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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이 임하리라!

대림절 조회 수 12107 추천 수 0 2009.11.30 17:4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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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누가복음 21:25-36 
 

그 날이 임하리라!

(눅 21:25-36)


오늘 설교의 본문으로 삼은 눅 21:25-36절은 세 단락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첫째, 25-28절은 인자(사람의 아들)가 올 것이라는 묵시적 선언입니다. 둘째, 29-33절은 그것의 징조가 분명하다는 사실을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설명한 것입니다. 셋째, 34-36절은 그 때를 준비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각각의 단락이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다른 내용을 말하고 있는 같지만 ‘마지막 때’가 온다는 점에서는 모두 동일합니다. 그 마지막 때에 대한 것을 첫 단락은 ‘인자’ 개념으로, 둘째 단락은 ‘하나님 나라’로, 셋째 단락은 ‘그 날’이라는 단어로 묘사합니다. 마지막 때라는 게 무슨 뜻일까요? 2천 년 전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하고 있는 누가복음 기자는 여기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인자’는 마지막 때에 세상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올 전능자를 가리킵니다. 곧 메시아입니다. 그 마지막 때는 곧 새로운 시작의 때입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그 마지막 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이가 곧 인자, 즉 사람의 아들입니다. 인자 이야기는 구약에 종종 등장합니다. 에스겔서 2장 이하에 인자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하게 나옵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겔 2:1, 이외 3,6,8절 참조) 다니엘서에도 나옵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단 7:13) 그 인자의 권세는 소멸되지 않고 영원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구약의 인자 개념은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눅 21:28) 이런 인자 사상에서 핵심은 ‘마지막 때’와 ‘심판’입니다. 이 세상에 마지막 때가 이르게 될 터인데, 그 때 인자가 이 세상을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와 심판

마지막에 대해서 누가복음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눅 21:25) 마지막 때에 해와 달과 하늘의 모든 별들이 흔들린다고 합니다. 바다가 요동치고 큰 파도가 몰아칩니다. 이 때 모든 민족들이 극심한 혼란에 빠집니다. 26절에서는 하늘의 권능이 흔들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계 6:13,14) 이런 구절들은 지구를 포함한 우주 전체가 해체된다는 뜻입니다.

과연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까요? 지난 인류 역사에 인류의 종말이나 우주의 최후를 예언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프랑스의 의사이자 신비주의철학자인 노스트라다무스(1503-1566)의 예언이 가장 유명한 것 같습니다. 그는 나중에 교황이 될 사람을 정확하게 짚었으며, 프랑스 왕 앙리 2세가 마상경기의 사고로 죽을 것을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예언이 적중한 탓인지 1999년 7월에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온다는 그의 예언도 크게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인류와 지구의 최후를 주제로 하는 영화도 많습니다. 최근에는 <2012>이라는 영화가 인기를 끈다고 합니다. 고대 마야문명 시절부터 2012년이 인류 멸망의 해라는 예언이 있었다고 하는데, 과학자들은 오랜 연구 끝에 그것이 확실하다는 판단을 내립니다. 지진, 화산폭발, 해일 등으로 모든 인류가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인류의 후손을 남기기 위해서 우주선을 만든다고 합니다.

우주가 총체적으로 파괴되는 때가 올까요? 우주까지는 가지 말고 지구만 생각합시다. 그 중에서도 인류만 생각해 봅시다. 인류가 이 지구에 더 이상 살 수 없는 그런 순간이 올까요? 이게 허무맹랑하거나 영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쉽게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지금 지구는 우주의 한 귀퉁이에 떠 있는 태양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지구는 계속 움직입니다. 그게 몸으로 느껴지지는 않겠지요. 우리가 오감으로 느껴야만 확실한 건 아닙니다. 태양계 안에는 수많은 행성과 혹성과 유성과 혜성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일정한 궤도에 따라서 움직이기도 하고 제멋대로 움직이기도 합니다. 만약 지금 지름 1킬로미터 되는 혜성이 지구에 부딪친다면 모든 생명은 끝장이 납니다. 개미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개미도 결국은 사라질 겁니다. 또 빙하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인류는 지구에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인류가 문명의 꽃을 피우고 있는 지금은 1만 년 전에 빙하기가 끝나고 새롭게 시작될 빙하기 사이인 간빙기에 해당됩니다. 이런 큰 자연재난만이 아니라 인간의 소비 문명에 의해서 지구의 생태적 균형이 급격하게 깨질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인자가 올 마지막에 대한 성서의 증언이 바로 위에서 설명한 것과 똑같은 종말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겉으로만 보면 아주 비슷합니다. 우주의 해체를 말하니까요.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성서는 기본적으로 이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로 봅니다. 하나님은 선하고 정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그의 창조 행위도 역시 선하고 정의롭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고 아름답다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노아 시대에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서 물로 심판을 내리셨지만 하나님은 무지개를 보여주시면서 앞으로 이런 재앙이 없을 것이라고 노아와 약속했습니다.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창 9:15) 성서와 기독교 신앙에 따르면 이 세상은 허무하게 해체되는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딛고 있는 땅은 탄탄합니다. 비록 홍수와 지진과 해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토대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본문은 왜 일월성신이 뒤틀리고 바다와 땅이 흔들린다고 말하는 걸까요? 그것이 결국 세상의 예언자들이 말하는 인류 멸망과 똑같은 게 아닐까요? 성서가 말하는 종말은 해체와 파괴가 아니라 오히려 세움과 들어올림입니다. 그것은 죽임이 아니라 살림입니다. 그것은 중단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입니다. 그런 세계를 누가복음은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온다고 표현했습니다.(눅 21:27) 그리고 그 때는 곧 ‘속량’의 때입니다.(눅 21:28) 그렇습니다. 인자가 오는 때는 구원의 때입니다. 생명이 완성되는 때입니다.

바로 위에서 인용한 두 구절이 무엇을 말하는지 보십시오. 거기에 기독교가 희망하고 기다리는 미래가 담겨 있습니다. 인자는 능력과 영광을 가진 분입니다. 그가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이는 곧 능력과 영광을 가진 인자만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인간과 세상을 구원할 능력과 영광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21세기의 놀라운 과학도 우리를 이 세상에서 조금 더 편리하게 살도록 도와줄 수는 있지만 능력과 영광은 없습니다. 인간과 과학은 바로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합니다. 아주 무능력합니다. 이 말이 이상한가요? 이상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과학의 능력은 지금 이런 세상 안에서만 발휘되지 인자로 인해서 완성될 세상에서는 무기력합니다. 무슨 말인가? 인자로 인해서 완성될 세상은 지금의 세상과 전혀 다릅니다. 조금 다른 게 아니라 완전히 다릅니다.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총체적으로 다릅니다. 양적으로 다른 게 아니라 질적으로 다릅니다. 세상을 개량하는 게 아니라 전복시킵니다.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그게 어느 정도인지를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외계인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질적으로 다른 세상이라고 해서 해괴한 세상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게 좋겠군요. 여기 코스모스 씨앗이 있다고 합시다. 굵기가 1,2미리, 길이가 1센티 정도 되는 가늘고 길쭉한 모양입니다. 그게 봄에 땅에 심겨졌습니다. 조금 지나면 거기서 화사한 코스모스 꽃이 핍니다. 씨앗만 놓고 본다면 꽃은 상상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세계입니다. 씨앗과 꽃을 따로 놓고 본다면 완전히 다른 세계입니다. 그러나 씨앗과 꽃은 신비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씨앗과 비슷합니다. 씨앗이 때가 되면 꽃을 피우듯이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은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꽃을 피우게 될 것입니다. 그걸 이루실 분이 바로 능력과 영광으로 오실 인자이십니다. 인자에게만 그런 능력이 있으며, 그런 세상이 바로 그분의 영광입니다.        

이런 성서의 가르침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냥 그대로 믿을 수도 있겠지만, 뭔가 속 시원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인자가 세우실 세상이 아무리 새롭다고 하더라도 그건 지금 우리와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라서 실감이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보다 지금 당장 여기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더 나아가서 여기서 이웃들과 평화롭게 사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틀린 생각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이 자칫하면 이원론적이고 초월적인 종말론에 빠져서 현실을 놓칠 수가 있습니다. 역사 허무주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들은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 자주 일어났습니다. 1992년 다미선교회 사건은 단적인 예입니다. 거기에 속했던 사람들은 1992년 10월28일에 세상의 종말이 오고, 자신들만 휴거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직장과 학교도 그만 두고 매일 종교적인 집회에만 몰두했습니다. 이런 신앙은 분명히 잘못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현실의 역사에 발을 굳건히 딛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 이뤄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있는 이 세상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불완전합니다. 창조가 아직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는 참된 안식이 불가능합니다. 오죽했으면 묵시적 문서들이 죽음을 영원한 안식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보십시오. 우리가 여기서 경험하는 것들은 모두 지나갑니다. 여러분의 젊음을 보세요.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우리가 소유했던 것들도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이 빠져나가듯이 모두 빠져나갑니다. 우리에게 남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그 어떤 것으로도 생명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우리 운명의 종착역이 죽음이라는 사실은 바로 이에 대한 단적인 증거입니다. 우리의 이웃 종교인 불교가 해탈을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의 모든 집착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야만 열반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 열반은 기독교 용어로 구원, 또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많은 점에서 우리와 다르지만 그들도 지금의 세상과 삶이 이것 자체로 완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것만은 우리와 다를 게 없습니다.      


깨어 있으라

불완전한 이 세상이 완전하게 질적으로 변형되는 그 하나님의 때가 구체적으로 언제일까요? 그 때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때는 예수님도 모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압니다. 그러나 그 때의 징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비유로 설명합니다. 싹이 나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는 것처럼 마지막 때의 징조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사이비 종말론이 창궐할 때 그들은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666이나 144,000이라는 숫자를 세계사의 큰 사건과 연결해서 설명하곤 했습니다. 유럽 연합(EU)이나 상품의 바코드를 실례로 들었습니다. 자연재해를 예로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 주장들은 모두 공허한 것들입니다. 사람들에게 공연한 두려움을 조장함으로 종교적 열정을 불러내려는 행태들입니다. 그런 것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마지막 때가 “덫과 같이” 임한다고 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두 말씀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들릴 겁니다. 한편으로는 마지막 때의 징조를 알아볼 수 있다고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걸 예상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모순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징조가 보일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전혀 보이지 않을 겁니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누군가요? 본문이 구체적으로 지적합니다.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진 사람입니다.(눅 21:34) 세상의 일에 모든 영혼이 치우쳐 있는 사람들입니다. 삶을 향한 의지와 열정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성취, 자기만족에 몰두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치켜세웁니다. 그러나 그런 삶은 결국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만듭니다.

마지막 때의 징조를 보는 사람은 누군가요? 오늘 본문에 따르면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눅 21:36)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며 깨어 있다는 건 생명의 중심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힘인 성령과 민감하게 공명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지막 때의 징조를 볼 수 있습니다. 더 근본적으로 이런 사람에게는 그 마지막이 내일이든지, 10년 후이든지, 10억년 후이든지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마지막 순간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인식하고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교회력의 시작인 2010년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을 기억하며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유는 예수님이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인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마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는 심판주로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이 바로 생명과 생명 아닌 것을 구분하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지난 2천년동안 기다렸지만 아직도 오지 않을 걸 보니 그의 약속이 확실하지 않다는 불안, 의심을 하지 마십시오. 2천년은 하룻밤과 같습니다. 그분이 오시어 생명이 확 드러나면 그 시간의 신비도 모두 밝혀질 것입니다. 마지막 그 때를 공연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때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받는 순간입니다.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구원의 그 날이 속히 올 것입니다. 이미 왔습니다. 2천 년 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대림절 첫 주일, 2009.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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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9]이선영

November 30, 2009
*.164.231.24

목사님, 아직 기독교신앙의 주변에서 서성이는 어린애이지만

천년이 하루같다는 주님이 오시는 그 때,

시간의 신비도 모두 밝히 드러나는 그 때,

참된 안식의 그때가 간절히 기다려집니다.

이미 우리에게 오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다는 건 어떤걸지.

설렘과 기대가 생깁니다.

현실이 고달프기도 하지만 그 속에 함께 하시는 주님을 잘 따라가고 싶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는 정말 목이 마를 때의 물 한 잔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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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November 30, 2009
*.120.170.243

선영 양,

내 설교가 물 한 잔 같소?

표현이 멋지군.

공짜니까 아무 때나 마시게나.

설렘과 기대로 대림절 첫 주간을 지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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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참믿음

December 01, 2009
*.123.6.154

목사님  언제부턴가 제 신앙이 변하고 있음을 느낌니다. 한마디로 자유함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자꾸만 더욱더  자유함을 얻기를  바라게 되는데 왜그렇죠?

무엇보다 신앙행위와 죄로부터 자유함을 느낌니다. 그리고 이전 느끼지못한  평안을 느낌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이라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천국이  바로 가까이에 있는데 우리는 알면서도 바보같은 나날을 보내는 인생인거 같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내앞에 내옆에 계시고 그분이 바로 천국이신데...

 

오늘 목사님 설교 말씀을 잃고 행복함이 느껴집니다. 왜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전같으면 말씀중 마지막때, 심판같은 단어와 예언적 묵시글을 잃으면 무섭고 두렵고 혹시 구원받을수 있을까?

생각을 했었는데 요즘은 제가 변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마지막이 시작이라는 우리의 신앙이 기쁘고 그날이 기다려지는

 마치 신부같은 마음이 듬니다.  다비아 여기저기 글을 잃고 정말 신앙의 자유함이라는 걸 느끼게 되는거 같습니다

 

하나님을 더욱더 알고싶은 마음이 생기고 ,나의 전존재로 사랑하고 싶은 마음. 

이제 제마음의 지옥인 세상염려만 던져버리면 전 목사님보다 이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 될거 같습니다.ㅎㅎㅎ

 

오늘 말씀중 "마지막때가 곧시작,  새롭게 시작하는 마지막때"가 제일 마음이 흥분됩니다.

이젠 그 흥분은 마음속에 묻고  그날을 위해 "깨어있으라, 기도하라"는 말씀으로 받아 드리고 싶습니다.

 

한가지 궁금한거 있습니다. 나중에 언젠가 설교로 말씀 부탁드림니다.

은사에 관한거 입니다. 특히 예언과 치유 그리고  신비주의 ,요즘 저뿐아니라

많은분들이 혼란과 궁금 할거라 생각합니다.  솔직히 저두 은사를 구하고 싶습니다 깊은 성령체험을..

잘못된영을 분별하는 영적 분별도 알고 싶고요.   성경에 말씀으로 있기때문에 성경적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상하게 볼게아니라 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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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December 01, 2009
*.120.170.243

참믿음 님,

좋은 대림절 첫 주간 화요일 아침이군요.

제 설교로 시험에 들지 않고

영적인 자유가 넓어졌다니, 다행입니다.

은사를 주제로 한 설교나 성경공부가 다비아 안에 어딘가 있긴 할 겁니다.

은사가 무엇인지를 알기만 하면 별로 혼란스럽지 않을 겁니다.

1. 은사의 보편성- 모든 기독교인은 은사를 받았습니다.

다만 그게 무엇인지 자신이 잘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2. 은사의 공평성- 모든 은사는 동일합니다.

교회 청소하는 은사나 병 고치는 은사나 똑같다는 뜻입니다.

3. 은사의 독자성- 다른 이의 은사를 침범할 수 없습니다.

설교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성가대의 은사까지 넘보면 안 됩니다.

위의 원칙이 무슨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요.

은사의 성격을 설명하는 것뿐이랍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은사가 없는 사람이 없고,

모든 은사가 똑같이 중요하니

은사를 자랑하지 말뿐만 아니라

남의 은사를 부러워하지도 말자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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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김용남형제

December 01, 2009
*.61.23.114

김혜자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아프리카 구제활동 일지를 담은 책인데요,

'신은 왜 아프리카를 만들었는가. 이렇게 모른체 할 것이라면'이라는 대목과 '신의 침묵'에 대한 언급을 읽으며

과연 신은 침묵하고 계신 걸까? 그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영적 둔감함이 문제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 '음성'은 은사주의권의 독단적인 신비체험보다는 목사님의 말씀대로 '성령과 민감하게 공명'하는 상태겠고요.

삶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어렴풋이 느낄 때도 있지만 아직도 생명의 중심과 연결된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목사님께서 코스모스 씨앗을 예로 드셨는데, 이 씨앗이 우리에게 주어진 기독교 복음에 상응한다면

그 복음의 내용을 넘어 심층적인 영성의 세계로 들어갈 때 인자가 완성하실 그 나라를 미리 경험할 수도 있을까요?

(공교롭게도 코스모스가 우주라는 뜻이네요. 목사님께서 의도적으로 복선을 놓으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대부분 황홀경을 체험한 신비주의 영성가들 중에 그렇게 종말론적인 세계에 이른 사람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진실로 신이 침묵하지 않으신다는 영적 리얼리티를 경험하고,

세상의 소외된 자들이 그 사실을 혼돈 없이 이해하도록 풀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태양계의 중심인 태양이 강렬한 빛에 싸여있기 때문에 그 태양의 실체를 경험할 순 없듯이

역사와 생명의 중심인 예수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에 관해서도 지금은 간접적인 진술로만 만족해야 할까요?

읽을수록 여러가지 생각이 복잡하게 뒤얽힙니다.

우주과학적인 입장에서 예수를 해설한다면 예수는 태양 안에 계시지 않을까하고 엉뚱한 상상도 해봅니다.

태양빛은 예수의 영광의 광채이고, 그 광채가 전지구에 생명을 공급하고 있다는 의미로 말입니다. 정말 나이브하죠?

이번에도 한층 생각을 끌어올려주신 말씀에 감사드리며, 다음주 서울샘터교회 1주년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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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December 01, 2009
*.120.170.243

김용남 군,

서울샘터교회 1주년을 기억하고 축하해주다니,

이런 감사할 데가 있나.

참으로 특별한 젊은이로군.

기대가 크네.

<역사와 생명의 중심인 예수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에 관해서도

지금은 간접적인 진술로만 만족해야 할까요?> 라고 말했네.

정확한 진술이네.

간접적인 게 직접적인 것보다 뭔가 부족하다는 말은 아니네.

전체를 경험할 수 없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부분적으로만 접근해야 한다는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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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beginner

December 01, 2009
*.106.156.126

막연하게 종말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이 내재해 있었던 초보운전인 저는

오늘 설교에서 죽임이 아니라 살림,  중단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 파괴가 아니라 세움이라는 대목에서

자유함과 주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신앙생활은 규칙 준수가 아니라.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동행하며 
그 분의 약속을 가슴에 품고 오늘의 고난을 이기며 가는 천국으로의 여정입니다. 

라는 어느 목사님의 말씀이 언듯 생각납니다.

목사님,

오늘도 몇미터 나간거 맞죠?

패션이 바뀌시니 더 엄숙해보이십니다.

두 번 읽고 한 번 들어도 결석생이라 뭔가 2% 부족합니다.

 다음주에는 결석안할게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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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December 01, 2009
*.120.170.243

예, 이일녀 님,

오늘도 진도가 많이 나갔군요.

복음은 자유와 사랑의 능력이랍니다.

그런 세게로 조금씩 깊이 들어가는 게 영성이기도 하구요.

패션을 말씀하시는 걸 보니

동영상을 보셨군요.

지난 주일에 입은 목사 가운은 30년 쯤 된 건데요.

돌아오는 주일에도 입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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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3]달팽이

December 01, 2009
*.83.94.22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심판대앞에 환히 드러나겠죠?

우리 자신의 눈에, 다른 사람의 눈에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아무것도 숨겨지지 않고,

아무것도 애매모호하지도 않고,

아무것도 오해되지 않고,

우리가 살아온 과거의 모든 거대한 흔적이 눈앞에  펼쳐진 책처럼  정확하게 드러나겠죠?

 

아마,

그때에 얼마나 많은 첫째가 꼴찌로 나타날 것이고,

얼마나 많은 꼴찌가 첫째로 나타날 것인지?

얼마나 많은 강자가 약자로 등장할 것인지,

얼마나 많은 약자가 강자로 등장할 것인지 보고 놀라게 되겠죠

 

바르트의 신학묵상을 읽어면서

대림절의 의미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대하여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 누구도 밝은 빛으로부터 곧 공개적인 자리로부터 도망갈 수 없을 것이다.

그 누구도 마지막 심판을 모면할 수 없을 것이다."

 

대림절, 그 분의 은총을 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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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December 01, 2009
*.120.170.243

정원주 형제,

우리 한번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깊이 들어가 봅시다.

인생에서 다른 할 일도 많겠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을 거에요.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의 모든 삶이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게 될 테니까요.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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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방랑자

December 02, 2009
*.109.153.11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진 사람(눅 21:34)....

이땅에서 사는 동안엔 늘 벗어 나고 싶지만 잘 안되는 힘든 과제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다비아를 통해 달라진 게 있어요 전처럼 자책하고 낙심하기 보단 희망이 있음을 보게

되었고 곧 제자리로 돌아오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노력의 방편인지는 모르지만

최근들어 가끔 종말에 단독으로 하나님과 마주하는 순간을 상상하곤 합니다.

첨엔 훈련하듯 의식적으로 했는데 어느땐 불현듯이 떠오를때도 있어요 그럼 그 순간 잠시 나마

세상일을 다 놓게됩니다 그 상상만으로도 너무나 두렵고 떨리거든요(아직까진 두렵기만함 ㅜ.ㅜ)

말씀을 보면서 목사님께서 풀어 주신 달란트의 비유가 생각납니다. 그전엔 설교중 그 비유만 나오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죄책감에 정말 괴로웠는데 그 글을 읽으면서 월매나 가심이 두근거리고

해방감을 맛보았는지... 거기서 깨달았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가장 경계해야할 문제는 다름 아닌

신앙심의 이완, 매너리즘 바로 이런 것들이란 것을요

생활의 염려로 마음을 다 빼앗기지 않으면서 슬기로운 다섯처녀처럼 긴장을 늦추지 않고 늘 깨어있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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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December 02, 2009
*.120.170.243

방랑자 님 같은 분이 계셔서

다비아 운동을 시작한 보람을 느낍니다.

이 한 가지만은 꼭 기억하세요.

우리는 모두 흔들림없이 영적으로 전진하는 게 아니라

오르락내리락한다는 사실을요.

여기서 제외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방향을 바르게 잡고 있다면

조금 흔들리거나 나락에 떨어졌다가도

곧 제자리로 돌아와서 앞으로 나갈 수 있답니다.

영성이 깊어진다면 흔들리는 폭과 시간이

대폭 줄어들겠지요.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자유와 해방과 기쁨이

샘물처럼 흐르고 있답니다.

대림절의 기쁨이 넘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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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wisdom

December 03, 2009
*.106.182.2

목사님, 안녕하세요.

늘 소리소문없이 들어와서 살금살금 글만 읽다가

오늘은 너무 궁금해서 댓글을 남깁니다.

 

요즘 선교단체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나누며

시대흐름과 영적흐름을 이야기하며 선교를 나가는데

선교가 귀한일이지만 현실을 도피하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볼때가 있습니다.

 

설교글에 '종교적 열정을 불러내려는 형태'라고 표현하셨는데  

(선교단체와 교회가 사이비라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여기를 살아가면서 선교, 복음전파는

어떻게 봐야하며 분별 해야할까요?

 

말씀 가운데 자유함을 느낀다고 생각하지만

현실 안에서 종교적 규칙에 사로잡혀

하나님 없이 달려 나갈까봐 두려워 질문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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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December 03, 2009
*.120.170.243

wisdom 님,

신앙의 바른 길을 찾기 위해서 애를 쓰시는 분이시군요.

마지막 단락에 모든 생각과 질문이 담겨 있네요.

말씀, 자유, 종교적 규칙, 하나님 없이, 두려움....

우리가 가는 신앙의 여정에서

하나님 경험이 가장 중요한 토대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감정, 연민, 느낌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인식, 분석, 해석, 판단, 결단과 연결됩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전자의 항목은 강렬하지만

후자의 항목은 취약하기 그지 없답니다.

지금은 일단 기독교의 근본에 대해서 학습하는 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사실 사랑의 능력에도 학습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이요.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고

진리 자체이신 주님이 말씀하셨답니다.

대림절의 기쁨이 넘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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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5]모모

January 01, 2010
*.199.67.216

목사님, 오늘 처음으로 가운을 입고 설교하시는 것같군요... ?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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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January 01, 2010
*.120.170.243

모모 님,

제가 신학대학교 다닐 때 베스트셀러가

미카엘 엔데의 <모모>였던 기억이 나는군요.

대구샘터교회에서 2009년 대림절부터

목사 가운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은 자연인으로가 아니라

일정한 역할을 맡은 사람으로 서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랍니다.

이걸 권위주의적 발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그건 큰 오해입니다.

물론 가운 뒤에 숨어서 권위를 나타내려는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근본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답니다.

판사가 법복을 입는 것도

그 역할을 맡은 이가 자연인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 교회는 양극단에 치우친 것 같습니다.

하나는 목사 가운을 그 개인의 권위로 삼으려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그걸 완전히 부정하려고 평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민주적이고 열린 교회라는 곳일수록

목사가 평상복으로 예배를 인도하는 경향이 강하더군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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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5]모모

January 01, 2010
*.199.67.209

뭔가 비장함이 서려있는것 같아서 부럽다고 할까요, 무섭다고 할까요,존경스럽다고 할까요, ㅋ ㅋ 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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