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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마 20:1-16)

창조절 조회 수 1333 추천 수 0 2023.09.24 20:52:56
설교보기 : https://youtu.be/W-gtkJyv5p4 
성경본문 : 마태복음 20:1-16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20:1-16, 창조절 4, 2023924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선포하신 첫 말씀은 회개하라, 하늘나라(ἡ βασιλεία τν ορανν)가 가까이 왔다.”(4:17)입니다. 그 메시지는 세례 요한도 마 3:2절에서 선포한 것입니다. 그 하늘나라는 물건이나 상품이 아닙니다. 어떤 장소를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늘나라는 누구에게나 똑같은 깊이에서 인식되고 경험되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이 다가간 사람도 있고, 멀어도 한참 먼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과 생명을 모두 똑같이 경험하는 게 아니듯이 말입니다.

 

포도원 비유

예수께서는 하늘나라를 비유로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를 우리말 성경 <개역 개정>은 한자인 천국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서 이 비유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됩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20:1)

 

이런 설명은 당시 사람들에게 실감 나게 들렸을 겁니다. 그들에게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포도원 수확기에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합니다. 큰돈이 들어도 가능한 한 많은 일꾼을 불러들여야 합니다. 이 포도원 주인은 아침 일찍 노동시장에 나가서 일꾼들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노동자의 일당은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몇 명을 데리고 왔는지는 모릅니다. 일꾼이 더 필요했는지, 그는 제 삼시에 다시 노동시장으로 나갔습니다. ‘제삼 시는 지금 시간으로 오전 9시입니다. 일꾼들을 포도원에 가서 일하게 했습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정오와 오후 3시도 일꾼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오후 5시에도 나갔습니다. 노동시장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왜 일하지 않고 놀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네요.’라는 대답을 들은 주인은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라고 말했습니다. 이건 정말 말이 안 되는 상황입니다. 오후 5시에 포도원에 온 사람은 한 시간밖에 일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럴 정도로 포도원 일이 밀렸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포도원 주인이 인간의 노동 문제와 소득 문제에 관해서 관심이 유달리 많아서 그랬을까요?

8절부터 이 비유의 후반부가 이어집니다. 주인은 포도원 회계 담당자를 시켜서 노동자들의 일당을 지급하게 했습니다. 순서는 나중에 온 사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오후 5시에 와서 한 시간 일한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씩 받았습니다. 거기 모였던 품꾼들은 모두가 놀랐습니다. 한 시간만 일한 사람에게는 반 데나리온만 줘도 감지덕지할 텐데, 일당을 다 주었으니 말입니다. 먼저 온 사람들은 내심 자신들이 조금이라도 일당을 더쳐서 받을지 모른다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한 데나리온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주인을 원망했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자신들이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컸겠지요. 12절에서 이렇게 따지고 듭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매우 논리적인 주장입니다. 열 시간 일한 사람과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똑같은 품삯을 준다면 당연히 열 시간 일한 사람은 불평할 수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이 포도원에는 일하러 오지 않거나, 한 시간만 일하는 기회를 엿보려고 할 겁니다. 오늘의 상황으로 바꿔놓고 생각해보십시오. 여기 대형 카페가 있다고 합시다. 정식 직원은 열 명입니다. 그들은 하루에 열 시간씩 일주일에 오십 시간 일합니다. 파트타임 아르바이트 직원은 다섯 명입니다. 이들은 하루에 다섯 시간씩 일주일에 스물다섯 시간 일합니다. 사장이 이들에게 똑같은 월급을 줍니다. 정식 직원들은 이 카페 운영이 공정하지 않다고 주장할 겁니다. 우리나라 국회를 생각해보십시오. 국회의원과 경비 직원에게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연봉이 지급된다면 국회의원들이 그 상황을 참지 못할 겁니다. 국정을 책임진 우리를 왜 경비원과 똑같이 취급하느냐고 원망하면서 임금 체계 규정을 뜯어고치겠지요.

13절부터 포도원 주인의 해명이 나옵니다. 자신은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온종일 일한 사람과 맺은 본래 계약을 위반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볼 때 열 시간 일한 사람만이 아니라 한 시간 일한 사람도 역시 가족을 부양하려면 하루 일당이 있어야 했기에 한 데나리온을 지급한 겁니다. 포도원 주인에게 불평을 쏟아놓은 이들은 자기보다 못한 인간이 자기와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을 주목했고, 주인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한 데나리온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돈과 경쟁과 승리에 마음을 두는 사람이 있고, 삶 자체에 마음을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체제는 삶 자체에 관한 생각을 가능한 한 외면하게 합니다.

우리나라에 기본소득당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일정한 금액을 매월 제공하는 걸 정당의 목표로 삼는다고 합니다. 현재는 국회의원이 한 명입니다. 용혜인이라고 합니다. 내년 총선에서 기본소득당이 의원을 배출할지는 의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양대 정당이 국회를 거의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본소득당처럼 확실한 방향성이 있는 정당들이 많이 나오는 현상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생태 문제와 에너지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정당이나 페미니즘 정당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어쨌든지 모든 사람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해준다는 정치 목표는 얼마나 현실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정치적으로 소중한 가치입니다. 똑같은 60만 원이라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일용할 양식이 되니까요. 오늘 본문에 나온 포도원 주인의 생각과도 통합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면 최소한 하루 세끼는 보장되어야 하니까요.

 

하나님의 선하심

15절에서 포도원 주인은 이렇게 끊어서 말합니다. 정곡을 찌르는 발언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라는 말은 당시 포도원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것입니다. 당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당신의 이익과 충돌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불편하게 생각합니까? 당신이 사랑을 독차지 못 한다고 해서 그렇게 속상합니까? 당신만 특별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억울합니까?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못마땅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이슬람교도들에게도 임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불편합니까? 북한에서 사는 우리 동족들도 모두 우리처럼 웃고 울고, 기뻐하고 슬퍼하며, 사랑하고 미워하면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산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가요? 일부 사람들을 마녀로 몰아야만 속이 시원합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에 이런 원망과 불평이 반복하는 게 아닐까요?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늘나라를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자기를 둘러싼 선입견과 자기 폐쇄, 자기 몰입에서 벗어나면 저절로 보입니다.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마 5:45절에서 너무 평범하면서도 우리의 허를 찌르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우리는 보통 악하고 불의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내리기를 바랍니다. 그걸 하나님의 정의라고 여깁니다. 그런 걸 짚는 구약의 율법 조항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없지는 않으나 그 심판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분의 선하심 말입니다. 심판은 하나님 통치에서 어두운 부분이고 그분의 사랑과 선하심은 밝은 부분입니다. 심판은 어둠이고 사랑은 빛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에서 이 두 부분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여전히 비밀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자신의 잣대로 하나님의 심판과 선하심을 재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데 어떻게 악인과 불의한 자까지 감싸 안고 사느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그 방향이 옳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사는 이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주장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연봉을 받는다는 원칙을 현실 역사에서 실현해보려고 했던 공산주의가 실패한 원인도 거기에 있습니다. 악과 불의를 행한 사람은 용서받는다고 해서 쉽게 변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걸 이용해서 더 악해집니다. 철부지 아이들이 늘 사랑하고 용서하는 부모를 우습게 보고 점점 더 엇나가듯이 말입니다. 그런 게 세상 돌아가는 원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런 원리에 묶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온전히, 전적으로, 온 힘을 다하여 의지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악과 불의를 바꾸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바꾸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을 놓치면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한국교회는 세상보다 더 세상 원리에 매달릴 때가 많습니다. 교회가 크든 작은 모든 교역자가 연봉을 엇비슷하게 받는 날이 예수 재림 이전에 오기는 올까요?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말입니다.

 

우리 실존과 하나님의 선하심

지금까지 저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이 세상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했습니다. 이제는 개인의 실존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의 모든 삶에서 항상 새롭게 함께하십니다. 즐거울 때만이 아니라 슬플 때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전혀 줄어들지 않습니다. 중산층 이상의 경제 수준이 유지되어야만 행복한 게 아니라 가난해도 행복합니다. 가난한 삶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외모가 출중해야만 삶이 즐거운 게 아니라 부족해도 삶은 즐겁습니다. 어떤 외모로 살든 하나님의 선하심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그런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나님 나라와 의만 구하라고, 그러면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나머지를 허락하신다고 말씀하신 게 아니겠습니까. 이런 말씀이 혹시 공허하게 들리시나요?

여기 잘 나가던 벤처기업가가 완전히 망했다고 합시다. 재기할 수도 있으나 그런 가능성도 다 사라졌습니다. 자기에게 충성하던 아랫사람들도 모두 떠나고 친하게 지내던 동료 기업가들도 모두 떠났습니다. 초호화판 모임도 없어졌고, 골프 모임도 없습니다. 집도 줄여서 이사했습니다. 겨우 일용할 양식만으로 삽니다. 그제야 그 사람의 눈에 하늘이 들어오고, 걸을 때의 중력에 관한 느낌도 새롭게 살아나고, 곤충과 야생화가 눈에 보였습니다. 제가 너무 꾸민 이야기라고 생각할 분들도 있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준비만 되면 하나님의 선하심은 어떤 조건에서도 우리와 함께합니다. 이런 예를 더 들라고 하면 온종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에 대한 어떤 선입견으로 인해서, 더 결정적으로는 자기 안에 폐쇄되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놓칠 때가 많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대표적인 사람들은 바리새인이나 율법 학자들입니다. 그들은 당시에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엘리트 집단에 속했습니다. 어떤 모임에 가든지 상석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입는 옷에는 특별한 장식이 달려 있었습니다. 자타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죄인이나 세리들과 어울리는 예수라는 인물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 일은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에 십자가에 죽은 자를 그리스도로 믿을 수는 더더욱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인격이 왜곡되었다거나 그들이 위선자라는 게 아닙니다. 자기 세계 안에, 즉 율법 패러다임에 갇혔을 뿐입니다. 자기 세계 안에 갇히면 하나님의 선하심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화가 납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말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수 있을까요? 자기 폐쇄에서 빠져나와야겠지요. 우물 안에서 밖으로 나와야겠지요. 문제는 이게 우리 인생살이에서 거의 불가능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물 안에 있으면 우물 밖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아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대대로 동굴 안에서 살던 종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동굴 안만을 모든 세계라고 생각했습니다. 습기, 박쥐, 곰팡내, 어둠, 그림자가 그들에게는 현실입니다. 그들 종족에게는 동굴 입구로 나가지 말라는 절대 규범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우연히 동굴 밖을 나갔습니다. 동굴 안과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는 걸 경험했습니다. 그는 동굴 안으로 다시 들어와서 자기 종족에게 동굴밖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 있다고 외쳤습니다. 미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재판이 열렸습니다. 그는 화형을 당했고, 동굴 안은 이전처럼 조용해졌습니다.

자기 세계에서 빠져나오려면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즉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와 함께한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실을 먼저 본 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쪽으로 시선을 옮겨야 합니다. 처음에는 그 말이 귀에 들리지 않을 겁니다. 시선을 돌려봐야 아무것도 보이지 않겠지요. 어떤 결정적인 순간이 옵니다. 들리지 않던 말이 들리고,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모두 그런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사야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다음과 같은 천사들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다는 사실은 누구의 눈에나 들어오는 게 아닙니다. 아주 특별한 경험입니다. 그가 말하는 온 땅은 착한 사람이나 경쟁력이 출중한 사람만 사는 곳이 아닙니다. 장애인도 있고, 동성애자들도 있고, 사랑하는 이에게서 실연당한 사람도 있고,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호스피스 병동도 온 땅이고, 외로운 곳도 온 땅입니다. 거기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즉 하나님의 선하심이 충만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경험해보셨나요?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그런 경험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지난 2천 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했습니다.

나에게는 그런 은총의 순간이 없을까, 하고 궁금해하는 분이 계신지요. 은총이 이미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다만 볼륨을 너무 높인 상태에서 티브이를 시청하느라, 또는 여러 가지 걱정에 휩싸여서 문 두드리는 소리를 못 들은 겁니다. 자기 인생살이에서 아직 분명한 방향을 잡지 못한 교우들에게 저는 그리스도교가 발견한 길을 안내합니다.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한 걸음이라도 가까이 가보십시오. 은총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사는 게 무엇인지 여러분의 눈에, 속도는 각자 다르겠으나, 들어올 것입니다. 아멘.


profile

[레벨:8]바람소리

September 25, 2023
*.94.35.122


목사님 설교 읽으니 데미안의 유명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또 내가 확신하는 그 신에 대한 인식이 또다른 알이 아닌가 

늘 겸손해야 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September 25, 2023
*.104.32.89

예, 고맙습니다. 바람소리 님.

'내가 확신하는 그 신에 대한 인식'은 늘 깨지고 새로워져야겠지요.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그렇게 이끌어달라고

저도 늘 기도하면서 삽니다.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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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512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555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622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590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336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292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3308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494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4107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517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3041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652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604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299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697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179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311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835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634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317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535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453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957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655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515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772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660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680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265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909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511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755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475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559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843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4052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643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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