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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합주의 신앙을 혁파하라!

성령강림절 조회 수 11411 추천 수 52 2007.11.04 19:35:01
설교듣기 : mms://wm-001.cafe24.com/dbia/071104.mp3 
성경본문 : 열왕기하 23:1-14 
mms://wm-001.cafe24.com/dbia/071104.mp3혼합주의 신앙을 혁파하라!
2007.11.4. 왕하 23:1-14

구약성서 중에서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는 신명기 법전이라고 불리는데, 다른 성서와 여러 가지 면에서 비교됩니다. 이 신명기 법전의 가장 큰 특징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평가하고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통일왕국, 분열왕국에 이르는 전체 역사에 등장하는 수십 명의 왕들이 주요 대상입니다. 대다수의 왕들은 나쁜 평가를 받습니다. 여로보암과 아합 왕은 대표적입니다. 그들이 당대에는 왕이랍시고 큰소리 치고 떵떵거리면서 살았을지 모르지만 훗날 아주 혹독한 역사적 평가를 받았습니다. 전반적으로 나쁜 평가를 받은 왕들의 연대기에서 다윗은 예외에 속합니다. 그는 몇 가지 인간적인 잘못이 없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모범적인 왕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요시아도 역시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왕하 22:1,2절에 따르면 그는 여덟 살에 왕이 되어 31년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합니다. 2절에 묘사된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이렇습니다. “그는 야훼의 눈에 드는 바른 정치를 폈다. 모든 일을 태조 다윗을 본받아 한 발짝도 어긋나지 않고 그대로 살았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다윗에게 버금갈 정도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실천했던 인문이 바로 요시아인데, 그의 업적은 종교개혁입니다.
요시아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을 보수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서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읽은 요시아는 크게 충격을 받고 옷을 찢었다고 합니다. 그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지역 대표자들인 장로들을 소집하고, 예언자, 사제, 모든 백성들을 예루살렘 성전에 불러 모아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야훼의 명령을 따르기로 서약했습니다.(왕하 23:3) 그 뒤로 요시아는 종교개혁을 구체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내용이 왕하 23:4절 이하에 설명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혼합주의로 떨어진 야훼 신앙
첫째, 요시아는 야훼의 전 안에 있던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별을 섬기는 데 쓰던 모든 기구들을” 치우고 그것을 불살랐습니다. 둘째, 각 지역에서 활동하던 가짜 사제들과 우상을 예배하던 사람들을 그 직위에서 파면했습니다. 셋째, 전국에 흩어져 있던 산당들을 폐쇄조치 했습니다. 첫째는 우상과 관련된 기구들을 없앤 것이고, 둘째는 거기에 종사하던 사람들을 파면시킨 것이며, 셋째는 지역의 산당을 없앤 것입니다. 이런 조치를 보면, 그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과 전체 나라가 완전히 우상숭배에 찌든 것 같습니다.
야훼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장소인 예루살렘 성전 안에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기구들이 들어 있었다는 게 정말 이상합니다. 심지어 성전에 아세라 목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야훼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약해졌다고 하더라도 아브라함의 자손인 그들이 바알과 해와 달, 성좌와 하늘의 별에게 제물을 살라 바쳤다고 하는 것도 이상합니다. 그런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는 전문적인 종교인들이 나라 전체에 퍼져 있다고 하니, 그들의 상황이 어떤지 알만 합니다. 요즘 식으로 바꿔서 생각해보세요. 교회당에 부처상이 놓여 있다는 걸 상상할 수 있을까요. 교회당의 기도실에 점쟁이가 그린 부적이 붙여 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요시아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과 유대의 모든 종교적인 행태는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야훼 하나님 신앙이 크게 변질되고 오염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어서 그런 일을 저질렀구나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예루살렘 성전 안으로 끌어들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우상을 섬기는 산당을 전국 곳곳에 세우지 않았습니다. 아주 천천히 그런 요소들이 그들의 신앙세계 안으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변질과 왜곡은 천천히, 자신들도 모르는 중에 일어납니다. 요시아 시대의 야훼 신앙도 여전히 그런 과정 중에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야훼 하나님을 섬기면서 다른 한편으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것이지요. 일종의 혼합주의입니다. 혼합주의는 신앙생활에서 아주 유용합니다. 속된 표현으로 알 먹고 꿩 먹는 식, 님도 보고 뽕도 따고 하는 식입니다. 그들은 형식적으로는 야훼 하나님을 섬기면서 속으로는 물질적인 풍요를 약속하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긴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기복주의 신앙이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닐까요? 한국교회가 그걸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듯이 요시아 시대의 유대인들도 예루살렘 성전에 아세라 목상 세우는 걸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혼합주의로 흐르면 행동은 저절로 따라오게 마렵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왜 이런 혼합주의로 깊숙이 빠져들고 말았을까요? 여기에는 많은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저는 성서의 관점만 전하겠습니다. 요시아가 종교개혁에 나서게 된 그 동기를 보면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요시아는 성전에서 발견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크게 충격을 받아 종교개혁을 단호하게 실행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야훼 하나님의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기준으로 제시되지 않으면 사람들의 믿음은 순식간에 우상숭배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믿음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이 둘의 차이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사실만 강조하지 무엇을 믿어야 할지에 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그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자신이 믿는 그 하나님이 바알인지 아세라인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믿는다고 합니다. 비유적으로 한 말씀 드린다면, 구구단만 달달 외우면서 수학을 안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무리 신앙적 열정이 강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혼합주의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요시아 시대만이 아니라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 그대로 증명되었습니다.  

솔라 스크립투라
10월31일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지금부터 490년 전인 1517년 이 날에 비텐베르크 성당의 신부이자 그 대학교 신학교수이며 어거스틴 수도회 수도사였던 마틴 루터가 성당의 정문 위에 95개 조항의 신학 논제를 대자보 형식으로 내다걸었습니다. 그 뒤로 종교개혁의 불길이 유럽에 확산되면서 지난 1500년의 역사를 지난 로마 가톨릭교회와 구별되는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일으키겠다는 의지를 가자고 그런 개혁운동을 시작한 건 아닙니다. 그는 신학자였습니다. 로마 가톨릭의 신앙을 신학적으로 바르게 이끌어가기 위해서 문제를 제기한 것뿐입니다. 그것을 그 당시 로마 교황청이 잘 수습했다면 교회가 갈라지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미 가톨릭교회는 그것을 수습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겠지요.
그 당시에 겉으로 크게 불거진 신앙적인 문제는 면죄부였습니다. 로마 교황청은 베드로 성당 건축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구원받지 못하고 연옥에 떨어진 가족과 조상을 위해서 면죄부를 매입하면 돈이 헌금함에 떨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의 영혼이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선전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코미디 같은 이야기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논리가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런 걸 남의 이야기로만 들으면 곤란합니다. 개신교회에서도 지금 서원헌금이라든지, 일천번제라든지 해서 이런 코미디 같은 종교행위가 없지 않습니다. 장로와 안수집사 직을 받기 위해서 일괄적으로 헌금을 드리기도 합니다. 명분이야 없지 않습니다. 교회의 일꾼으로 살아갈 사람들이니 임직을 받을 때 기념될만한, 예컨대 전자올갠 같은 걸 바치는 게 좋다는 겁니다. 5백 년 전 로마교황청이 행했던 면죄부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 당시 가톨릭교회가 왜 이렇게 말도 되지 않는 일을 했을까요? 그것이 바로 마틴 루터의 신학이 말하려는 핵심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세 가지 슬로건을 그 토대로 합니다. 첫째는 솔라 그라티아(오직 은총)입니다. 인간의 구원은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주장입니다. 둘째는 솔라 피데(오직 믿음)입니다. 인간이 의롭다고 인정받는 길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뿐이라는 주장입니다. 세 번째는 솔라 스크립투라(오직 성서)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을 끌어가는 기준은 교회가 아니라 오직 성서라는 말씀입니다. 요시아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아 엄격하고 총체적인 개혁을 실시했듯이 그로부터 2천년이 흐른 뒤에 마틴 루터는 다시 솔라 스크립투라를 외침으로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겼습니다. 어느 시대에서나 하나님의 말씀이 종교개혁의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곧 거꾸로 하나님의 말씀이 실종되거나 침묵하면 기독교가 아주 쉽게 혼합주의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루터가 솔라 스크립투라를 외친 이유는 그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앙전통이 지나치게 교회 중심으로 흘렀기 때문입니다. 가톨릭교회의 교회는 곧 성직자인 사제를 가리킵니다. 그 사제의 수장은 교황입니다. 그들은 성서와 교황의 칙령을 동일한 권위로 받아들였습니다. 가톨릭의 입장에서는 할 말이 많기는 합니다. 성서도 교회의 회의를 거쳐서 결정된 것이고, 그 종교회의는 바로 교황에 의해서 소집되고 결정되기 때문에 교황의 권위가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오늘 저는 이에 관한 신학적 논쟁을 설교 시간에 반복할 생각이 없습니다. 교황의 칙령이 나름으로 근거가 있다 하더라도 루터 시대에 교황의 칙령에 따라 판매된 면죄부를 용납할 수는 없겠지요. 교황의 이름으로 갈릴레이 같은 과학자들에게 행한 종교재판과 마녀재판을 옹호할 수는 없겠지요.
저는 지금 로마가톨릭을 비판하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교회, 성직자, 전통이 성서말씀보다 더 중요한 기준으로 제시되는 일들은 500년 전 루터 시대의 로마가톨릭교회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개신교회에도 여전하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겁니다. 오늘 우리 개신교회에서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교회의 습관과 전통이 더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예배에서도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청중들의 종교적 감수성이 더 중요한 요소로 취급됩니다. 열린예배를 드리겠다는 취지로 한국교회 안에 하나의 트렌드가 된 <경배와 찬양> 유의 예배에서는 말씀이 실종되고 사람들의 감수성만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예배는 전형적인 혼합주의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면서도 동시에 신자들의 종교적 갈망을 만족시키겠다는 것이니까요.
오늘 한국교회에 가장 뿌리 깊은 혼합주의는 물질 만능주의입니다. 자본주의라고도 할 수 있고, 신자유주의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물질 만능주의는 오늘 전 세계를 사로잡고 있는 일종의 유사종교입니다. 저는 정치와 경제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겠습니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부(富)를 삶의 핵심으로 선전하니까 그러려니 해야겠지요. 문제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우리 기독교인들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일전에 서울의 모 대형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말하는 핵심은 한 가지입니다. 예수를 잘 믿고 기도만 잘 하면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1억원 십일조 헌금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방식이라고 한다면 결국 기독교 신앙은 처세술이 되고 말겠지요. 이런 신앙은 분명히 혼합주의입니다. 기독교를 자본주의와 혼합해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혼합주의 특징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만 골라서 상을 차려놓는다는 것입니다. 죽음 다음에 천당을 가고 싶으니까 예수를 믿습니다. 살아있을 때 성공하고 부자가 되고 싶으니까 자본주의를 끌어들입니다. 이런 혼합주의적인 성격이 강한 교회일수록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왜냐하면 민중들은 바로 이렇게 자기의 종교적 취향과 세속적 욕망에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혼합주의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당장은 구미가 당기는 것처럼 보여서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모일지 모르지만 우리의 영을 살리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시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받은 충격입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자!
여기서 문제는 무엇이 혼합주의인지 아닌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대개의 신자들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 채,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교회 지도자가 말하는 것만을 무조건 추종합니다.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니까 그게 옳은가 하고 따라가기도 합니다. 요시야가 개혁을 추진하기 직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것이 왜 문제인지 몰랐듯이, 조금 눈치 챘다고 하더라도 감히 거기서 뛰쳐나올 수 없었듯이 이런 역사는 오늘도 반복됩니다. 이런 혼합주의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한 가지입니다. 요시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고 거기서 심각한 위기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충격을 받지 못한 채 신앙생활에 매달린다면 우리는 관성의 법칙에 따라서 혼합적인 신앙생활에 안주하고 말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에 관한 열성은 많은 것 같지만 실제로 그것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가 교회 성장을 위한 도구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교회부흥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할 뿐입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날 수 없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영적인 관심은 무뎌지고 대신 교회의 여러 행사에만 재미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런데 머물러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신앙의 혼합주의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5백 년 전 루터는 솔라 스크립투라를 외쳤습니다. 2천 6백 년 전 요시아는 율법 양피지를 발견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혼합주의라는 유혹으로부터 건져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마음을 쏟는 것이야말로 종교개혁의 시작이며, 마무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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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비틀

November 04, 2007
*.131.149.144

오늘 새벽에(주일) 다비아 들어와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먼저 읽고(시차가 이럴 때 참 좋습니다)
교회 갈 준비하고 있습니다(8시 30분 예배).

항상 목사님의 뜻 깊은 말씀에 감사드리며
저에 속에 있는 혼합주의를
이 시간부터
쉬지 않고 세탁한다고 하더라도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 같지만
계속 노력해 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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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권오수

November 04, 2007
*.236.84.144

샬롬! 어제 회원 가입을 했습니다.

혼합주의가 무엇인지 좀 더 생각하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오늘 설교를 읽으면서
아주 천천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들어와있는 혼합주의의 실체가
제 안에서 조금 의식되는 시발점이 되어서 감사합니다.
제 속에 교묘하게 합리화하여 의식과 생활 속에 들어와 있는 혼합주의가
온전히 드러나고 고침받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마음을 쏟는 것이야말로
혼합주의로부터 치유받는 길이요,
그 유혹으로 부터 건짐받는 길이요,
참된 개혁임을 깊이 긍정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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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gaedener

November 05, 2007
*.241.31.226

얼굴에 무엇이 묻어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죄인이 죄인인줄 모르고, 말씀을 외치나 말씀의 진수를 모르고, 기도를 하나 누구에게 무엇을 기도하는지도 모르고..... 이런 현상이 초신자, 묵은 신자, 집사, 장로 심지어 목사님들까지도 이런 분이 많으니 아!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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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3]달팽이

November 06, 2007
*.152.178.97

아침에 말씀을 묵상하면서 어디선가 읽은 책 내용이 생각났습니다.
우리삶의 헝클어진 삶의 실타래를 푸는 방법은 오류를 바로 잡기 보다는 진리의 길로 매진할 때 모든 오류들이 눈에 보이고 그것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뜨거운 물에 개구리가 들어가면 즉시 밖으로 도망가지만 미지근한 물에 서서히 불을 가하면 자기는 죽는줄도 모르고 그냥 있다고 하더군요.. 혼합주의 신앙이 이런것이 아닐까요. 우리 삶에 포장되어 있는 위선과 거짓, 어떻게 보면 말씀을 바로 선포되어지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닐까요. 한 때 저도 하나님을 알고자 몸부림 치며서도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것이 부담되고 짐이 되지 않을까 하며 생각한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복음과 진리가 주는 자유함이 무엇인지 조금씩 실채를 깨닫아 가고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 삶을 얽매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자유하는 삶으로, 해방된 삶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 하루 하루 눈을 뜨며 어린 세아이들의 잠자는 모습을 보면서 지금 여기 삶의 자리에서 주의 나라를 바라보며 그져 묵묵하게 맑은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면서 살고자 합니다.
그래서 오늘 하늘도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답기에 슬픔과 고통을 뛰어넘는 삶의 긍정으로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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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流水不爭先

November 07, 2007
*.173.40.129

목사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희교회만해도 오후예배시간전에 30분가량 경배와찬양류의 찬양시간이 있습니다.
수요예배시간전에도 찬양을 드리는데 이때는 매우 빠른 찬양만 전도사님이 선곡하십니다.
서원헌금도 있습니다.
15년동안 아무런 의심도 비판도 없이 오히렬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던 것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자연스럽게 행하여지는 이런 류의 모습들이
이곳 다비아를 통하여 재해석되어진다.
마치 빛이 임하매 어두움이 물러가듯이

과연 무엇이 옳은가
둘다 맞는가, 아니면 둘다 틀리는가 아니면 둘중 하나인가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드는 다비아가 참으로 귀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류 역사속에 종교집단만큼 폐쇄적인 집단이 있었던가
하나님께서 인터넷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시어 만천하에 이 폐쇄성을 드러내시는것 같다.
하나님께서 다비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시는것 같아 참으로 기쁘다

정용섭목사님
오늘도 좋은날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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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계성아빠

November 08, 2007
*.116.187.126

평소 정목사님의 설교비평을 읽으면서 많은 부분을 공감하면서
어떻게 하면 한국교회가 말씀으로 돌아 갈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아직 정목사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지만
한국 교회의 미래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법이 제시 되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번 설교를 읽으면서 느낀점을 감히 말씀드리자면
설교 거의 모든 부분이 "교회의 문제"지적이고 그것에 대한 적용과 해결책이 제시 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네요.

분명하게 본문 말씀은 요시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상을 제거했는지에 대한 내용인데
목사님의 설교 내용은 본문내용을 이야기 한 것이라기 보다는
본문의 배경에 촛점을 맞추어 목사님의 관점과 생각을 이야기 한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솔직한 말로 하나님 말씀의 설교라기 보다는 목사님 개인의 사설이라 볼 수 밖에 없습니다.
평소 한국교회 강단의 설교를 비판하시면서 똑같이 목사님 또한 그런 문제를 되풀이하시는
모습에 실망하면서 진실로 어떻게 올바로 하나님 말씀을 설교할 수 있을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한국교회 강단의 문제점 그리고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원리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합니다.
공감하며 비판에만 머무르지 않고 개혁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고
제시 하는 것이 이 시대의 살아있는 하나님의 종들이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며
요시야 왕이 개혁하고 종교개혁자들이 개혁한 것 처럼
우리들이 이 시대에 말씀을 가지고 해야할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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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November 08, 2007
*.181.51.23

계성아빠 님,
좋은 지적을 주셨네요.
제 설교가 하나님 말씀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하고
설교자 개인의 사설로 떨어지고 말았다는 거지요?
그렇게 보였다면 제가 뭐라 말씀 드릴 건 없습니다.
다만 설교란 무엇인가, 하는 큰 틀에서 한 마디만 드릴께요.
설교는 말씀 해석을 토대에 두지만
소위 강해설교자들이 하는 것처럼
성서텍스트를 그대로 따라가면서 적용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랍니다.
경우에 따라서 성서텍스트에서 어떤 주제를 파악한 후
그 주제를 오늘의 지평에서 새롭게 해석하는 설교도 필요하지요.
모든 설교가 한 가지 틀로만 고착되는 게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그러나 기초에는 성서텍스트가 말하게 하라,는 원리가 작동되어야 합니다.
성서텍스트가 말하게 하는 게
낱말풀이가 아니라 그 계시 사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성서텍스트를 말하지 않다고 지적하셨지요?
본문에서 요시아가 혼합주의를 배격했다는 사실을 가능한대로
정확하게 짚었는데, 아닌가요?
설교대부분이 교회 문제를 지적한 것이고
해결책이 제지되지 않았다고 했는데,
계성아빠 님이 설교를 자세하게 읽지 않으신 것 같군요.
저는 종교개혁을 기억하는 이 설교에서
요시아의 개혁, 종교개혁자들의 개혁, 그리고 오늘의 관점들을
하나로 묶어내려고 했거든요.
해결책을 말씀하셨는데,
오늘 교회 안에 있는 혼합주의적 요소들을 제거하는 게 해결책이 아닌가요?
혼합주의적 요소로 사람중심의 예배인 열린예배, 기복주의를 짚었는데요.
더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그리고 그것의 시행방법까지 제기해야만 해결책이 되는 걸까요?
한 마디 더,
설교는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는 시간은 아니랍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지향점을 제시하는 데 머물러야지요.
그것을 인식한 청중들이
자기가 처한 삶의 자리에서 구체적인 해결책을 찾아나서야 한답니다.
청중들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성숙한 사람들이거든요.
계성아빠 님은 구체적인 방법이 무엇인가 하고 마지막으로 물으셨지요?
그건 각자가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이 설교에서는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혼합주의를 경계한 거지요.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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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계성아빠

November 08, 2007
*.116.187.126

와~ 목사님.. 빠른 답변 정말 감사합니다.
부족한 제가 감히 목사님의 설교에 사족을 달다니...

목사님의 답변을 듣고 이해가 된 것은 어디선가 읽은 것 같은데
목사님께서 교회력을 중요시한다는 것!
그러니까 종교개혁주일을 위한 설교이기 때문에 이 본문에서 요시아의 개혁과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을 기억하여
오늘 우리도 개혁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죠.
저는 아직까지 왜 설교를 교회력에 따라 설교를 해야 하는지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력에 따르다 보면 설교의 출발점이 성서가 아닌 설교자의 의도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요?
죄송합니다. 무지하면 용감하다고 잘 알지를 못해 이런 질문을 하게 되네요.

그리고 또 한가지 질문은 설교가 하나님 나라를 향한 지향점을 제시하는 데 머물러야 한다는 목사님의 의견이 잘 와 닿지를 않네요.
제 견해는 보다 구체적으로 청중들에게 그 말씀을 적용할 수 있는 데 까지 설교가 접근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청중들에게 방향만 제시한 다는 것은 설교자의 게으름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성서해석 보다도 더 어려운 것은 본문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적용할 것인가 하는 부분이라 생각을 하는데
이 "구체적"이란 단어가 애매모호 해서 그런데 시시콜콜하게는 아니더라도 또 방향만 주어서도 아니고
개인적인 삶에까지 접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있는 혼합주의 신앙을 혁파할 수 있는 방법은 먼저 내 개인의 삶에 있는 혼합주의 신앙, 곧 우리도 모르게 세상 문화 속에 길들여져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헤아리고 그 우상을 제거하는 것, 뭐 예를 들면 돈과 명예라는 우상이 가장 크겠죠.

목사님...
감사합니다. 이런 자리를 빌어 보다 바람직한 설교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
점검해 볼 수 있다는 것,
또 이렇게 세세하게 답변해 주시는 목사님의 열의와 사랑..
저 자신 뿐만 아니라 이곳에 오시는 모든 분들께 많은 유익이 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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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운영자

November 08, 2007
*.40.102.106

계성 아빠님, 반갑습니다.

교회력에 문제에 대해서는 정목사님의 <설교비평 제 31번>
*설교의 두 기둥, 교회력과 해석학-경동교회 박종화 목사- 를 참조해 보세요.

그리고 설교의 적용문제에 대해서는 <설교비평 제 37번>
*큐티 식 설교의 효율성과 미숙성-휴스턴 서울침례교회 최영기 목사- 를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루이틀 들어오시다 말것 아니면 여유를 갖고 천천히 진도 나가시지요.
아무쪼록 좋은 사귐 있게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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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코람데오

November 10, 2007
*.252.183.105

감동적인 설교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리고 계성아빠님 저는 설교를 보는 두시각 즉
하나님 나라를 향한 지향점을 제시하는 데 머물러야 한다는 시각과
계성아빠님이 제시하시는 청중들에게 그 말씀을 적용할 수 있는 단계
까지를 포함애야 한다는 시각의 사이에서 저또한 고민하였더랬습니다.

대형 교회 있다가 개척교회로 옮긴지 한 3년쯤 된것 같은데..
저희 교회 목사님은 단 한번도 생활설교나 말씀을 생활에 적용에 관한
설교를 하신적이 없으며 거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본질만 설교
하더군요 그래서 님과 같은질문을 한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알듯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활을 윤택하게하고 우리의 삶을 좀더 도덕적으로
만드는 생할규범을 가르치는 교훈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주님이 하신일 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일 입니다.

기독교 복음이 기복주의화 되고 본질에서 벗어나는 가장 큰 원인중 하나가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도구로 설교되는데에 있다는 것이 제 생각 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설교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향한 지향점을 정확히 제시하기만
하면 삶은 그 바른 지향점을 향하여 나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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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솔나무

November 12, 2007
*.47.75.36

계성아빠님,
안녕하세요.
정보가 공개되어있지 아니하여서 정확하게 인사드리기가 어렵네요.

계성아빠님이 말씀하신 설교중에 적용에 대한 것 까지를 말씀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적용을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다면 의미가 없게 됩니다.
어떤 적용을 한다고 해서 생명을 소유함에 대한 행복함을 나아가기에는 한계가 있으니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저의 아들녀석이 둘이 있습니다. 현재 12살과 10살인데요.
몇년전에 자전거를 가르치치려고 공원둔치에서 자전거를 빌렸습니다.
3발 자전거에서 2발 자전거로의 옴겨감을 말합니다.
한동안은 제가 2발자전거를 타고 어린 아들녀석들은 3발을 타고 다녔습니다.
3발자전거를 타고 있는 아들녀석들은 2발 자전거를 타는 저의 즐거움을 모를것입니다.
아니 같은 것으로 알고 현재에 머물어 있었겠지요.
그러던 중 2발자전거를 타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무엇이 동기부여가 되었는지 몰라도 주변의 여건을 보니 움직여야 할 무언가가 찾아왔겠지요.
그러나 선듯 그냥중심이 잡히는 3발자전거에서 달리면서 중심을 잡아야하는 2발 자전거로의 이동은
생각처럼 쉽지가 아니합니다.
3발 자전거를 버릴 정도의 결단력과 2발자전거에 대한 호기심과 동기부여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것을 예를 드렸지만
교회에서 어떤 적용을 한다고 해서 적용의 예를 들어 설명은 가능하지만 그것의 실체는 말입니다. 정보여요.
실제의 적용은 필드로 나아가서 두발자전거에 몰을 실어서 여러번을 감당한 후에 만나게 되는 기쁨입니다.
세발자전거에서 두발 자전거로의 이동은 어떤 설교나 미션을 지시한다고 해서 일어나는 일들이 아닙니다.
본인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 나아가고자 하는 길에대한 깨달음이 만나지 아니하고서는 어려운 일입니다.

한가지 더 예를 들어서
자전거를 타는 것을 경험을 하지만
그 자전거를 타는 목적이 속도를 내는것으로만 잡힌다든지...
아니면 짐을 많이 싫어서 물건을 옮기는 데 이용하는 기술을 가진다든지...
앞 바퀴를 들고 남보다 험하게 탈 수 있는 기술을 보인다든지...
엠티비자전거를 타고 험한 산을 올라야 한다든지...
이런 목적 지향적인 가치를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두발자전거를 타면 행복하는 행복의 가치, 삶의 가치를 설명하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자전거를 타면서 넘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질 정도로 그 자전거를 타는데 기술이 있다면
그 다음에 찾아오는 여유입니다.
과정에서의 행복도 있을 것입니다. 넘어지면서 무언가 내게 다가온 깨달음...조금씩 나아지는 만족...
어느덧 모르게 내안에 찾아온 중심...
세발자전거를 탈때는 몰랐던 두발자전거를 탈때 필요한 중심에 대한 깨달음...
그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내가 자전거와 하나가 되어서 서로를 느낄 수 있게 하는 그 중심..속도..
그 중심이 무너 졌을때의 회복을 위해서 핸들의 각도와 몸의 움직임...잘못되면 어쩔 수 없이 아픔...
이 모든것들이 내 안에 들어온다면 나는 자전거(신앙하는)를 통한 행복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하지요.

가끔 동창회에 나가면 폼 잡는 친구들이 있지요.
폼을 잡고 싶어서 나온 동창회...
나는 무엇을 이루어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친구들에게...
"정말 행복하니?"라고 물을면 대답이 없어지게 됩니다.
폼 잡지 말고 정말 행복에 대해서 말을 해 볼 수 있겠냐고 묻고 있기 때문이지요.

교회에서의 목사님들이 설교나 교인들의 생활에 진지한 이해없이 적용을 인위적으로 시키고자 할때오는
병적인 시간낭비는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없이 당연히 해야 하는 정도의 일을 말합니다.
자유와 행복이 없는 무조건적이 일들을...
현재 내가 처한 환경을 정확하게 뚫어 볼 수 있는 돌아봄을 가르쳐야 하며 그런 후에 동기부여가 되어진다면
스스로 해 낼 수 있는 방향만을 제시하는 것이 성도들의 영혼에 짐을 덜어 주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아들녀석들이 자전거를 잘 탑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힘이듭니다.
자기 몸에 맞는 자전거를 사 달라고 졸라댑니다.
시시때때로 공원에 자전거를 타러 나가자고 날립니다.
어찌합니까...그것이 자기들이 좋아서 하고자 하는 놀이이니 말입니다.
행복하면 하게 되는 그 것은 내가 스스로 찾아가고자 하는 그 마음의 움직임이 그 사람을 걷게 만듭니다.
억지로가 아닌 스스로의 깨달음만이...

너무오래 신앙생활을 하다보니 제 영혼이 많이 병들었나봅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사람이 시키는 일을 절대로 하지 아니하는 성향의 사람이 되어버렸답니다.
그럼...어떤일을 하는지?
그저 아무런 의도없이 해야 할 일을 합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해야 할 그 섬김을 가정이나 교회에서...그리고 사회에서 그 일을 해 갑니다.
언젠가 내 안에 진리가 오셔서 하시는 그 일..."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저 인간은 누구를 가르친다는 것의 한계를 빨리 알아서 남에게 명령하는 것을 하루빨리 버려졌으면...

아무쪼록 개인적으로 계성아빠님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 교육부서에 있으면서 윗 사람들과 부딛치며 씨름하는 이야기입니다.
무엇하라하지 말고 왜 해야 하는 것인지를 설명하는 일에 집중하라고 말입니다.
그 마지막이 예수님의 말씀하셨던 그 가르침인지...
하나님나라의 일인지에 대한 물음을 계속하다보니 그렇습니다.
당신들의 지시나 적용에 순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강권하지만 실체는
자신들에게 복종하는 것을 말하는 경우들이 십중 십입니다.
잘 들어보시면 보입니다. 알게 됩니다.

행복한 신앙생활이 되어지기를 바라며...
너무 글이 길었지요. 용서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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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온마음

November 26, 2017
*.229.97.134

"예배에서도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청중들의 종교적 감수성이 더 중요한 요소로 취급됩니다. 열린예배를 드리겠다는 취지로 한국교회 안에 하나의 트렌드가 된 <경배와 찬양> 유의 예배에서는 말씀이 실종되고 사람들의 감수성만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예배는 전형적인 혼합주의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면서도 동시에 신자들의 종교적 갈망을 만족시키겠다는 것이니까요." 이 대목에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제가 수년 전에 "목사님께서 경배와 찬양이 전형적인 혼합주의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을 했었습니다. 목사님의 답변이 '경배와 찬양이 혼합주의와 '일치'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럴 위험성이 있다는 거에요." 라고 답변해 주셨습니다.

 위 대목에서 분명히 경배와 찬양을 전형적인 혼합주의라고 단정하셨는데, '그럴 위험성이 있다' 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질 않네요. 이 부분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해주실 수 있나요?

 그렇다면 위 설교에서 혼합주의로 언급하신 여러가지들 예를 들어 물질만능주의, 기복주의 등등 또한 혼합주의와 일치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럴 위험성이 있다는 말로 이해해야 하는 건가요?

 경배와 찬양에 대해서 반복해서 질문을 드려서 너무 죄송스럽습니다. 얼마 전 매일묵상의 혼합주의 관련 글을 읽고 혼합주의 관련 설교를  다시 읽게 되었다가  '혼합주의의 위험성이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의문이 들었고 딱 떨어지지가 않아서 질문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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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November 26, 2017
*.182.156.5

혼합주의라는 말과 혼합주의 위험성이 있다는 말이

같은 의미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처럼 보입니다.

혼합주의라는 말과 혼합주의 위험성이 있다는 말은

강조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같은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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