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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경험은 새롭게 '봄'이다

성령강림절 조회 수 12348 추천 수 0 2009.11.09 16: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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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가복음 10:46-52 
 

들음에서 봄으로!

(막 10:46-52)


오늘 설교 본문(막 10:46-52)에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사람은 시각 장애인 거지 바디매오입니다. ‘바디매오’라는 이름은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여리고 성 길목에 앉아서 구걸을 하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뜨게 되고, 결국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공관복음서에 다 들어 있는데, 약간씩 다르게 전승되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바디매오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며, 마태복음에는 등장인물이 두 사람으로 나옵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로 들어가다가 이 사람을 만난 반면에 마태와 마가복음에는 여리고를 나오다가 만납니다. 세 복음서가 약간씩 차이를 보이지만 중요한 대목에서는 일치합니다. 시각장애인이 여리고 근처 길가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따르면 이 사건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바로 직전에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제 예수님이 체포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하게 될 바로 그 도시입니다. 죽음의 도시로 들어가기 직전에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섰다는 것은 바디매오 이야기가 예수님의 운명에서도 아주 중요했다는 뜻입니다.


듣는 바디매오

여리고 성 길목에 앉아 구걸하던 바디매오의 처지를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는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생존 능력이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처럼 공부할 수도 없고,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양을 칠 수도 없습니다. 남이 도와주지 않으면 밥 한 끼도 끓여먹기 힘들었습니다. 복음서가 그를 ‘맹인 거지’라고 묘사한 걸 보면 그의 집도 그렇게 넉넉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집이 넉넉하면 이 사람에게 구걸행각을 시키지 않았겠지요. 이런 사람을 오늘도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봅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육교나 지하도, 또는 지하철 등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가난한 장애인들이나 오랜 세월 실직자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이런 이들이겠지요. 그들의 처지가 얼마나 절박한지는 긴 말이 필요 없습니다.

바디매오는 오늘도 자기 자리에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아마 햇빛은 찬란하게 비치고 있었겠지요? 구름이 잔뜩 끼었을까요? 바람이 솔솔 불었을지도 모릅니다. 심술궂은 동네 꼬마들은 바디매오를 놀려댔겠지요. 동냥 그릇에 작은 돌멩이를 던져 넣으면 바디매오가 돈인 줄 알고 확인했다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깔깔댔겠지요. 그런 일이 어디 한 두 번이었겠습니까? 바디매오에게는 그것이 일상이었습니다. 혹시나 인심 좋은 부자가 지나가다가 큰돈을 주기만을 기대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무료하게 하루를 지내고 있는 그의 귀에 특별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사렛 예수다!”라는 소리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디매오의 옆을 지나면서 예수님을 부른 것인지, 아니면 지나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디매오의 귀에 그 소리가 들린 것은 분명합니다.

바디매오는 귀가 번쩍 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까요? 처음 듣고 그런 경험을 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여리고 성 길목에 앉아 있던 바디매오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여기에는 나사렛 예수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당시에 파다했습니다. 나병환자와 중풍병자를 낫게 하셨고,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으며, 그리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게 하셨고, 벳세다에서 맹인을 낫게 하신 소문을 바디매오도 들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누군가 하는 궁금증이 바디매오의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나사렛 예수를 한번 만나보리라 하는 꿈을 키워왔겠지요. 진리를 향한 열정이 그의 마음 밭에서 큰 나무로 자라고 있었던 겁니다. 그는 귀를 그쪽으로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나사렛 예수다!” 하는 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영혼의 안테나가 있습니다. 그 안테나는 모든 방향의 소리를 잡아내는 게 아닙니다. 안테나가 어디를 향하는가에 따라서 들리는 소리도 달라집니다. 돈 버는 것에만 안테나가 맞춰져 있으면 그런 소리만 들리겠지요. 자기가 잘난 것을 나타내는 것에만 안테나가 맞춰져 있으면 그런 쪽의 소리만 들립니다. 우리 영혼의 안테나는 어디를 향해 있을까요? 생명과 구원의 소리를 향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생명과 구원을 향해서 진력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는 거기서 나오는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나를 따라오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 건 아닙니다. 그들의 영혼이 진리와 구원에 목말라 했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그렇습니다.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도 생명의 소리를 들은 경우도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자신도 모르는 깊은 차원에서 생명을 향한 목마름이, 마치 땅속의 용암이 끓고 있듯이 끓고 있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다!”는 소리가 바디매오의 영혼을 크게 울렸습니다. 그의 영적인 용암이 분출될 지경에 다다른 것입니다. 그 순간의 경험이 어떤 것이었을지 상상해보십시오. 사막에서 길을 잃고 있다가 오아시스를 발견한 바로 그런 느낌이었을까요? 전쟁 중에 아이를 잃은 어머니가 피난민 행렬에서 아이를 찾았을 때의 느낌이었을까요? 그 순간의 바디매오에게는 이제 맹인거지라는 자기의 정체성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소곳이 앉아서 사람들의 연민을 자아내야 한다는 본연의 임무도 모두 망각했습니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입니다. 자기를 얽어맸던 모든 습관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거기서 그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기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은 구약성서가 메시아를 가리킬 때 사용한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식하고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예수님을 부른 바디매오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메시아 앞에서 사람이 취해야 할 가장 정확한 태도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맹인 거지는 불쌍한 사람이니 ‘불쌍히 여겨 달라.’는 외침이 당연하겠지, 하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바디매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돈이 없어서, 건강이 나빠서, 혼자 살아서 불쌍하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이 그 이유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22) 피조물의 한계를 누가 벗어날 수 있습니까? 하루만 굶어도 우리는 식욕의 노예가 됩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역시 우리 내면이 공허합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는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이미 경험하고 있을 겁니다. 옛날에 비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환경은 모두 최상의 조건으로 바뀌었습니다. 옛날 왕들도 우리처럼 살지는 못했겠지요.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만족을 모릅니다. 조바심을 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특별히 욕심이 많아서라기보다는 피조물의 한계입니다.

현대인들은 바디매오의 이 외침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은 너무 잘났기 때문이 아닐까요? 너무 잘나고 싶어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자기가 불쌍한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깊은 통찰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의 소유가 너무 많은 탓은 아닐까요? 이럴 바에야 차라리 바디매오처럼 맹인 거지가 되는 게 낫습니다. 그런 방식으로라도 자신이 얼마나 무능력한 존재인지를 인식하는 것이 너무 잘나서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기도를 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을까요?

오해는 마십시오. 기독교인들이 모두 패배주의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습관적으로 “나는 죄인이야!” 하는 방식으로 죄책감에 사로잡혀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이 마땅히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공부도 잘 하고, 사업도 잘 하는 게 좋습니다. 무기력하고 무책임하게 살면서 ‘이 세상은 썩었어.’ 하는 방식으로 자기를 합리화하는 것은 병든 신앙입니다. 문제는 사람의 영적인 차원을 못보고 자기가 이룬 업적에 도취되어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보는 바디매오

예루살렘을 목전에 둔 예수님을 향해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외친 바디매오는 지금 예수님을 따라오는 제자들보다 훨씬 깊은 차원에서 예수님을 이해한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있었지만 바디매오의 영적 경험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들의 귀에 바디매오의 외침은 우스꽝스럽게 들렸겠지요. 또는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피곤하게 한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들은 바디매오를 꾸짖으면서 “잠잠 하라.”고 했습니다.

이 장면을 다시 상상해보십시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향해서 외칩니다. 그에게는 오직 “예수다.”하는 소리밖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바디매오의 이 외침을 하찮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말을 할 줄 모릅니다. 그냥 “잠잠 하라.”고만 할 뿐입니다. 바디매오가 잠잠해야만 거기서 지체하지 않고 자신들의 갈 길을 갈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요. 이들이 특별히 이상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다만 바디매오의 영적 경험에 이르지 못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어느 쪽에 속한 사람들일까요?

바디매오는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똑같은 외침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은 그를 불렀습니다. 바디매오는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왔습니다. 그가 얼마나 다급했는지를 이런 표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자기의 영적 실존이 불쌍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구원의 현실 앞에서 이렇게 다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바디매오의 대답입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거기 모였던 사람들은 조금 의외로 생각했을 겁니다. 동냥을 많이 얻고 싶어 할 줄 알았겠지요. 그러나 바디매오는 그런 차원에 머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궁극적인 구원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지금 필요한 것은 먹을거리와 집과 가족이 아니라 ‘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 10:52) 바디매오는 곧 보게 되었고, 예수님을 길에서 따랐다고 합니다. ‘길 가에’ 앉았다가 이제 ‘길에서’ 예수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오늘 마가복음 기자는 바디매오 이야기를 통해서 무얼 말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잘 믿기만 하면 바디매오처럼 시각장애인이 눈을 뜬다는 말일까요? 예수님을 잘 믿기만 하면 바디매오처럼 횡재를 할 수 있다는 말일까요? 눈을 떴기 때문에 이제 바디매오는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일까요? 그런 방식으로 우리 삶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수 있다면 인생은 그야말로 구구단 외우기보다 더 쉽습니다. 눈을 떠도, 좋은 직장을 얻어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도 우리 삶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뿐입니다. 성서는 전혀 다른 것을 말합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본문이 결론 부분에서 말하는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디매오는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었는데, 그 구원은 곧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키워드는 세 가지입니다. 믿음, 구원, 봄입니다. 이 단어들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리합니다. 바디매오의 믿음은 예수님을 향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그는 정확하게 인식하고 믿었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바디매오가 애를 써서 성취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메시아를 통해서 선물로 주어지는 구원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세상을 본다는 사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세상을 보고 있으신가요? 무엇을 보고 있나요? 보고 있는 것이 확실한가요?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을 대단히 확실한 것으로 여깁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오류가 있습니다. 1)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을 못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미시의 세계와 거시의 세계는 우리가 전혀 못 보고 삽니다. 2) 우리가 본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옛 어른들이 인생을 큰 꿈이라고 말했는데, 옳습니다. 꿈으로 본 것을 진짜로 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요. 꿈에 친구에게 10만원을 빌려주었습니다. 다음날 만나서 10만원 갚으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이런 마당에 우리가 뭔가를 확실하게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예수를 통해서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거꾸로 예수 믿기 전에는 세상을 바르게 보지 못했다는 말도 됩니다. 그게 이해가 되지요? 예수를 믿기 전의 세상과 믿은 후의 세상이 전혀 달라진 게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여전히 밥을 먹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합니다. 여전히 부부싸움도 합니다. 이 문제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기 전과 오신 이후의 세상이 별로 달라진 게 없는 논리와 비슷합니다. 예수님이 오셨는데도 이 세상은 여전히 악하고, 싸우고, 무죄한 자의 고난이 계속됩니다.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세상의 예를 들어서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 어느 날 갑자기 사랑에 빠진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에게 세상이 달라졌는가 하고 물어보십시오. 당연히 달라졌다고 대답할 겁니다. 남에게 구걸하며 살다가 예수님을 따라나서게 된 바디매오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의 실체를 새롭게 보게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을 사람들이 입으로 실어 나르는 소문으로 듣는 게 아니라 실질로, 즉 하나님의 은폐된 통치의 시각으로 보게 된 사람들입니다. 문학적인 수사로 이렇게 표현해야겠습니다. 이 세상은 이제 우리에게 꽃으로 활짝 피게 될 그 순간을 기다리는 꽃봉오리와도 같습니다. 부활의 생명이 바로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인가요?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 주님을 따르십시오. (2009.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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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살군

November 10, 2009
*.218.178.221

바디매오는 이미 일상에서 구원론적인 지평을 체험한 사람이군요

 

목사님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바디매오처럼 일상의 구원론적인 지평을 체험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런지요?

 

저를 보면

하루하루 먹고살만 합니다. 여러가지 염려들은 있지만,

삶을 근본적으로 훼손시킬 수 있는 염려는 없습니다.

 

이런 제가. 예수님에게 찾아온 바디매오처럼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간절한 마음

구원이 일어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입니다.

 

그런 마음이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디매오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그런 마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이 삶의 딜레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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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November 10, 2009
*.120.170.243

살군 님,

중요한 질문을 주셨는데요.

그 대답은 이미 설교 안에 있습니다.

바디매오처럼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가 가리키는

영적 실존을 인식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가장 노골적인 영적 실존은 죽음이겠지요.

지금 살아 있지만 이미 죽음의 영적 실존을 안고 살아야겠지요.

그 영적 실존을 가리켜 '피조물의 한계'라는 겁니다.

좋은 밤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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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beginner

November 10, 2009
*.106.156.126

오늘따라 촉촉히 젖어오는 가을 비가 다르게 느껴집니다.

가슴이 설레인다고나 할까요?

 여전히 피곤하고  좋은 일도 없는데도요.

아마 목사님의 설교를 다시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여유 때문일까요?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이렇게 깊이있게 들려주시다니요.

어쩌면 제 영혼이  바디매오보다 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피조물임을 깨닫고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드립니다.

또한 믿음, 구원, 봄의 눈이 열리도록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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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November 10, 2009
*.120.170.243

이일녀 교우 님,

제 설교를 정확하게 이해하셨군요.

피조물의 한계를 깨닫는 것이

우리가 성서의 영적 깊이로 들어가는 지름길이랍니다.

그것이 바로 영성의 근거이기도 하구요.

영적인 신앙인이 누구냐 하는 질문도

바로 여기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답니다.

기도 자랑하고 자기 은사 자랑하는 것은

결코 영적인 게 아니랍니다.

기초를 잘 다지고 있으시니

앞으로 성숙한 영성에 이를 것입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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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angelica

November 10, 2009
*.22.90.165

'다윗의 자손 나사렛 예수여' 를 부르짖는 소경 바디매오의 절박한 외침이

제 귓가에 들리는 것 같습니다.

 

소경으로서의 비천함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탄식도, 원망도 내려놓고

오로지 한 인간으로 진정성을 가지고, 예수를 부르짖는 그의 용기와 밈음이

부럽습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날마다 영혼의 안테나가 주님을 향하기를 소원해봅니다.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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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November 10, 2009
*.120.170.243

안젤리카 님,

바디매오의 외침이 들리는 것 같으시다니,

영혼이 순전하신 분이시군요.

바디매오의 외침은 두 가지입니다.

1) 다윗의 자손 예수여

2)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독교 신앙의 진수가 여기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관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이 나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

예수에게서 선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선물이 가능한 토대는

바로 불쌍히 여기소서,

'엘레이송'라는 기도에 있어요.

이걸 상투적으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인식하고

거기에 자기 영혼을 던지는 사람에게

새로운 '봄'의 차원이 열립니다.

이런 봄의 차원이 스데반의 순교 때 일어난 것은 아닐까요?

부활의 주님에 대한 바울의 경험이 아닐까요?

우리의 영적 안테나를 주님에게로 맞춰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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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November 11, 2009
*.207.250.115

목사님,

이제 새로운 '봄'을 경험한 바디메오에게 이 세상은 새로움과 경이 그 자체이겠다 싶어요.

그리고 그에게 이 '봄'은 주님에 의해 보여지는 '봄'이 되지 않을까 싶구요.

저는 위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제 바디메오의 새로운 눈은 '주님의 눈'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는군요.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다니!!

아, 이 얼마나 경이로움인가요?

 

그렇게만 세상이 보여진다면, 목사님 늘 말씀하시는

"악!!"소리 칠수 밖에 없는 순간들을 만나겠지요.

어찌 할수 없는 피조물의 한계를 절감하겠고요.

그리고, 그와 반면에,

주님의 '신비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겠지요?

엊그제, 지리산 자락 산청의 감밭에서,

빨갛게 익은 감과 둥둥 떠다니는 새털구름을 보면서,

저는 이 경이로움을 생각해 봤습니다.

이런 경이의 세계를 누가 보게 하시는가?

마음에 감동이 밀려 왔습니다.

우리 삶에 깊은 질곡은 있지만,

그래서 우리의 삶이 막막할 지라도,

주의 구원을 바라는 자들에게 보여 주시는 '주의 세상'은

아름답기 그지 없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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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November 11, 2009
*.120.170.243

산청에서 머문 시간이

좋으셨지요?

단순히 좋다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겠군요.

죽을 때까지 기억의 저 깊은 창고에서

필요할 때마다 내다 쓸 마음의 양식이 될 겁니다.

그런데요.

산청에서 본 자연의 경이로움도

결국 지나가고 만답니다.

마치 천사같은 어린아이도 늙듯이

보석같은 지구과 그 안의 자연도 늙어서

결국 죽는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자연주의자들은 아니지요.

그런 자연과 사람과의 사랑 이외에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자리가 어딜까요?

좀 어려운 이야기지요?

여기서는 요한계시록의 묵시적 환상이 필요하겠군요.

하늘이 종이처럼 말리는 그 순간은

이 세상이 질적으로 변화되는 때인데요.

그때가 새하늘과 새땅이라고 하지요.

거기까지 우리의 영성이 가 닿을 수 있을까요?

일단은 바디매오의 외침에 머물로도 충분하겠지요.

좋은 밤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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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November 11, 2009
*.207.250.115

네, 목사님, 맞습니다.

사람과 자연에서 경험하는 경이와는

비교도 안되는 경이가 존재한다는 거,

저도 늘 소망을 갖게 됩니다.

그 아득함을 생각할 때마다,

자연의 신비, 생명의 끝자락에,

영생의 신비의 끈이 잇대어 있지 않을까,

늘 그런 묵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럴 개연성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지요.

 

그래서 바디메오의 열려진 눈에,

단순히 사물의 신기함이 아니라,

감춰진 '주의 세계'가 보여지지는 않을까,

그런 기대로, 그 끝자락을 잡고 싶은 심정이었던 거 같습니다.

 

옛날 선진들이 하늘을 우러러 보며

'하나님의 처소'를 기대하듯이,

저도, 우리가 도저히 창조해 낼수 없는 '자연물'앞에서

그 끝 너머의 주님을 그리워 하고 있었는지도요.

 

아득한 길,

그 길을 천천히 걸어 보겠습니다. 

목사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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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9]이선영

November 11, 2009
*.164.231.24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중반부까지는 뭔가를 좀 알 것 같다가도

마지막은 늘 뭔가 아리송했던 것 같아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이 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었거든요.

설교에 나오는 단어들의 개념을 따라가는 것도 쉽지 않았구요.

하루하루를  찌지고 볶으며 살아가야 하는데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바르게 알고 믿는다는 게

정말 어떤 걸까. 여기에 인생을 건다는 게 어떤 걸까 생각했어요.

좀 바보같다고도 생각했구요. 이런 생각들을 친구들에게 늘어놓았다간 또라이 취급을 받을테니까요. ㅎㅎ

근데 오늘 설교말씀과 댓글을 통해 그 출발점을 겨우 찾은 것 같아요.

'피조물의 한계'를 깊이 깨닫는 게 그 길이네요.

곧 다가오게 될 죽음을 연습하는 것으로서의 삶이 왠지 희망으로 다가옵니다.

다비아에서 배우는 것들이 삶과는 동떨어진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목사님이 강조하시듯 정말 실질적으로 경험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으니, 잘 알기 위해 잘 자야겠습니당.

목사님도 좋은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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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November 12, 2009
*.120.170.243

이선영 선생,

잘 지내지요?

요즘도 꼬마들과 싸우며 재미있게 보내겠소이다. ㅎㅎ

내 설교가 오랫동안 선영 선생을 아리송하게 만들었다니, 미안하게 됐소.

위의 설교에서 영적 사유의 끄나플을 잡았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오. 

피조물의 한계,

그래요.

모든 게 다 지나가요.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자 곧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한답니다.

이 얼마나 큰 부조리에요.

이런 부조리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겠어요?

모든 게 쏜살같이 지나간다는 게

무조건 허무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죽음을 늘 준비해야 한다는 게

그렇게 절망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예수 사건에서 발견한 사람들이라오.

이 사실이 우리에게 또렷한 현실로 다가오려면

결국 예수 사건과 우리의 운명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정확하고 심층적으로 알아야겠지요.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아는 것으로가 아니라

우리 삶과 일치해야겠지요.

이런 문제를 잘 알아듣게 설명하려고 애를 쓴 사람들이

바로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활동한 신학자들, 영성가들이라오.

우리도 오늘 우리의 자리에서

그런 역할을 감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 아니겠소?

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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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바우로

November 13, 2009
*.114.22.104

정용섭 목사님께서 바디매오의 외침의 의미를 알기 쉽게 설명해주시니, 이주일에 한 번 드리는-제가 일하는 도서관은 주말근무를 하기 때문에,예배는 이 주에 한 번 참석합니다.-성공회 성찬예배때마다 읽는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Kyrie Eleison)라는 기도를 진지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주님의 자비와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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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November 13, 2009
*.120.170.243

바우로 님,

주말 근무 일자를 얻었군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빠른 시일 안에 주중에 일하는 정규직이 되었으면 합니다.

성공회 예배는 신학적인 상징이 깊어서

참여자들에게 깊은 영적 감동을 허락하는 것 같아요.

키리에 엘레이송이

우리 인식과 믿음의 토대가 되기를 바랍니다.

행복한 주말을 맞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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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바우로

November 14, 2009
*.62.26.5

이런..제가 설명을 정확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전 직장인 부천시립중앙도서관에서 주말에만 일하는게 아니라, 주중(화요일-금요일)과 주말에 모두 일합니다. 단지 주말에는 격주로 쉬기 때문에 2주에 한 번 성찬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거지요. 이번주는 도서관 쉬는 날인 월요일에 장서점검으로 출근해서 일했기 때문에 주말에는 쉽니다.

도서관 근무는 근무계약기간이 6개월간이어서 2009년 6월부터 일을 시작했고, 2009년 12월에 일을 끝마치게 됩니다. 고용의 유연화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인간을 도구화하는 비정규직 제도에 반대하고 있습니다만, 먹고 살려니까 비정규직이라도 열심히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겸손이 우리의 자기 인식과 믿음의 뿌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교만한 말 같아서 조심스럽지만, 대다수의 교회들이 WCC의 에큐메니컬 예전인 리마예전에 따라 예배때마다 기리에 엘레이손을 외우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전통을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도 행복한 주말을 맞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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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방랑자

November 15, 2009
*.205.199.220

이번주에는 약간 골치 아픈 가정사로 신경쓰다보니 벌써 한주간이 다갔네요

그래도 설교 말씀은 뜨자 마자 봤고 두어번 더 봤는데 신경쓸 일이 있어서 인지

말씀의 중심에 깊이 들어가진 못한 것 같습니다.

역시 세상속에서 살면서 당장 눈앞에 문제거리 하나만 생겨도 예수님을 바라 볼 마음의 여유조차 없는

나약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변에서 믿음 좋다고 하는 분들은 조그만 일만 생겨도 하나님을 찾는다는데

전 오히려 일이 생기면 오직 그것만 바라보다가 정작 여유가 생기고 평온하면 하나님을 찾는 것 같습니다.

전에는 그런 것 까지도 약한 믿음 탓이라고 자아비판(?)을 참 많이 했는데....

잠시 머무는 이땅에서 앞으로도 겪어야 할 많은 일들이 있을 것이나 당장 눈앞의 세상만을 바라보지 않고 

삶의 중심에 늘 예수님을 모시고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스스로 많은 영성 훈련이 필요하겠지만.....

더불어서 이땅에서 사는 동안 현재의 삶과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를 바라보는 종말론적 삶의 균형을

슬기롭게 잘 이루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전 자칫 허무주의적(헛되고 허되니 ~ )으로 빠질 확률이 많아서...

이번 주일도 여전히 바쁘시겠군요 행복한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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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November 16, 2009
*.120.170.243

예, 방랑자 님, 안녕하세요.

골치 아픈 가정사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답니다.

생각대로 잘 되지도 않구요.

그래도 신앙의 중심을 잘 잡고 있으면

금방 원래의 신앙적인 자리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너무 자책은 하지 마시구요.

좋은 한 주간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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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참믿음

November 16, 2009
*.123.6.154

안녕하십니까. 목사님 처음 인사로 뵙습니다. 우연히 인터넷통해

목사님 알게되었구요 여기저기 목사님 글을 보았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목사님을 알게 해주신 것 감사드려야 겠습니다

저가 너무 부족합니다. 목사님통해 많은거 배우겠습니다.^^

 

진리에대한 열정 갈급함은 순간순간 가지고 있구요, 또 그런 마음 갖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영적인것 하나님을 알고자하는 마음 주신거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두 바디메오같이 불쌍히여겨주십시요 기도를 많이 합니다. 주님의 긍휼하심이 없으면 저는

아마 100% 영과 혼과 육이 모두 죽을수 밖에 없는,저는 가증한 죄인이거든요

 

여기 바디메오가 무척 부럽습니다.

이사람은 소경이고 거지인데 저는 직접 경험해보지 못해서 그사람 심정을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이 오히려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 먹고 살기위해 구하는거는 어쩔수 없이

죽지 않기위해 하는 행위이고. 육적인 현실이 바뀌어 봤자 얼마나 달라 지겠습니까?

그래서 바디매오는 예수님소리를 들었을때 그 누구보다  목숨을 걸고 만날려는 의지가

 있었다고 봅니다.  바디매오야 말로 이땅에서의 삶보다 하늘나라를 꿈꾸며 기대하는 희망이

 누구보다 클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던중 메시야 소리를 들었으니 그에겐 목숨을 걸만한 기쁜 소식

이였을 겁니다.  저는 바디매오가 부럽습니다. 그는 겸손하고,순수하고, 세상때가 전혀 묻지 않고, 자기를

비난해도 모두 받아드리고, 그러나 진리에대한 갈급함이 그의마음 속에 심어있었구요.

 

부럽습니다!!!!    목사님 하나님 만이 복이죠???. 100% 하나님 만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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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November 16, 2009
*.120.170.243

참믿음 님, 반갑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구원이고 복입니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우리 함께 바디매오 처럼

오직 주님을 향해서 영혼의 방향을 집중시켰으면 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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