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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부활절 조회 수 11281 추천 수 125 2008.04.13 15:2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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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베드로전서 2: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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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4.13. (벧전 2:18-25)

베드로전서를 비롯해서 신약성서가 기록되던 시대의 특징은 노예 제도가 일반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편지에도 노예에 관한 이야기가 종종 등장합니다. 실제로 교인들 중에서도 노예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신약성서가 로마 제국과 직간접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역사적 상황을 놓고 본다면 이런 현상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고대의 제국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노예제도를 근간으로 하는데, 로마 제국은 아주 유별났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잡아온 적국의 포로를 노예로 삼았습니다. 이런 노예들의 노동력을 통해서 로마를 지탱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에 노예들이 많은 이유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노예들에게 참된 희망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그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지금 우리는 노예가 아니니까 이런 말씀은 우리와 상관없는 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고대 로마 시대와 같은 의미의 노예는 아니지만 상하 관계로 구성되는 사회 안에서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무늬만 다른 노예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노예에 관한 초기 기독교의 가르침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선 베드로전서 기자가 말하려는 것을 따라가 봅시다.

복종하라.
그는 노예 신분의 기독교인들을 향해서 주인에게 복종하라고 끊어서 주장합니다. 더구나 “두려운 마음으로”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대 로마 시대의 노예생활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을 겁니다. 미국의 노예제도를 고발한 <엉클 톰>이라는 영화나 <뿌리> 같은 영화에서 노예들의 삶이 얼마나 혹독했는지를 약간이나마 맛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인권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소나 돼지처럼 노예시장에서 사고 팔렸다고 하니, 더 긴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 상황을 견딜 수 없어서 도망치는 노예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잡아들이는 전문적인 노예 사냥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최근 미국의 역사만이 아니라 로마의 역사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던 것들입니다. 노예들이 비인간적으로 다루어지는 형편이라면 그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위해서 투쟁하라고 말하는 게 당연한 게 아닐는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노예 주인에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더구나 착하고 너그러운 주인에게만이 아니라 고약한 주인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칼 마르크스가 이런 구절을 읽었다면 기독교야말로 <민중의 아편>이라고 본 자기의 주장이 옳았다고 쾌재를 부를지 모르겠군요.
마틴 루터도 이런 점에서는 욕을 먹기가 안성맞춤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한창 무르익고 있을 때 독일에서는 ‘농민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 농민은 로마 시대의 노예 못지않은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소작농과 같았습니다. 아무리 농사를 잘 지어도 땅 주인만 배부르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농민들은 무장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같은 종교 개혁자였던 뮌처는 농민들을 지지한 반면에 루터는 그들의 폭력적 저항을 반대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많은 역사가들에게 인정을 받지만 바로 이 농민전쟁에 대한 반대는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루터가 그 당시 군주들에게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농민전쟁을 반대했다고 말입니다. 고약한 주인에게도 복종하라는 오늘 본문의 말씀과 농민전쟁을 반대한 루터의 입장이, 그리고 위의 권세에 복종하라는 바울의 주장(롬 13장)이 모두 비슷한 논조입니다. 이런 것들이 과연 옳은 가르침일까요? 아니면 기독교가 현실을 외면한 체, 관념 안에 갇혔다는 증거일까요?
성서는 이 세상을 관념적으로만 접근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원래 악하기 때문에 아예 상관하지 말고 ‘저 세상’만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서는 이 세상을 훨씬 현실적으로 봅니다. 문제는 여기서 무엇이 현실이냐 하는 관점의 차이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성서기자는 이 세상에 ‘고약한’ 주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 밑에서 노예 기독교인들이 당하는 고통은 정말 ‘억울한’(19a) 일입니다. 성서기자는 악한 주인이 얼마나 야비하고 악랄한지, 노예들이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하는 게 이들의 삶을 지켜낼 수 있는 현실일까요? 싸워서 권리를 확보하라는 것일까요? 그런데 성서기자는 주인에게 복종하라는 대답을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그 당시의 노예제도는 폭력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고대 로마 시대에 노예들이 폭력적으로 저항한다는 것은 죽음을 담보해야만 했습니다. 실제로 주인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만이 아니라 도망가는 것조차 용서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노예전쟁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 잔인하게 학살당하고 말았습니다. 대화 자체가 불가능한 악과의 소모적인 싸움이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닙니다. 루터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그 당시에 농민들의 반란은 도저히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농민전쟁은 실패했습니다. 루터는 군주들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농민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전쟁을 거부한 것입니다. 어느 쪽이 더 현실적일까요? 아니, 어느 쪽이 생명의 현실에 가까울까요? 죽는 게 분명한데도 무모하게 저항하라고 닦달하는 건가요, 아니면 구조 악 앞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라고 가르치는 건가요? 각각 시대와 형편이 다르기 때문에 이것을 칼로 무를 자르듯이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마음을 열고 성령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인다면 어떤 대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베드로전서의 저자는 무모한 싸움을 피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둘째, 생명의 현실은 사회제도의 개혁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일치입니다. 이 관점이 훨씬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성서는 생명의 현실이 노예제도를 극복하는데 한정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노예제도는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는 점에서 해결해나가야 할 중요한 문제이지만, 그것만으로 우리가 생명의 현실을 획득하지 못한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지금처럼 호사스럽게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생명의 온전한 현실에 참여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을 보면 이게 확실합니다. 신앙인들은 이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복지향상이나 휴머니즘 제고와 일치하는 게 아닙니다. 이것을 구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노예들에게 무력으로라도 투쟁하라고 강요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세계화의 물결이 지구촌 전체를 밀물처럼 뒤덮고 있습니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벽을 허물고 지구촌 전체를 한 나라처럼 꾸려가자는 요구입니다. FTA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몇 년 전부터 우리 농민 대표들께서 국내외에서 벌어지는 이런 세계화 운동에 강력하게 반발했습니다. 이런 저항에 기독교의 진보 측 인사들도 동참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크게 보면 그런 쪽에 속합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농민 대표들이 자해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실제로 목숨을 잃은 이들도 있습니다. 세계화 반대가 과연 우리의 목숨을 걸고 싸울만한 사건인지, 저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선포하는 목사들이 섣부르게 이런 과격한 반대투쟁에 연대함으로써 결국 이런 죽음에 간접적으로나마 책임을 지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약한 주인에게도 복종하라고 가르칩니다. 어떻게 보면 비겁해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순교를 불사했던 초기 기독교인들을 비겁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투쟁해야 할 대상이, 요즘 식으로 주적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못하게 하는 힘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노예로 산다는 것은 비록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이 따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독교 신앙을 보존할 수는 있었습니다. 2천년이 지난 오늘의 사회과학적 시각으로는 초기 기독교의 이런 신앙을 비판하면 곤란합니다. 그들은 싸움을 피하는 것이 곧 노예 기독교인들을 살리고, 공동체를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결과적으로 옳았습니다. 만약 노예들을 향해서 ‘저항하라.’고 가르쳤다면 기독교는 역사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정의
저는 주인에게 복종하라는 이 가르침이 기독교가 역사에서 살아남았다는 그 한 가지 사실에 근거해서 옳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기가 살 궁리를 눈치로 때려잡은 사람들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훨씬 본질적인 신앙적 확신에서 행동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 한 가지 사실에 매진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심판은 하나님의 몫이라는 확신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초기 기독교인들이 노예제도의 잘못을 모르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거대한 악과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네로 황제와 도미티안 황제 시대에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을 벌였습니다. 지금 당장 폭동을 일으켜서 끝장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악을 심판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 사실을 그들은 예수님 사건에서 배웠습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그 사실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는 죄를 지은 일도 없었고, 거짓도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당한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았습니다.(22,23절) 그 내용은 70인 역의 이사야서에서 인용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의대로 심판하시는 분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기셨습니다.”(23b)
모든 것을 하나님의 심판에 맡긴다는 게 무슨 뜻인지 예를 드는 게 좋겠군요. 학교 교실에 많은 아이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중에는 정말 못된 아이도 있습니다. 그 아이는 왕초노릇을 합니다. 아이들에게서 돈도 빼앗고, 때로는 구타하기도 합니다. 돈을 빼앗긴 아이는 다시 달라고 투정을 부리고, 맞은 아이는 자기도 한 대 때리려고 기회만 엿보고 있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서로 씩씩거리면서 화를 내고, 힘들어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 아이가 있습니다. 이 아이도 못된 아이에게 당하기는 했지만 마음이 그렇게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 아이는 종례 시간이 되면 선생님이 오셔서 모든 걸 정상적으로 돌려놓는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이 정의롭게 심판하신다는 믿음으로 현실의 고통을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 태도는 약자의 자기 합리화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지금 당장 주먹이 센 사람이 최고지 무슨 하나님의 심판을 믿느냐고 말입니다. 실제로 이 세상을 보면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믿기 힘들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간혹 정의로운 것 같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힘과 돈이 정의처럼 행세하고 있습니다. 정의를 실현할 최후의 보루라 할 사법부도 돈의 힘으로 좌지우지될 때가 많은 걸 보면 더 이상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서 말할 기분이 나지 않습니다. 현대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 자리할 여유가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경험과 생각만으로는 그런 확신이 들지 않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아니 그렇기 때문에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경험과 생각에 의존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확신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그런 확신으로 사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늘 부족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넉넉합니다. 넉넉할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 정도로 차고 넘칩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해야 옳습니다. 이사야 53:4,12절을 인용한 오늘 본문 24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친히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스도 덕분으로 우리는 죄의 권세를 벗어나 올바르게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매 맞고 상처를 입으신 덕분으로 우리의 상처는 치료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목해야 합니다. 그에게 일어난 이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에 모든 마음을 걸어두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에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맡겼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십니다. 초기 기독교인의 신앙에서 바로 이 사실이 중요했습니다. 이 세상의 악한 힘은 자기의 뜻을 따라주지 않는 대상을 십자가에 처형시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은 십자가까지라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들의 한계상황입니다. 예수님은 저주의 대상이었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 바로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입니다. 그 부활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모욕은 더 이상 절망과 무기력증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사실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저의 설교를 듣고 오해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불의에 전혀 저항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 저항은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자기가 선택할 문제입니다. 각자의 살림살이를 조금 더 윤택하게 하고, 소외당하는 이들을 돕는 일들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독교인들이 마땅히 행할 일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핑계로 자기 안일에만 빠져 있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런 투쟁이 우리 삶의 최종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더 큰 승리가 이미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것을 알고, 믿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비굴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으며, 자기의 개인적인 욕망에 치우치지 않으며,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하나님의 가장 분명하고 정의로운 심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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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0]웃겨

April 14, 2008
*.153.93.97

그렇군요...! 루터가 왜 농노들의 편에 서지 않았는지.. 확연히 풀렸습니다.
제도권 안에서의 무모한 싸움은 고귀한 생명을 역행하는 소모전일 뿐이라는..
보다 더 근원적인 생명을 이해한 것이군요. 보이는 현상을 넘어선 하느님의 정의와 심판을
기다리는 긴 인내와 믿음이 무러무럭 자라 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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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미들타운

April 14, 2008
*.49.154.94

이 설교를 읽으면서 민주화 운동이 한창일때 김지하씨가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우라" 라는
칼럼을쓰고서 일으켰던 반향이 떠오르네요.
대학생,노동자들이 민주화를 위해 분신자살이라는 극단적 저항을 펼치고 있는데
민주주의를 위해 온몸을 던져 싸우고 글로 말하였던 김지하 시인이 ..
아마 그 분도 오늘 목사님의 설교와 같이 생각하셨나 보네요.
(저는 사실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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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April 14, 2008
*.181.51.93

농민전쟁, 분신 같은 주제로 들어가지 말아야겠습니다.
아주 복잡한 문제이거든요.
더구나 죽음을 던지는 분들의 그 실존적 적박감을
제 삼자가 논평할 수는 없으니까요.
루터 이야기만 조금 보충하겠습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두왕국설'을 주장합니다.
이 세상의 질서는 군주에게,
영적인 질서는 교회에게 주어져 있다는 거지요.
보통 이원론이라고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루터의 주장이 그렇게 이원론으로 치부해버려도 괜찮을 정도로
나이브하거나 보수적인 게 아니랍니다.
현실을 정확하게 뚫어본 신학자의 양심에서 우러나온 관점이지요.
교회가 세상에서 걸림돌처럼 투쟁해야 할 때가 있지만,
모든 문제에 시시콜콜 간섭하는 건
교회의 영적 차원을 세속화하는 거에요.
그 경계선을 찾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어떤 문제까지 투쟁하고
어떤 문제에서는 물러서야 하는지가 말이지요.
예컨대 대통령제를 하느냐, 의원내각제를 하느냐, 하는 문제는
정말 지상의 문제겠지요.
총선에서 어느 당이 의회를 장악하느냐 하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민노당이 의회의 다수당이 되는 것과
교회의 하나님 나라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하나라 당과 하나님 나라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교회는 더 큰 악과 싸워야 할 겁니다.
극단으로 흘러가는 자본주의는 우리가 투쟁해야 할 바알과 같겠지요.
루터의 사명은 당시 로마가톨릭 교회의 개혁에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회과학적인 안목이 부족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의 신학적 영성에 근거한 두왕국론은
폐기처분되어야 할 교리가 아니라
여전히 생명력이 있는 가르침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참고적으로 위의 권세에게 복종하라는 바울의 주장은
두 가지 배경이 있습니다.
하나는 로마 제국이 악하다고 하더라도 무질서보다는 낫다는 겁니다.
이라크에서 후세인이 악이었지만 그가 없어진 이라크에 더 큰 불행이 시작되었다는 데서
이른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북한 정권이 불량하지만 그들이 무너져서 무질서가 지배하는 것보다는
그런 질서라도 유지되는 게 낫겠지요.
둘째, 바울의 복종하다는 대상은 로마라는 큰 제국이 아니라
지방 정부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들 지방 정부는 기독교 공동체와 가까이 관계를 맺고 있어서
그들이 기독교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될 수 있었던 거지요.
두 발을 땅에 딛고 사는 오늘의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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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지니땅

April 15, 2008
*.129.58.85

예수님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말씀이 생각나는군요, 귀한말씀 감사합니다.(런던이야기의 신완식목사님카페에 가입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인사드리구요, 더 많이 찾아뵐게요,,목사님이하 다비아 회원 여러분들도 평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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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3]달팽이

April 16, 2008
*.78.246.98

말씀이 살아 움직여 내 마음을 요동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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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2]샘터

April 16, 2008
*.243.104.14

이번주는 "설교보기"나 "설교듣기"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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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April 17, 2008
*.181.51.93

에레마 님,
지난 주일에 동영상을 다룰 줄 아는 교우가 교회에 못 나왔습니다.
저도 할 줄 모르거든요.
그게 옛날에 하던 엘피쓰리가 아니라, 복잡합니다.
캠에 들어있으니까
다음 주일에 올리겠습니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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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April 17, 2008
*.77.108.107

"루터는 군주들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농민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전쟁을 거부한 것입니다."

위의 내용은 어떤 근거에 의해서 주장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목사님의 어떤 신학적 확신에 의해서 나온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만일에 "제 생각에는 루터가 .....이러 이러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면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텐데요
끝 부분에 가서 "....전쟁을 거부한 것입니다"라고
단정적으로 자신있게 주장하시기에 드리는 질문입니다.
혹시 루터가 농민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자신은 전쟁을 반대할수 밖에 없었노라고
자신의 입장을 밝힌 문헌을 참고하셨는지요?
딴지 걸려고 질문하는게 아니고 사실 관계를 알고 싶어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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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April 17, 2008
*.181.51.93

와, 민들레 님이 꼭 필요한 점을 짚어주셨군요.
나도 약간 찜찜했던 부분인데요.
루터가 농민들의 희생을 염려 해서 농민전쟁을 반대했다는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질문이군요.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아니, 근거를 찾으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겠군요.
내가 알고 있는 루터 사상을 기초로 해서
그렇게 해석한 겁니다.
그런 해석이 옳은지 아닌지는
아마 교회역사학자가 판단할 수 있을 텐데,
아마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설교는 학문을 말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언제가 근거를 제시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런다면 "제 생각에는..."하고 말하는 게 좋다고 보시는군요.
설교는 그렇게 표현할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선포이기 때문에 웬만하면 그냥 자기의 생각을 말해도 좋습니다.
물론 조심해야하겠지만요.
아마 농민전쟁과 루터에 관한 문제는
학위 논문만이 아니라 책도 많기 때문에
혹시 관심이 있는 분이나
이미 잘 알고 있는 분이 도움을 주시면 좋겠군요.
참고적으로 바울이 위의 권세에게 복종하라고 한 말도
무조건 정치권력에게 복종하라는 뜻인지
아니면 내가 해석한 대로
기독교 신앙을 위해서는 악한 질서라고 필요하다는 생각인지
바울이 딱 뿌러지게 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해석할 수 있을 뿐이랍니다.
그런 해석은 바울의 전체 신학과
초기 기독교의 기본적인 가르침과 역사 과정을 종합적으로 보고
시도해야겠지요.
결론적으로
루터의 생각에 대한 나의 주장은
어떤 구체적인 문헌이 아니라
나의 개인적인 루터 해석에 의한 것이랍니다.
이거, 틀렸으면 어쩌지요?
감사.
profile

[레벨:100]이길용

April 17, 2008
*.141.162.85

"루터는 군주들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농민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전쟁을 거부한 것입니다."

이 부분은 너무 루터에 대하여 호의적인 평가일 수도 있겠네요.
실제 루터는 정치영역에서는 지극히 보수적이었고
농민에 대한 시각도 단순히 희생을 줄이는 차원은 아니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정목사님의 저 판단은 1525년 4월에 쓴 "평화를 위한 권면"(Ermahnung zum Frieden)만 놓고본다면 크게 어긋났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루터는 저 글이 나왔음에도 농민들의 저항이 수구러지지 않자 한달 후인 5월에
"살육과 약탈을 일삼는 농민의 무리에 대항하여"(Wider die räuberischen und mörderischen Rotten der andern Bauern)라는
매우 거칠고 폭력적인 대 농민관을 드러냅니다.

루터의 시각은 단촐했죠. 국가와 세속의 권력 역시 신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그에 대한 저항은, 그것도 폭력을 동반한 저항은 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보았고
따라서 군주가 폭압적이고 못되먹었다 해도
그 권위에 폭력으로 저항하는 것도 역시 못지 않게 강도요 나쁜 짓거리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권력자들에게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농민들을 잔혹히 진압할 수 있는
이론적이고도 신학적인 토대를 제공하게 되고
그 결과 농민전쟁을 통해 10여만명의 인명이 희생되고 말지요.

이 점에서 루터와 뮌처는 대척점에 서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에고.. 막 집에 도착해서 기억에만 의존해서 무언가 적으려하니
정신이 없네요..

저도 대충 생각나는 대로 적은 거니까.. 보충해줄 분 있으면 보충해주세요~

일단 씻고 좀 쉬어야 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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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April 17, 2008
*.181.51.93

어쩌다가 루터와 농민전쟁 이야기를 해 갖고
변명하느라 내가 고생 좀 하네요.
이런 문제를 세세하게 다루려면 정말
본격적인 논문 한 편을 써야할 겁니다.
그냥 '재미'로 한 마디 더 붙입니다.

이길용 박사님이 제공해준 루터의 글을
내가 직접 읽어보지 못했답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번역이 됐나 모르겠지만.
두번째 논문이 문제군요.
나는 주로 전체적으로 보는 입장인데요,
루터가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군주편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역사를 호도한다고,
또는 비인간적 폭력을 조장했다고 보진 않습니다.
이런 건 바울이나 어거스틴을 볼 때도 마찬가지인데,
신학과 영서의 거장들은 진리에 대한 통찰이 있거든요.
루터가 "다른 농민들...."의 폭력에 대해서 폭력적인 방법으로 억압하다고 주장했다고 해도
아마 거기에는 많은 속사연들이 담겨 있을 겁니다.
그런 것들을 다 빼놓고, 폭력적인 억압을 용납했다 하고 비판하면
너무 단순하게 보는 거겠지요.
더 크게는 아마 두왕국론에 의한 세속의 질서를 옹호한다는 것이겠지만요.
그것도 무조건 보수적이다, 하는 방식으로 재단하기는 쉽지 않는 거지요.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인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에서 말하듯이
현실주의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선한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악을 자행하게 되고,
그 실재적인 악을 통제해야 할 힘은 필요한 거겠지요.
내 눈에 바울, 어거스틴, 루터, 바르트, 그리고 판넨베르크의 진술들이
모두 옳게 보이는 이유가 뭐람?
제길헐!
그들은 내가 도저히 오르지 못할 높은 산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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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0]웃겨

April 18, 2008
*.156.33.160

저도 이길용박사님처럼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정목사님 설교를 듣고 그렇게 깊은 뜻이 ...
하고 탄복을 했는데..헷갈리네요. 어떤 입장에 서야할지?
그래도 정목사님 의견에 따르고 싶은 심정입니다.
안 그러면 슬퍼지네요.. 신학적 거장이 그렇게 단순하게 세속질서를 옹호했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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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April 18, 2008
*.181.51.93

웃겨 님, 웃기셨네요.
"안 그러면 슬퍼지네요..."하고요.
웃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답으로 한 마디 드릴께요.
신학과 영성의 대가들을 내가 신뢰하는 이유는
그 사람들이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경험한 진리가 완전하기 때문이랍니다.
하이덱거 식으로 말해서
진리의 존재론적 능력을 믿기 때문이지요.
만약 어떤 사람이 진리 경험을 했다면
그는 그 진리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이는 흡사 음악경험을 한 사람이
그 음악 안에서 살아야 하듯이 말이지요.
바울, 루터 같은 사람들은 바로 기독교적 진리를 경험한 사람들이거든요.
그들의 세상 인식이 불완전하다 하더라도
결국은 진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지요.
그런데 내가 이렇게 말은 하지만
역사적 인물들을 판단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모세도 한 나절에 삼천명(?)을 때려죽인 일이 있었거든요.
마지막 때 모든 게 밝혀지겠지요.
그때까지,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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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김재남

April 19, 2008
*.185.234.235

종종 뵙게 되는 '아자!'에 힘을 얻습니다.
마지막 때도 '안 그렇다면... 슬퍼지네요.'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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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한상복

May 02, 2008
*.235.147.16

오랜만에 또 글을 쓰게 되네요.
뉴스앤조이에서 이 설교를 읽고 대화나누고자 이 곳에 들렀습니다.
정목사님의 말씀을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또 신학적 방향성 또한 항상 동의하는 저 입니다만.
항상 느끼는 의문을 이 말씀에서도 느끼게 됩니다.
제가 자주하던 문제제기입니다만 인간의 책임성에 대한 문제가 그것입니다.

위 말씀에서 "복종하라"는 베드로전서의 말씀과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설교의 큰 대지는 공감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자칫 기독교인들에게 숙명적인 삶을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땅의 정의는 물론 하나님에 의해 궁극적으로 이 땅에 주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하나님의 정의가 주어지기만을 바라고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책임성있는 결단과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용기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에 동참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 아닐까요?
현재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셨습니다만,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투쟁을 하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행동을 한 사람 정도로 말씀하셔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만 그들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목사님은 그 당시 '저항하라'고 가르쳤으면, 기독교가 사라졌을 것이라고 말씀하지만, 저는 오히려 '저항하지 말라'고 가르치면 기독교가 역사가운데서 사라진다고 봅니다.
폭력적인 방법은 물론 거부되어야 하겠지만 기독교인은 자신의 시대의 악한 세력들에 언제나 저항해야하고 그 저항하는 행동이 하나님의 정의를 믿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유일한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간디가 "나의 인생이 나의 메시지다"라고 말했다고 하던데, 저는 "행동이 곧 믿음이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기다리라" 그것은 이미 행동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추구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승리의 약속인 것입니다.
그 약속을 정의를 위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주어지는 것처럼 선포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비약입니다만, 어떤 사람들은 이 글을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정부가 FTA하자고 하면 복종하라
소고기 먹으라고 하면 먹어라
반대 시위 따위는 하지마라
그들의 죄는 하나님께서 갚아 주신다.
광우병에 걸려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실 것이다.
믿으라"

마르크스가 비판한 종교의 아편적 특성을 이 설교는 어느 정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목사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이 의미가 아니라는 것 분명 압니다만
이 글을 읽는 독자들, 그리고 이 글을 재차 인용하여 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설교에 대한 제 이해가 부족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짧은 생각에 갇혀 목사님의 깊은 메시지를 듣지 못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 생각을 정리도 할겸 목사님의 답변도 듣고 싶기도 하고 해서 두서없이 적었습니다.
무례했다면 용서하십시오.
경주에서 사역하느라 자주 뵙지 못해 아쉽기도 합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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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May 02, 2008
*.181.51.93

한상복 전도사,
반갑소이다.
공부 잘 하던 학생인데,
목회도 역시 잘 하고 있을 거로 믿소.
내 경험으로는 신학공부와 목회는 거꾸로 가던데... ㅎㅎ

위의 설교에 대한 문제 제기를 잘 읽었소.
젊은 교역자로서 당연힌 그런 문제의식이 필요하오.
이렇게 짚은 구절이 눈에 뜨이는군.

<현재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셨습니다만,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투쟁을 하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행동을 한 사람 정도로 말씀하셔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만 그들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내 말을 오해한 것 같소.
FTA 반대 집회에서 칼로 심장을 찔러 자기 생명을 바친 그분을 매도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분위기를 끌어가거나
또는 그 일 뒤에 그것을 부추기는 행동들에 대해서 언급한 것뿐이오.
자기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판단이야 제 삼자가 뭐라 할 수 있겠소.
일본의 어떤 경제인들은 회사 부도 등으로 인해 명예가 실추되었다는 사실로 할복하기도 하고,
우리나라의 어떤 교장 선생님도
약간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서 음독 자실을 하셨소.
수년 전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이오.
그들에는 자기 생명보다 명예가 더 중요한 거였소.
조금 더 선정적으로 말해도 이해바라오.
바람핀 남녀가 동반 자살하는 경우도 많소.
나는 그들의 선택에 대해서 뭐라 말할 게 없소이다.
다만 생명을 걸어야 할 일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는 정확하게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뿐이오.

정부가 미국 소고기 먹으라 하면 먹어야 하는 거 아니냐, 하는 식으로
내 설교를 받아들일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는 염려를 했군.
만약 그런 뉘앙스가 거기서 발견된다면
내 말솜씨와 글쓰기가 서툴기 때문이오.
설교 마지막 패러그래프에서 그걸 분명하게 짚은 걸로 아오.
그 대목을 다시 읽어보시구랴.

한 전도사는 내가 경북 대구 지역에서 어떻게 진보적 활동을 하는지 알 거요.
십 수년 동안 인권위와 목협 활동을 했으며,
촛불 시위를 비롯해서
역사 변혁을 위한 개신교 목사들의 연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소.
그러나 나는 일종의 행동주의에 희망을 걸지 않소.
이런 행동주의는 또 하나의 극단주의로 빠져들 염려가 많은 거요.
하나님의 행위가 아니면 역사변혁도 불가능하다고 믿는 거지.
한 전도사가 위에서 인간의 역사적 책임을 말했지?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에 희망을 건다는 건
바로 역사적 책임까지를 포함하는 거요.
그걸 자꾸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면
성서의 종말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요.
종말론은 바로 역사관이란 말이오.

이건 또 목회적 관점으로 한 마디 해야겠소.
자네도 앞으로 평생 그렇고그런 민중들과 함께 목회해야 할 사람이니 말이오.
신자, 민중, 청중들을 못 살게 굴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어떻겠소?
신자들을 교회성장의 도구쯤으로 여기는 목회자들만이 아니라
신자들을 역사변혁의 용사로 나서게 하는 목회자들도
내가 보기에는 신자들의 영혼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에 눌리게 하는 거요.
왜 그런지는 여기서 길게 설명할 수 없소.
인간, 세상, 신학이 눈에 더 크게 들어오면 저절로 알게 될 거요.

일례로,
초기의 칼 바르트가 자펜빌에서 목회할 때
노동조함에 가입하는 등,
종교사회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가
1910년대 중후반부터 발을 빼게 된 이유가 무언지 아시오?
내가 뭐 현대신학을 강의할 거는 없으니
그냥 질문으로 끝냅시다.
복음이 신자들의 영혼을 잠들게 하는 '아편'이 되면 문제겠지만
신자들의 영혼을 과민하게 만드는 '각성제'가 되어도 문제 아니겠소?

결론,
종말론적으로 일어나게 될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믿고 희망한다는 것은
현실 역사를 방관한다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우리의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된다는 믿음이라 할 수 있소.
만약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아름다운)의도에 따라 실현된다면
얼마나 허무하겠소?

한 전도사,
좋은 질문 주어서 고맙네.
언제 한번 기회가 닿면
친구 전도사들과 함께 내게 오시게나.
밥을 살테니....
profile

[레벨:2]한상복

May 03, 2008
*.235.147.16

답변 감사합니다 목사님.
목사님의 삶이나 신학이 사변적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행동하는 신앙이라는 것이 꼭
팔 걷어붙이고 거리로 달려 나가는 것만을 의미한다고 생각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저에게는 이분법적으로 나누고자 함이 아니라
희망과 책임은 같은 것으로서 함께 강조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희망이 없이는 올바른 책임적 삶이 불가능하고,
행동하는 책임적 삶 없이는 희망을 이야기 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목사님의 설교가 한쪽으로 치우쳐 보였던 것입니다.

하여간, 현실참여에 대한 요구가 '각성제'가 될 수 있다는 지적에 공감하며,
조심하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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