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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정체에 대한 질문

부활절 조회 수 14710 추천 수 3 2010.04.25 21:2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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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한복음 10:22-30 

 

예수의 정체에 대한 질문

(요 10:22-30)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세상의 주, 앞으로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심판자로 믿습니다. 이런 용어들 중에서 예수님의 정체에 가장 가까운 것이 무엇일까요? 더 가깝고 먼 것은 따로 없습니다. 모두 예수님의 정체를 가리키는 중요한 용어들입니다. 이 용어의 중심은 예수님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과 동일한 권능을 가지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창조의 권능으로 사람과 세상 전체에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는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이 구원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세상의 주라는 말도 똑같이 생명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심판자는 생명과 생명 아닌 것을 구분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이런 용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생명의 주인, 즉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한 종교의 창시자로, 또는 성자로만 인정합니다. 그들은 왜 그럴까요? 그들에게 우리와 같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분들도 있겠지요. 우리의 입장에서 가장 편한 대답이지만 그렇게 대답하는 것으로 여기에 연관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믿는다고 생각하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명목으로만 그리스도인이지 실제로는 아닐 가능성도 큽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들은풍월로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인지 모릅니다. 믿는 척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경건생활도 가능합니다. 어떤 동기만 주어진다면 자기 몸을 불사를 정도의 열정으로 교회생활을 할 수도 있습니다. 사이비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가정과 직장을 내팽개치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질문해보십시오. 나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해서, 즉 그의 정체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가? 예수와 나는 어떤 관계인가? 이런 관심이 내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가?

 

 

예수는 그리스도인가?

     요 10:24절에 따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 계실 때 유대인들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과연 그리스도, 즉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메시아인지 아닌지에 대한 궁금증이 컸습니다. 유대인들은 특별한 민족입니다. 메시아를, 즉 구원자를 대망했습니다. 그 말은 곧 그들이 세상의 질서에 만족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가 얼마나 혹독했는지를 보면 그들의 메시아 대망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주변의 강대한 제국에 의해서 꾸준히 수탈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의 힘으로 제국의 악한 질서를 해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메시아를 고대했습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메시아가 오리라는 기다림과 믿음으로 살고 있던 그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들렸습니다. 그가 메시아일지 모른다는 소문입니다. 제자들도 그런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왔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었습니다. 메시아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랍비나 바리새인들과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에게서 놀라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것들은 메시아의 특징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세계의 주인이 된다는 메시지를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승리보다는 오히려 실패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메시아의 특징이 아닙니다. 더 결정적인 것은 예수님이 자기를 가리켜 직접 메시아라고 말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따져 물었습니다. 우리를 피곤하게 하지 말고 속 시원하게 당신 정체를 밝히라고 말입니다.

     이 질문 앞에서 예수님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여러 가지로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메시아인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고 자꾸 질문하는 걸 안타깝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는 유대 민중들이 불쌍하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자기 인식에 달려 있습니다.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면 아무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게 확실하지 않으면 끊어서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유대인들의 질문은 바로 예수님 당신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인가, 아닌가?’ 이 대목에서 혼란스럽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지요.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더 나아가 태초부터 그리스도였기 때문에 자신의 메시아 성에 대한 질문이 없었다고 생각할 테니 말입니다. 그런 생각은 예수님에 대한 오해에서 나온 겁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가능하면 그 운명을 면하게 해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했고, 십자가 위에서는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외쳤습니다. 자신의 정체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면 이렇게 행동하지 않으셨겠지요. 예수님은 그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가 완전히 실패한 자라는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그리스도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자신이 그리스도인가 아닌가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관심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25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입으로 그리스도라고 떠벌리지 않습니다. 그의 일이 바로 그것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일은 바로 ‘내 아버지’, 즉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일을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는 똑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은 바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행하신 일들을 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일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마 11:2절 이하(눅 7:18절 이하)에는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인가를 확인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이에 대한 가타부타 말씀은 없고 대신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고 말했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5) 이런 구절을 호기심 천국 수준으로 읽지 마십시오. 기도하고 안수를 받았더니 병이 깨끗하게 치료되었다는 사실 자체에 떨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위에서 인용한 구절에서 거론된 이들은 당시에 가장 비참한 운명에 빠졌던 사람들입니다. 인간다운 삶을 완전히 부정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구원 사건들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그 구원 사건들이 바로 하나님의 통치이며,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결국 치병과 축귀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한 명백한 증거라는 말이 아니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지금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치병과 축귀 같은 일에 앞장서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비참한 운명이 새로워지는 현상과 하나님 나라 사이에는 긴밀한 연관성이 있지만 결정적인 차이도 있습니다. 그건 아주 명확합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의 비참한 운명이 아무리 새로워진다고 해도 그것을 완전히 벗을 수는 없습니다. 병이 치료되어도 다시 병이 듭니다. 늙으면서 우리는 모두 장애인들이 되고 맙니다. 그런 장애의 속도를 늦추는 것 자체를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생명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일어난 치병과 축귀 등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는 사실에 대한 징표들입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그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달입니다. 예수님입니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 권능에 휩싸여 살았던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내 양’

     그런데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들을 똑같이 경험하면서도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어떤 사람은 모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까요?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도 이렇게 나뉘고, 지금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메시아 비밀’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확연한 게 아니라 비밀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신 일도 사실은 비밀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본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은 게 아닙니다.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 일들은 당시에 나름으로 카리스마를 행사하고 있던 영웅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던 현상들이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많은 예언자들이 자칭 그리스도로 행세했습니다. 군중을 끌고 광야로 나가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런 이들 중의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이가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고, 오늘 본문 30절이 가리키듯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셨으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만 둘 수가 없었습니다. 신성모독의 죄를 범한 자는 죽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메시아 비밀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시험에 들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메시아 비밀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고 믿게 되었을까요?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우리가 더 지적이거나 인격적이거나 경건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그것을 독특한 메타포로 설명합니다. ‘내 양’이 그 대답입니다. 믿지 않는 이유는 ‘내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는 이유는 ‘내 양’이기 때문입니다. 27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목자와 양의 관계는 오늘 설교 본문 앞 구절인 요 10:1-21절까지 자세하게 나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양은 목자가 자기를 지킨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압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5)

     여기에 약간의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내 양’이 아닌 양은 아무리 노력해도 예수님을 알 수 없으니, 그 책임은 그들에게 있는 게 아니라고 말입니다. 이는 마치 칼뱅이 말한 이중 예정론과 비슷합니다. 이미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당할 사람이 이중적으로 예정되었다면 사람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거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성경을 읽으면 오해하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내 양’이라는 메타포는 멸망당할 양과 구원받을 양을 이중적으로 구분하려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믿음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를 수도 있었는데 알게 된 이 사실을 그 이외의 그 어떤 것으로도 해명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드리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총 말고는 해명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럴만한 능력이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힘이 우리를 끌고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합니다. 이 은총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내 양’이라는 메타포는 한 걸음 더나가서 다음의 사실을 가리킵니다. 모든 양은 ‘내 양’입니다. 처음부터 그것이 결정되어 있는 게 아닙니다. 위에서 인용한 27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 양’의 특징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바로 ‘내 양’입니다. 여기서 제외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아듣고,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은총에서 제외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은총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서 제외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세리와 죄인들도 여기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 사람은 바로 본문이 말하는 ‘내 양’입니다. 오늘 본문 요 10:28절이 가리키듯이 예수님이 영생을 주겠다고 약속한 ‘내 양’입니다.

     당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히라는 유대인의 질문이 바로 영생과 연관됩니다. 즉 당신이 사람에게 영생을 줄 수 있는 존재냐 하는 질문입니다. 요한복음 공동체를 비롯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바로 그 사실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영생이 있기에 그리스도가 분명하다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영생의 출처라는 말은 그가 생명의 창조자인 하나님과 하나라는 뜻입니다.(30절)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라는 사실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서 증명됩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서로 순환되면서, 동시에 긴장관계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안에서 행하셨기에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과 하나이기에 온전히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런 권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 두 가지 사실이 예수님의 정체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이 두 사실이 예수님의 인격에서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지금 우리는 부활절 넷째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2천 년 전 나사렛 목수의 아들이었던 예수님에게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우주의 역사에서 유일회적인 사건이기에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예수님에게 일어난 부활을 대체할 수도 없고,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창조 사건이었습니다. 창조가 완성될 종말에 그 부활의 실체가 완전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주’, 생명의 주, 영생의 주이십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힘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부활절 넷째주일, 4월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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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godfather

April 25, 2010
*.68.209.23

목사님의 설교처럼 예수님이 부활의 주시요, 영생의 주시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인해,

이 세상의 어떤 힘도 우리를 예수와 갈라놓을 수 없다면 좋으련만....

우리 개개인이 맞이하는 실존은 예외없이 너무나 씁쓸하기만 합니다.

 

과연 나와 예수가 무슨 상관이 있을런지 새삼 궁금해지는군요.

예수는 그냥 예수일 뿐인데 말이죠. 우리는 왜 그리도 십자가의 주를

내 곁으로 끌어내리려고 하는지. 뭔가 많이 뒤얽힌 것 같아요.

 

어쩌면 나는 예전부터 그냥 한 마리의 앵무새였을 뿐이였고,

지금도 여전히 앵무새이며, 앞으로도 여전히 앵무새로 살다가

제도권 목회지에서 제도권 목사로 축도나 열심히 하다가 죽겠지요.

이왕이면 영생 천국 극락 왕생하고 싶은데...하하.

 

신학 없는 이 세대에서 찍혔다간 대안 없이 낙관만 가지고 있는

코흘리개 좌파로 취급당할 것이 뻔한 것 같구요,

저는 졸업 후 그냥 제도권 안에서 '붉은 사상'을 은닉하며

살아야 될 듯 싶습니다.

 

제도권과 자아라는, 나의  이중적 실존이 in christ하기만 한다면

과연 해결될까요.

부활 생명과 나의 운명이 만나는 사건이 과연 우리의 지향 이외에 다른 의미가 될 수 있을런지.

그냥 기분 좋은 이상향이라고 해두는 게 솔직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제가 실존에만 너무 몰두해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예수가 나랑 뭔 상관인지.

내가 교회 다니는게 예수랑 뭔 상관인지.

그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런지.

설교를 훑어만 봤는데도 의문은 쏟아지는군요.

 

이상 사상 불온한 신학도였습니다.

건강하십시오 목사님.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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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9]정용섭

April 26, 2010
*.120.170.243

대부 님,

오늘은 점심 시간부터 봄비 치고는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군요.

솔직해서 좋습니다.

나의 실존과 2천년 전 예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거지요?

그런 질문을 유지해야만 앞으로

성서를 붙들고 씨름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없으면 그야말로 약장사가 되는 거지요.

나에게 대답을 바라는 것도 아니지요?

그 대답의 과정이 바로 신학공부이니,

지금 공부 중에 있다면 천천히 그 윤관이 보일 날이 오겠지요.

조금만 훈수를 둘께요.

모차르트 음악이 지금 나의 실존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뉩니다.

1) 모차르트 음악의 세계로 들어간 사람

이 사람에게 모차르트의 음악은 생명 차제입니다.

2) 모차르트와 아무 상관 없이 사는 사람

지금 당장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지만

여러 관계망을 통해서 영향을 받습니다.

예수 사건은 모든 인류의 실존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거에요.

그걸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고 해서 부정할 수는 없는 거지요.

마르크스나 모택동가 끼친 영향도 마찬가지이니

예수가 뭐 특별한 존재가 아닐 수 있다구요?

여기서는 믿음이 필요하겠군요.

예수에게서 다른 이들에게서 없었던

아주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믿어야겠지요.

거기서만 기독교 신앙이 성립되는 거랍니다.

대부 님,

지금 문제 의식이 좋으니

계속 진도를 나가보세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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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godfather

April 30, 2010
*.68.209.26

목사님, 저한테 포인트 당첨 됐다는 쪽지가 날라왔는데요 이게 뭔가요?

아무튼 당첨됐다니까 좋네요. 도토리라도 주는건가요?? ㅎㅎ

목사님의 설명을 듣고 생각을 좀 해봤습니다. 그랬더니 제가 너무 스트레이트로 막 나갔던 것 같아요.

제가 범했던 오류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내가 경험하지 못한 일은 일어날 수 없는일이다." 정도가 아닐까 싶네요.

다시 생각해 보니 비약이 심했던 것 같습니다. 역시나 사람은 이해가 안 될 때 화부터 나는 법인가봐요. ㅎㅎ

목사님께서 음악 이야기를 자주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하고 멍~해질 때가 많았는데,

오늘은 어찌 된 일인지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저 역시도 좋아하는 모짜르트를 말씀하셔서일 수도 있겠네요.

내가 음악 속에 흠뻑 젖어들어가든 그리 않든간에, 음악은 여전히 존재하겠지요.

물론, 음악의 깊은 세계 속으로 심취해 들어가 있는 무아적 경지의 사람과, 피상적으로 듣고마는 사람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경험의 차이를 빠뜨리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때때로 저 자신도 음악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무언가에 휩싸이는 듯한 생명의 감격에 흠뻑 젖을 때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현상이 도대체 무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학을 실증과학으로 만들자는 것은 아니지만, 복잡다단한 현상계의 일들을 내 주관이 좋아하는 방향으로만 규정하고 싶지는 않아요. 내 존재는 끊임없이 확인을 요구하고 끊임없이 진리성에 대해서 묻고 회의하는데도 불구하고, 의식을 애처롭게 다독여가면서까지 내 자신을 안심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생각하는 행위 속에서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인간 스스로의 뇌를 강간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제 속에서 벌어져 왔던 알 수 없는 현상들에 대해서 가만히 받아들이기만 하기 보다는(예전과 달라진 점이겠죠), 때론 번뜩이는 메스를 들고  제 자신을 근본부터 헤집어 가면서, 데카르트 흉내를 좀 내보고 있어요. 그렇게 하다보니 좀 대책없이 게쉬히테에서의 그리스도만 말해버린 오류를 범한 것 같네요.

음, 그렇다면 예수에게서 일어났던 아주 특별한 일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어라 규명해야 될까요.

물론, 규명이라는 말이 좀 어불성설이긴 합니다만, 최소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신앙에도 진전이 있겠죠.

여기서 안셀름 옹의 추종자는 잠시 아웃해 주시기 바래요. ㅎㅎ

 

판넨베르크를 진지하게 탐독할 때가 된 것일까요?

이번 것은 확실히, 목사님께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요청하는 거랍니다. 플리즈 헬쁘 미 써~~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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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9]정용섭

May 01, 2010
*.120.170.243

대부 님을

사유의 미로에서 벗어나게 해 줄 구명줄은 나에게 없어요.

지금 나의 길을 가기에도 숨이 찬 마당에

어찌 옆 사람에게 눈을 돌릴 수 있겠어요.

다만 대부 님의 짧은 글에 대한 내 느낌만 전합니다.

사유의 점들이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것보다 신학적 사유에서 그렇습니다.

신학은 우주 전체의 현상에서

특정한 부위만 잘라내 자기 안위로 삼는 작업이 아니에요.

만약 그런 거였다면

2천년 동안의 역사 검증에서 견뎌내지 못했겠지요.

모든 사태를 있는 그대로 직관한답니다.

아무 것도 피하지 않아요.

그것을 성서와 2천년을 지낸 신학에 근거해서

해석하고 있지요.

문제는 예수 사건이 보편사적 근거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건데요.

그걸 중심으로 신학은 세상 학문과 경쟁하고 있어요.

철학, 물리학, 생물학 등등과요.

이 경쟁은 결코 적대감에서 나오는 건 아니에요.

진리론적 경쟁이지요.

신학의 진리론적 토대를 찾아가는 게

신학자의 몫이에요.

지난 2천년 동안,

그리고 지금도 수많은 신학자들이

그 길에 분투하고 있어요.

일단 그들의 말을 더 진지하게 경청할 필요가 있겠지요.

여기에 판넨베큰 좋은 스승이 될 겁니다. 

잘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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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godfather

May 01, 2010
*.68.200.105

이크....그렇군요.

생각하는 수준이 영 가볍다는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조만간 이런 소리 들을 줄 알았어요. ;;;  저는 상처받지 않습니다.

후......갈 길이 조금 먼 줄 알았는데, "무지" 멀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물론, 그걸 모르는 건 아닌데 너무 고독하다는 생각에 자꾸 로그인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것도 내공이 빈약하다는 증거겠죠.

정리 안 된 생각들은 머릿속에 다발처럼 많은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될지는 막막하네요.

 

하여튼 각설하고,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생기는 저의 질문은 성서와 신학이 우주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을만한 것일까, 라는 것입니다.  역사를 끌어 안고 신앙이 진리이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 것인지에 관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범주 안에만 있는다면 그다지 문제될 일은 없겠지만

그것과 동시에 세상의 삶과 함께 맞물려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신앙의 위치를 진리로 놓을 수 있는 것인지, 그 근거는 자명한 성격이 될 수 있을지,

신학이 특수학문이 아니라 보편학문으로서도 어떻게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요.

저로썬 영 감이 안 옵니다. ;;;

목사님께서 말씀해 주신대로, 저는 예수사건의 이 진리론적인 부분에서

생각이 완전히 뒤엉켜 버린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생각하는게 자꾸 과장되리만치 격해지곤 합니다. ;;;;

판넨베르크를 성실하게 읽기 위해서라도 힌트를 좀 받고 싶어요.

 

은혜로운 주일 보내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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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스타

April 27, 2010
*.206.48.228

    "과연 나와 예수가 무슨 상관이 있을런지 새삼 궁금해지는군요.

     예수는 그냥 예수일 뿐인데 말이죠. 우리는 왜 그리도 십자가의 주를

     내 곁으로 끌어내리려고 하는지. 뭔가 많이 뒤얽힌 것 같아요.

 

    어쩌면 나는 예전부터 그냥 한 마리의 앵무새였을 뿐이였고,

    지금도 여전히 앵무새이며, 앞으로도 여전히 앵무새로 살다가

    제도권 목회지에서 제도권 목사로 축도나 열심히 하다가 죽겠지요.

   이왕이면 영생 천국 극락 왕생하고 싶은데...하하.  "

 

좀, 진지해 보십시오.  아무리 말은 자유라해도 그리 함부로하면 괴변(궤변) 같은 낱말만 역어가면 쓰나요?   지금 신학을 공부중이면 혹 그럴 수도 있겠네요.아직은 예수도 모르고 그러니 신앙은(확신은) 더욱 없고 ------그러다 앵무새로 전락 될 게 두렵기도 하겠지요.  그렇다면 겸손히 엎드리십시오.  그리고 매달려 보십시오.  삼자가 보기엔 영낙없는 반항아,  나가서는 예수를 조롱하는 아이처럼 보입니다.   좀더 진지하게 다가서십시오,  아니면 차라리 일찌감치 방향을 돌리는 것이 본인을 위해서도,  아니 기독교를 위해서 유익할 겁니다.    정신 바짝 차려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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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godfather

April 29, 2010
*.68.200.32

아이구. 용남형제님 글을 보니 마음이 많이 어려우신가 봅니다.

비도 추적추적 내리고..... 안타깝기 그지 없네요.

모든 것이 합력해 가는 과정이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독교를 아끼고 사랑하시는 나머지 

일찌감치 방향을 돌리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스타님의 충고를 달게 받겠습니다.

 

아울러 저의 글이 진지하지 못했던 점과,

함부로 궤변을 엮은 점에 대해서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또한, 예수를 조롱하는 반항아처럼 행동했다면, 그것 역시 사과를 드립니다.

 

웬만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조용히 살고 싶은데,

저의 인격의 부족으로 인해 이와 같은 직설적인 말로써 남을 불쾌하게 만들게 되는군요.

부디 노여움을 푸시기 바랍니다.

 

다만, 스타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신 '진지하지 않다'는 지적과,

'아직 예수를 모르는 신학생이로군' 이라는 표현,

그리고 '신앙에 확신이 없다는'  말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보충 설명을 듣고 싶군요.

 

어떤 학자는 인간의 모든 언어는 해석의 대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저의 '경박한 글' 속에도 뭔가 함의가 담겨있었겠지요.

물론, 제가 기록한 문자의 이면에 담긴 해석까지 해 주실 의무는 없지만

진정으로 저를 위하는 그리스도인이시라고 한다면

위와 같은 전투적인 용어로 타인에게

카운셀링 하려 들지는 않을것 같네요.

 

다시말해, 스타 님의 글에는 충고를 위한 진정성 보다는

극복이라는 목적이 뚜렷이 내포된

원색적인 비난으로 들린다는 코멘트를 달아 드리고 싶습니다.

 

스타님은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신학교를 그만두라는 친절한 권면까지 해 주실 정도의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이시기 때문에,

저 같이 믿음 없는 연약한 자의 코멘트라 할지라도

넓으신 아량으로 포용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억울하시겠지만, 저는 기독교를 욕하는데에는 흥미를 못 느낍니다.

신앙고백은 이 정도로만 해두겠습니다.

평안한 새벽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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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아델포스

April 30, 2010
*.201.77.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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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godfather

May 01, 2010
*.68.209.26

아이쿠...아델포스 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할지, 아버님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관심을 보여주신 것 자체가 어르신께서 불온하지 않다는 증거로 보입니다.

저희들은 혈기가 많은 나이기 때문에 어르신의 세대에 대해서 부정적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뭔가 타겟이 있어야 파괴적인 욕정의 분출이 가능하기 때문이겠지요. 호르몬이 자꾸 본능의 길로 인도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것 같기도 하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년대에 대학생활을 하신 선배분들에게 화가 나는 일은 불합리하고 못마땅 한 일을

누구보다도 많이 겪었고, 말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 누구보다 자주 침묵할 수 밖에 없었던 철권의 시대에서 살았을 텐데, 서기 2000년대에도 그들은 여전히 생각에 있는 말들을 발화하지 않고 오히려 침묵을 좋아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어떤 때는 그때가 더 좋았노라고 말하기도 하시지요.

 

물론, 거대한 하나의 시대적 흐름 속에 함께 있다해도 사람의 관심사는 첨예하게 다르고, 현실적으로 문화의 관성은 끊어내버릴 수 없는 마력과도 같은 성질의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과거의 향수에 젖어 사는 사람,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는 사람, 그냥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겠죠. 현실 세계를 앙칼지게 비판해 봤자 그닥 달라지는 것도 없고 피곤해지기만 한다는 것이 솔직한 사실일 것입니다. 오물덩어리 같은 부메랑이 내 이마에 꽂힐 수도 있구요. 그렇지만, 지금 이 땅위에 굳건히 서 있는 자신의 토대를 쳐다볼 때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할 부분은 지금의 우리를 위하여 누군가는 심구었었다는 사실, 그리고누군가는 존재의 불안함을 무릅쓰고도 씁쓸한 진실을 한사코 꼬집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덕에 지금의 내가 이 땅에 뿌리 내리고 사는 것이겠지요.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천재와 진실은 부정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 둘에 제가 상관이 없다는 현실이 야속하기만 하구요.

어차피 천재가 못 된다면, 차라리 진실하게 사는 게 나을겁니다. 저희들이 사역 현장에 나가서 적어도 진실을 추구만이라도 할 수 있도록 토대를 닦아 주십시오. 행동해주십사고 부탁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재고만 해주시더라도 저의 고장난 가슴은 다시 뛸 것 같습니다.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다운 삶을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더 이야기 안 해도 충분히 공감해 주실 것 같습니다.

생각과 생각이 공명하는 사건 만큼 달콤한 순간이 있을까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이라도 남긴다는데, 인간으로 났다면

다음 세대를 위해서 유산을 남겨줄 수 있어야 마땅하겠지요.

 

저희 세대가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응원해주십시오.

제도와 권위에 영혼의 본질적 아디아포라를 헌납해버린 이 가엾은 현실을 이제부터나마

하나 하나씩 다듬어갈 수 있도록 가슴으로 지지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 세대의 신학도들이 끈적끈적한 이중적 실존의 늪을

너무 급하게도 아니고, 너무 천천히도 아닌 착실한 단계를 거쳐서

성실하고 빠짐없이 두루 여행하고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참, 밀란 쿤데라 책은 그냥 철학 속에 잔뜩 버무린 괜찮은 사랑 소설로 읽었습니다.

주인공 이름을 선생님 덕분에 거억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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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용남군

April 25, 2010
*.149.117.69

오늘의 설교는 완전히 케리그마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부활이 ‘사건’인가에 대해, 목사님께서 여러 글에서 줄곧 강조하시는 내용이기도 한데,

이런 입장이 부활 자체의 권능으로부터 소외되는 길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러니까 그냥 십자가면 십자가고 부활이면 부활이고 그 자체의 속성이 무엇인가가 문제이지

어떻게 ‘십자가 사건’이나 ‘부활 사건’이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인데요,

사-건(件)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의 관념으로 처리될 수 있는 ‘대상’의 지평에 속한다고 볼 때,

예수는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온 ‘대상으로서의 역사’로부터 구별되는 새로운 생명의 주(主)가 아닐까요.

실존론적 해석학(불트만), 정치적 해석학(몰트만), 역사학적 해석학(판넨베르크)….

이러한 신학적 전통을 아무리 봐도 ‘예수로부터의 새 역사’가 시원하게 계시된 적이 한 번도 없어서 말입니다.

제가 보기엔 이것이 성서 텍스트와 더불어 예수의 복음을, 해석자 자체를 삼키는 권능이라기보다는,

‘고집스럽게 있는 나’의 해석 대상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 신학이 참된 현실의 학으로서 바로 서는 길은, 예수의 복음이 어떻게 우리가 믿고 있는 현실을 규정하는지,

모든 감정을 죽이고 그 사태 앞에서 묵념의 태도를 취하는 데 있지 않을까요.

예수로부터의 생명 가운데서 기쁘나 슬프나 변함 없이 날아가고자 합니다. 평안한 부활절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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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godfather

April 25, 2010
*.68.209.23

목사님께 개인 과외를 받으시고자 글을 올리신 듯한데, 끼어 들어서 죄송하군요.

제가 보기에 형제 님의 글은 충분히 훌륭하신 것 같습니다.

 

다른 건 저보다 잘 하실테고, 이제 형제님께서 하실 일은 풍부한 삶의 체험이 아닐까 싶군요.

아무것도 아닌 제가 할 말은 아닌 듯 하나, 형제님께서 뚜렷한 답을 받고자 글을 쓰는 게 아니라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는 것이니, 오해는 없으시길 바랍니다.

 

뽈 리꾀르나, 까뮈, 에리히프롬 등이 도움이 될 듯 싶네요.

풍부한 철학적 사유를 기르시고, 삶의 까칠한 현장을 마음껏 피부로 느끼고 생각하시면서,

상식적인 의사결정을 내릴만한 경지에 오르신다면, 의미있는 삶을 사실 수 있을 겁니다.

 

이상 허접한 졸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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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April 26, 2010
*.104.195.235

상식적인 의사결정을 내릴만한 경지...

좋은 말씀입니다.

비상식적인 세상에 살고 있어서 피곤한데

뛰어나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상식적이지 못한지를 알면

역시 상식은 평범한 사람들이 공유하는 것인지...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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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9]정용섭

April 26, 2010
*.120.170.243

용남 군,

사건이라는 단어가 근원을 전하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된다는 말이군.

특히 그것이 주객 대립 구도에서 나온 거라고 보는군.

그런 생각은 말꼬투리 잡기에 불과한 거야.

별로 중요한 게 아닌 걸 붙들고 중요한 것을 판단하는 잘못이야.

사건은 역사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단어야.

용남이의 생각에는 역사가 실종된다.

용남이는 '그 사태 앞에서 묵념의 태도를....'이라고 했는데,

사태라는 말도 용남이의 생각에 따르면 쓰지 말아야지.

그냥 십자가, 부활 앞에서 묵념하고 있기만 하면 되는 거거든.

불트만, 몰트만, 판넨베르크를 공부한 것 처럼 말하는데,

그런 표현은 경솔한 거야.

'이러한 신학적 전통을 아무리 봐도....' 운운 했잖아.

용남이는 생각이 깊고

사유 능력도 상당한 것 같은데,

현실과 역사에 대한 관점이 실종되었군.

굳이 예를 들자면 영지주의적 가현설 쯤 되려나?

내 말에 발끈하지 말고

좀더 천천히 기초를 배워야해.

용남이가 생각하는 것보다

철학과 신학의 세계는 훨씬 깊다는 걸

꼭 기억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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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용남군

April 28, 2010
*.149.120.151

목사님, 제 말에 발끈하셨군요.

제가 사건이라는 낱말 하나만 붙들고 말꼬투리를 잡는다고 보신 것 같은데,

이 점이야말로 목사님의 설교와 신학의 총체적인 부실을 해명할 키가 된다고 보입니다.

가현설은 예수의 몸이 현실적이지 않았다는 비/초현실주의 아닌가요?

그런데 ‘예수로부터의 새 역사’를 이야기한 제 글을 두고 가현설 운운하신다는 건

목사님께서 제 글이든지, 교회사든지 둘 중에 어느 쪽을 피상적으로 독해하셨다는 증거 같은데요.

물론 학자라면 불트만, 몰트만, 판넨베르크 등에게서 열리는 계속된 의미지평에 마음을 열고

그 깊이 앞에서 연구의 자세를 취하고 끊임없이 구도정진해야 하겠지만

저는 그리스도인의 일차적인 정체성은 학자이기 이전에 복음전도자라고 봅니다.

철학과 신학의 깊은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목사님께서 아무런 성찰 없이 스쳐지나가시는 그런 언어들을 복음의 근본 앞에서 조명하자는 말이지요.

예를 들어 이렇습니다. 하이덱거는 “무는 존재의 너울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저는 “존재가 무의 너울이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철학자들은 예수의 죽음이 온 세상의 유무구도와 가치체계를 근본적으로 허물어뜨렸다는

그리스도교의 케리그마적 현실론을 전혀 생각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자기 경험과 관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저는 그러한 사유방식이야말로 현실과 역사의 실종이라고 보며,

그에 따라 목사님께서 자주 쓰시는 여러 다른 용어들에도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이 굴뚝입니다.

김종두 목사가 목사님의 존재사유를 두고 “여전히 주객도식 안에 머물러 있다”고 비판한 바 있지요?

목사님께서 김 목사에 관하여 “신학을 교리문답의 수준에서만 이해하고 있다”고 평가하셨다면,

저는 목사님께서 “신학을 교양의 수준에서만 이해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영성을 위한 객관적 ‘정보도구’로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철학과 신학의 세계”란,

결국 “철학-관련-교양”과 “신학-관련-교양”일 확률이 크다는 뜻입니다.

그런 교양을 열심히 쌓으면 나름대로의 깊이로 인해 한때의 권위는 얻을지 모르지만

세상의 “상식적인(?)” 생존논리를 깨부수며 역사하는 영원한 생명의 권능과는 갈수록 동떨어질 수밖에 없지요.

질의응답 시간에 드렸던 제 문제제기를 기억하시나요? “십자가가 세상의 종말이 아닌가”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 신학자들의 종말론은 바오로서신부터 판넨베르크역사신학에 이르기까지 복음의 타락입니다.

예수의 죽음은 곧 하나님의 죽음인데, 하나님이 죽은 이 세상에 과거/현재/미래란 게 어디 있나요?

오로지 ‘끝’, 곧 절대무성(無性)만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이 제 역사관의 기초입니다. 색즉시공을 말하는 불교와 복음적 그리스도교간의 명백한 차이기도 하고요.

그러고보면 판넨베르크에게 “거듭나셨나요?”라고 물었다는 신학교수 이야기가 이해되기도 하네요.

아마 이때가 제가 다비아와 이별할만한 절호의 찬스(?)가 아닌가 싶은데,

그러면서도 뭔가 찝찝한 마음은 거두어지지 않네요.

정통 그리스도교 영성의 확보를 주창하시는 목사님의 설교비평과 인문학적 성서읽기 패러다임에 이끌려

복음의 세계 가운데서 생명의 능력을 진지하게 경험해보고자 몇 달을 머물렀지만,

그동안 목사님에게서 본 모습은 어떤 이데아를 열심히 설명하는 ‘유사 복음전도자의 섹시포즈’였을 뿐이지

도무지 예수가 말한 ‘바로 그 생명’이 열린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이런 식으로는 목사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시는 다층적 종말론적 ‘영-성(性)’으로의 돌입은 도저히 불가능하며

더욱이 예수로부터 임하는 프뉴마의 ‘영’에 이르는 일은 더더욱 묘연해 보입니다.

다만 인문학적 감성과 약간의 진보주의가 가미된 상태에서

그럴듯한 그리스도교 언어를 사용하는 것에 도취된 채 자기만족에 빠져 속아갈 뿐일텐데요.

다비아를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다비아가 추구하는 중심의식에 깊이 공감하고,

또한 그것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소견을 말씀드리지만,

계속 이런 길로 간다면, 다비아는 어정쩡한 그리스도교풍 친목단체 이상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카이로스 호”를 향한 목사님의 갈망은 도대체 어디로 증발된 건가요?

다비아가 부디 나름대로의 길 속에서 올바르게 나아가, 이어질 세대에서도 계속 생존하길 진심으로 기도하며,

츠빙글리를 향한 루터의 선언을 끌어다씀으로 글을 마치고 떠납니다.

“그대와 나는 영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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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April 28, 2010
*.122.208.32

용남아,

이 라라집사의 말은 코방귀도 안뀌겠지만,

그래도.. 억장이 무너져서 한 마디만 하겠다.

니가 한 동안 교회에서 안 보일 때,

목사님께서 일부러 전화 하셔서

"용남이 상처 입지 않게 집사님들이 잘 챙겨 주세요."

신신당부 하시더구나.

 

오히려(내가 왜 오히려 라고 하는지 알겠지),

니가 상처 입지 않고, 반듯하게 자라주기를 바라시는 마음,

너는 언제쯤 그것을 깨달을까?

그래, 너는 아직 너무 어리다..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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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kich

April 29, 2010
*.175.54.205

용남군의 글은  어렵고 지겹고 재미가 없어요!! 

  같이 최대한 인생 쉽고 재밌게 살아가려고 고군투하는 사람들은 그렇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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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1]자유의꿈

April 29, 2010
*.15.13.124

용남군님, 혜성같이 등장해서 정목사님과 다비아의 신학을 놀라운 속도로 흡수하는 모습을 보여주시더니

어느 순간부터 글쓰기의 톤이 좀 차이가 난다했는데 벌써 실망하시고 하산하시려 하는군요.

용남군님이야 총명하고 앞 길이 창창하니 별 걱정은 안됩니다마는... 좀 더 얘기를 듣고 싶네요.

정목사님이나 판넨베르크 신학이야 이미 공개된 거지만 용남군님 얘기는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어서요.

최근에 용남군님 글에 많이 등장하는 '권능'과 '영'이란 단어를 중심으로 용남군님의 신학을 들려주세요.

용남군님의 생각을 피상적으로 오해한 상태에서 용남군님을 떠나보내고 싶지는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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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NEGADETH

April 29, 2010
*.30.10.104

용남아.. 내가 중학교 1학년때 팡세와 '철학하는 방법'이라는 이대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읽고 철학하기로 마음을 먹고 하나님을 변증하는 파스칼, 키에르케고르 같은 사상가가 되기 를 기도했단다. 그런가운데 난 고민했었지. 용남아 내가 너같이 너무나 무지하고, 한쪽으로 정치적으로 신학적으로 경도되어 있는 교회를 떠난후,  일방 주입식의 기계적인 암기만 가르치는 학교를 자퇴 하고 검정고시로 대학을 들어간 중학교 1학년이후 5년동안 나는 너무 방황을 했단다.

 난 중학교1학년떄 칸트사상 입문서를 보고 중3-고1떄 데카르트 방법서설 순수이성비판등을 읽어왔단다. 나는 내가 읽은걸 내가 다 아는줄 알았어. 근데 내가 서강대 강영안선생님을 만나서 얘기를 나누었을때 그분은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호빈아 고등학교 1학년생으로서는 훌륭하나 '니가 아는게 아직 너의 것이 되지 못했다.'고 말씀해주셨단다. 그분은 철학과 같은 인문학은 좋은 스승을 만나서 배워야한다고 하셨어. 고대 그리스의 예를 들어가며 말이야.

하지만 나는 인정하지 않았어 나는 내가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했고 나는 마치 비트겐슈타인이 논고를 쓸때처럼 단박에 위대한걸 해낼수 있을 줄 알았지. 하지만 대학을 1년 일찍들어가고 직접 학문의 대가들과 부딪혀 본 결과 강영안 교수님의 말이 정말 백번옳다는걸 뼈저리게 느꼈단다. 철학과 같은 인문학은 고전 하나를 읽었다고 해서 아는게 아니야.. 한 장의 텍스트를 가지고 수백편의 논문이 쓰여질 수 있는게 철학이고 인문학이야. 신학도 이와 다를바 없단다.

나는 항상 통탄하는게 내가 중학교 1학년떄 나를 지도해줄 철학적 신학적 스승이 없었다는것이야. 그때 독일처럼 김나지움에서 철학을 배웠다면 더 빨리 깨달을 수 있었을텐데!!

 너도 너가 읽은것을 니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거라, 칼포퍼의 말대로 인간은 유한하기 떄문에 언제나 틀릴 수 있는 존재야. 그리고 우리같은 학문에서의 아기들은 그럴 가능성이 더 높단다. 학문은 나이로 만하는것은 아니지만 나이로도 하는거야. 너가 좋은 스승을 못알아보고 또 방황할까봐 걱정되서 하는말이다.

인문학은 책을 붙들고 책상에서 씨름하는 땀속에서 나오는거지 몽상가의 머리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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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NEGADETH

April 29, 2010
*.30.10.104

용남아 그리고 너가 데카르트 스터디때 얘기했었지.. 방법서설 글이 어렵다고. 그건 아주 쉬운수준이야. 나도 다 이해했던것은 아니지만 나도 중학교떄 읽고 코기토 명제의 확실성에 대해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런 수준으로 몰트반, 불트만, 판넨베르그를 논한다는건 어불성설이야.. 그 들은 신학과 철학의 최첨단에 있는사람만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단다.

그리고 이제 너가 범한 오류를 알려줄게, 이건 내가 목사님과의 담화속에서 이해한 것인데  '사건'이라는 개념은 무조건 주-객 도식에서 객관에만 국한된 개념이 아니란다. 칸트의 초월론적 자아(Transzendental Self)가 주관이야 객관이야? 답은 둘다 아니다야 칸트의 초월론적 자아는 오히려 주객 도식을 가능케하는 근거로서 개념적 틀이지, 마찬가지야 사건Event는 사실 Fact와 달라. 특히 부활은 사실이 아니라 사건Event야, 사실Fact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단순한 사실Fact이라면 부활은 객관적 사실Fact에 머물고 말 것이야.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다른 사실들을 하나님이 하신 역사로 해석할 수 있게 끔 하는 해석학적 틀이라는 점에서 주관 객관의 도식을 벋어나 있단다. 칸트로 따지자면 초월론(Transzendental)적인 것이지.. 오히려 그 사건 떄문에 사실에 대한 해석이 가능해진단다. 그러므로 목사님이 말씀하신 부활사건을 단순히 객관으로만 보는것은 큰 오해야.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교 인이 그리스도교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수 있는 해석학적 틀(Framework)이란다.

그런점에서 사건을 주객대립의 구도로 몰고간 너의 글의 관점자체가 이미 틀려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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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April 27, 2010
*.122.208.32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지 아닌지에 관심이 없었다.

오직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뿐이었다. "

이 말씀에서

 "정말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구원 받느냐 아니냐에 대한 신경을 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되야 되지 않겠는가.."

라는 말씀과 연계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두 공통점은 모두 자기집중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에게만 집중하는 것이네요.

오늘 우리도,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자기애"으로부터 빨리 벗어나는 길이

"생명의 길"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땅속에 묻혔던 보화를 발견한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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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9]정용섭

April 27, 2010
*.120.170.243

라라 님,

오늘은 황사는 아니었지만

바람은 제법 불었지요.

바람을 생각하고 몸으로 맞을 때마다

얼마나 신비로운지 모르겠습니다.

호흡도 비슷하구요.

천국에서도 우리가 호흡해야할까요? ㅎㅎ

자기애에서 벗어나는 건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하지만

자기 정체성을 부정할 필요는 없겠지요.

사실 정체성이 무엇인지도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 않지만요.

생명의 주인이신 그분에게

온전히 집중하는다는 게

우리의 삶에서 어느 정도나 가능할지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면 앞으로 나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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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7]paul

April 29, 2010
*.190.42.145

목사님 오늘 말씀은 참으로 제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면서도 너무 어렵군요.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주제에 관한 질문은 아니지만 아래 글을 무슨 의미로 쓰셨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 불만족 스럽다는게 아니라 모르겠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가, 아닌가?’ 이 대목에서 혼란스럽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지요.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더 나아가 태초부터 그리스도였기 때문에 자신의 메시아 성에 대한 질문이 없었다고 생각할 테니 말입니다. 그런 생각은 예수님에 대한 오해에서 나온 겁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가능하면 그 운명을 면하게 해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했고, 십자가 위에서는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외쳤습니다. 자신의 정체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면 이렇게 행동하지 않으셨겠지요. 예수님은 그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가 완전히 실패한 자라는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었습니다.


위의 글과 아래의 글이 어떻게 일치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위에서는 예수님 자신도 자신의 정체성에 질문을 하신다고 하시고 아래에서는 그리스도라고 인식하셨다고 하시니. 무슨 의미인가요?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예수님이 자신을 그리스도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자신이 그리스도인가 아닌가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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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9]정용섭

April 29, 2010
*.120.170.243

paul 님,

껄끄러운 질문을 주셨습니다.

우선 제 글의 앞뒤 문장이 모순이라는 지적을 답해야겠군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자신의 그리스도성을 확인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방점이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 못했다는 뜻은 아닙니다."는 문장이 혼란스러웠나 보군요.

자연스럽게 질문의 핵심으로 들어갈 수 있겠네요.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상으로 인식했다는 뜻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면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도 없었겠지요.

그리스도는 메시아, 즉 구원자입니다.

구원의 근원입니다.

기도하는 자가 아니라 기도를 받아야 할 자입니다.

하나님과 동일한 권능을 가진 자입니다.

그런 이가 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셨을까요?

오해는 마세요.

예수님이 선재적으로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말씀이 아니랍니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창조 이전의 로고스이십니다.

이 문제와 예수의 메시아 인식 문제는 다른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 통치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우리의 상식과는 다르게 진행됩니다.

창조와 현재가, 창조와 종말이 역행할 수도 있어요.

이건 크게 이상한 이야기도 아니지요.

종말, 즉 심판이 창조의 완성이에요.

이 말은 창조에 이미 종말이 들어있다는 뜻이기도 하구요.

제가 폴 님을 골치 아프게 해드리려고 이렇게

복잡하게 설명하는 게 아니랍니다.

이런 인식의 전환이 아니면

예수의 그리스도 성을 해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랍니다.

이렇게 예를 들어서 설명하지요.

제가 어렷을 때부터 목사라는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있었을까요?

물론 아니겠지요.

지금은 목사랍니다.

어렸을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나의 인격 자체는 변한 게 없습니다.

지금 목사라는 내가 어렸을 때의 나를 오히려 규정할 수 있어요.

설명의 비약이 있었을지 모르겠군요.

중요한 것은 예수에게서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현재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와 하나님 나라의 일치입니다.

하나님 나라와의 일치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랍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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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묵묵이

April 30, 2010
*.165.101.81

목사님의 글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예수님의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은 결국 부활의 사건을 통해서 증명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군요. 

예수님이 전하시고  예수님의 삶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이 증거하신 핵심이군요.

그런데 요즘 고민되는 부분이 있어서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주일학교 설교를 하면서 많이 저 자신에게 던져지는 질문이 있는데 그리스도라는 말이 무엇이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많이 언급이 되는데 정작 그리스도라는 말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 제게 맡겨진 사명이지만 여전히 어려운 건 사실입니다.^^: 특히 아이들에게는 더욱더 그렇습니다.(아이들이 발달과정상 아직 추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연령이라는 것이 더욱 힘든 과제입니다.)  이런 아이들을 향한 예수의 모습은 함께 놀아주고 자신의 존재감을 세워주는 친구같은 분이 아닐까 생각되어 그렇게 증거하고 제 삶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길 소망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세상 가운데 던져진 아이들은 이곳저곳에서 고통받고 무시당하는 낮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러한 예수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되어 그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이신건 교수님의 "어린이 신학"을 참조하시면 더욱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제 자신을 돌아보면 무엇인가 잘못된 사유를 하고 있지는 않는지 여전히 불안한 마음은 감출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이런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의미가 지금의 시대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새롭게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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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9]정용섭

April 30, 2010
*.120.170.243

묵묵이 님,

그리스도 정체성과 그것의 인식과 하나님 나라와 부활의 관계를

적절하게 설명하셨군요.

이런 문제는 수학공식처럼 딱 떨어지게 설명되는 건 아니에요.

굳이 말하자면 변증법적 해석의 문제에요.

예수의 그리스도 인식이 하나님 나라에 의해서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가는 거지요.

그것은 또한 부활 사건으로 인해서

더 명백한 현실로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구요.

여기서 자칫하면 순환논리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게 뭔지는 제가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순환논리에 빠지지 않으려면

보편사적 해석이 필요합니다.

지금 제가 판넨베르크 신학의 구도로 설명하는 건데요.

보편사에서 부활이 증명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설명하려면

'보편사' 개념을 설명해야 하는데,

오늘은 좀 곤란하군요.

온라인강의실로 들어가면 '기독교 해석학'에서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적 해석학을 찾을 수 있을 거에요.

그걸 참조하세요.

음, 그리고 어린아이들에게 그리스도를.... 말씀하셨지요?

바르게 가르치기 위해서 묵묵이 님이

그 개념을 정확하게 알아야겠다는 말씀이지요?

<그리스도론> 만으로도 신학대학원 석사 과정에서

3학점 짜리로 한 학기를 공부해야 할 겁니다. ㅎㅎ

그리스도는 구원자라는 뜻이잖아요.

구원이 무얼까요?

인간은 왜 구원을 말해야만 할까요?

인간은 왜 구원을 받아야 할 존재로 만들어졌을까요?

이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메시아니즘이 배회하고 있답니다.

그런 것들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부터 키워야할지 모르겠군요.

히틀러의 나치즘이 일종의 메시아니즘이라는 거 아시지요?

성공한 기업가를 대통령으로 뽑으면 모두 잘 살게 될 거라는 모종의 주술이

바로 오늘 대한민국의 메시아니즘이라는 것도 아시지요?

제 말이 자꾸 옆으로 갈래를 치는군요.

사이비 메시아니즘에 빠진 채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외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서

말하다보니 이렇게 되었군요.

어린이들을 잘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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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Dr. Jung

May 03, 2010
*.97.130.53

목사님의 글과 많은 댓글 속에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감사할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각기 사람마다 다른 은혜의 분량으로

다가오시는 그 분을 만나는 시간들이 오리라 생각됩니다

이미 와있을 수도 있구요

 

나의 삶의 처지에서 부족하나마 그 분이 가르치신 마음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하려고 노력중입니다.

 

지식과 지혜가 시간이 지나가면 은혜로 다가오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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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9]정용섭

May 03, 2010
*.120.170.243

안녕하세요.

닥터 정 님,

'각기 사람마다 다른 은혜의 분량으로'라는 표현이

마음에 드네요.

똑같은 분량은 없지요?

분량의 크고 작음도 크게 중요하지 않겠지요?

오늘도 우리 각자 은혜의 분량으로 살아봅시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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