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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날: 새 하늘과 새 땅 (벧후 3:8-13)

대림절 조회 수 2322 추천 수 0 2023.12.10 21:40:33
설교보기 : https://youtu.be/HzAD4z4sv8Y 
성경본문 : 베드로후서 3:8-13 

하나님의 날: 새 하늘과 새 땅

벧후 3:8-13, 대림절 2, 20231210

 

 

조롱하는 이들

초기 그리스도교는 들판에 유기된 신생아처럼 생존 자체가 기적이라 보일 만큼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습니다. 외부적인 어려움도 컸으나 내부적인 어려움도 심각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박해라든지 회당 축출 같은 외부적 어려움보다 사이비 이단의 내부적 어려움이 더 심각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영지주의입니다. 이런 이단의 위험성을 교회 지도자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경고했습니다. 벧후 2:1절은 그들을 거짓 선지자, 또는 거짓 선생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거짓 선지자이며 거짓 선생들이 제기한 문제 중의 하나는 예수 재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벧후 3:3-4절에 따르면 그들은 예수 재림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조롱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믿었던 것처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재림이 머지않았다고 믿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당시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곧 재림하실 테니까 개인 재산은 필요 없다고 판단해서 재산을 팔아 교회의 공동 재산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 재림은 일어나지 않은 가운데 예수 재림을 고대하던 그리스도인이 죽기 시작했습니다. 60년대에는 교회의 기둥 격인 야고보와 베드로와 바울마저 죽었습니다. 예수 재림은 허망하다고 생각하여 교회를 떠난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이 문제는 사실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곧 재림하신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교회는 이 문제를 아예 언급하지 않는 경향을 보입니다. 한국 개신교회 중에서 대림절을 제대로 지키는 교회도 많지 않습니다. 대림절 신앙은 교회 성장에 별로 도움이 안 되니까 가능한 한 멀리하는지도 모릅니다. 예수께서 곧 재림하신다고 믿으면서 교회당 건축을 무리하게 추진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벧후 3:8-13절은 재림 신앙을 조롱하는 이들을 향한 반론입니다. 본문은 앞 대목에서 두 가지 근거로 반박합니다. 하나는 시간의 상대성입니다.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서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하루는 천 년과 비교하면 아주 짧고 천 년은 하루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깁니다. 이런 계산법은 시간을 양적인 차원에서 다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질적인 차원에서는 하루와 천 년(365,000) 사이에 차이가 없어집니다. 무한 앞에서 유한은 그것이 아무리 길어도 0입니다. 1이나 1천이나 똑같이 0입니다. 1 곱하기 0이나 365,000 곱하기 0이나 똑같이 0입니다. 이를 조금 실제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현생 인류의 조상인 호모 에렉투스(직립인)은 대략 2백만 전에 지구에서 살았습니다. 2백만 전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봅시다. 그들 중에서 한 명은 50년을 살았고 다른 한 명은 20년을 살았습니다. 30년 차이가 납니다. 당시에는 매우 긴 시간입니다. 다시 오늘로 돌아옵시다. 당시의 30년의 차이는 오늘의 2백만 년 앞에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현대물리학은 시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속도에 따라서 시간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우주선을 타면 시간은 거의 흐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시간표를 들이밀면서 재림 지연을 조롱하는 이들을 경솔하다고 말한 겁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따른 설명입니다.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재림 지연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이런 설명이 어떤 이들에게는 상투적으로 들릴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신비로운지를 알기에 저렇게 말한 겁니다. 구원의 신비는 우리의 이성과 합리성을 뛰어넘을 때가 많거든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5:20)라는 바울의 진술도 이와 비슷합니다.

 

주의 날, 하나님의 날

본문은 8-9절에서 조롱하는 이들의 논리를 반박한 다음에 10절부터 예수 재림 문제를 본격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예수 재림의 때를 가리켜서 주의 날’(ἡμέρα Κυρίου, day of Lord)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주의 날은 하나님의 날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날입니다. 주님의 일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날이며, 구원이 완성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주의 날은 참된 안식과 자유를 얻는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이런 안식과 자유는 세상 권력이나 지위나 재산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일치에서만 주어집니다. 이런 안식과 자유는 신앙생활의 길이에 따라서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늦은 나이에 그리스도인이 되거나 교회의 주류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 먼저 주의 날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날,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계산대로 일어나지 않기에 사람들은 주의 날을 기다릴 줄 모르고 기다리기를 싫어합니다. 심지어 짜증을 냅니다. 자신이 인식할 모르기에 아예 없는 것으로 여기고 조롱합니다. 음악 경험도 이와 같습니다. 평생 음악을 전공하여 프로로 살았다고 해도 음악을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고, 음악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소리에 대한 존재론적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음악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10절은 주의 날이 도둑 같이온다고 말했습니다. 홀연히 주의 날이, 즉 참된 안식과 자유가, 더 익숙한 표현으로는 구원 경험이 우리 앞에 닥칠 수 있습니다. 주의 날에 일어날 일에 대한 10절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주의 날을 우주의 해체처럼 묘사했습니다. 세 가지 현상입니다. 1)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갑니다. 2)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집니다. 3)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인간이 사는 지구와 하늘이 모두 붕괴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표현이 10-12절에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걸 압축하면 모든 세계가 불에 타고 해체된다는 겁니다. 일종의 불 심판표상입니다. 본문은 21세기에, 또는 가까운 세기에 일어날 핵전쟁을 2천 년 전에 예고한 것일까요? 미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는 지구를 수십 번 불바다로 만들만한 숫자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한쪽에서 핵무기를 사용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겁니다. 하늘이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게 되겠지요.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모두가 그렇게 머지않은 시간 안에 불로 태워집니다. 아무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화장장에 가보셨는지요.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셨겠지요. 소각로에 들어간 시체는 몇 시간 만에 한 줌의 가루가 됩니다. 인간 몸이라는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는 겁니다. 우리는 아무도 이런 운명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주의 날이 온다는 뜻입니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해와 해에 딸린 여러 행성도 불에 탑니다. 태양이 수명을 다하면 붉은 거성이 됩니다. 지금보다 수십, 수백 배 큰 형태로 부풀어오는 겁니다. 태양에 속한 모든 행성을 집어삼킵니다. 태양에서 나온 행성이 다시 태양의 불길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태양이 대폭발을 일으켜서 우주 먼지가 됩니다. 현대 우주물리학이 밝힌 별의 생성과 소멸이라는 과정을 우리의 거처인 지구와 태양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파루시아

만물이 뜨거운 불에 풀어진다는 사실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역설적으로 그 순간을 간절히 사모하라고 말합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광신자들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믿기 힘들겠지만, 12a절이 분명히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하나님의 날10절에 나온 주의 날과 같은 뜻입니다. 주님은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한다고 할 때의 그 임함은 그리스어 παρουσία의 번역입니다. 파루시아는 coming, arrival, presence의 뜻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 성경은 도착이라는 뜻의 Ankunft로 번역했고, KJVthe coming으로 번역했습니다. 파루시아는 일반적으로는 예수 재림을 가리킵니다.

우리말 성경은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즉 주의 재림을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라는 번역했는데, 루터 성경과 영어 성경은 기대하고 서두르라.’라고 번역했습니다. 기대하고 서두르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영적 정체성에 맞아떨어집니다. 교회는 초기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자신을 신부로 묘사했습니다.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는 신부처럼 정신 차리고 서둘러야 합니다. 일주일 후에 결혼할 예비 신랑과 신부가 있다고 합시다. 그들의 마음은 온통 결혼할 바로 그 순간에 맞춰져 있습니다. 결혼하는 문제와 직결되지 않은 일들은 다 뒤로 미룰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서두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왜 서둘러야 할까요? 인생살이를 서두르면 오히려 실수하기 마련 아닌가요? 파루시아 앞에서 서둘러야 할 이유는 제가 보기에 다음과 같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 파루시아는 구원이 완성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완성을 본문은 만물이 불에 타고 풀어지는 현상으로 설명했습니다. 세계가 재창조되는 수준으로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모양이 조금 바뀌는 방식으로는 구원이 완성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결정적인 순간이 도둑처럼 닥칠 테니까 그 순간을 맞기 위해서 서두를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파루시아는 너무 먼 미래의 일이니까 그렇게 서두를 게 없다고 생각할 분도 계시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일전에 한 번 말씀드린 이야기입니다. 제가 올해 일흔 살입니다. 50년 전 1973년도에 서울신학대학교 학부생으로 들어갔습니다. 만약 제가 50년 후인 2023년이 도둑처럼 들이닥치니까 서둘러서 치열하게 공부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깊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겠지요.

둘째, 서두르는 태도로 거기에 집중하지 않으면 파루시아를 경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공부나 예술 행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도예가들은 자기가 원하는 작품이 나올 때까지 쉬지 않고 흙을 빚고 그릇을 만들고 가마에 불을 지핍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가마에 불을 지필 때는 며칠 밤을 지새웁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도예의 어떤 절정에 도달합니다. 파루시아는 하늘이 풀리고 만물이 불에 타는 방식으로 발생하니까 가만히 있어도 쓰나미가 닥치듯이 모두가 알 수 있는 거 아니냐, 하고 질문할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파루시아는 우주론적인 미래라는 차원만 있는 게 아니라 실존적인 현재라는 차원도 있습니다. 저의 인생에서도 50년 전과 지금이 거의 한 순간인 것처럼, 그리고 개인의 죽음이 이미 일상 안에 들어와 있듯이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파루시아는 우리의 삶 안에서 이미 일어났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서두르지 않기에, 영적인 눈이 어둡기에, 졸고 있기에 그걸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는지요.

 

새 하늘과 새 땅

파루시아 앞에서 서두르는, 즉 깨어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본문은 마지막 13절에서 다시 압축적으로 설명합니다. 다른 구절은 잊어도 좋으나 13절은 꼭 기억해두기 바랍니다. 베드로후서의 압축파일임 셈이니까요.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앞에서 나온 주의 날과 하나님의 날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날에는 이전 하늘이 사라지고 새 하늘이 만들어질 겁니다. 21:1에도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도대체 새 하늘과 새 땅이 어딜까요? 그걸 누가 구체적으로 알겠으며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그리스도교 교파는 지상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저 우주 어딘가에 있는 천국이라고 생각하겠지요. 이 문제는 궁극적인 비밀입니다. 세상을 무에서 창조하신(creatio ex nihilo)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이기에 우리는 실증적인 방식으로 알지 못합니다. 천사도 모르고 하나님의 아들도 모릅니다.(13:32) 다만 13절에 따르면 두 가지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첫째, 우리는 그의 약속을 믿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시 온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에 어떤 과학적인 근거가 있냐, 하고 반문할 사람들도 있겠지요. 사이비 이단 교주들도 약속을 많이 했으나 모든 약속이 속임수였다고 말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약속에 속으면 물론 곤란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의 약속마저 허투루 여겨도 되는 건 아닙니다. 그의 인격과 그의 가르침과 그의 운명을 믿는다면 우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그의 약속도 믿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 없이는 구원도, 생명도 거리가 멉니다. 세상에서 속기만 한 사람은 믿음의 세계에 들어가기 힘들 겁니다.

둘째, 새 하늘과 새 땅은 가 있는 곳입니다. 그 대목을 그리스어 성경에 맞도록 번역하면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의(δικαιοσύνη)가 삽니다.’입니다. 우리말 성경 번역처럼 그냥 의가 있는곳이 아니라 의가 사는곳입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살아 숨 쉬는 곳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의는 로마의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당시에는 로마 체제가 정의의 기준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팍스 로마나’(Pax Rommana)라는 말이 나왔겠습니까. 로마의 정의와 평화는 정치, 경제, 군사, 문화의 힘이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세계를 가리키지만,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는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하는 세계입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현실적으로 가능한가요?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더 부자로 살고, 더 군사적으로 막강하고, 세계가 우리를 부러워해야만 살맛 나는 세상이 아닌가요? 많은 사람이 그런 대한민국을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음의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바울은 롬 3:19절 이하에서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저는 로마서와 베드로후서를 연결해서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의에 참여한 사람은, 즉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날에 펼쳐질 새 하늘과 새 땅을 학수고대할 뿐만 아니라 지금 이미 그곳에 들어간 사람처럼 벅찬 기쁨으로 일상을 살아갑니다.


profile

[레벨:9]소유와존재

December 11, 2023
*.254.11.100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더 부자로 살고, 더 군사적으로 막강하고, 세계가 우리를 부러워해야만 살맛 나는 세상이 아닌가요? 많은 사람이 그런 대한민국을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음의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되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현실에서 적어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점은

저마다 의롭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구요.

그리고 그게 얼마나 허술?한지...


요즘에 저는 목사님이 언급하셨던 두가지 질문을 끼고 살려하고 있습니다.

1. 실질적인 내용을 아는가? 2. 그 내용대로 살아가는가?

오늘 예수그리스도에 의해서 실현된 하나님의 의에 관해서도 그 내용을 제대로 알고 있었는지 되짚어 보게 됩니다.

그 의가 전혀 새로운 차원의 의라서 질적인 다른 생명이라서 너무도 다행입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December 12, 2023
*.157.223.40

소유존재 님이 지금 회심(메타노이아) 중이시군요.

끼고 살려한다는 그 두 가지가 그리스도교 영성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첫째는 인식론이라고 한다면, 둘째는 윤리학이고요. 

첫째는 존재라 한다면 둘째는 행위이고요.

첫째는 나무라 한다면 둘째는 열매에요.

알아야만 우리의 존재가 바뀌고 존재가 바뀐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히겠지요. 

세상의 많은 일과 가르침을 우리가 다 알 수 없으니, 그럴 필요도 없거니와,

그리스도교 영성 하나만 깊이 알아도 모든 것을 아는 거와 같습니다.

마음 푹 놓고 하나님의 의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그 놀라운 일 안으로 

천천히, 또는 속도를 내서 들어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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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1902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1910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2950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2317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2262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2750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2645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485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502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548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616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586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330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284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3295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487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4098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512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3029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646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597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286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692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176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306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824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622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311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527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448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952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647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505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765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650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675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259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97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501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748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467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550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838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4044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634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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