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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것과 부분적인 것

주현절 조회 수 12532 추천 수 1 2010.02.01 18: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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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3:1-13 
 

온전한 것과 부분적인 것

(고전 13:1-13)


고린도전서 13장은 소위 ‘사랑 장’이라고 불립니다. 사랑에 대한 찬가입니다. 세계 문학의 역사에서도 사랑에 대해서 이처럼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렇게 깊이 있게 묘사한 글은 별로 없을 듯합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는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사랑의 실천이 자신에게는 불가능하다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반응은 본문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바울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뜻으로 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실천은 아예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바울은 지금 다른 것을 말하는 중입니다. 본문은 고전 12장과 14장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12장은 은사에 대한 이야기이고, 14장은 방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방언은 여러 은사 중에서 고린도교회를 시끄럽게 만든 대표적인 은사입니다. 바울이 은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중간에 사랑을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결국 은사와 사랑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말하려고 했다는 의미입니다.


은사의 상대화

바울은 오늘 설교 본문에서 모든 은사를 상대화합니다. 그는 이 문제를 세 묶음으로 정리합니다. 첫째는 방언과 천사의 말입니다. 방언과 천사의 말은 이상한 언어들입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독일어나 프랑스어는 방언입니다. 서울사람에게는 제주도사람들의 말이 방언입니다. 고린도교회에는 그런 일상적인 외국어나 심한 사투리 같은 방언만이 아니라 언어 구조를 넘어서는 신비한 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그런 소리를 냈습니다. 이런 현상은 이교도의 예배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사람은 아주 고도의 정신적 상태에 빠질 때 이런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 줄 안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고 했습니다.(13:1)

둘째는 예언과 비밀과 지식과 믿음입니다. 바울은 이런 은사를 방언보다는 나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방언은 개인의 유익에 속하지만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섯 마디 전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보다 낫다고 했습니다.(고전 14:19) 산을 옮길만한 믿음은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신유와 축귀 능력이 여기에 해당될 겁니다. 많은 신자들이 원하는 그런 은사들입니다. 바울에 따르면 그런 것들도 사랑이 없으면 신자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고전 13:2)

셋째는 구제와 불사름입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극한의 자기희생입니다. 이것보다 더 귀한 일들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자기 소유를 모두 포기하면서 남을 돕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하지 않습니다.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감동을 받습니다.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준다는 말은 순교를 불사한다는 뜻입니다. 신앙을 고수하기 위해서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능력도 은사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모든 소유를 나눠주고 살신성인의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13:3) 위에서 언급한 은사들은 모두 귀한 것들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가장 가치가 높다고 생각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은사들도 그것 자체로는 궁극적인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우선 여기서 오해는 없어야 합니다. 바울이 이것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은사들을 부정하는 은사 냉소주의는 교회 안에서 아예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은사들은 분명히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입니다. 알기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교회 봉사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귀한 은사입니다. 청소,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 등등, 모든 섬기는 일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 은사들이 우리에게 더 풍요로워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런 귀한 은사들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상대화할 뿐입니다. 은사들은 사랑과 연결되어야만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것들은 소리만 요란한 꽹과리가 됩니다. 무슨 말인가요? 그는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은사들은 사랑이 없이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방언, 천사의 말, 예언, 비밀, 지식, 믿음, 구제, 순교 등이 모두 그렇습니다. 사랑 없이 목사로 살 수 있고, 신자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 없이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고, 구제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우리의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경험합니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아내 생일에 꽃다발을 사올 수 있습니다. 자기만족으로 그게 가능합니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라도 그런 일에 더 매달릴 수 있습니다. 제가 아주 젊었을 때 빼고는 아내의 생일에 꽃다발 선물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변명하려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자기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자기만족에 빠지기 위해서 얼마든지 그럴듯한 모습을 취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것들은 상대적인 가치가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모든 은사가 결국 어느 시점에 이르면 끝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고전 13:8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예언은, 즉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되어야만 합니다. 예언이 성취되면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아무리 고상한 예언이라고 하더라도 결국은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방언은 신비로운 방식으로 하나님과 소통하는 은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온전히 계시될 때 이런 신비로운 방식은 무의미합니다. 지식도 그렇습니다. 지식(그노시스)은 하나님에 대한 감추어진 것을 아는 힘입니다. 철학, 물리학, 고고학, 경제학 등, 모든 지식은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실 때 더 이상의 역할이 없습니다.

은사가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바울은 몇 가지 다른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부분적’이며, ‘어린 아이’와 같으며, ‘희미한’ 것입니다. 특히 어린아이 같다는 표현이  재미있기도 하고 실감이 가기도 합니다. 고전 13:11절을 그대로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교회 신자들을 어린 아이와 같다고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방언을 비롯한 은사를 과대평가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은사를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거기에 자신들의 신앙을 완전히 걸었습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동네에서 친구들과 노는 것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행태와 비슷합니다.

그 결과는 분쟁과 파당입니다. 지난 주일의 설교에서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고린도교회는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았는가 하는 문제로 갈렸고, 누구의 은사가 더 큰가 하는 문제로 싸웠습니다. 심지어 성찬식 문제로 서로 마음이 찢겼습니다.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인격적인 결함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은사 자체의 한계입니다. 그것으로는 일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얼마나 진지하고 과도하게 은사중심으로 작동되는지를 아는 분들은 다 아실 겁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사람이 해야 할 일만 강조됩니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주일은 하루 종일 교회에서 보내기가 일쑤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은사중심주의입니다. 모두 좋은 것들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인 것들입니다. 일시적인 것들이고, 희미한 것들이고, 그래서 어린 아이의 것들입니다. 그런 일들은 모두 끝장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노력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말씀입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 온전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 앞에서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은사는 사라지게 됩니다.  


사랑은 누구인가?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기에 모든 가치 있는 은사를 상대화한다는 말인가요? 바울은 사랑만이 절대적이며, 온전하다고 말합니다. 그 사랑의 속성에 대해서 고전 13:4-7절까지 묘사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으면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총 15개 항목입니다. 사랑을 묘사하는 헬라어는 형용사가 아니라 모두 동사라고 합니다. 사랑은 단순히 머리에서 맴도는 사유나 관념이 아니라 행위라는 뜻이 거기에 담겨 있겠지요.

저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고전 13장을 오해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랑을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어떤 도덕적 가치로 여기는 오해 말입니다. 4-7절이 묘사하는 사랑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겉모양이 아니라 동기에서도 완전힌 순수해야만 가능한 사랑을 누가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가능한 능력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용할 수 없듯이 사랑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스스로 우리에게 임할 뿐이지 우리가 사랑을 불러올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끊임없이 사랑에 실패한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15가지 사랑의 속성이 우리 삶에서 반복해서 훼손됩니다. 4절이 언급하는 다섯 가지 항목만 생각해보십시오. 오래 참는 게 아니라 너무나 쉽게 화를 냅니다. 온유한 게 아니라 거칩니다. 시기하지 않는 게 아니라 시기심에 불탑니다. 자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자랑하고 싶어서 견디지 못합니다. 교만하지 않는 게 아니라 교만덩어리입니다. 우리는 사랑과는 정반대로 사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사랑에서 늘 실패합니다.

성인들은 좀 다르지 않느냐고 볼 수도 있겠지요. 성인들은 이타적으로 살았으니까 그런 말을 들을 만도 합니다. 또 이 세상에서 그래도 사랑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어머니일 겁니다.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거의 절대적입니다. 성인들과 어머니들이 보여주는 사랑이 아무리 지고하다고 하더라도 사랑 자체는 아닙니다. 모든 소유로 남을 구제하고, 순교의 길을 간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한 바울의 말은 빈 말이 아닙니다. 성인들과 어머니에게서 볼 수 있는 귀한 마음과 행위들은 은사입니다. 그런 은사로는 사랑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각종 은사는 부분적인 것들입니다. 사랑은 온전한 것입니다. 부분적인 것으로는 온전한 것을 담아낼 수 없습니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사랑이 완전히 실천되지 않은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껏 해봐야 아름다운 퍼즐 한 조각에 불과한 사람이 어찌 퍼즐 전체 그림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욕심을 부릴 때마다 절망감만 느낄 뿐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사랑의 능력이 없다면 아예 사랑의 실천을 포기해야 할까요? 은사로 인해서 교회가 시끄러워진다면 은사 자체를 포기해야만 할까요? 이게 어려운 질문입니다. 딱 떨어지는 대답을 찾기도 힘듭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오죽 심각했으면 바울이 은사 문제를 세 장에 걸쳐서 길게 설명했겠습니까?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서 방향을 찾을 수 있을 뿐입니다. 구체적인 방법은 여러분 각자가 스스로 삶의 능력과 영적 수준에 따라서 찾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제가 여러분에게 드릴 수 있는 신앙적인 방향은 우리의 일상과 신앙생활에서 부분적인 것과 온전한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분적인 것과 온전한 것이 무엇인지는 이미 앞에서 충분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분적인 것과 온전한 것은 서로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부분적인 것은 겉으로 드러나지만, 온전한 것은 속으로 숨어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는 부분적인 것입니다. 목사는 부분적으로만 알고, 부분적으로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은사입니다. 설교라는 언어와 문자에 하나님은 은폐의 방식으로 임재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설교라는 형태만 봅니다. 이렇게 형태에만 머물러 있을 때 설교에 하나님이 은폐의 방식으로 임재 하는지를 분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성숙한 기독교인이 되려고 하다면 이를 구분할 줄 아는 눈이 필요합니다.

부분적인 것과 온전한 것을 구분한다는 것은 부분적인 것을 부분적인 영역에 두고, 온전한 것을 온전한 영역에 둔다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 부분적인 것을 온전한 것에 의존시킨다는 뜻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한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우리가 감당해야 할 교회봉사는 부분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전한 것입니다. 교회봉사는 철저하게 하나님에게 의존적이어야 합니다. 이것도 혼란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봉사 자체를 하나님이라고 믿으니까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으니까요. 온전한 것에 대한 시각이 강렬하지 못하니까요.

바울은 오늘 본문의 결론인 고전 13:13절에서 온전한 것을 고린도교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세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들입니다. 그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2절이 말하는 산을 옮길 만한 능력과는 다른 온전한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입니다. 그런 신뢰에 근거해서만 하나님에게만 소망을 둘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완전히 계시하시는 그 때에도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이며 존재이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능력입니다. 그것은 영원합니다.

부분적인 것으로 인해서 우리의 영혼이 손상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다른 이들의 영혼에 손상을 주어서도 안 됩니다. 그것처럼 무례한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온전한 것에 마음을 기울이면 우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의 능력에 휩싸인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그때만 우리는 순전한 마음으로 참고,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종말과 현재에 우리 삶의 참된 능력이십니다.(주현절 후 넷째 주일, 1월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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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김용남형제

February 03, 2010
*.149.114.170

설교를 들으며 떠오른 부분,

목사님의 글 <기독교의 두 얼굴, 사랑과 미움(이수영 목사 설교비평)> 중 마지막 대목입니다.


"사랑과 미움은 원래 역사적 기독교의 존재 양식(樣式)이자 양식(糧食)이었다. 예수님이 사랑을 선포하셨지만 기독교가 언제 한번이라도 사랑에만 오롯이 순종한 적이 있던가? 오히려 기독교의 힘이 강해질수록 사랑의 능력은 축소되고 미움의 힘은 강력해졌다고 보아야하지 않겠는가. …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선택은 무엇인가? 두 가지 가능성이 우리 앞에 놓여 있을 것이다. 비록 느리고 불확실한 길이라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개혁하는 종교개혁의 전통에 따라서 ‘사랑의 능력’ 자체이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제시하고 있는 역동적 생명의 세계를 치열하게 열어감으로써 이 세상이 교회를 진정한 구원 공동체로 받아들이게 하든지, 아니면 교회의 물적인 토대가 허물어질 때까지, 그래야 바른 정신을 차리는 법이니까, 하나님의 시간(카이로스)을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랑도 사람이 실존적으로 직접 할 수 없고, 예수를 통하여만 간접적으로 할 수 있는 세계,

그렇다면 남북으로 분단된 이 나라가 서로 사랑하게 되는 길도 예수를 통하여서만 가능할 터인데,

이 시대에 한국교회의 임무는 이명박 정권도, 김정일 정권도 아닌 '예수 정권'을 외치는 것이 아닐까요.

신의 왕권(kingdom of God)에 죽기까지 순복했기에, 결국 그 나라의 실세적인 왕이 된 예수,

그 예수의 정권이 구체적으로 이 땅에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가, 요즘 한창 고민입니다.

대학을 잘 가든, 성공을 하든, 친(親)예수분자로서 깨어있지 않다면 예수 안에서의 제 존재 의미는 소멸될테니까요.

즉문즉답시간에 드렸던 예배에 대한 질문도, 그런 정권 운동으로서의 예배가 절실하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에서, 모든 성서 텍스트가 결국은 예수를 의지하고 예수를 바라보라는 한 가지 메시지로 집약되는,

그러한 하늘의 세계의 카이로스적 빛줄기를 봅니다. 그것이 곧 '온전한 것'일테지요.

그 "역동적 생명의 세계를 치열하게 열어"가는 것, 목사님을 만나뵌 다음 세대로서의 제 과업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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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February 03, 2010
*.120.170.243

용남이,

글투가 바르트의 그것을 닮아 있군.

하나님의 왕권, 하나님의 주체성, 예수정권...음.

예수를 통한 구원과 생명이

어떻게 보편적 지평을 확보할 수 있는지

앞으로 천천히 그러나 '치열하게' 열어가보자.

좋은 꿈을 꾸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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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희락당

February 04, 2010
*.12.62.25

저도 지난 주에 같은 본문으로 설교를 했는데, 목사님 설교를 읽으면서 제 설교와 목사님 설교의 큰 차이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 물론 제 설교에 대한 반성입니다. 제 설교의 제목은 "사랑 없이 은사 없다!"였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목사님께서 설교에서 잘 지적하고 계시듯이,  제 설교는 결국 사랑을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은사로 결론 맺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 없이 은사 없다"라는 것을 주장하면서, 사랑에 대한 의존성, 즉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성을 강조했어야 했는데, 사랑을 또 하나의 은사로 묘사하고 만 것 같아 '아차'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서 변명(?)하자면, 한국교회(이민교회)의 현실이 사랑을 은사로 묘사하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목사님께서 설교에서 지적하셨던 대로 "부분적인 것"에만 매달리는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온전한 것"을 이야기하면, 이해하지 못할 뿐더러 체제를 허무는 불순한 무리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은사를 강조하지 않으면 한국교회가 만들어 놓은 신앙체계가 잘 돌아가지 않고,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사람이 해야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이 부분이 너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제가, 우리 교인들에게 정말로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은사 때문에 교회가 시끄러운 건 고린도 교회나 한국교회(이민교회)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은사"가 곧 신앙의 잣대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교회생활(신앙생활)을 하면서 바쁘지 않으면, 즉 많은 일을 하지 않으면 이미 그 사람은 '믿음 없는 자'로 낙인 찍히고 맙니다. 이건 예수님에게 의존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뜻이죠. 결국 교회생활(신앙생활) 속에서 '예수님'은 없고, '나'만 존재하게 되는 상황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사중심적인 교회생활(신앙생활)이겠지요. 제 설교는 바로 이런 한국교회(이민교회)의 상황과 타협한 설교인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반면 목사님 설교는 한국교회(이민교회)의 이런 상황에 대한 저항인 것 같아, 부럽습니다.

저는 날마다 '타협'과 '저항' 사이에서 고민합니다. 정말...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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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February 04, 2010
*.120.170.243

희락당 목사님,

대글을 읽고

목사님의 고민이 저에게도

절실하게 다가오는 걸 느꼈습니다.

그런 고민을 하신다는 것은

타협의 차원은 벗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영적으로 아직 미숙한 분들에게는

우유나 죽을 주는 게 좋을 때가 있습니다.

간혹 이유식을 주면서

딱딱한 음식을 먹을 준비를 시켜야겠지요.

이민교회는 상황이 더 열악할 듯합니다.

힘 드시겠으나 용기를 냅시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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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February 04, 2010
*.104.195.168

목사님, 저의 소견이지만

고린도전서 13장의 이 설교는 名品인 것 같습니다.

감사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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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February 05, 2010
*.120.170.243

와, 명품설교라,

부끄럽소이다.

부분적인 설교가

온전한 영성의 자극제가 되었으면

오죽이나 좋겠나요.

감사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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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아름드리

February 04, 2010
*.144.103.87

목사님, 안녕하신지요.

평소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많은 걸 배우고 생각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늘 목사님의 글을 읽기만 하다가 오늘은 한번 용기를 내어 보았습니다.

 

설교 서두에서 목사님은,

"바울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뜻으로 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실천은 아예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고 하셨는데,

저는 이 부분이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목사님의 의도는 사랑이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도달할 수 없는 차원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줄로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의 실천이 아예 가능하지도 않다고 하시는 것은 지나치게 단정적으로 들립니다.

 

더구나 목사님은 설교 말미에서,

"우리가 온전한 것에 마음을 기울이면 우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의 능력에 휩싸인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그때만 우리는 순전한 마음으로 참고,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을 겁니다. "라고 하셨는데,

저로서는 사랑의 능력에 휩싸인다는 것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사랑의 능력에 휩싸이게 되어 결국 사랑을 실천하게 되는 결과에 이른다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이 아닐런지요?

그렇다면, 사랑의 실천이 아예 가능하지도 않다는 표현은 좀 지나친 감이 듭니다.

 

은사로 인해 분열해 있던 고린도교회 상황에서 바울 사도가 사랑을 말한 것도

그런 사랑에 기초하여 은사를 발휘해야 한다는 의미가 12-14장의 문맥과도 어울리지 않을까요?

 

바쁘지 않으실 때,

간단히 답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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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February 05, 2010
*.120.170.243

아름드리 님,

닉이 좋군요.

좋은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저로서는 사랑의 능력에 휩싸인다는 것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저는 큰 차이가 있다고 본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일종의 율법이라고 한다면

사랑의 능력에 휩싸이는 것은 복음이지요.

음악을 도구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고,

음악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이요.

이런 차이가 겉으로 확 드러나는 것은 아니랍니다.

사실 하나님도 확 드러나는 분이 아니지요.

그 숨어 있는 영적 현실을

우리가 어떻게 느끼고 보고 들을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에게 맡겨진 숙제가 아닐는지요.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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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방랑자

February 04, 2010
*.109.153.12

예전같지 않은 신앙적 여유속에서 그나마 길지 않은 출퇴근시간 지하철에서 묵상하는

목사님의 책을 통해 짧은 사유의 시간을 가지며 많은 위안을 얻습니다

아마도 그전 같으면 이렇게 신앙생활하다가 무슨 큰일한번 나지않을까 감당못할 큰시험이라도

닥치면 어쩌나 내심 불안해 했을텐데 이젠 적어도 그정도 짐은 내려놓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전 만큼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영성에 대해 더 깊이 사유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고

죄송스런 마음입니다. 사실 지하철에서 책을 본지는 얼마 안되었습니다. 그전엔 지하철 타기전에

항상 잠깐 고민합니다 그동안 목사님으로부터 새롭게 알게된 진리에 대해 또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또

영성에 대해 곰곰히 사유해보는 시간을 가질지, 아니면 그냥 책을 볼지 그 두가지를 놓고 생각하다

결국은 사유하는 쪽을 택하곤 했습니다. 그 이유는 목사님의 글을 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무식하지만

제가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한가지 중심을 잡은게 있다면 올바른 영성은 항상 우리의 삶가운데서 하나님의

계시를, 그 놀라운 창조의 신비를, 은폐로 비밀로 존재하시는 그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늘 잘되는건 아니지만 정말 어떤순간엔 주변의 사소한 것들이 놀라움으로 다가올때가

있어요 그럴땐 더 생각하고 싶어서 지하철에서 내리기 싫을때도 있습니다(회사일때문에 자주는 아니지만...)

근데 요즘은 다비아를 통 못들려서 밑천이 다 떨어지고 진리가 무엇이었는지 햇갈릴데가 많아요 그래서

일단 다시 목사님 책을 통해 방향을 잡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시간나는대로 열공하고 있습니다.

서론이 너무 길었네요 간만에 싱싱한(?)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보며 역시나 가려져 있던 진리를 깨닫습니다.

결국 사랑의 본질은 하나님입니다 우린 너무나 부분적인 것에 매달리다 그것이 본질처럼 되어버리곤 합니다

주일성수, 새벽기도, 봉사, 헌신, 충성 그것이 신앙의 잣대가 되었고 자랑거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전엔

저또한 그것때문에 열등감, 죄책감에 빠지기도 하고 어쩌다 헌금좀 더 내는 것에 우쭐하기도 했는데 이젠

그 모든것이 헛된 것임을 알았고 완전히 버려버릴려고 합니다. 할수만 있다면 신앙 공동체를 돌아보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순간순간 오직 온전하신 하나님께만, 그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알수 있도록 유일하게

계시하여 주신 예수님께만 집중하기를 원합니다. 성령님 도와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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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February 05, 2010
*.120.170.243

방랑자 님은

제가 대구성서아카데미의 인문학적 성서읽기 운동을 벌인 목표의

전형적인 표적을 보여주시는 분입니다.

헷갈릴 때가 있지요?

괜찮습니다.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방향만 놓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다시 일어서서 바른 구도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성령의 깨우침은

불현듯 우리를 찾아온답니다.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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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godfather

February 07, 2010
*.249.117.190

와아.. 설교 정말 잘 들었습니다.

왠지 음성으로 들으면 실망(?)할 것 같아서 그냥 읽는걸루 만족하겠어요. 하하.

 

김용남 형제분은 고등학생이시라고 들은거 같은데, 정말 대단하신 형제님 같군요.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됩니다. 첨엔 목사님을 뵙고 싶었는데, 지금은 김용남 형제가 더 보고 싶네요.

대구 샘터인지, 서울 샘터인지 모르겠지만 한 번 보고 싶군요.

 

목사님의 설교는 역사비평과 조직신학, 인문학이 설교 작업에 있어서 반드시 포함되어야만 한다는,

정언명령과도 같은 설교 원칙의 정형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목사님들이 이 설교를 읽고 좀 자극을 받았으면 좋겠는데,

 어찌나 고집들이 세신지. 에휴. 매우 피곤하네요.

 

그런데 목사님. 슐라이어마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개인적으로 슐라이어마허 목사님의 신학 방법이 판넨베르크와 접촉점이 있다고 생각이 들어요.

 

많은 사람들은 그를 그저 이단 정죄함으로써 그의 사상을 터부시 해버리지만,

제가 보기에는 슐라이어마허 목사님이 기독교 신학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진멸코자 한 시도들은

우리가 천착하고 있는 바, 다시 말해 진정한 생명과 참 종교의 본질에 대한 의미를 찾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요.

이런 의미에서라면 보편적인 세상사와 부활 사건으로부터  선취된 부활 체험을 지상에서 실현코자 했던

판넨베르크랑도 엮을 수 있을것 같네요.

 

이렇게 영의 세계가 심오하고 어렵다면,

우리는 무당 업무를 보시는 형제 자매 님들을 존경해야겠네요.

정말로 요즘들어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답니다.

 

참. 끝으로 질문이 있는데요. 정말 수준 낮은 질문 드려서 죄송해요.

판넨베르크가 말한 지상에서의 부활 선취라 함은, 혹여나 양자론?

판넨베르크와 정 목사님의 기독론을 조금 알려주세요. 이해 못했어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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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5]사띠아

February 08, 2010
*.173.244.4

godfather님

님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은 아래에서 보시면 확실해 지십니다. 


신학마당-온라인강의실-사도신경해설-19강에서 23강까지입니다.


첨부화일도 올려드리겠으니 찬찬히 공부해 보시면

커다란 유익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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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godfather

February 08, 2010
*.68.202.33

와. 사땨(?)님 중요한 정보에 감사드립니다.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해설이란 책이 혹시 저것인가요?

너무 어려워서 읽다가 집어던졌었는데, 

남은 방학 동안 책 대신 강의록을 열심히 보면 해결되겠군요.

보물을 찾은 기분이에요. 야호.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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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February 08, 2010
*.120.170.243

갓파더 님,

슐라이에르마허를 어떻게 생각하느나구요?

훌륭한 신학자이자, 철학자이자, 종교학자로 생각한답니다.

그를 보통 현대신학의 아버지라고 하는데요.

그 이유는 그가 기독교 신앙을 현대적 학문의 틀로 설명하려고 한

첫 번째(?) 인물이기 때문이지요.

'절대의존감정'을 신학과 신앙의 본질이라고 했는데,

옳은 이야기죠.

그런데 너무 주관적인 신앙의 차원으로 떨어졌어요.

판넨베르크의 역사 신학은 이런 점에서

슐라이에르마허, 불트만으로 이어지는 실존신학의 극복이라고 할 수 있어요.

어쨌든지 저는 슐라이에마허,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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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godfather

February 09, 2010
*.159.166.46

음. 판넨베르크를 공부해야만 하는 이유가 생기는군요.

그런데, 판넨베르크 박사님이 90세가 넘으신걸루 아는데, 현존하고 계신가요?

(살아계신다면, 정말 그분께 죄송...ㅠ.,ㅠ)

 

역시나 현대신학자들의 무리수를 극복할 대안은 판넨베르크로군요.

판넨베르크는 국내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확보하여 연구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판넨베르크는 바르트가 해결 못하고 죽은 내재적 삼위일체-경륜적 삼위일체 간의 모순을

어떻게 풀었는지 궁금하네요. 만인화해론의 냄새도 그렇구요. 바르트는 그리스도가 모조리 다 삼켜버렸는데.

 

바르트는 자연신학자들을 의식해서인지 기독론을 챙기려다가

성령이 십자가에 삼켜져서 증발해 버린 듯해요.

창세전부터 심판 때까지 그리스도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는 구원 사역도 그렇고,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이런 저런 신학적 공격을 염두에 두다 보니

결국 두서 없는 결론이 되버린건지, 잘 모르겠어요.

 

판넨베르크가 바르트의 모호한 부분을 적절하게 건드려 준 바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참, 목사님이 슐라이어마허를 좋아하실줄 알았습니다. 그래야만 되지요. ㅎㅎ

좋은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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