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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있음이란? (막 13:24-37)

대림절 조회 수 2580 추천 수 0 2023.12.04 07:23:50
설교보기 : https://youtu.be/NezmwqjiAkQ 
성경본문 : 마가복음 13:24-37 

깨어있음이란?

13:24-37, 대림절 1, 2023123

 

 

성경에는 무슨 말인지 종잡기 힘들거나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내용이 종종 나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전반부인 막 13:24-27절은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온다고도 했습니다.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휘오스 투 안트로푸(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를 사전적인 의미로만 본다면 평범한 용어지만 묵시 사상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상 마지막 때 보내서 세상을 심판하게 하실 인물을 가리킵니다.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바로 휘오스 투 안트로푸라고 생각했고 믿었으며 선포했습니다.

 

묵시 사상

묵시 사상의 키워드는 둘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심판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할 때가 온다는 겁니다. 아무도 그 심판을 피할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이 절대적으로 의지했던 모든 것의 토대가 붕괴합니다. 재산도 필요 없고, 학위도 필요 없습니다. 국가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사는 지구만이 아니라 우주 전체가 총체적으로 무너집니다. 그래서 본문은 해와 달과 별과 권능까지 흔들린다고 표현했습니다. 비유적으로,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사람들이 모래성을 쌓았습니다. 비너스 상도 있고, 생각하는 로댕 상도 있고 만리장성과 에펠탑 상도 있습니다. 정말 멋집니다. 모두 감탄합니다. 갑자기 해일이 닥쳤습니다. 모래 상이 모두 바닷물에 사라졌습니다. 해일이 물러갔으나 이전의 모래 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세상이 완전히 무너지고 하나님께서 완전히 새롭게 재창조하신다는 묵시 사상은 후기 유대교의 종교적 열광주의에 불과한 것일까요? 망상일까요? 사람들에게 겁을 주려고 꾸민 이야기일까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용어를 사람들은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심판을 받아서 지옥에 가는 게 두려워서 교회에 다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예수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이 보장된 천국에 보내고 믿지 않는 사람은 영원한 고통이 기다리는 지옥에 보내는 거라고 말입니다. 아주 드물게나마 성경에 그렇게 묘사된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걸 통해서 말하려는 핵심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완전히 새롭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잠정적이고 악한 세상 너머에서 새로운 걸 실현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겠다고 나선 정치인 중에 세상을 정말 새롭게 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최선의 경우라 하더라도 조금 모양만 바꿀 뿐입니다. 약간 개혁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뿐입니다. 약간 진보적일 뿐이거나 약간 보수적인 뿐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정당은 적대적 공생관계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일에 성공하면 정치적 소득을 올리는 구조입니다. <창작과 비평> 2023년 겨울호 책머리에꼭지에 괴랄이라는 신조어가 보이더군요. 뜻은 괴상하고 별나면서 악랄하다.’입니다. “거의 매일 괴랄한 얼굴들을 목격하게 된다. 손바닥 뒤집듯이 말을 바꾸고,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거짓말을 하고, 자신의 책임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정치인들의 얼굴이 그렇다.” 개혁과 진보가 어느 순간에 기득권으로 뒤바뀌는 걸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늘 경험합니다.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보다 더 진보적인 이데올로기는 없습니다. 그걸 실현할 능력이 인간에게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지금 당장 먹고사는 일만으로도 정신없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보내서 세상을 심판하고 새롭게 만드신다는 사실에 마음을 두고 사느냐고 질문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을 해결하는 게 급선무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우리는 12월 첫째 주일인 대림절 예배를 드리는 중입니다. 올 한해도 순식간에 열한 달이 지나갔습니다. 열한 달 동안 어떻게 살았습니까? 여유롭게 살기도 하고, 쪼들리기도 했겠지요. 각각 자기의 일상적 삶은 중요합니다. 일상을 소홀히 여길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게 지나가고 지금 마지막 달을 맞았습니다. 마지막 달이 온다는 사실을 지난 열한 달 동안 마음에 둔 사람이 있고,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그 마지막이 바로 묵시 사상이 말하는 하나님의 심판이고, 입니다. 발등에 불을 일단 끄긴 해야겠으나 모든 게 지나가고 운명이 완전히 새로워지는 그 순간이 온다는 사실에 마음에 두지 않고 살면 되겠습니까? 굳이 그렇게 살겠다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인식론적 한계 상황

그 묵시적 종말은 실제로 언제인가요?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 일어날까요? 예수께서는 언제 재림하시나요? 하나님께서는 언제 세상과 역사와 우주를 완전히 새롭게 하시나요? 남북한이 적대적이지 않고 같은 민족으로서의 형제애를 회복할 때가 언제인가요?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들과 이슬람교도들이 함께 어울려서 평화롭게 살아갈 때가 언제인가요? 모든 사람이 실제로 평등해지는 세상은 언제 실현될 수 있나요? 형제 사랑과 자매 사랑이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완성되는 때는 언제인가요? 개인적인 차원에서, 우리 각자는 언제 참된 평화와 안식을 누리게 될까요? 개인과 세상 전체에 구원이 일어날 순간은 언제인가요? 오늘 설교 본문 28-32절은 그 언제를 나뭇잎이 푸르러지면 여름이 오는 걸 알 수 있듯이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기도 하지만, 구체적인 과 구체적인 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경험이 부분적으로 느껴지기는 하나 완전하게 경험할 수 없는 거와 같습니다. 32절을 들어보십시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천사들은 초능력인 존재들이기에 온갖 비밀의 때를 알 것 같은데, 본문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아들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대화하는 듯한 예상외의 발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모르는 게 있다면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은 비밀 가득하다는, 또는 활짝 열려있다는 뜻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모든 질문에 대해서 척척박사처럼 대답하는 생성형 인공지능 AI도 그 과 그 는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궁극적인 순간만 모르는 게 아닙니다. 작은 사물에 관해서도 우리는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작은 사물도 궁극적인 순간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식에서 받게 될 빵과 포도주를 생각해보십시오. 빵과 포도주는 비밀입니다. 빵과 포도주를 구성하는 원자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오늘 성찬식 자리까지 왔는지를 완전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밀과 포도에 태양 에너지가 얼마나 들어와 있는지를 계산해낼 수 없습니다. 밀과 포도에 비와 안개와 공기와 새와 벌이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는지도 계산해낼 수 없습니다. 인식론적 한계가 바로 우리 인간의 가장 적나라한 실존입니다.

 

그레고레이테

이런 인식론적 한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최선은 무엇일까요? 본문이 아주 친절하게 안내해줍니다. 오늘 설교 본문 33-37절에 네 번 반복된 단어가 있습니다. ‘깨어있으라.’입니다. 33절은 이렇습니다.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34절에는 비유가 나옵니다. 다른 나라로 떠나는 집주인은 문지기에게 모든 사무를 맡기면서 깨어있으라.’라고 일렀습니다. 집주인이 돌아오는 순간이 해 저물 때, 밤중, 닭 울 때, 새벽일지 예상할 수 없으니까 깨어있어야 합니다. 집주인이 돌아왔을 때 문지기가 자고 있으면 문책을 당합니다. 이런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께서는 마지막 37절에서 이렇게 이르십니다.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우리말 성경에는 깨어있으라.’(γρηγορετε)라는 단어가 문장 앞에 나오지만, 그리스어 성경에는 끝에 나옵니다. KJV 성경도 끝에 ‘Watch’라고 했고, 루터 성경도 ‘Wachet’라는 단어를 끝에 달았습니다. 거기에 강조점이 있는 겁니다. <여호와의 증인>에서 발행하는 정기 간행물 중에서 <파수대>(Watch Tower)<깨어라>(awake)가 있습니다. 정통 그리스도교에서 이단으로 분류하는 교파의 간행물이지만 제목만으로 본다면 매우 성경적입니다.

깨어있으라라는 말은 잠들었거나 졸고 있는 상황을 전제합니다. 잠들었다는 말은 오늘 본문에 따르면 묵시적 종말이 온다는 사실과 사람의 아들이 온다는 사실을 잊고 산다는 뜻입니다. 아마 본인들은 잠들지 않았다고 주장할 겁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정신 똑바로 차리며 산다고 말하겠지요.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천국 잔치 초대와 거절에 관한 이야기가(14:15-24) 있습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밭과 소를 사고, 결혼했다는 이유로 잔치 날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런 일상 처리에 바빠서 천국 잔치가 얼마나 귀한지를 잊어버린 겁니다. 잠에 떨어진 거지요. 마찬가지로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는 우리는 자본 메커니즘에 세뇌당해서 정작 중요한 일은 못 보고 사는 건 아닐는지요. 유대-러시아계 한국인으로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교 한국학 교수인 박노자는 자본주의 사회를 가리켜서 중독사회라고 규정하더군요. 일 중독, 소비 중독, 쇼핑 중독, 취미생활 중독, 술 중독, 마약 중독이라고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 종교 중독도 여기에 포함해야 합니다.

종교 중독이라는 말이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게 당연하지 않냐고 말입니다. 종교적 열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저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수도원 원장이 되는 게 마지막 꿈이라고 나발을 불었습니다. 기도와 노동(ora et labora)에 매진하는 수도원 생활은 다른 이들에게 인간다운 삶이 결핍된 것으로 비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수도원 생활을 통해서 오히려 삶의 본질로 들어갑니다. 자기 집중에서 벗어나서 이웃과 하나님에게 집중합니다. 더 관용적인 사람이 되고, 평화와 안식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종교에 중독되는 게 아니라 종교를 통해서 더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겁니다.

한국교회에는 종교 중독이라는 말을 붙여야 할만한 현상이 종종 벌어집니다. 주일 공동예배는 물론이고 새벽기도회 참석과 십일조 헌금까지 체크해서 권사나 장로 후보자를 선정합니다. 신앙생활을 경쟁하듯이 하는 겁니다. 교단에 자부심이 유달리 큰 사람들은 천국에 가서도 장로교인, 순복음교인, 감리교인으로 살고 싶어 할 겁니다. 자신과 다르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을 쉽게 자유주의자야, 이단이야, 하고 재단합니다. 교회 밖을 향해서는 혐오 발언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동성애자 혐오가 한국교회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렸는지를 생각하면 종교 중독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깨어있는 게 아니라 잠들어가는 겁니다. 예수께서 위선자라고 일갈하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바로 종교 중독자 아닐까요?

 

생명 지향적 삶

깨어있다는 말씀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앞에서 짚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묵시적 용어는 생명 완성의 순간에 대한 메타포입니다. 깨어있음이란 생명 완성에 필요한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삶의 태도입니다. 즉 생명 지향적 삶을 가리킵니다. 생명 지향적 삶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일단 생명을 생각해보십시오. 살아있다는 겁니다. 살아있으려면 먼저 존재’(be)해야 합니다. 혹은 실존(existence) 하는 겁니다. 자신이 세상에 이렇게 존재하거나 실존한다는 사실에 집중하는 겁니다. 이름 날리는 기업가, 프로 축구 선수, 가수, 유명 유튜버, 교사, 의사, 판사 등등, 여러 가지 직업으로 자기의 존재를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늘 대통령은 아닙니다. 잠시 그 자리에서 자기 일을 할 뿐입니다. 그가 아프면 환자가 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숨을 제대로 쉬는 게 생명 지향성입니다. 숨을 안 쉬면 살아있을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숨을 제대로 쉬는 게 생명에 가까워지는 길입니다. 일용할 양식도 생명 지향성에서 중요합니다. <주기도>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는 문장이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연봉 100억 원을 받는 펀드매니저나 일전 한 푼 받지 못하는 노숙자가 모두 일용할 양식이 필요할 뿐입니다. 자기에게 일용할 양식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면 다른 사람의 일용할 양식도 챙길 수밖에 없겠지요. 생명, 즉 삶의 본질과 근본에 집중하는 것이 바로 깨어있음의 참된 의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된 생명이라고 믿습니다. 생명과 적대적인 죽음이 그에게서 극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주일 예배 때마다 입으로 고백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라고 말입니다. 바로 앞에서 존재와 실존과 숨 쉬는 것과 일용할 양식이 생명 지향성의 기본에 속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젠가 더는 세상의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고, 숨을 안 되게 되고 일용할 양식도 필요 없는 운명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런 순간은 우리가 외면하거나 못 볼 뿐이지 이미 지금 우리의 삶에 은폐되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런 운명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듯이 우리도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즉 세상과 생명의 비밀인 하나님의 품에 받아들여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그리스도교 신앙에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실제 삶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입니다. 그들에게 억지로 동의를 받아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다음의 사실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이 그렇게 확실한 게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죽음이 극복되었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세상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확실한 삶의 내용을 확보했으며, 추구하는지 잘 살펴보십시오. 한 마디로, 얄팍하고 납작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생명을 찾을 것인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했습니다. 그의 믿음과 그의 사랑과 그의 희망이 바로 저의 믿음과 저의 사랑과 저의 희망이 되도록 그에게 가까이 가보겠습니다. 그것 말고 더 의미심장한 인생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깨어있으라!’(그레고레이테)라고, 정신을 차리라고 일종의 죽비를 날린 게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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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소유와존재

December 04, 2023
*.254.11.100

"천사들은 초능력인 존재들이기에 온갖 비밀의 때를 알 것 같은데, 본문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아들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대화하는 듯한 예상외의 발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모르는 게 있다면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은 비밀 가득하다는, 또는 활짝 열려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비밀 가득하다"는 말은 이해가 되는 듯 하나

"하나님의 일은 활짝 열려있다"는 말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비밀 가득하다는 말과 활짝 열려있다는 말은 언뜻 모순된 표현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일이 하나님 경험이 보는 눈이 있는 사람에게만 열려지는 세계라는 걸까요?

 

어떤 차원에서 활짝 열려있다라는 표현을 쓰신 건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생명을 찾을 것인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찾는 자의 삶은 어떤 것인지,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한 자의 삶은 과연 어떤 것인지?

도 질문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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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04, 2023
*.157.223.40

소유존재 님이 설교 텍스트를 꼼꼼히 읽으셨군요. 

그런 방식으로 읽고 질문하고 답을 찾는 게 신학입니다. 

두 가지 질문이군요.

1) 열려있다는 말은 결정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제가 잘은 모르고 단어만 들은 '쉬레딩어의 고양이'와 비슷해요.

   양자물리학의 세계에서는 고양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가 결정되지 않고

   실험이 끝나서 확인할 때 알게 된다네요. ㅎㅎ

   하나님의 미래는 결정되지 않았으니가 비밀 가득한 거지요.

2) 이미 설교에 나왔을 텐데요. 예수와 하나 되는 게 그를 선택했다는 의미에요.

   그와 하나 된다는 건 그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거고요.

   그의 운명을 받아들이려면 그의 믿음과 사랑과 희망 안으로 들어가야겠지요.

   한 마디로, 예수처럼 하나님을 믿는 겁니다. 이게 쉽지 않거든요. 회개가 필요하겠지요.

   그 믿음과 사랑과 희망이 바로 생명 충만이고, 구원이랍니다.

   거기서만 죄와 죽음이 극복되니까요. 그것으로 만족하게 사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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