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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

성령강림절 조회 수 14315 추천 수 0 2009.07.27 23: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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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가복음 6:14-29 
 

요한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

(마가복음 6:14-29)


세례요한의 죽음

복음서 기자들은 세례 요한에 대해서 비교적 많은 말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이외의 인물 중에서 세례 요한처럼 중요하게, 그리고 자주 복음서에 등장하는 인물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예수님의 운명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출생설화는 곧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와 직결됩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인물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였다가 나중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감옥에 있을 때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서 당신이 메시아인가, 하고 묻기도 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전승을 통해서 복음서 기자들이 세례요한에 관해 내린 결론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인물이라는 사실입니다.(막 1:2,3) 그 사실은 다음과 같은 이사야 40:3절에 대한 복음서 기자들의 해석입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오늘 설교본문 막 6:14-29절은 요한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을 통치하던 분봉왕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아내와 이혼하고 동생 헤롯 빌립보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결혼했습니다. 이런 행동은 간음을 금하는 유대의 율법을 범한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이 문제를 지적하자 헤롯은 요한을 감옥에 가뒀습니다. 그 당시에 왕을 비판한다는 것은 죽음을 초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헤롯은 민중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요한을 두려워했습니다. 속으로는 존경하기도 했습니다. 그를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헤롯의 생일날 고관대작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헤로디아의 딸이자 헤롯의 조카인 소녀가 춤을 추었습니다. 술과 가무가 곁들인 자리에서 사람은 기분에 휩싸이기 마련입니다. 헤롯은 춤을 춘 소녀에게 나라의 절반이라도 줄 터이니 소원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소녀는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달려갔습니다. 헤로디아는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고 딸에게 시켰습니다. 결국 요한은 참수당합니다. 요한의 머리가 담긴 소반을 소녀가 받아서 어머니에게 전합니다.  

요한의 죽음에 대한 오늘의 이 이야기는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합니다. 우선 이야기가 너무 끔찍합니다. 상상이 가지요? 헤로디아의 분노가 하늘을 찌릅니다. 여자의 한(恨)이 바로 이런 걸 의미할까요? 이 여자는 구약에 나오는 이세벨과 비교됩니다. 복음서 기자들도 그걸 암시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엘리야와 같은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엘리야를 쫓아다니면서 죽이려고 한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가 바로 아합 왕의 아내인 이세벨입니다. 신약의 이세벨이라 할 수 있는 헤로디아는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했습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요한의 머리가 담긴 소반이 헤롯 왕 생일잔치 자리에 들어옵니다. 그 소반이 소녀에게 전달됩니다. 소녀가 새파랗게 질렸겠지요. 딸은 소반을 어머니에게 갖다 줍니다. 소반에 담긴 요한의 머리를 내려다보는 헤로디아의 표정이 어땠을까요? 너무 잔인한 장면이라 이 이야기는 18세 이하금지 딱지를 붙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길이가 너무 길고 묘사 방식도 너무 시시콜콜할 정도로 자세합니다.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이는 이야기가 이런 방식으로 기록된 적은 복음서에 한 번도 없습니다. 복음서는 근본적으로 예수님 이외의 이야기는 거의 다루고 있지 않으며, 다루는 경우라 하더라도 아주 짧게 한 두 마디로 끝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독자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장황하게 전개하는 건 아니겠지요.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왜 끔찍한 요한의 죽음에 대해서 이토록 자세하게 설명하는 걸까요?   


예수는 누군가?

먼저 이 이야기가 나오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를 보십시오. 헤롯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는 게 이 이야기의 배경입니다. 그 소문은 예수님이 특별한 일을 행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축귀, 치병 등, 지난날 예언자들이 행하던 이적과 기사에 관한 것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랐던 제자들에게도 그런 일들이 일어날 정도였습니다. 별로 명망이 없는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일이 일어나고 있으니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각자 자기의 생각을 말하기도 하고, 다른 데서 들은 이야기도 전했습니다. 이런 소문이 꼬리를 물고 많이 퍼졌습니다. 이 소문은 구체적으로 세 가지였습니다. 예수는 세례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말입니다. 그 소문이 결국 헤롯왕에게까지 들어갔습니다. 그가 얼마나 불안해했을지는 긴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는 얼마 전에 세례요한의 목을 벤 적이 있었거든요. 

예수님도 이런 소문을 들은 것 같습니다. 이 소문이 잠시 나왔다가 뜬소문처럼 금방 사라진 게 아니라 널리 자자하게 잘 알려졌던 탓이겠지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세례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막 8:28) 이런 이야기는 마태와 누가복음에도 똑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는 질문은 제자들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미 예수님이 누군지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막 8:29) 하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정확하게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기의 정체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막 8:30) 

예수님에 대한 세 가지 소문과 베드로의 고백은 완전히 다릅니다. 이 다름과 이 차이가 예수님의 정체를 결정합니다. 세 가지 소문의 특징을 보십시오. 세례요한은 뛰어난 도덕성이, 엘리야는 초자연적 능력이,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달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을 대표합니다.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 덕분으로 이 세상이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아무리 위대한 인물들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는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행한 일들은 인간 구원의 궁극적 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개인과 사회를 개량하고 진보시키고 변혁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혁명을 일으킵니다. 이런 일들은 인간다운 세상과 역사 발전에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일은 질적으로 새로운 것입니다. 이 양자는 완전히 다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이 소문의 한 사람이었던 엘리야를 보십시오. 그는 구약의 인물들 중에서 초자연적 능력을 가장 크게 보인 사람입니다. 심지어 그는 이 땅에서 죽지 않고 불 수레를 타고 하늘에 올라갔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습니다.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온다는 말이 이런 데 연유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초능력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능력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런 초능력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엘리야와 똑같이 초능력적인 기적을 행하신 게 아니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그런 능력으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특별한 일들이 그를 그리스도로 확증하는 단서는 아닙니다. 예수님에게서 그런 초능력적인 것을 경험한 사람들도 결국은 모두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다. 오병이어를 경험한 사람들도 떠났습니다. 그런 초능력으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진작 그런 일을 하셨겠지요.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은 전혀 다른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모든 이들에게 확연하게 알려진 게 아니라 들을 귀를 가진 사람에게, 볼 눈을 가진 사람에게만 인식되는 구원의 비밀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빌라도나 산헤드린 지도자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의 부활 생명은 모든 이들에게 확연하게 드러난 게 아니라 그를 따르던 이들에게만 드러난 하나님의 생명 비밀이었습니다. 이 비밀은 말로 설명이 안 됩니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니라 종말에 드러날 궁극적인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는 그리스도이시니이다.”하고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당신의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막 8:30)

메시아, 즉 그리스도가 비밀이라는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기독교가 보편적인 진리와는 완전히 담을 쌓고 자폐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이비 이단들에게서 보듯이 비의(秘儀)적 공동체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비의적인 게 아니라 역사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은 곧 역사의 비밀을, 역사의 신비를 가리킵니다. 우리의 생각과 예상을 뛰어넘어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적 구원 행위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의 샘터교회를 생각해보십시오. 5년 전에 우리가 각각 처한 자리에서 오늘의 우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 지금 벌어진 겁니다. 이런 점에서 세상 전체가 비밀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는 방식이 바로 비밀이라는 뜻입니다.         


메시아의 죽음

저는 앞에서 마가복음 기자가 끔찍한 세례요한의 죽음에 대해서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전한 이유가 무언지를 물었습니다. 그 대답이 바로 메시아의 비밀과 연관됩니다. 세례요한의 죽음은 바로 예수님의 죽음을 예시합니다. 마가복음 독자들은 이 세례요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에서 이미 예수님의 죽음을 예감했습니다. 이 두 죽음에는 유사성이 많습니다. 첫째로 의로운 자의 죽음입니다. 둘째로 불의한 자가 행한 죽음입니다. 셋째, 억울한 죽음입니다. 넷째, 저항할 수 없는 죽음입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모두 이렇게 죽었습니다. 이 모든 항목들이 말하는 핵심은 메시아의 죽음입니다. 메시아가 죽다니, 말이 되나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전하고 있는 또 다른 본문을 앞에서 인용해서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비밀로 하라고 말씀하신 뒤에, 고난 받고 버림받아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막 8:31) 베드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고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제자들이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활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게 이상하게 들릴 겁니다. 부활은 제자들에게 별로 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충격을 받을 자신들을 위로해주기 위한 덕담이나 권면 정도로 생각했겠지요. 제자들에게는 오히려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이 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과 달리 오늘 우리는 이 메시아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이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했지만, 우리는 분명하게 알고, 또 확신하고 있을까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교리적으로는 그렇게 따르고 있겠지요. 기도할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실제적인 삶에서는 우리도 역시 제자들과 똑같이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뜯어말리는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가 고난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돌아보십시오. 고난이라고 말할 것도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약간 불편한 것 자체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오늘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 신앙은 실종되었습니다. 십자가는 브로치처럼 여성들의 옷에 붙어 있는 장식품으로 전락했습니다. 십자가는 허울로만 남았고 실제로는 바알 신앙인 경제만능주의에 사로잡혔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이 세상에서 승리하겠다고 큰소리칩니다. 그렇게 사는 게 행복하다면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결국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성서가 왜 풍요의 신인 바알을 숭배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는지 아십니까? 사람이 거기서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알 신앙은 소유로 생명을 확인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인간의 소유욕은 끝이 없습니다. 무한한 갈망에 빠지게 할 뿐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제자들이 받아들이기 싫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부활생명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부활생명은 우리의 소유욕과 갈망을 충족시키는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 경험입니다. 거기서만 영혼의 참된 안식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서만 하나님의 구원 생명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다는 말인지, 이상한가요? 저는 여러분을 믿을 수 있게 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메시아의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말이 안 되는 비밀이 아니라 말이 되는 비밀입니다. 그것을 성서와 기독교 역사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동의하는 사람들입니다. 동의할 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다니, 얼마나 놀라운가요? 그 비밀과 그 신비에 우리의 영적인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는 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분의 은총이 아니고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으니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역사에는 세례요한의 죽음과 같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일어날 겁니다. 답답한 일이 많을 겁니다. 남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렇게 억울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헤롯이나 헤로디아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당하는 억울한 죽임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실패를 가리킵니다. 궁극적으로 본다면 어느 누구도 이 운명에서 벗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방법과 때의 차이가 있지 모두 죽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죽음의 그림자가 지금 살아있는 우리를 엄습하고 있습니다. 어디서 구원이 임하는지 분명하게 직시하십시오. 세례요한과 엘리야와 선지자들을 통해서 오는 게 아닙니다. 죽은 자로부터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의 죽음과 죽음의 그림자에게 굴복당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아멘!(2009.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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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harris

July 28, 2009
*.151.112.164

명쾌하게 구분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생명", "진리"라는 주제 앞에서는 아직도 캄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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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July 28, 2009
*.120.170.243

생명과 진리 앞에서 캄캄해진다는 말은 옳습니다.

아무도 생명과 진리를 직면하지 못했으니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목도하는 것과 비슷해서

죽은 뒤에나, 종말에나 가능하답니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말할 수 있는 생명과 진리는

거기에 이르는 과정, 그 길을 가리킨답니다.

거울로 보는 것처럼 어떤 윤곽을 본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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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떨기나무

July 28, 2009
*.33.110.189

목사님 설교문을 읽고 많은 깨달음과 지혜를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모세-엘리야-세례요한을 예수와 연결시키는 경우를 종종 보게됩니다.

예를 들어 변화산에서 모세-엘리야-예수의 만남.....

모세-엘리야-세례요한-예수가 모두 갈릴리에서 활동했고, 모두 광야/시내산/언약/야훼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평소 궁금하던 차에 목사님 설교를 듣고 다시한번 생각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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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July 28, 2009
*.120.170.243

재미 있는 관점이군요.

그런데 모세도 갈릴리에서 활동했나요?

시내산도 모두에게 적용시키기에는 문제가 있군요.

반가웠습니다.

주의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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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July 28, 2009
*.136.116.106

답답한 일이 정말 많습니다.

심지어 목사님마저도, 교회마저도 바알신앙을 숭배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으니까요.

주보 한 면 가득 헌금 한사람의 명단이 쭈욱 발표되고

연말에는 선교 헌금을 백만원 이상,  십만원 이상, 억 이상 한사람들의 이름이

화면에 쫘악 비춰지고...

심방을 가건 무엇을 하건 봉투는 꼭 전달되고...

이런 말을 하면 믿음이 적어서라거나

자신의 재물만을 아끼려하고 돈계산하는 아나니아 삽비라로 취급당하고...

 

하나님이 점점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 같은 교회들이 너무나 많음을,

더구나 그 교회들이 더욱 더 성도수는 늘어가는( 이것을 부흥이라고 말하는..)...

도대체 왜 루터는 종교개혁을 해가지고...^^

루터가 지금 모습을 보면 얼마나 슬플까요. 면죄부보다 더한 것들을 팔고 있는 교회를 보면서..

 

하나님! 저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소서.

하나님! 비판하고 있는 저를 긍휼히 여겨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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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July 28, 2009
*.120.170.243

ㅎㅎㅎ

눈사람 님의 글이 재미 있군요.

위에서 열거한 그런 교회 현상은

사이비 이단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니

크게 신경쓰지 마세요.

성령이 진리의 영이신데,

그런 일에 함께 하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문제는 그런 걸 깨달은 사람들이 방향을 잘 잡아나가면 되겠지요.

눈사람 님이 오죽 답답했으면 이렇게 하소연했겠습니까.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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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July 30, 2009
*.136.116.214

제가 열거한 내용들을 하고 있는 교회가 바로

제가 얼마전까지 다녔던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 광주에서 꽤나 큰편에 속하는...

그리고 많은 성도들은 목사님의 말씀을 아주 은혜롭다고 생각하는(저도 한때 그런 사람이었지만)

그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심지어 송구영신 예배때는 말씀카드를 뽑습니다.

말씀카드를 들고 계신 분 앞에는 헌금함이 놓여있구요.

돈내고 토정비결 보는 것보다 더 나쁜 짓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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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July 28, 2009
*.116.154.149

정 목사님!

 

3 년 전 터키에 남아 있는 초대교회 발자취를 따라가 본 적이 있습니다.

골로새 교회터라고 하는 곳에 이르러서 정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돌맹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그저 잡초만 무성했습니다.

 

고고학적으로 역사학적으로 어떻게 증명된 자리인지는 잘 모르지만

이천 년 전에 그 곳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모여 예배 드렸다는 생각을 하며

이천 년이나 지나 그 자리에 있는 제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름 수양회 성경 공부 시간에 골로새서를 하신다 해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또한 주님이 다시 오실 그 날을 기다린다는 것이

정말 은혜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가능하겠는지요.

 

설교 말씀을 읽으며 그 크신 은총에 대해 다시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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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July 28, 2009
*.120.170.243

와, 골로새에 다녀오셨군요.

현장 경험자가 말씀을 전해야 하는데,

이거야 원.

수련회에 오세요.

아니면 나중에 엠피쓰리를 올릴 테니 들어보시든지요.

좋은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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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July 28, 2009
*.234.35.112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장18절

목사님, 여기에 '구원의 비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온전히 다 숨어 있었네요.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세상의 죽음과 죽임의 그림자에게 굴복 당하지 않습니다." 아멘!

 목사님, 그럼으로 믿음은  타협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생각이 점점 더 굳혀져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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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July 28, 2009
*.120.170.243

ㅎㅎ

믿음의 래디칼리스트가 되어 가시는군요.

일단 가보는 데까지 가보세요.

나중에 조금 뒤로 나오는 한이 있더라도요.

위에서 타협과 선택이라는 용어가 적절한가는 잘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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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July 28, 2009
*.234.35.112

그런것도 같네요. ^^

제가 타협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진리는 타협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굳혀져 가기 때문 아닐까 싶어요.

우리는 그 진리의 길을  '선택' 한다고 생각하고요.

이 배면엔 '믿음'이 선재하겠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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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떨기나무

July 29, 2009
*.255.84.98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계약(언약)을 체결하여 이스라엘의 신앙 정체성을 수립했고, 엘리야-세례요한-예수는  북이스라엘(갈릴리)에서  활동하며 모세가 체결한 계약(언약)을 강조했고, 우상과 독재자들과 저항했습니다.

예수가 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보다는 예수가 이스라엘의 신앙 전통을 계승한 점을 먼저 강조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예수가 갈릴리에서 활동했다는 점을 주목하고 싶고, 예수를 구약의 예언자 전통을 계승한 사람으로 보고 싶습니다.

나중에 기독교가 발전하면서, 예수에 대한 여러 교리들이 등장한 것이 아닐까요?

목사님 설교를 듣고 예전부터 가졌던 생각을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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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은빛그림자

July 29, 2009
*.141.3.65

목사님의 설교는 분명한 한 가지만을 줄기차게 강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늘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은 저에게(개인에게) 맡겨지는데요,

그것이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고 그렇습니다요.(이 심정을 목사님 아실라나..??ㅎㅎ)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안다"고 말할 때의 이 "앎"은

정확히 어떤 것인지요?(사실 진짜 몰라서 여쭤보는 건 아니구요..ㅎㅎ)

역으로, 위의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참 드문데(많이 들어왔던 평범한 얘기니까요)

죽음의 두려움은 고사하고 일상의 두려움도 못 벗어나는 게 범인들의 현실입니다.

그 "앎"이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조금씩 획득되는 것인....가요? 그렇겠죠?

 

이 길은 참 쉬우면서 어렵고, 어려우면서 쉽고.

목사님 설교도 참 쉬우면서 어렵고, 어려우면서 쉽고.. 그렇습니다요.^^

 

추신 : 수련회 특강(?) 원고도 혹시 나중에 올려주시나요?

            올려주시면 차암~~좋겠지만 조르지는 않을게요.

            참고로 전 mp3는 싫어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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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July 29, 2009
*.120.170.243

은빛 님,

모든 걸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그냥 진도나가기 어려운 분, 맞지요?

속 시원한 대답은 아예 기대하지도 않았을 터이니

부담 없이 두 마디만 하겠소.

하나, 설교는 사람에게 삶을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경험을 목적으로 합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이 누구인가, 하나님의 통치는 무엇인가를 말할 뿐이에요.

그것을 경험하는 게 곧 은혜를 체험하는 거지요.

은혜 받은 자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건

각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각각 책임을 져야 하는 거지요.

국어 선생이니 비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경험은 시(詩) 경험과 비슷하다오.

둘, 앎과 삶의 불일치는 기독교인이 안고 가야 할 숙명이라오.

그렇지만 문제의 핵심이 어디 있는지는 계속 생각해봐야겠지요.

앎이 정보로 머물러 있을 때 삶은 따라오지 않겠지요.

앎이 성육신 된다면 삶과 일치하겠지요.

이런 나의 설명도 현실의 삶과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들릴 것이오.

남의 말을 빌려야겠군요.

"사랑하는 것만큼 알고, 아는 것만큼 보이고, 보이는 것만큼 산다."

추신1: 수련회 특강 원고는 없어요. 요약문만 갖고 강의를 한답니다.

추신2: 한달에 한번이라도 교회에 나오면 좋을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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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Dr. Jung

July 30, 2009
*.97.129.75

앎과 깨달음이 행복으로 다가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예수의 삶이 그러함이 아니란걸 보면 우리의 일상의 삶이

어쩌면 행복에 겨운 것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괴리 속에 인간은 고뇌와 번민을 하나봅니다.

초월이나 초탈을 바라기도 하고요.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이 너무도 개인적인 것이라서

어떤 실체의 궁극을 표현하기가 어려울 뿐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그냥 외처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현실 아닐까요?

 

목사님

하나님은 보편적으로 역사적으로 설명이 가능하지도 않겠지만

그러함을 가지고 해석하고 하나님을 나타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이

꼭 종교를 통해서 일어나는지

더 간단하게

예수를 통해서 일어나는지

 

예수를 알지 못하는 많은 이들을

하나님의 궁극을 느낄 수 없는지,,,,,

 

종말로 열려있는 기다림에

어떤 특정한 대답이 있을 수 없지만

요즘 많은 생각들이 스치기에

목사님의 고견에 기대어 봅니다.

 

평안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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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July 30, 2009
*.120.170.243

닥터 정 님,

하나님 경험과 예수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군요.

하나님 경험에 대한 것만 하더라도 복잡한데

거기에다가 기독론까지 포함시킨다면

아예 신학 전반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겠군요. ㅎㅎ

하나님 경험을 쉴라이에르마허 같은 사람은 '절대의존의 감정'이라고 했어요.

오토는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했구요.

궁극적 실제이기도 하고, 사랑이기도 하구요.

판넨베르크 식으로 말하면 '모든 것을 규정하는 현실성'이랍니다.

아마 그 경험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말한다면

사람 숫자만큼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 경험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이런 논쟁은 어쩌면 무의미할지 몰라요.

우리는 이미 그것을 전제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거든요.

그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이미 신앙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신앙이 성립되지 않으면 하나님 경험이라는 것도 무의미해지는 거구요.

그 전제라는 게 아무런 논리적 토대도 없이 나온 거라면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거에요.

예수가 왜 하나님이냐 하는 논의는 초기 기독교부터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질문하신 것에서 내가 너무 멀리 나가고 있군요.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경험이 불가능하냐, 하는 질문인데요.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느냐 하는 질문과도 맥을 같이 하는군요.

구원은 곧 하나님 경험이니까요.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말 밖에는

더이상의 말을 하지 못합니다.

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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