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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보좌 앞으로!

성령강림절 조회 수 14825 추천 수 0 2009.10.26 17: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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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히브리서 4:12-16 
 

은혜의 보좌 앞으로!

(히 4:12-16)


히브리서의 특징은 예수님을 구약적인 전통에서 해석한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두드러집니다. 히 4장14절부터 10장39절까지, 자그마치 여섯 장 이상의 분량으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히브리서가 1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거의 절반에 해당됩니다. 위 본문 히 4장14절은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다고 말합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큰 대제사장’이라는 표현은 문법적으로 어색하긴 합니다. ‘큰’과 ‘대’가 중복됩니다. 루터는 ‘참된’ 대제사장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어쨌든지 이를 통해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대제사장 중에서 가장 큰 대제사장, 그 어떤 대제사장과도 비교될 수 없는 대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볼 때 여러 성소와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해하기 좋게, 오늘의 목사라고 해도 됩니다. 제사장들 중에서 대제사장이 나옵니다. 학교에도 일반 선생님들이 있고 교장 선생님이 있는 것과 비슷하게 각 성소의 책임 제사장들이 대제사장으로 불렸습니다. 본격적으로 대제사장제도가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게 된 것은 바벨론 포로기 후입니다. 민족의 위기에 처해서 내부적 단결을 도모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대제사장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전권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종교 최고법정인 산헤드린 공회를 주도했습니다. 말하자면 대제사장들은 당시에 신정체제였던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들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대제사장 제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독자들을 향해서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승천과 은혜의 보좌

예수님이 참된 대제사장인 근거가 무엇일까요?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예수님의 정체성에서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인 예수님을 가리켜 ‘승천하신 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림을 받았다는 사실은 초기 기독교에서 예수님에 대한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예수님의 승천을 말하고 있으며, 사도신경도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를 말합니다.

여기서 승천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먼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서가 말하는 진리를 왜곡시킬 수 있습니다. 우선 현대인들은 승천을 당혹스럽게 생각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하늘, 우주 공간에는 아무 것도 없으며, 오히려 생명을 불가능하게 할 것들만 작용하고 있으니까요. 대기권을 벗어나면 공기가 없습니다. 거기서는 모든 생명이 죽습니다. 해발 5km만 올라가도 사람이 숨 쉴 수 없을 정도로 공기가 줄어듭니다. 더 멀리 나가면 흑암물질만 있을 뿐입니다. 이런 곳에 예수님이 올라가셨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어떤 신자들은 승천이라는 사실을 무조건 문자적으로 받아들입니다. 현대인들의 물리적 지식을 완전히 외면합니다. 세상의 지식은 불신앙이기에 옆으로 제쳐두고 승천을 사실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미국의 어떤 기독교 소종파 교도들은 아직도 천동설을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종교가 그 사람의 진리론적 인식을 파괴한 겁니다. 사람은 이성적인 존재이면서도 그것과 완전히 반대되는 방식으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자폐요 독단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건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지난 2천년 동안 그런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신학자들의 말은 접어두고 요한복음의 말만이라도 기억하십시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전했습니다.(요 14:6) 길과 진리와 생명은 보편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진리라면 세상의 물리적 사실을 거부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의 물리적 사실 앞에서 승천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그것의 실체가 무엇일까요?

승천은 예수님이 생명의 궁극적인 세계로 들어가셨다는 뜻입니다. 거기서 말하는 하늘은 우주의 어느 한 공간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우주 전체를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는 심층적 생명 세계를 가리킵니다. 아직은 숨어 있지만 종말에 완전하게 드러날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하늘은 지금 이런 방식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성입니다.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아주 명백하게 실재하는 세계입니다. 그런 생명의 깊은 세계가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내가 확인할 수 없으니까 없는 걸까요? 우리가 지금 어머니 자궁 안에 들어있는 태아라고 생각해보세요. 태아에게는 자궁 밖의 세계가 경험되지 않을 겁니다. 자궁 안이 아니라 밖이 더 실재적인 세계라는 걸 전혀 눈치 채지 못할 겁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서 바로 그 은폐된, 종말에 드러날 궁극적인 하나님의 생명으로 들어 올림을 받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 되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 분이 아니라면 대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대제사장의 역할은 인류를 대신해서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말은 우리의 중보자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령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영입니다. 그래서 교부들은 성령을 말할 때 ‘필리오 케’, 즉 ‘그리고 아들로부터’라는 라틴어를 붙여서 설명했습니다. 성령이 아버지만이 아니라 아들로부터 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워줄 중보자이십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 덕분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은혜의 보좌’가 무슨 뜻인지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승천 이전에는 이스라엘의 대제사장들이 동물의 피를 뿌리거나 동물의 몸을 불에 사르는 방식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사죄를 얻기 위해서 이런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신 후로는 이런 제물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는 그야말로 은혜의 보좌입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바로 인류의 속죄를 위한 제물이었습니다. 그 뒤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무런 제물이 없어도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인이라고 하더라도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고 말합니다. 루터는 이를 ‘mit Freudigkeit’라고 번역했습니다. ‘기쁘게’, 또는 ‘결단코’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의지와 열정을 포함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께 드린 참된 제물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그런 의심은 이해가 갑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어리석음과 거리낌의 극치였습니다. 예수님만 십자가로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십자가 처형에서 구원이 시작되리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삼척동자도 코웃음을 칠 일이었습니다.

이런 의심, 이런 반론은 교회 밖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옛날만이 아니라 지금도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이 가리키는 인류 구원의 유일회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적지 않습니다. 진보적인 지식인 기독교인들 중에서 비교적으로 그런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양심적이고 역사 참여적인 신앙을 추구합니다. 휴머니즘이 그들 신앙의 특징입니다. 이들로 인해서 한국의 기독교가 세상에서 체면 유지는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이 아무리 개혁적이고 휴머니즘적이라고 하더라도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지 못한다면 근본적으로 잘못입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예수만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겁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많은 그리스도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역사적 예수가 그리스도의 길을 가르쳐 주었으니 우리도 각자 작은 그리스도로 살아가자고 역설합니다. 이런 신앙으로는 결코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갈 수 없습니다.


긍휼과 은혜

어떤 분들은 위의 설명이 너무 교리적인데 치우쳤다고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승천, 하나님의 아들, 은혜의 보좌 같은 용어들이 별로 삶의 중심으로 와 닿지 않는다는 뜻이겠지요. 이런 용어들은 고대 성서시대의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지 우리에게는 아무런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 생각은 아직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들어가지 못해서 생긴 겁니다. 또는 삶의 중심에 들어가지 못해서 생긴 겁니다. 성서 용어만큼 우리 삶에 현실적인 것을 저는 못 봤습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야 할 이유에 대한 히브리서 기자의 설명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우리가 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본문 16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긍휼과 은혜를 얻기 위해서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간다고 말합니다. 만약 긍휼과 은혜가 필요 없다면 하나님 앞에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거꾸로 하나님 앞에 나가지 않는 사람은 긍휼과 은혜가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긍휼과 은혜가 여기서 핵심입니다. 아무리 예배와 각종 교회 모임에 빠지지 않으며, 경건한 생활에 최선을 다한다고 하더라도 긍휼과 은혜의 깊이를 모른다면 그의 신앙생활은 율법의 차원에 머물고 맙니다. 지금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 자신에게 질문해보십시오.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절실하게 다가오나요? 아니면 그게 없어도 사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요? 더 근본적으로, 긍휼과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며, 그런 세계로 들어가고 있을까요? 음악가가 음악의 실질을 경험하듯이 우리가 그렇게 경험하고 있을까요?

긍휼은 자비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곧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이 긍휼도 현대인들에게는 별로 진지하게 다가오지 않을 겁니다. 노골적으로 표현해서, 현대인들은 자기가 모두 잘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똑똑해서 돈 잘 벌고, 인생 계획을 잘 짜서 다른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삽니다. 더 나아가서 사회활동도 하고, 이웃을 돕기도 합니다. 소위 잘나가는 사람들은 굳이 하나님께 긍휼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들이 볼 때 하나님의 긍휼은 뭔가 삶에 자신감이 없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주장도 틀린 게 아닙니다. 신자들 중에서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을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입에 달고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비겁하게 살면서 자기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편하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두 가지 종류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자기 신세를 바꿔달라는 욕망이며, 다른 하나는 무의식적인 불안감, 또는 죄책감입니다. 이런 신앙 습관이 얼마나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지, 그것이 마치 기독교 신앙인 것처럼 얼마나 심각하게 오도되고 있는지 알만한 분들은 모두 알 겁니다. 이 양쪽 모두 건강한 기독교 영성은 아닙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긍휼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영적인 빈곤함을 철저하게 깨달은 사람만이 구하는 영성의 가장 깊은 차원을 가리킵니다. 영적인 빈곤함이라는 말을 상투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실제로 우리는 영적인 차원에서 아주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쪽에 속했을까요?

우리 삶의 토대가 얼마나 부실한지를 먼저 생각하십시오. 돈만 있으면 어느 정도 생존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요. 그건 옳습니다. 그러나 생존하는 것으로 사람은 영적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피상적으로는 만족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생활조건을 늘리면 어딘가 마음이 넉넉해질 겁니다. 여가를 즐기고 노후 준비를 해놓으면 정신적으로 여유가 생기는 건 분명합니다. 선진국이 된다는 건 바로 이런 조건을 만들어간다는 것이겠지요. 그것을 성취하려고 우리 모두가 운명을 걸고 투쟁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영적으로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런지는 제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즉 생명의 깊이에서 무능력한 사람들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생명의 깊이를 채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숨을 쉬지 않고는 단 5분도 지탱하기 힘들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밖의 것으로 계속 채워야 하는 우리의 생명이라니, 얼마나 불안합니까? 얼마나 가난합니까?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의 “김혜란의 그림일기”라는 자리에 고정적으로 그림과 글을 올리는 분이 있습니다. 지난 10월23일에 “나는 오직 가난하고 슬프오니...”라는 제목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 “탕자의 귀향”을 읽고 하루 종일 그 그림 곁을 떠나지 못한 헨리 나우엔의 같은 이름의 책이 소개되었습니다. 김혜란 씨는 거기서 시편 69편29절을 인용하면서 짧은 글을 남겼습니다. “벌거벗은 내 영혼은 오직 가난하고 슬플 뿐입니다.” 기독교 영성의 진수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영혼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요. 본문 히 4:13절은 하나님 말씀 앞에서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삶의 속도가 마치 호랑이 등에 올라타서 내려오기 힘든 것처럼 너무 빠르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지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는 건 아닐까요?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 참된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그는 승천하신 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참된 생명이 약속된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갑시다. (2009.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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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David Chris

October 26, 2009
*.59.140.246

목사님 은혜의 설교 읽고 갑니다. 저는 현재 미국에 있습니다. 어떻게 대구 성서아카데미에 들어와서 목사님의 설교 비평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설교 비평을 읽고 또한 목사님의 설교를 읽으면서 느끼는 부분들과 저를 돌아 볼 수 있는 시간들도 가졌습니다.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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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October 26, 2009
*.120.170.243

대빗 크리스 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신기하군요.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았던 분을

이렇게 온라인으로나마 관계를 갖게 되었다는 게 말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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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October 26, 2009
*.232.97.185

정 목사님!

나뭇잎들이 자꾸 떨어지는군요.

벌거벗은 숲에 가고 싶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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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October 26, 2009
*.120.170.243

우리는 원하지 않아도

곧 가게 될 겁니다.

수의를 입고 땅에 묻힌다해도

결국 모든 게 사라질 테니 벌거벗음과 다를 게 없구요,

다행히 화장을 한다면

그거야말로 벌거벗음의 극치이겠지요.

모든 걸,

자신의 몸까지 모든 걸 내려놓을 때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겠지요.

그런 연습이 삶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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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김용남형제

October 26, 2009
*.162.15.212

"성서 용어만큼 우리 삶에 현실적인 것을 저는 못 봤습니다." 아멘.

성서가 제시하는 하나님 경험의 깊이로 들어갈 때 삶의 깊이에도 더 들어가기를 기대합니다.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전 지금까지 기독교에서 승천(혹은 그와 비슷한 초자연적 사건)의 의미가 차지하는 바가,

그 사건의 사실성(reality)에 근거한다고 생각해왔는데요.

목사님의 인문학적 성서읽기에 대해 배워가면서도 느낀 바이지만,

사실성에 대한 변증이 없는 채로도 기독교적 의미가 확립할 수 있나요?

박영선 목사님도 설교비평 반론에서 이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신 적이 있는 것 같은데요.

사실 예전에 기독교변증학에 관심을 가졌다가 회의를 품으면서 고민해보았던 생각이기도 합니다.

그러고보니 목사님께서 자유주의자로 오해받으셨었다는 댓글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그럴법도 하다고 느낀 것이, 저도 목사님의 저서(인문학적 성서읽기)를 읽으면서

흡사 오강남 교수의 '예수는 없다'가 떠오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질을 움켜쥔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믿습니다.

이번 말씀도 잘 읽었습니다. 늘 통찰력이 자라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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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October 26, 2009
*.120.170.243

김용남 군,

논리가 정연한 글을 썼네.

다만 한 가지 개념 정리가 필요하다네.

사실성(reality)을 fact의 차원에서만 접근하면 곤란하네.

팩트는 신문기자의 관심일 뿐이지.

성서기자와 신학자는 사건에 관심을 갖는다네.

사실적인 역사(Historie)가 아니라

의미심장한 역사(Geschichte)에 관심을 갖는다네.

한 주간, 잘 보내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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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김용남형제

October 27, 2009
*.162.15.212

답변 감사드립니다.

그러고보니 요즘 TV오락프로그램 장르 중에 '리얼 버라이어티 쇼'가 떠오르고 있는데,

사실 거의다 각본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해도 많은 사람들이 사실성을 만끽하며 즐겨보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생각하면 될까요.

비록 팩트가 밝혀지지 않았다해도,

기독교의 영향력은 합리성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에 근거한 것이기에

저도 성서기자들이 진정 관심을 가졌던 바에 촛점을 맞추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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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병훈

October 27, 2009
*.91.60.12

목사님께서 사회적으로 능력있고 성공한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그분의 긍휼을 구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셨는데 저는 조금 다른 경우 인 듯합니다.


마치 세들어 사는 사람이 언젠가 자기집을 갖고 말겟다고 생각하는 것 처럼 지금은 이러 저래 여의치 않아 하나님의 긍휼에 기댈 수 밖에 없지만 언젠가는 모양빠지게 그러지 않고 당당하게 서리라 하는 맘이 제 안에 있는 것을 확인했네요..

성공에 대한 갈구 ,조급증 이런 것들이 그 마음으로 부터 오는 듯 합니다..


진정 가난한 맘이 되기까지 마음을 딱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마음을 닦는 것도 스스로 하려는게 아닌가 생각들기도 하는데요..

마음 속 깊이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하는 자가 되길 소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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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October 27, 2009
*.120.170.243

병훈 씨는 안과 밖이 다르지 않은 사람이지요?

글과 행동에서 그걸 알 수 있어요.

당당한 위치에 올라선다 하더라도

인간은 결국 궁극적인 어떤 것을 갈구한다는 사실은 분명해요.

본질적으로 종교성이라는 게 작동되는 거지요.

흔히 인용되듯이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참된 안식을 몰랐다고 했다네요.

이런 경구는 단순히 경건한 척 하는 게 아니라

인간과 세계의 중심을 뚫어보는 데서만 나올 수 있는 실존적 고백이에요.

그 말을 다르게 바꾼다면

'전체를 알기 전에는 부분만으로는 생명의 희열을 느낄 수 없다'고 할 수 있어요.

전체는 죽어야 볼 수 있다는데,

결국 죽지 않으면 참된 만족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라오.

그래서 옛날부터 죽음을 영원한 안식이라고 말했오.

오해 마시길.

저런 경구들이 숙명주의나 염세주의를 가리키는 게 결코 아니라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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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October 28, 2009
*.244.76.39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세가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먼저는 히브리서의 역할이 참으로 독특하면서도 필수적인 것 같다는 것입니다.

구약을 통하여 하나님의 속죄와 용서의 방식이 반복이 되었는데

신약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해석되고 그 끈이 연결되고

역사에서 미미한 부유물이 되지않도록 하는 연결고리의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 분이 큰 대제사장이며, 대속물이라는 사실을 선언적으로 말한 것 같습니다.

죄, 죽음, 속죄, 대속, 용서로의 기전에 근거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 말이어요.

 

둘째는 제가 중학교 때 생각해보다가 질문도 해보지않고 말았었는데요.

어떻게 오래 전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지금의 나의 죄를 해결하는 의미가 있다는 것인지...

설교 중에 승천을 생명의 궁극적인 세계로 들어가신 것으로 표현하셨는데

여기에서 좀 더 밝은 해답이 잡히는 것 같습니다. 그 메카니즘은,

 

구약에서 대속물에게 인간의 죄를 전가하는 것은 엄밀하게는

인간 자체를 전가하는 것인데 살기 위해 대속물을 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이든 대속물은 인간 자체인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대속으로 죽는다는 것은 우리가 죽는 것이고

그가 산 것은 우리가 산 것이다.

그러나 그 분과의 시공간적 차이는 어떻게 해결하는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라는

예수님의 선포와 그것을 신앙하는 것이 시공간의 초월을 가능하게 한다.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어설프게라도 생각하느라 머리가 좀...

 

세째는 긍휼과 은혜의 대목입니다.

정말이지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지 않을 수도 설 수도 없는 존재들입니다.

이 양단간의 딜레마에서 저는 기도를 시작할 때 자주 멈칫거립니다.

유연하게 나갈 수도 있지만 저 자신을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으나 나갈 수도 없는 존재라는 것,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해야하나,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나 망연자실하다는 것..

이 자리가 은혜로 주어진 자리, 긍휼히 여기심을 그 분이 먼저 예비하신 자리라는 것을

다시 재차 생각 할 때..겨우 입이 떨어집니다.

 

우리를 생명의 깊은 곳으로 인도하실 주님을 기대하며..

목사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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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October 28, 2009
*.120.170.243

유니스 님은 주로 화학방정식 같은 거만 보고

젊은 시절을 보냈을 것 같은데,

인문학적 분석과 상상력과 종합 능력이 뛰어나네요.

조직신학은 전공했더라도 잘 했을 거 같네요. 음.

위의 대글로 단 설명에 틀린 구석이 없습니다.

내가 다 아는 거는 아니지만요.

하여튼 기독교의 도그마(교리)가

아무런 해석학적 근거도 없이

불쑥 튀어나온 게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형성될 때 해석학적 근거들이 자리한 것처럼

오늘 그것을 다시 들여다볼 때도 역시

해석학적 근거들이 필요하다는 거지요.

예를 들어 오늘 reality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관점이

이런 해석학적 근거가 될 수 있는 거에요.

우리 삶의 리얼리티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하는 인간 실존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런 질문들이 모두 성서를 이해하는데

해석학적 근거들이 되는 거지요.

이게 타당성이 있으면 사람들이 받아들일 것이고,

아니면 외면하겠지요.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긍휼에 마음을 둡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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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6]리옹~

October 28, 2009
*.223.153.106

긍휼 은혜....

너무 생소하게 다가오네요.

아무런 생각없이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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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October 28, 2009
*.120.170.243

긍휼이 생소하다구요? ㅎㅎ

솔직한 말씀이군요.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신앙을 일상의 현실에서 절감하지 못합니다.

일상이 너무 적나라한데 비해서

신앙은 관념적으로 다가오니까요.

거꾸로 가는 사람도 있긴 합니다.

일상을 관념으로 취급하고

신앙만을 적나라하게 느끼는 거지요.

양쪽 모두, 좀 그렇지요?

하님의 긍휼이 일상에서 현실로 다가오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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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October 28, 2009
*.105.7.230

목사님,

저는 설교 들으면서, 이 찬송가를 생각했었네요.

"..내 손과 혀가 굳어도 내 몸의 피가 식어도

나 영영 잊지 못할 곳 은혜의 보좌 시은소."

 

금요일날 설교제목을 주보에서  읽으며,

그리고 웃겨님의 돌아온 탕자 그림을 보면서,

그리고 이 설교와, 이어서 시편 69편의 녹취,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우연성'안에서 일어난 일들이겠지요?

이런 일련의 일들을 한 줄로 꿰 보면서,

내 뼈와 살이 먼지가 되어도 영영 부를 수 있는 찬송은

"<은혜의 보좌> 시은소!" 밖에 없겠다 싶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영원과 잇대어 살수 있고,

또 이 땅에서 살아내는 힘이 아닐까 싶어서지요.

이것은 또  예배와, 찬송, 기도의 '원천'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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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October 28, 2009
*.120.170.243

위에서 인용하신 찬송가는

저도 모르는 거네요.

시은소라....

무슨 뜻인가요?

은혜를 베푸는 장소라는 뜻인가요?....

이런 용어들이 말장난이 아니라

실질로 들어가는 통로가 되어야 할 텐데요.

어려운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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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October 28, 2009
*.105.7.230

네, 목사님,

의미는 "은혜를 베푸는 장소"일거예요. 저는 그렇게 알고 있어요.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이 계신 곳"이 아닐까 싶고요.

이 찬송작시자가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는 모르지만,

저는 "은혜의 보좌" 하니깐, 자동적으로 튀어 나오던 걸요?^^

특히,저 가사때문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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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떡진머리

October 29, 2009
*.255.203.253

대제사장들에 의하여 속죄의 피가 뿌려진 곳, 원전적 의미로 출애굽기에 의하면 성막안 언약의 법괴뚜껑인  속죄판(소)을 의미한다고 하네요.

히브리어 영문표기로는 Kapporeth이고 헬라어 영문표기는 Hilasterion입니다.

 하지만 신약적으로 볼 때는 은혜의 보좌는 인류를 구원한 예수님의 속죄의 피가 뿌려진 곳이라는 의미가 더욱 정확할 듯 합니다.

그곳은 골고다 언덕이고 모든 이들의 사회적 정치적 탐욕과 이해가 첨예하게 드러난 곳이기도 합니다.

로마의 황제와 유대교의 지배자들이 자신의 반대세력을 처형하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며 메시아의 줌음을 조롱하던 유대인들의 치욕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곳은 초대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증언하기 위하여 피흘렸던 곳이기도 하며 현대사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많은 이들이 피를 흘린 현장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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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떡진머리

October 29, 2009
*.255.203.253

성서를 읽으면 고민되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역시 같은 의혹을 던져줍니다.

저는 성서를 읽을 때 저자들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고민을 해봅니다.

저는 성서를 매우 쉽게 이해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말입니다.

히브리서도 그렇게 이해합니다.

초대 기독교가 처해있는 역사적 상황을 그려보면서 이러한 편지가 왜 전달되었는지 하는 것들을 상상해 봅니다.

많은 이들이 감옥에 가거나 처형을 당하거나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으로 주도권을 가지고 있던 다른 입장에 있던 사람들에게 놀림을 당하거나 재산을 빼앗기는 상황이 초대 기독교인들이 처해있던 상황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편지를 받았던 기독교공동체는 이러한 핍박으로 부터 벗어나 있던 듯 합니다.

그렇지만 주변에서 고통을 당하는 이들을 목격하거나 이야기들을 전해 듣고는 있었을 듯 합니다.

이들의 신앙은 흔들리고 있었으며 꼭 기독교에만 구원이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과 타협이 마음속에 싹트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유대교로의 회귀에서도 이러한 구원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 입니다.

또한 많은 종교적 논리의 공격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 유대교에 비해 종교적 정통성에 해당하는 공격들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레위족속의 전통을 잇지않고 대제사장에 되신 예수에 대한 정당성을 멜기세댁의 내용을 들어 강변하는 내용이 상당부분 차지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교의 제사장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예수님을 저자가  대제사장에 비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던 죄사함의 대리인인 제사장의 권위를 빌어온 것이거나 구원의 문제를 쉽게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공동체에는 종교적으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공동체를 신앙적으로 지도하고 있었던 사람들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공동체의 사람들은 이제 어느정도의 훈련을 마치고 기독교를 전파하는 사람들로 역할을 해야할 시점이 온것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수 많은 픽박을 각오하고 말입니다.

예수의 피로 속죄함을 받은 속죄소의 자리앞에 나오라는 것입니다.

막약 이러한 시점에 있다면 은혜의 보좌앞에 담대히 나가야 할 이유는 충분할 것입니다.

물론 이들이 기독교를 믿는 것 만으로도 부담이되고 겁나고 주위의 소문들이 공포심을 가져다 줌으로 기독교를 포기하고 싶은 상태에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들에게도 담대함은 요구될 것입니다.

예수 이외에는 구원의 길이없다.

다시 죄를 짓는다면 구원받을 길이 없다.

어느정도의 협박도 있습니다.

그리고 곧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이라는 희망도 함께 말입니다.

저는 히브리서를 당시의 상황에서 흔들리고 있는 신앙공동체를 독려하는 편지로 이해합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히브리서의 저자가 이야기 하듯 항상 새롭게 죄를 짓고 있는 우리들의 신앙은 설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종교적 이유와 수사를 가져다 붙이더라도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예수의 승천 이후 2000년이 지난 종말에 대한 이야기들은 명확히 설명될 방법은 없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가졌던 순진한 종말에 대한 믿음의 내용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들의 순수한 믿음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문제가 아닌가 생가합니다.

2000년 전의 사람들의 생각이 그렇게 복잡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수 많은 설명들이 구차하고 혼잡스러울 뿐입니다.

온갖 성서의 주해서들이 오히려 우리의 신앙을 잡스럽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말씀을 미사려구와 그럴싸한 포장으로 덧씌움으로 실제 그 속에 흐르는 순수하고 담백한 말씀의 진수를 조미료가 잔뜩 들어간 음식처럼 느끼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당시의 역사를 이해하고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상황과 문화를 살펴본다면 성서의 글들과 그 의미가 그렇게 어렵게 다가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성서를 심플하게 이해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너무 성서를 편하게 이해하는 것 아닌가 의심도 해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많은 부분에서 구차해져야하고 의미도 모를 혼탁한 말들로 그 구절의 의미들을 모호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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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October 29, 2009
*.120.170.243

떡진머리 님,

성서를 심플하게 이해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면서

설명은 콤플렉스하게 하시는군요. ㅎㅎ

옳은 이야기입니다.

신학이랍시고 신앙을 복잡한 인식론적 체계로 만들면 곤란하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심플한 게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랍니다.

한국의 대중설교자들은 모두 성서를 심플하게 전하는 분들이랍니다.

있는 그대로 전하는 거지요.

그 방식으로 사회적 마이너리티도 공격하고,

기복적인 메시지를 선전하고,

처세술도 발견한답니다.

한국교회에 신학무용론이 지배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지요?

신학은 세상에서 인문학이 감당하는 역할을 교회에서 감당한다고 보면 좋아요.

2천년전 사람들의 생각이 복잡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지요?

복잡하지 않은 거와 깊지 않은 거와는 똑같은 사태가 아니에요.

오늘 우리가 우주 앞에서 느끼는 그 두려움, 경외심, 현묘함을

2천년전 사람들도 똑같이 느꼈답니다.

오늘 우리가 무죄한 자의 고난 앞에서 절망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듯이

그들도 똑같이 그런 실존적 절망을 느꼈지요.

신학은,

건강한 신학은 삶과 영성을 모호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더 실질적으로 만드는 역할을 한답니다.

나는 지금도 몰트만, 오트, 윙엘, 판넨베르크, 골비처 등등의 신학자들에게서

신앙의 진수를 늘 배우고 있는데요.

그들 덕분으로 기독교 영성이 더 명료해지는데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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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떡진머리

October 30, 2009
*.255.203.253

좋으신 말씀 감사합니다.

저 역시 신학적 소양을 논할 수준이 아니기에 성서를 심플하게 이해한다는 것이 궁극적으로 어떤 상태인지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지는 못합니다.

이는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과 맥을 같이 하고있습니다.

누가 그러던데 세상은 아주 단순하게 돌아간다고요.

하지만 그런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을의 생각이 복잡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수 많은 사회과학 이론과 철학사상들과 나의 삶 속에서 발견한 경험이 세상을 관통하고 있으며 모든 우주만물의 변화와 발전의 설명이 가능한 깨달음이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물론 이 깨달음도 끝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세상이 명쾌히 보이고 세상돌아가는 모습이 단순하게 보이는 지점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먼 원시공동체사회로 부터 세계화와 IT에 의한 네트워크 사회가 거론되는 지금의 시대까지 당위적이고 필연적인 변화발전의 일관된 법칙을 엿본다는 것이 그러한 것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성서를 보는 것에 있어서도 같은 상황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성서의 영성 역시도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바라봅니다.

성서를 감싸고 있는 신비로운 그 무엇이 아니라 역사속에 축적돼오며 전해진 하나님의 이야기들 그 속에는 감추지 않는 온갖 이야기들이 있고 그러기에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서에 대하여 신비로운 무엇을 덧씌우는 순간에 우리는 성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저자들의 경험과 고대인들의 매우 인간적이고 유치하기도한  생각이 성경의 의미를 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건강한 신학이 어디까지를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신학이 가지고 있는 모호한 영적 덧씌움은 근본적으로 성서를 심플하게 바라보는 눈을 흐리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봤습니다.

물론 종교적으로 수 많은 신학들이 기독교를 건강하게 만들고 있음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근본적 다달음의 끝이 다름도 부인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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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October 30, 2009
*.120.170.243

예, 모호한 영적 덧씌움이라는 말을 곰곰히 생각해봐야겠군요.

천천히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긴 호흡으로 가봅시다.

좋은 주말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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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流水不爭先

October 29, 2009
*.173.40.129

안녕하세요

 

위에 나오는 찬송가의 시은소라는 단어가 아마도 "속죄소" 혹은 "시은좌"가 아닌가 합니다.

구약시대 회막의 지성소 안의 법궤의 덮개에 해당하는 두 그릅이 위치한  곳으로서

1년에 1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들어가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곳이 아닌가 합니다

 

출처 : 출애굽기 37장 제6~7절 및 난하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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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October 29, 2009
*.120.170.243

아, 그렇군요.

시은소가 속죄소라는 뜻이군요.

잘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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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October 30, 2009
*.105.7.230

thinkbible 님, 떡진머리 님,

감사드립니다.

그러니까 "시은소"가 지성소와 관련있었군요.

어쩐지.. 저도 그럴것 같다,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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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October 30, 2009
*.232.97.185

라라 님! 

이 찬송가는 저희 교회 목사님도 아주 좋아하셔서

새벽기도회 때 자주자주 불러요~~

산청에 가시면 제 몫까지 많이 많이 즐기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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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떨기나무

October 31, 2009
*.232.114.206

마태, 마가, 누가 복음서와 히브리서에 괴리가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대제사장으로 생각하셨을까요?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성전을 청소하셨고 성전을 악으로 규정하셨습니다.

당시 성전이 정치-경제-종교의 권력을 잡고 로마에 협력했음을 보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서를 통해서는 성전의 역할에 대해서 대단히 부정적인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는데,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해석을 하였군요.

복음서와 히브리서가 쓰여진 시대상황, 배경이 서로 다르기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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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떡진머리

October 31, 2009
*.255.203.253

히브리서는 서기 90년을 전후해서 쓰여진 것으로 보아진다는 것이 일반적 추론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볼 때 복음서와 쓰여진 시대가 크게 차이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저자의 관점과 관성의 문제가 아닌가 봅니다.

저자의 경우 유대교에 대하여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이며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인 듯 합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계시는 동안에는 인간적 존재의 의미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상에 계실 때 부터 신격화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써 최고의 경지인  위대한 대제사장의 위치에 놓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우편에 계심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로 신격화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집니다.

아마도 일반적으로 인간의 모습으로 계실 때 부터 대제사장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신격을 인정하는 기독교인들의 생각과는 조금은 괴리가 있는 듯 보입니다.

저자가 예수께서 인간적 고난을 벗어나지 않은 것에 대한 근거를 염두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저자 스스로가 유대적 관습으로 부터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기독교를 믿고 있음에도 유대적 전통으로 부터 철저히 벗어나지 못한 신자들에게 알기쉽게 설명하기 위함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은 독특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건 유대적 전통하에서 예수님의 인각적 역할을 설정하는 것에는 철저하지 못한 저자의 기독교관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마치 근대를 혁명적으로 벗어나고자 했던 현대사상가들 속에서도 근대사상의 한계를 철저히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민주화가 되어가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문화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독재시대의 잔재를 가지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고 할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그렇게 타파하고자 했던 카톨릭의 악습이 개신교에 남아있거나 부활하듯이 말입니다.

성경이 영감에 의해아 씌여졌다는 의미를 신비한 무엇이 개입하여 저자의 사상이나 생각과 경험과는 본질적으로 무관한 무엇으로 씌여진 것으로 이해한다면 모르겠지만 그 영감이란 것이 기나긴 인류사속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주관하심이라고 본다면 성서는 충분히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히브리서에서 보듯이 인간적 한계가 명확히 드러나는 글들이 감추어지지 않고 있음이 역설적으로 성경의 영감을 높여주고 있다고 봅니다.

한계와 모순으로 가득차 있지만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인간세상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성서는 기록하고 있으며 우리들은 이 속에서 인간사를 주관하시는 신의 의지를 조금은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고대인들의 고대인 스러운 한계는 역사발전의 한계로, 인간적 한계는 삶의 한계로, 유대인의 한계는 공간적 한계와 그들의 민족주의적 한계로 이해해 주는 것이 성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속에서 성서에 기록된 더러움이 우리를 깨끝한 삶으로 인도하고 그속에 씌여진 죽음이 부활을 의미함을 깨닫는 다면 성서는 씌여진 그대로 단정한 모습으로 우리들 곁에 있을 것입니다. 

모호한 영적 덧씌움을 통하여 한계와 오류와 모순을 덮어버리고 저자들을 마친 위인전의 위인같이 만들어 버린다면 우리가 성서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의미와 하나님의 역사는 감추어져 버릴 것이고 박제되어 버릴 것입니다.

 

정통적이지도 않은 좁은 소견을 적어 생각을 어지럽게 하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기독교가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인간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으로 부터 외면받을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모습이고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과 신앙의 내용일 것이기에 제가 생각하는 것들을 몇자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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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October 31, 2009
*.120.170.243

떨기나무 님,

복음서와 히브리서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면

성서를 생각하면서 읽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성서를 그냥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에

그런 차이를 별로 느끼지 못하고

느낀다고 하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거든요.

그냥 짧게 결론적으로 한 말씀드린다면

그런 차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그것으로 성서의 영적 가치가 손상되는 것도 아니랍니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해석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

또한 시대에 따라서 다를 수밖에 없어요.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도 다르게 해석될 수밖에 없어요.

복음서 끼리도 차이가 나거든요.

갈라디아서를 보면 유대-기독교와 헬라-기독교가 심각하게 싸웠답니다.

그런 과정에서 기독교의 진리가 깊어지는 거지요.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해석한 히브리서 덕분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구약의 빛에서 더 환하게 볼 수 있게 되는 거지요.

이런 해석의 과정은 종말까지 계속될 겁니다.

기독교의 도그마는 종말로 열려 있는 셈이지요.

유연하게, 그러나 중심을 잡고

종말에 궁극적으로 그 실체가 드러날 하나님의 계시를 기다리며,

동시에 오늘의 역사에 은폐의 방식으로 선취된 그 계시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주일을 맞으세요.

부활의 주님이 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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