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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폐, 하나님의 침묵

주현절 조회 수 15903 추천 수 1 2010.01.18 16:4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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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이사야 64:1-12 
 

하나님의 은폐, 하나님의 침묵

(사 64:1-12)


오늘 설교 본문인 이사야 64장이 포함된 이사야 56-66장을 쓴 사람은 일반적으로 제3 이사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1-39장의 제1 이사야, 그리고 40-55장의 제2 이사야와 활동시기가 다릅니다.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제 3이사야는 기원전 530년 전후 대략 2,3년 정도 예언자로 활동했습니다. 기원전 530년의 시대적 특징은 기원전 587-537년에 있었던 바벨론 포로 이후입니다.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초토화되고 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은 이스라엘의 정치, 사회 문제만이 아니라 종교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들이 몰락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역사적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자리를 잡고 살았고, 그 후손들이 이집트에 이민을 떠났다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다시 가나안으로 왔습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에서 세계 모든 민족이 부러워할 정도로 행복하게 살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민족이 완전히 망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물론이고 예루살렘 도시 전체가 파멸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 백성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내버려두는 하나님이 누군가 하는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하나님이 무능력한 존재인지, 아니면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닐지 모른다는 회의입니다. 이런 회의가 오늘 본문을 기록한 제 3이사야 시대에도 여전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무능력한 존재인가, 하는 회의를 근본적으로 거부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는 분이십니다.(사 64:1) 하늘은 고대인들에게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능력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을 가른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런 절대적인 세계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이사야는 그런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에 대해서 보충해서 설명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산들이 진동합니다. 이방 나라들이 벌벌 떱니다. 하나님은 이런 능력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키신다고 합니다. 이런 하나님을 본 사람도 없고, 들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 하나님은 금시초문의 존재십니다. 이사야는 지금 출애굽 사건을 언급하는 중입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내셨습니다. 당시 세계 최고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바로의 기마병들을 홍해 바다에서 전멸시켰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무능력하다는 의심과 의혹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암담한 신세가 된 것일까요? 이사야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이스라엘의 범죄가 대답입니다. 5b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래 되었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사 64:5) 예언자들은 자기 민족에게서 벌어지는 불행과 재앙을 죄의 결과로 보았습니다. 그것 말고는 이런 상황을 해명할 길은 없었습니다. 이런 예언자들의 생각은 선악과 사건에까지 맞닿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사실과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의 충돌을 창세기 기자는 선악과를 통해서 해명했습니다. 인간의 죄, 즉 불순종이 결국 인간의 죽음을 불러왔다고 말입니다. 이런 관점이 구약성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신약성서는 이 문제를 다르게 접근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을 본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누구의 죄로 이 사람의 운명이 이렇게 결정되었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의 죄냐, 아니면 부모의 죄냐 하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이 사람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장애를 고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요 9:1 이하) 이 말씀을 마치고 예수님은 그의 시력을 회복시키셨습니다. 모든 질병과 재앙을 죄의 결과로 본 구약의 관점을 넘어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의 재앙이 범죄 때문이라는 예언자들의 시각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두 가지 관점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그 시대는 그런 충고를 들어야할만한 시대였습니다. 이사야가 그 시대를 어떻게 묘사하는지 들어보십시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그 시대가 총체적으로 부패했다는 뜻입니다. 둘째, 이들의 범죄는 단순히 부도덕성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을 가리킵니다. 7a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 말은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먹고 사는 데에만 관심을 둔다는 뜻입니다. 생명의 근원에 대해서는, 정의와 평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이름을 내는 것에만 몰두합니다.

이사야는 이런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라.”(사 64:7) 하나님이 얼굴을 숨겼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셨다는 뜻입니다. 그 상황이 얼마나 참담했으면 하나님이 숨으셨다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토로했겠습니까? 이사야는 본문 끝자락에서 다시 이렇게 호소합니다. “주께서 아직도 가만히 계시려 하시나이까 주께서 아직도 잠잠하시고 우리에게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려나이까?”(사 64:12) 지금 이사야는 하나님의 은폐,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합니다. 그 어디에도 하나님을 찾는 이들이 없습니다. 하나님도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습니다. 막막한 상황입니다. 

이런 묘사는 물론 문학적인 수사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따로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가 자신을 숨긴다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무소부재하신 분입니다. 없는 곳이 없는 분입니다. 이것은 아무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상황에 대한 문학적 묘사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묘사도 역시 그렇습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고, 지금도 늘 자기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침묵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고 행동하신다는 증거를 찾기 힘들다는 사실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사야의 이런 영적 경험을 이해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의 파괴, 포로생활, 귀환 뒤에 일어난 성전재건의 어려움, 이스라엘이 일어설 거라는 예언자들의 예언이 성취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등을 살펴보면 이해가 갑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은 어떨까요? 우리도 이사야와 똑같은 상황에 놓여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의 은폐와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할까요? 사람들은 이사야 시대와 우리 시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경우는 실제로 절망적이었지만 우리의 경우는 오히려 희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생존 자체가 위태로웠지만 우리는 최소한 생존은 넘어섰고 오히려 풍요를 구가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증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닙니다. 이사야 시대보다는 지금 우리의 시대가 표면적으로 나아보입니다. 실제로 조건이 좋습니다. 먹을 것도 상대적으로 풍부하고, 핸드폰과 인터넷을 일상으로 사용합니다. 미군이 남한 땅에 60년 이상 주둔하고 있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은 식민지가 아니라 어엿한 주권국가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가톨릭과 개신교를 합해서 전인구의 30% 쯤 됩니다. 예배도 많고 기도회도 많고 성경공부 모임도 많습니다. 해외 선교사 숫자가 미국 다음으로 우리나라가 많습니다. 세계에게서 열 손 가락 안에 드는 큰 교회가 우리나라에만 다섯 개 이상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가,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증거가 산더미같이 보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런 정도로 만족하고 즐겁게 살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인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시각이 무엇인지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잃은 양을 찾는다는 예수님의 비유입니다.(눅 15:3-7) 양 백 마리를 키우던 사람이 한 마리를 잃었습니다.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놓아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아흔아홉 마리를 위험에 방치한다는 것은 무모한 행위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아흔아홉과 하나를 단순하게 비교하면 곤란합니다. 잃은 한 마리를 향한 목자의 심정을 말하는 겁니다. 기독교인의 영성은 바로 여기에 놓여 있습니다. 잃은 한 마리의 양, 소외된 한 사람,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깊은 연민과 연대가 그것입니다. 오늘 잃은 한 마리의 양이 누구인가요? 

한 마리에 관심을 두기는 쉽지 않습니다.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를 잘 키우는 게 훨씬 경제적입니다. 사회적 소수자, 그늘진 구석에 자리한 이들에게 가까이 가는 건 여러모로 불편합니다. 서울역에는 노숙자들이 많습니다. 요즘은 날씨가 추워서 그들이 대합실에 자리를 잡을 때가 많습니다. 그들은 대낮에도 소주병을 들고 다닙니다. 몸에서 악취가 납니다. 이런 이들 곁에 가까이 가는 건 어색한 일입니다. 그들이 담배 한 가치를 달라거나 술값을 달라고 가까이 오면 짜증이 날 수도 있습니다. 제가 극단적인 예를 들었는지 모르지만 잃은 한 마리 양을 찾는다는 건 사실 어렵고 귀찮은 일입니다. 그러나 어쩝니까? 우리가 메시아로 믿는 예수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용기가 없어서, 또는 게을러서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최소한 그런 쪽의 시각만이라도 알고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기회가 올 때 주님의 제자로 행동할 수 있지 않을까요?

노숙자 문제가 불쾌했다면 고상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바로 잃은 양 사건과 비슷합니다. 잃은 양은 자기가 길을 잃은 거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겁니다. 양쪽 다 세상에서 따돌림을 당한 사건이라는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당시에 유대인은 물론이고, 헬라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십자가를 하나님의 저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은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초기 기독교는 온 세상이 수치라고 생각한, 그래서도 가까이 가기도 싫고 생각하기도 기분 나쁜 예수의 십자가를, 그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믿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물론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건의 처절함, 무력감, 좌절을 우리가 뼈저리게 느끼지 않으면 부활 생명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십자가는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심이며,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외쳤습니다. 이사야의 절망과 한탄이 이 절규에 오버랩 됩니다. 

저도 지난 2009년 일 년 동안 하나님의 침묵을 자주 경험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용산참사입니다. 매주일 기차를 타고 서울을 다녀오면서 용산역을 지날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다행히 작년 연말에 국무총리의 유감표시와 적절한 보상을 통해서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아직도 남은 문제는 많습니다. 다른 하나는 교사들의 해임 사건입니다. 서울교육청은 일제고사를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초등, 중등 선생님들을 해임했습니다. 자초지종을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법적으로 잘못이 있다면 누구든지 그에 대한 문책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잘못보다 더 큰 문책을 내리는 건 잘못입니다. 부도덕한 일을 행한 교사들도 몇 개월 감봉으로 끝나는 마당에 교사 나름의 교육 철학으로 학부모들에게 일제고사를 치르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문건을 보냈다는 이유로 해임시킨다는 건 횡포입니다. 이런 횡포는 선거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아 교육감 자리를 내놓은 아무개 서울 전 교육감이 저지른 것입니다. 다행히 얼만 전 법원은 교사들의 해임이 무효라고 선고했습니다. 요즘 검사의 기소가 법정에서 번번이 무죄로 결정이 납니다. 미네르바 사건도 그렇고, 정연주 KBS 전 사장 사건도 그렇고, 강기갑 국회의원 사건도 그렇습니다. 이번에 법원에서 해임 무효 선고를 받은 선생님들은 서울 교육청에서 상고를 하지 않으면 다음 학기부터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겠지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이와 비슷한 일은 많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권력의 남용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반복될까요? 

이사야는 정말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고, 하나님이 침묵한다고 생각한 걸까요? 저는 앞에서 그것을 답답한 상황에 대한 문학적인 수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문학적 수사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강력한 요구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요구입니다. 이스라엘의 참담한 상황을 이사야는 범죄의 결과라고 지적했습니다. 가장 큰 범죄는 곧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자기 잘못이니 어쩔 수 없다고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자기연민이며, 자기집중입니다. 그것의 극단이 바로 자폐입니다. 생명은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의 소통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인데, 그것이 단절되었다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저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편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모두 예언자와 똑같이 살아야 한다고 독촉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설교를 듣는다고 해서 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옳다고 생각해도 그렇게 살아가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성서가 말하는 생명의 길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게 무엇인지는 성찰해야 합니다. 그것에 대한 부단한 성찰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결국 상투성에 빠집니다. 교회는 단순히 신앙적인 친교모임이 되고 맙니다. 성도 여러분, 비록 현실이 고달프고 거칠더라도,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에 일단 마음을 집중하십시오. 예수가 지신 십자가와 부활에 영적인 관심을 기울이십시오. 현실은 하나님의 침묵이지만, 그 침묵 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주현절 후 둘째 주일, 1월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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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김용남형제

January 18, 2010
*.152.237.65

이 글이 제대로 된 적용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전에 머물던 교회 학생부에서 하나님의 침묵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열광적이고 은사주의적인 교회인지라 기도할 때는 다들 감정이 범람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철저히 '끼리끼리' 문화에 젖어져 있는 가증한 모습들을 보며 속에서 불이 솟구쳤습니다.

서로는 잘들 어울리지만 그야말로 '집단적 자폐'에 젖어있는 그 상태는,

신기하게도 제게만 가관으로 보였는지 아무도 문제의식을 못 느끼더군요. 아니면 한국 청소년들만 그런건지.

그래서 최근 칼럼방의 그림일기 '딸 자랑 좀 할게요' 편이 참 와닿았습니다.

소외된 사람의 마음,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헤매는 심정은 겪어본 자만이 알고 있는데,

아무튼 그 안에서 소외성으로서의 인간 실존을 깨달았다는 게 그나마 감사거리라면 감사거리입니다.

이렇게 보면, 전세계에 퍼져있는 사회의 마이너리티들,

그들이 예수 안에서 새롭게 묶여서 어떤 거대한 세력을 이룰지도 모르는 일일까요?

설교비평에서 읽은 김기석 목사님의 말씀, "극단(極端)은 단서(端緖)의 시작지점이다"라는 말이 또 맴도네요.

그 사실을 현실세계에서 구체적으로 읽어내고 외치는 자가, 하나님의 은폐를 탈은폐화시키는 선지자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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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January 19, 2010
*.120.170.243

용남이의 글은 읽을수록 감탄사가 나오네.

"하나님의 은폐를 탈은폐화시키는...."

18살 기독교인들 중에서

은폐와 탈은폐의 변증법적 관계를 아는 이가

용남이 말고 또 누가 있을는지, 음.

그렇지.

하나님은 침묵으로 말씀하시지.

침묵에서 말씀을 읽고 듣는 자가 선지자겠지.

그건 그렇고,

용남이가 금년 11월에 있을 수능도 이렇게 잘 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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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눈꽃

January 18, 2010
*.187.19.193

오늘은 설교가 올라 오기를 학수 고대 하고 기다렸습니다
어제 설교에 집중을 못했거든요 그래도  목사님 간증은 정확히 기억납니다 .목사님은 설교시간에 본인의 간증을 거의 안하시는데....

 

이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유기 방치라고 생각합니다

제의 경우엔 고난은 하나님의 방치라기보다 오히려 관심이란 생각이듭니다

 

가장 큰 범죄는 곧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생명은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의 소통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인데, 그것이 단절되었다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네 맞습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이유 없는 고난은 당해 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다 이유있는 고난이였고 내 잘못으로 인한 어려움이였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당하면서 그리고 그 고난속에서 고난이 끝난 후에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더 절절함으로 다가왔습니다
오고계시는 하나님에 응답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생활!
예민한 촉수를 내밀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나라에 집중할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성도 여러분, 비록 현실이 고달프고 거칠더라도,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에 일단 마음을 집중하십시오. 예수가 지신 십자가와 부활에 영적인 관심을 기울이십시오. 현실은 하나님의 침묵이지만, 그 침묵 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의 말씀이 폭포소리와같이 우렁차게 제 심령을 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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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January 19, 2010
*.120.170.243

예배와 설교에 집중하지 못한 이유가

강단 정리였다면서요?

젊은 오빠들에게 부탁하세요. ㅎㅎ

설교 시간에 한 이야기는 간증이라기보다는

경험담이었어요.

좋은 한 주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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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눈꽃

January 19, 2010
*.187.19.193

아직도 풀지못한 이유없는 고난 그 앞에서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흔히 욥기를 들어 말하곤하지만

 그래도 욥은 살아있을때 회복이라도 되었지......그렇지 않은 경우가 현실에서는 더 많은데

바로 지금 우리는 아이티의 현장을 TV를 통해서 보고있노라면 .......

다만 하나님도 같은 고난을 당하셨다는(예수님의 십자가사건과 세계속에서 일어나는 고통의 현장에 하나님도 같이 동참하며 그아픔이 하나님의 아픔이라고 생각해야 될까요?)  이런 것으로 설명이 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전 이들(이유없는 고난을 겪는 )과 함께 해야한다는 생각 내가 있는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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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godfather

January 18, 2010
*.180.127.45

정용섭 목사님께.

 

0. 글을 어디다 올려야 될지 몰라서 여기에다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학부 신학생이구요 감리교 계통의 신학교에 다닙니다. 목사님의 교단과 형제로군요. 하하. 저번에 청주 켄싱턴 호텔인가에서 한 번 뵈었는데 재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교회에서 맡은 일이 있어서 하루 밖에 있지 못하고 갔지만요. 그 때 저희 방에 성공회 신부님이 한 분 계셨었는데 그 부분 또한 정말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1. 서두에 아무것도 모르는 신학생이라고 밝혔기 때문에 저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제가 가진 생각을 간결하게 말씀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페이퍼도 아니기 때문에 멋있는 문장 안 만들어도 괜찮겠지요. 하하. 목사님께서 쓰신 책 중에서, "말씀신학과 역사신학", "인문학적 기독교읽기 - 기독교를 말한다", "설교비평1,2,3" 논문 중에는 말씀신학과 역사신학의 내용을 보완하여 협성대학교의 김영선 박사님 등 앞에서 논찬하신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적 해석학", 그리고 세련된 독일어로 번역하여 주신 판넨베르크의 설교도 간간히 읽었습니다. 물론, 제대로 이해했다고 볼 수 있는 책은 하나도 없다는게 저의 솔직한 심정이구요, 과시가 절대 아님을 밝히는 바입니다. 과시라는 것은, 무언가 갖고 있는게 많은 사람이 하는 것이니까요.

 

2. 목사님께서 사유하시는 방법은 주로 판넨베르크가 견지해 온 신학방법론에 크게 영향을 받으신 것 같아 보입니다. 제가 대충 이해하기로는 판넨베르크가 헤겔의 변증법을 거쳐 가다머의 지평 융해와 루돌프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역사관 등의 사관에서 각각 장점을 나름대로 취한 후에 그것들이 가진 단점을 뛰어넘어 인류의 보편역사에서 그리스도교의 계시성을 논증하고자 했으며, 그러한 그의 논증의 전거는 성서의 부활사건에 주로 정초하고 있고(목사님은 부활 사건에 대하여 엄청나게 다양한 함의와 신비적 의미를 부여하시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물론 다른 성서텍스트에 대한 입장두요.), 또한 그는 자신의 보편사적 역사해석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타당성과 합리성을 충분히 객관적으로 어필할 수 있다고 본 동시에,  인문학적 인식 기반에입각하여 기독교에 황금빛 면류관(?)을 수여 하고자 했던 시도를 꾀한 신학자라고 이해했습니다.

 

3. 설교 비평에서도 목사님께서 보여 주신 촌철살인적인 지적과 날카로운 통찰을 잊지 못하겠습니다. 참고로 저는 목사님께서 비평해 주신 목사님들에 대해서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않는 동시에 목사님의 비평에 대해서도 별다른 의미 부여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직까지 제 뇌리에 남아있는 부분은 한 가지로 결집되어 있습니다. 3권에 걸쳐서 한국 목회자들에게 쓴 소리를 하셨는데, 제가 보기에 목사님께서는 일관되게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계시더군요.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바르트의 말하고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거 같은데, 바로 "텍스트로 말하게 하라"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제가 목사님의 풍부한 사유에 대해서 감히 왈가왈부 하는게 매우 바보같다는 생각을 합니다만, 제가 이해하기로는 결국 목사님께서 인문학적인 배경을 중시하고 강의도 하시는 모습을 보면 "성서 텍스트 자체"에 대한 관점이, 목사님과 다른 한국 목사님들 사이에 있는 가장 큰 갭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유치한 알레고리식 설교나(지금은 2010) 마치 도사 같은 기이한 해석으로 청중앞에서 영적인 유희의 폭력으로 뇌를 강간시키는 설교를 매우 싫어합니다. 물론, 가끔 저의 무식으로 인해 별 수 없이 알레고리로 설교해버리곤 할 때는 죽고 싶은 심정이기도 합니다.

 

4.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제가 얼마나 이해했는지 모르겠으나, 제 생각에 목사님의 비평 정신과 날카로운 사유 방법은 한국 교회와 목회자, 신학생들에 대한 따끔한 반성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솔직히  우리는 영적인 일에 대하여 루터로부터 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중세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어쩌면 우리는 포스트모더닉한 세계에 대하여 자신있게 우리를 드러낼만한 용기가 없다고 말해야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학문적 박사학위만 많아졌지, 영적 사유에 있어서의 박사학위는 전무하다고 보며, 한국인의 기독교에는 그러한 다채로운 영성적 차원의 제시가, 영원히 아무런 어필을 하지 못할수도 있다고까지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5. 그래서 말입니다. 목사님 이러한 모든 고찰들과 푸념 끝에 저에게 찾아오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목사님의 말 뜻을 대충이나마 이해 했다고 한들, 저는 여전히 답답한 가슴을 치며 이렇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떡하죠?"

모두가 나름대로의 다양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물론, 다양한 것은 아름다울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다양하다고 해서 모두를 정답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하는 것은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치열하게 진리 논쟁을 해야 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며, 이상한 것은 이상하다고 지적해주어야 하는 거라고 보는데, 우리는 진리에 관한 트리트먼트 행위에 너무나 서툴고, 그에 대하여 전무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목사님의  지적은 저에게 있어서 마치 꿈만 같습니다. 여전히 뭘 어떻게 생각하고, 무슨 책을 어떻게 읽고, 설교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완전히 뇌 부분이 표백이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목사님을 모르기 전보다는 지금이 훨씬 마음이 편합니다.

 

6. 누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하여서는 침묵해야 된다고 하지만(논고의 비트겐슈타인이던가..확실치 않아요. ),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하여 몇 자 적어 보았습니다.  "이제, 어떡하죠?"라는 저의 질문에 별다른 답변을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줄 알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정진하는 수 밖에 없겠지요. 주의 은총이." 이 글은 목사님을 응원하는 한 모자란 신학생의 글이었습니다. 다음에 또 목사님을 뵙게 되기를 소망하며. (그때는 하루 종일 붙잡고 있을지도 몰라요)

저도 주의 은총이.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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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January 19, 2010
*.120.170.243

godfather 군,

한국신학교 학부생들이 자네만 같으면

미래가 밝아보이네.

궁극적인 것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으니 말이네.

그것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없는 신학이란

얼마나 공허한지...

나에게 무슨 답을 원한 거 같지는 않군.

이미 스스로 답을 제시하고 했으니 말이네.

"이제, 우리는 어떡 하죠?" 

자네의 그 질문은 지금도

내가 설교를 끝낸 뒤에 수 없이 받는다네.

'당신이 말한 문제의식은 동의하지만,

어떻게 하란 말이냐' 하는 질문이라네.

그냥 어리석은 답을 하겠네.

하나님 앞에서 무얼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번짓수를 잘못 짚은 거라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무위, 무언의 태도를 지킬 수밖에 없겠지.

하나님 경험이 없을 때

답답한 마음으로 무얼 하려고 애를 쓴다네.

자네가 이런 대답을 원하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알고 있겠지.

그 하나님 경험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질문일 거네.

자네가 마지막에 달아놓은 그 답이 옳다네.

구도정진, 신학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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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9]이선영

January 18, 2010
*.164.231.24

우리반 아이들 중에 말귀를 잘 못알아 듣고,  몸에선 냄새가 나고, 실없이 웃는 한 아이가 있어요.

아이들은 이 아이 옆에 앉지도 않으려고 하고 곁에 가는 것도 꺼려한답니다.

제가 볼 때에는 놀이도 같이 하는 것 처럼 하다가 안본다고 생각 될 때는 대놓고 '너랑은 안 놀아' 하구요.

그런 까진 애들보다도 약간 소외되고 소극적이기도 한 아이들에게 정이 더 가긴 하지만,

이 아이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게 쉽지 않아요. 어떤 상황에서는 짜증이 날때도 있구요.

목사님께서 서울역 노숙자이야기를 하실 때 전 이 아이가 떠올랐어요.ㅠ

그 불편하고 미련하고 귀찮기까지 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살아간다는 건 어떤걸까..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침묵한다는 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이었을까.. 

목사님 말씀처럼 현실은 늘 우리에게 안이한 삶을 요구하지만 거기에 포로가 되지 않고,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이 땅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다는 게 어떤건지 성찰하며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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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January 19, 2010
*.120.170.243

선영이,

꼬마들과 하루종일 지내는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자리라네.

거기서 영성을 경험하지 못하면

어디서도 경험할 수 없겠지.

늘 자신에 대한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는

선영 선생이 기특하군.

좋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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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January 19, 2010
*.68.129.80

정 목사님!

요즘 아이티 참사를 보면서--아마 미국에서는 한국 보다 훨씬 더 많은 보도를 할 거에요. 

지리적으로 가깝고 또 뉴욕에도 아이티 출신들이 많이 삽니다.

-- 많은 사람들이 하는 질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큰 재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건 아닌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주님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마음도 이러 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다시 사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으로 인해 사람들이 다시 희망을 얻을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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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January 19, 2010
*.120.170.243

그렇지요, 모래알 님?

이유를 알 수 없는 재앙 앞에서

하나님의 침묵을,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다른 방식으로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우리는 이런 재앙과 싸워야겠지요.

이번에는 미국과 유엔이 발벗고 나선다고 하니

아이티 주민들에게 큰 힘이 될 거 같습니다.

주님의 위로가 그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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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January 19, 2010
*.104.194.37

그 무모하리만치 가혹한 시대에 이사야를 옆에서 바라보는

한 명의 이름없는 이스라엘인이 되어봅니다.

도저히 하나님과의 연결을 잃어버린 시대를 살아가면서

홀로 외치는 예언자의 소리를 듣습니다.

예언자를 조롱하기도 하는 마음과 나에 대한 자조적인 한숨도 있지만

그 한 사람만이라도 계속 하나님의 세계를 이야기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랄겁니다.

내가 진흙에서 만신창이가 되어도

생명의 근원되시는 분의 구원을 외치는 예언자의 소리를

귀를 막으면서 따라가겠습니다.

세상에서는 들을 수 없는 소리를 외치는 예언자의 소리를

그 많은 바람소리 중에서 한줄기로 골라서 들어보겠습니다.

나에게 그 분의 은폐와 침묵의 이유가 있다면 

그 은폐의 방식으로 나에게 반응하시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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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January 20, 2010
*.120.170.243

예, 유니스 님과 같은 이름 없는 이스라엘 인들이

조금씩 늘어갈 때

예언이 현실로 나타나겠지요.

주님이 우리에게 오직 살아 있는 말씀에만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순전한 영혼을 허락해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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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검객

January 20, 2010
*.158.35.253

오늘은 저도 댓글에 슬쩍 끼어들어보렵니다. 17일 주일에 "사람의 침묵과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제목으로 했습니다. 나름대로 상당한 고민과 연구와 문제의식을 가지고 몇 번 설교했던 것인데 정말로 깜짝 놀란 것은 처음 제가 이 설교를 수년 전에 했었는데 뒤에 지나고 보니 정목사님도 이 본문(창 37장)을 가지고 하셨더군요. 그리고 놀랍게도 제가 설교했던 논지와 비슷했습니다. 이걸 신비한 체험이라고 해야 되나 뭐라고 해야 되나... 누가 보면 아무래도 제가 정목사님의 설교를 베낀 것이 되겠지요.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닙니다. 두번째인데 신학교 다닐때(한 21-2년 전 쯤) 요한복음 4장을 설교했는데 나중에 한참 지나고 난 다음에 불트만의 설교 논지와 거의 흡사한 것을 보고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불트만이 내 설교를 베꼈나(ㅋㅋㅋ).

godfather님이 말하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나?라는 질문은 정말이지 너무도 실감나고 동지의식 내지는 연대의식을 느낍니다. 수도 없이 그 질문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답하시는 정목사님의 답변을 보고도 동일한 연대의식을 확인했습니다. 우리가 뭘해야 한다는 것은 번지수를 잘못찾고 있다는 것이지요. 정말 그렇습니다. 다만 복음과 진리의 세계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심층적인 인격적, 통전적인 체험을 통해 고백토록 하시는 것이지 무엇을 행하여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마 하나님의 은폐성과 그 은폐성이 하나님의 현존이 개인에게 나타나셔서 체험케하심을 통해 탈은폐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아닌 세계에서 제일 보수적인 교단의 목사입니다. 그런데 창 37장을 설교하고 나니까 저를 초청한 교회 목사님이 저를 보고 This is the most typical Cavinistic sermon이라고 하시면서 빙긋이 웃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정목사님도 정통 칼비니스트(ㅎㅎ).

오랫동안 다비안이었지만 오늘 최초로 설교에 댓글 남기면서 교제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한가지 저로서는 의심할 수 밖에 없는 것 한가지, 김용남 형제는 혹시 고등학생으로 위장한 외계인 아니면 신학자가 아닌가? 고등학생이 저렇게 깨닫고 저런 진술을 해도 되는 겁니까? 이것 또한 신비한 일인 것같습니다. 한국에 갈 일이 있으면 한번 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

시카고 눈 많이 오는 추운 도시인데 오늘은 제법 따뜻해서 눈이 녹고 있습니다. 오늘 저의 완악하고 어리석은 심령도 그리되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도서관에서 두드리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평화, 정목사님께 강건...

예수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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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January 20, 2010
*.120.170.243

검객 님,

안녕하세요?

비슷한 영적 시야와 깊이에서

성서를 읽고 해설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성령에게 의존한다는 의미이지요.

제가 도반을 얻은 거군요.

잘 해 봅시다.

하나님이 침묵으로 말씀하신다는,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심으로 나타나신다는

그 영적 신비의 세계을 향해서

오체투지의 자세로 나가봅시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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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January 23, 2010
*.229.151.223

지난 주 설교말씀 <하나님의 은폐,하나님의 침묵>은 제 자신을 냉철하게 뒤돌아보게 하는 복된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이사야 선지자의 탄원처럼

"주의 이름을 부르지도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지도" 않는자로 이 암울한 시대를 살아 가는 것 같습니다.

말씀 중에 잠깐 언급하신 것처럼, 용산사태를 바라보는 저의 심정 또한 참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더구나 가까운데 사는 저로서는 그 곳을 지나오면서, 시커멓게 타 버린 건물 옥상을 바라 볼때마다,

동병상련의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작년 일년동안 그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을 쭉 지켜 보았기에,더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아픔못지않게 더 컸던 것은, 이 나라 최고의 수장이 우리와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우리와 똑 같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뤄지기를 간구하는, '우리의 지체'라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저를 더 우울하게 했습니다.

그것은 실로 "주를 찬송하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파괴됨"을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저 또한 별 수 없이 이런 사태를 수수방관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오늘,

선지자의 절규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 주의 백성"임을 믿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고통스런 시대를 살아가지만, "침묵으로서 말씀하시고, 은폐하심으로 계시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믿기에, 부활의 산 증인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부활생명의노래"를 들을 수 있음으로 인해서

또한 우리도, 이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 바로 이 노래가 '생명의 노래'였어요!! 

 

지난 주의 말씀은, 그 옛날 우리가 희미하게 들었던 이사야 선지자의 음성을

내 어머니가 불러 주시던 자장가처럼 꿈결같이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할머니의 자장가를 기억하여 우리에게 들려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이 '자장가'를 우리 후손들에게 들려 줘야 할 책무가 있겠지요.

말씀, 타는 목마름으로 잘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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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January 24, 2010
*.120.170.243

라라 집사님,

제 설교를 통해서

이사야 선지자의 음성을 조금이라고 가깝게 들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이사야는 저에게 큰 산과 같습니다.

그의 영성을 속속들이 말하기에는

저의 영성이 미숙하기 짝이 없습니다.

더불어 그의 하나님 경험을 배워가도록 해봅시다.

좋은 주일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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