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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때’

대림절 조회 수 9020 추천 수 9 2008.12.01 20:51:17
설교듣기 : mms://wm-001.cafe24.com/dbia/dawp_081130.mp3 
성경본문 : 마가복음 13:28-37 
마지막 ‘때’
2008.11.30.(막 13:28-37)

오늘은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 절기인데, 성탄절 전 네 번째 주일인 11월 마지막 주일이나 12월 첫 주일부터 시작됩니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는 바로 이 하나의 사실에 매달려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만약 대림절 신앙이 부정된다면, 또는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된다면 기독교는 한때 부흥했지만 역사에서 사라진 많은 종교와 똑같은 운명에 처할지도 모릅니다. 지금 제가 대림절 신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과장하는 게 아니라 기독교 진리의 성격을 사실대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대림절 신앙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이유를 다른 데서 찾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윤리적으로 살기 위해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합니다. 예수 믿는 게 별 거냐, 세상에서 착하게 살기 위한 거지,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굳이 기독교 신앙을 선택할 필요 없이 동서양의 성현들에게서 윤리 공부를 받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복을 받으려고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더 노골적으로는 죽어서 천당가기 위해서 믿는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윤리, 복, 천당에 초점을 둔 이 세 종류의 신앙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림절 신앙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윤리에 신앙의 목표를 두는 사람들은 주로 지성적인 실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여기서’ 이웃을 위한 박애주의적 삶을 실천하는데 집중합니다.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이 세상은 그런 정도나마 유지되고 있는 게 아닐는지요. 그들의 그런 모범적인 실천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부족하지만, 이들의 신앙에는 예수의 재림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기복적인 데만 관심을 두는 분들도 현재 자기와 가족의 건강과 재물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예수의 재림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 천당을 외치는 분들이 앞서의 분들과 비교해서 대림절 신앙에 가장 가까이 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천당은 이 땅의 욕망이 투사되는 것이기 때문에 대림절 신앙과는 거리가 멉니다.
위에서 설명한 세 유형의 신앙이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대림절 신앙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오늘 한국교회의 신앙현상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궁극적인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거의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보입니다. 겉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과 순수성을 보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에게 몰입하고 있습니다. 설교의 주제도 한결같이 믿음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보다 잘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에 머물러 있는 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 사건에 관심을 기울 수가 없습니다. 자기 미모에만 온통 정신을 파는 사람은 그것 너머의 현실과의 만남을 통해서 가능한 시인도 될 수 없고, 음악가도 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오해는 마세요. 외모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매도하는 게 아닙니다. 삶의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자기와 자기 교회에만 매몰되어서 정작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놓쳤다는 것 말입니다.
이렇게 질문해보세요. 나는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열망이 강한가? 거꾸로 그런 것에 아무런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불행하게도 여러분은 아직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들어온 게 아닙니다. 구경꾼인지도 모르지요. 그렇다고 너무 걱정은 마세요. 하나님의 은총은 구경꾼에게도 임하니까요. 그래도 가능하면 구경꾼으로 남지 말고 그 신앙의 중심으로 깊숙이 들어가도록 하십시오.

변증법적 긴장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님의 재림을 열망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철썩 같이 믿고 기다렸습니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 본문의 바로 앞 구절에 따르면 초기 기독교인들 중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생전에 경험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재림은 그때까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제자들과 예수를 직접 만났던 이들이 죽기 시작했습니다. 기원 후 70년에는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해서 점령당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전쟁이 바로 예수 재림의 징조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신앙적 긴장이 이완되고 어수선해진 상황에서 마가복음이 기록되었습니다. 본문은 그 재림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첫 이야기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입니다. 모습이 변하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계절을 살피듯이 세태를 보고 주님이 오실 때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2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이런 일은 막 13:14 이하에서 묘사되어 있는 전쟁이나 대기근과 같은 환난을 가리킵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그 환난을 앞에서 언급한 유대전쟁이라고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는 임박한 것입니다. 마가는 천지가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말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이 사실을 강조했습니다.(31절) 그러나 그 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릅니다. 아버지만 아십니다.(32절)
둘째 이야기는 멀리 떠난 집주인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먼 나라로 나가면서 종들에게 각각 일거리를 맡겼습니다. 주인이 돌아오는 건 분명하지만 그 때가 언제인지는 모릅니다. 마가복음은 밤을 세 경점으로 구분하는 유대인의 계산과는 달리 네 경점으로 구분하는 로마인의 계산을 따라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모른다고 말입니다.(35절) 집주인이 돌아와서 종들이 자고 있는 걸 보면 책임을 추궁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으라는 겁니다.  
본문에 나오는 두 이야기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마지막 ‘때’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때’가 키워드로 작동됩니다. 직접적으로 그 날과 그 때를 말하기도 하고, 또는 간접적으로 그 때를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가 말하는 ‘때’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재림의 때이고, 심판의 때입니다. 종말이면서 시작입니다. 부활의 생명이 완성되는 때입니다. 신앙생활의 경력이 어느 정도 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런 생각에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본문을 피상적으로 읽지 말고 깊이, 실질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미 여러분이 눈치 채고 있겠지만, 그리고 제가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이지만 마가복음 기자는 이 ‘때’의 성격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그 때가 분명히 온다는 것, 특히 임박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 때를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대림절 신앙은 바로 이 두 사실의 틈바구니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만으로는 진리가 아닙니다. 둘이 더불어서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드러냅니다.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한쪽으로만 치우치지 말아야 하고, 그렇다고 해서 어중간한 중간에 자리를 잡아서도 안 됩니다. 이 두 사실이 변증법적인 긴장을 이룬다고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이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 정확한 때를 모르며, 거꾸로 그 ‘때’를 모르기 때문에 그 때는 임박해 있다고 말입니다. 마가는 재림의 지체와 유대전쟁으로 신앙적인 위기를 경험하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향해서 바로 이 사실을 전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며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과 그 때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사실과 그 때를 모른다는 사실을 모순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더 노골적으로는 속임수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생각은 그렇게 터무니없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재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혹시 예수님의 생각을 제자들이 오해해서 재림을 선포한 것은 아닐까요? 이런 문제는 오늘 우리에게도 심각합니다. 예수님은 정말 오시기는 오시는 겁니까? 오신다면 어떻게 오시는 겁니까? 손오공처럼 구름을 타고 오시는 건 아니겠지요. 우리의 마음에 오시는 것도 아니겠지요. 오신다면 2천 년 전 유대인으로 살다가 서른세 살에 십자가 처형을 당한 바로 그 유대 청년의 모습으로 오시는 걸까요?
이런 질문은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찾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이들이 이런 문제를 막연하게 생각하고 지나갑니다. 대림절 신앙이 우리의 삶에서 역동적으로 다가오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과 삶이 분리되었습니다. 재림은 예수의 문제이고 세상살이만이 우리의 문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에 관해서 질문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당장 대답을 찾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또는 더 헤매는 한이 있더라도 질문 안으로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일반적인 공부도 질문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신앙에서도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질문은 그 날과 그 때를 왜 모르는가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막 13:32절에 의하면 그 때는 아버지만 아십니다. 천사도 모르고 아들인 예수님도 모릅니다. 여기서 핵심은 그 때의 결정이 아버지에게 독점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에 따르면 집주인이 ‘홀연히’ 오기 때문에 종들은 그 때를 모릅니다. 여기서도 핵심은 그 때가 집주인의 독단적인 결정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집주인만이 그 날과 그 때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이 권한이 아버지에게만 배타적으로 주어졌다는 말은 그분이 창조자이고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그분이 집주인이고 우리가 종이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실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간이 왜 종이냐, 인간은 자기에게 주인이다, 인간은 정말 위대하다 하고 말입니다. 그들의 주장처럼 기독교 신앙이 자칫하면 인간을 열등감에 빠지게 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지난 역사에서, 그리고 지금도 인간에게 심리적인 죄책감을 불어 넣는 일도 많습니다. 그런 가르침은 물론 잘못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의지와 능력으로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몇 년을 더 사는지 계산해보십시오. 30년, 50년, 100년일까요? 그게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2007년 대림절이 일 년 전에 지나갔는데, 우리는 지금 한 해를 훌쩍 지나치고 2008년 대림절을 맞았습니다. 일 년이 짧다면 10년도 똑같이 짧은 겁니다. 10년이 짧다면 100년도 짧은 겁니다. 우리가 우리의 일상에 휘둘려서 그 사실을 놓치는 게 문제이지, 영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놀라워서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아무도 이런 시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시간과 더불어 우리 모두는 이렇게 나이를 먹고 늙고, 이제 이 세상의 삶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피조성입니다.  
여러분, 시간과 더불어 쏜살같이 흘러가는 우리의 인생이 허무하다는 걸 말씀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렇게 흘러간다는 것은 허무가 아니라 은총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한 자리에 멈춰버린다면, 그래서 늙지도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저주이겠지요. 우리가 지금 이렇게 나이가 들고 늙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에 가까이 이른다는 의미입니다. 이게 실감이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대개는 늙는 걸 서럽게 생각하겠지요. 그런 생각은 생명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과 편견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나오는 오해입니다.
성서는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서 완성된다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의 생명이 완성되는 때가 바로 주님이 재림하는 때입니다. 그 때가 바로 완전히 변화된 생명인 부활의 때입니다. 문제는 그 때를 모른다는 데에 있습니다.
왜 모르는지 그 대답을 드릴 때가 왔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전체’로서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피조물인 우리의 인식은 늘 부분적입니다. 그런 존재가 전체를 볼 수는 없습니다. 전체를 보려면 생명이 완전히 드러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위의 설명으로 주님의 재림이 늦어지는 이유가 충분히 해결됐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여전히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비유를 하나 들겠습니다. 제가 아마 다른 설교에서도 이 비유를 말씀드렸을 겁니다. 대형 퍼즐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퍼즐 조각을 붙들고 전체 그림이 무엇인지를 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전체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이 바로 생명의 완성인 재림의 때입니다. 퍼즐 조각이 점점 자리를 찾아가고 있지만 우리 눈에는 그게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모르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이미 마지막 생명이 선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부분적이지만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전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우리가 모르고 있는 순간에 우리의 제한적 삶 안에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생명이 이미 들어왔습니다. 그 생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에게서 이미 종말에 일어나게 될 생명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우리는 참된 생명에 접붙임을 받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깨어 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사의 한 순간에 머물고 있지만, 여전히 잠정적인 생명 안에 머물러 있지만 그는 이미 종말의 생명을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지막 ‘때’가 이미 현재의 ‘때’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이것이 대림절 첫 주일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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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3]우디

December 01, 2008
*.141.21.47

재림이 무척 기다려집니다. 두근두근합니다.
그 퍼즐이 맞추어지는 순간 선취된 생명이 완성됨을 맛보는 순간 가슴이 터져버리지 않을까요?
그러다가도 종종은 세상에서의 무한경쟁으로부터의 도피심리를 못벗어난 차원이 아닌가 가슴을 쓸기도 합니다.
무한경쟁에서 막강한 우위를 점하고 재림을 그다지 기다리지 않고 사는 삶.
재림에의 기대가 상실된 삶. 정말 끔찍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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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시와그림

December 02, 2008
*.109.72.190

내게 예수는
싸구려 성화 속의 모습이었습니다
기독교 서점 기념품 코너에 놓인,
혹은 대로변 행인들 발치 옆에 세워 파는
'문 두드리는 예수' 였습니다
내가 원할 때 부르면
원한 것을 준다고 약속하는 착한 예수...

지금 내게 반문합니다, 예수는 누구냐고

'문 두드리는 예수'는 키치적이었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
그를 도무지 그리지 못하겠다고...
무지함만도 아니고 두려움만도 아니고
그를 도무지 말하지 못하겠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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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시드니

December 02, 2008
*.101.112.210

한가지 드리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제가 죽는 날이 곧 세상의 종말이고, 재림의 날이고, 심판의 날입니다.
내가 죽으면 모든게 끝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혹시 기절해 보신 경험이 있으신가요? 5분을 기절했건 10분을 기절했건, 깨어나는 순간은 기절하기 직전의
순간과 바로 연결이 되어서, 어? 왜 내가 갑자기 여기 누워있지 ? 하고 멍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성경 어디엔가 우리가 죽으면 주님이 재림할 때까지 '잔다'라고 되어 있고, 재림 때에 깨어난다고
되어 있죠. 저는 이것이 기절한 것과 같이 재림 때에 우리의 인식이 죽기 직전의 인식과 연결이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나의 인식은 죽음의 순간과 재림의 순간을 연결하겠죠.

그래서 저에게는 제가 죽는 날이 재림의 날입니다. 그게 실제 시간이 일주일이 될지 100만년이 될지
실제로 저에겐 다를 것이 없습니다.

저에게 세상의 종말, 주님의 재림은 50년이 채 남지 않았습니다. 죽음처럼 확실하게요.

제 질문은, 저의 이런 생각이 성경적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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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시드니

December 02, 2008
*.101.112.210

부활 후에도 우리의 '인식'이 지금과 같은 '인식'일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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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신밧드의보험

December 02, 2008
*.243.149.1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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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광야

December 02, 2008
*.188.73.12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하는데 주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 것인가요?
어떤 분은 주님은 저 위도 아니고, 저 밖도 아니고, 지금 여기에 계신다고 하고,
또 어떤 분은 모든 것을 초월하신다고 하고,
그리고 또 어떤 분은 21세기 과학의 발전으로 우주에 가보니 주님은 하늘에는 계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림절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참 소망을 주시는데,
소망의 주님은 어디에 계시다가 다시 오시는 걸까요?
이런 질문하면 신앙이 없는 것일까요?
창조주 하나님, 부활의 예수님은 성경에 다시 오신다고 하였으니
어디에 계시다고 오든지 신경 쓰지 말고 무조건 믿으면 참 좋은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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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광야

December 02, 2008
*.188.73.12

문자주의를 버리고 인문학적으로, 근본주의를 벗어나 성서를 심층적으로 연구하시는 분들의
말씀은 결국 삶의 실재 속에서 부활과 하나님나라 즉 생명의 완성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부활의 변화가 생명의 완성의 때라고 하지만 우회적인 선포라고 생각이 듭니다.
천국, 지옥, 부활 등을 직접적 부인하지는 않지만, 단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내세적인 것을 지향하지 않고,
지금 여기서의 삶의 실재, 생명의 충만함, 존재의 깊이에서 오는 그 무엇이
바로 부활과 하나님나라를 경험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말씀하는 것으로 들으면 맞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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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December 02, 2008
*.181.51.93

위의 대글 주신 분들과 함께
대림절의 영성에 참여했으면 합니다.
저도 신자들에게 설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이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설교와 삶이 일치할 수 있도록 노력해볼랍니다.
이건 노력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세계에 영적인 눈을 뜨는 거겠지요.

광야 님,
주신 질문들과 생각들은 당연한 겁니다.
계속 그런 문제를 화두로 삼아 보십시요.
그러나 혼자의 생각에 머물러 있으면 진보가 없을 겁니다.
신앙의 선배들에게 도움을 받아야겠지요.
현세와 내세의 관계를 실증적으로 선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 영성은 내세주의는 아니지만
당연힌 내세의 새로움을 기다립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은
그런 내세, 종말에 만나게 될 영광스런 삶의 그림자입니다.
결국 기독교 신앙은 아무리 현세에 임박해 있는 하나님 나라를 말한다고 하더라도
내세 지향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광야 님이 강조한 '지금 여기서'는
그것 자체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이 종말론적 생명과 연관될 때만 의미가 있겠지요.
그 연관을 깊이 이해하고 해석하는 게 바로 신학입니다.

모두에게 대림절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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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코람데오

December 05, 2008
*.109.122.33

...
주님은 부활의 처음 열매가 되셨지요..
사도들은 온전히 변화한 육신의 세계를..
주님의 부활에서 경험 하였을 것 입니다..

어쩌면 영원한 생명에 참예한 부활하신
신령한 육신을 실존에서 곃험한 사도들의
놀라움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 까요?

얼마전 "점퍼"라는 헐리우드 영화를 보며
잠깐 상상의 나래를 펼친 적이 있습니다.

공간을 초월하는 육신에 관련되니 이야기
였습니다. ㅎㅎ

영원한 생명 이란 말에는 시공의 초월에 관한
개념이 기본적으로 전재가 됩니다..

시공이 접혀져 버린 육신의 세계라..

여러분은 상상이 되시나요??

혹시 살아서 피조물이 고대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땅에 나타나는 놀라운 날을 목도
할 수 있으려는지 ㅎㅎ

http://www.christianinsid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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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December 05, 2008
*.116.154.86

"역사의 한 순간에 머물고 있지만,
여전히 잠정적인 생명 안에 머물러 있지만
그는 이미 종말의 생명을 삽니다."

이보다 더 큰 위로의 말씀이 있을지요.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96]정용섭

December 05, 2008
*.120.170.254

모래알 님,
그렇지요?
지금 우리의 삶은
마치 보화를 담은 그릇과 같겠지요.
우리가 무엇을 본다는 사실 하나만 하더라도
황홀한 생명의 극치 아닌가요?
그 날이 오면 우리는 얼굴을 맞대듯이
생명의 실체를 보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실존은 늘 대림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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