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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신 제사의 유혹 (창 22:1~14)

성령강림절 조회 수 1312 추천 수 0 2023.07.03 06:43:35
설교보기 : https://youtu.be/v4oqNj0zgZE 
성경본문 : 창세기 22:1~14 

인신 제사의 유혹

22:1~14, 성령강림 후 5, 202372

 

 

본문 설명

오늘 설교 성경 본문인 창 22:1~14절에는 일반 사람들이 읽기에는 상당히 불편하거나 위험스러울 수 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선 저는 그 이야기의 전모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불렀다는 말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은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누가 듣더라도 동의하기 어려운 명령을 내리십니다. 모리아 땅의 한 산으로 가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입니다. 번제는 짐승의 내장과 가죽을 벗겨내고 불살라서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 종류의 하나였습니다. 보통 양이나 비둘기를 번제로 드립니다.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을 하나님께서 내렸다는 사실은 믿기 힘듭니다. 더구나 아브라함이 전혀 따져 묻지 않고 그 명령을 그대로 수행했다는 사실이 더 이상합니다. 그런데도 이야기는 가치판단 없이 무심한 듯 진행됩니다.

아브라함은 이른 아침부터 길 떠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건강한 나귀 몇 마리를 준비했습니다. 번제에 쓸 장작도 준비했습니다. 여행을 도와줄 두 종과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을 향해서 출발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땠을지 본문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독자의 상상력에 맡긴다는 뜻이겠지요. 모리아 산 아래까지 삼 일이 걸렸습니다. 종들에게 기다리라고 이른 뒤에 아브라함은 장작을 아들 이삭에게 짊어지게 하고, 자신은 불과 칼을 들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칼은 아들의 목을 벨 때 필요하고 불은 장작에 불을 붙일 때 필요합니다. 여기서 불은 불씨를 가리키겠지요. 불과 칼은 고대인들의 생존 필수품이면서 인류 문명의 토대입니다. 동시에 불과 칼은 인간을 파멸하는 무기이기도 합니다. 불과 칼을 상징으로 하는 인간의 과학은 이처럼 양면성이 있습니다. 생명을 풍요롭게도 하고, 거꾸로 파괴하기도 합니다. 소중하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한 불과 칼이 지금 아브라함의 손에 들려있습니다.

지금껏 말 한마디 없이 장작을 지고 산을 오르던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를 불렀을 때와 똑같이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다.’(Here am I)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칼도 있었고요.)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요?’ 아브라함이 무슨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애매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대답을 합니다. ‘내 아들아, 번제로 드릴 어린 양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손수 준비하셨단다.’ 반은 거짓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아들을 번제물로 삼으려고 결심한 상태에서 길을 떠났습니다. 그걸 차마 발설할 수는 없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더는 이어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았습니다. 큰 바위 위겠지요. 그곳에 장작을 적당하게 쌓았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장작 위에 누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목에 칼을 겨누었습니다. 이삭은 장작을 짊어질 정도의 나이가 들었으니까 저항하면 이미 백십오 세 정도 되었을 아브라함이 당해낼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삭은 아버지, 왜 이러시냐?’는 말이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너를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중이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무서운 침묵의 순간입니다. 이 장면은 많은 화가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이 가장 유명합니다. 대략 10년을 주기로, 그러니까 1636년과 1645년과 1655년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첫 그림은 유채화이고, 나머지는 흑백 소묘 그림입니다. 첫 그림이 가장 다급한 상황을 묘사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칼을 아들 목에 대려는 순간에 하늘에서 아브라함을 부르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는 다시 제가 여기 있습니다.’(Here am I)라고 대답했습니다. 세 번이나 반복되는 대답입니다. ‘나는 여기 있다.’ 인간은 극한의 상황을 피할 수 없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는 여기에있어야 합니다. 렘브란트 그림에서 천사는 오른손으로 칼을 든 아브라함의 손목을 낚아채면서 칼을 떨어뜨리게 합니다. 왼손은 아브라함을 위협하듯이 치켜들었습니다. 천사와 아브라함 둘 다 놀라고 당황하는 눈빛입니다. 천사는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너 아브라함이 아들을 아끼지 않는 걸 보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게 분명하구나.’ 이런 발언을 은혜롭다고 보면 은혜로우나 위험하다고 보면 위험합니다. 그 순간에 아브라함은 뿔이 수풀에 걸려 꼼짝 못 하는 숫양을 발견했습니다. 그 숫양으로 번제를 드렸다고 합니다.

 

인신 제사와 선지자 전통

고대 사회에는 여러 형태의 인신 제사 관습이 있었습니다. 인신공양(人身供養)이나 인신공희(人身供犧)라고 불립니다. 신에게 살아있는 사람을 바침으로써 신의 진노를 풀거나 복을 얻으려는 의식입니다. 보통은 전쟁 포로나 종을 그 대상으로 합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왕의 신하나 귀족의 딸, 궁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바쳐지기도 했습니다. 세계 여러 곳에서 나오는 순장 흔적도 사실은 인신 제사입니다. 우리나라 대가야 시대에 가장 광범위하게 순장이 실행되었다고 합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 베트남 승려 중에 자기 몸에 불을 붙인 이들이 있었습니다. 반전 평화를 위한 인신공양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은 있었습니다. 4대강 반대를 이유로 자기 몸에 불을 붙인 승려도 있었습니다. 정치와 노동계에서 벌어지는 분신 사태도 일종의 인신공양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생존에 대한 극심한 불안입니다.

구약 선지자 전통은 근동의 인신공양 관습을 엄격하게 금했습니다. 19:5절입니다.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산당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살라 드렸나니 이는 내가 명령하거나 말하거나 뜻한 바가 아니니라.” 선지자들이 인신 제사를 엄격하게 금한 이유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자체는 아니나 하나님의 일부입니다. 심한 장애를 앓은 사람이나 비장애인이나 모두 똑같이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깊이에서 모두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을 번제로 바치는 행위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선지자들은 생각했습니다. 이런 선지자 전통이 당연하게 성립된 건 아닙니다. 오랜 시간에 걸친 투쟁의 결과입니다. 사람에게는 인신 제사가 그럴듯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자극적인 죽음을 통해서 생존의 불안을 심리적으로 극복할 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목표를 달성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전쟁이 그치지 않고, 군수산업이 줄어들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문제를 더 확대해서 보면 초등학생들을 선행학습으로 몰아넣는 행위도 사실은 인신 제사의 한 형태입니다. 아주 자극적인 방식으로 생존의 불안을 극복하려는 시도니까요. 생존에 대한 불안이 없다면 아이들을 선행학습으로 몰아넣지는 않겠지요.

구약 성경에서 인신 제사의 흔적은 두 군데입니다. 하나는 바로 우리가 읽은 아브라함의 이삭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선지자 입다의 서원 이야기입니다. 입다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집에서 가장 먼저 나와서 환영하는 사람을 번제물로 드리겠다고 서원 기도를 드렸습니다.(11:31) 경솔한 태도입니다. 종이 뛰쳐나오리라 예상했는데 딸이 먼저 나왔습니다. 입다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을 번제로 바쳤습니다.(11:39) 이스라엘의 선지자 전통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 벌어진 겁니다. 아브라함의 이삭 이야기도 그렇고, 입다의 딸 이야기도 고대 이스라엘에 아직 선지자 전통이 확립하기 전에 벌어진 사건인 셈입니다. 입다는 인신 제사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아브라함은 다행스럽게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저 경험 안으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시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려고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라고 말씀하셨다는 창 22:2절을 듣고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하신다는 표현이 성경에는 드뭅니다. 시험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욥 이야기에서 욥을 죽음 직전의 운명까지 몰고 간 이는 사탄입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할 때 받은 시험 세 가지도 사탄이 제시한 겁니다. 그런데 유독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만은 하나님이 직접 시험하셨다고 합니다. 사탄의 시험이라고 하면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말이 아예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일는지요.

여기서 성경 읽기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말은 창조주 하나님 신앙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그런데 그런 문장이 성경에 분명하게 나옵니다. 도대체 이런 명령은 어디서 온 겁니까? 하나님 말씀은 우리가 귀로 듣거나 눈으로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오해하는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선지자들도 하나님 말씀을 서로 반대로 전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와 하나냐 선지자가 대표적입니다. 신약에서 율법에 관한 바울의 관점과 야고보의 관점이 달랐습니다. 바울은 베드로를 위선자라고 책망했다고(2:11 이하) 합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데도 이런 차이가 벌어집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별금지법을 완강하게 반대하는 설교자들이 있고, 침묵을 지키는 설교자들이 있고, 지지하는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누가 옳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었습니까? 지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탄의 말을 들었을까요? 사람은 극한 상황에서는, 그리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을 때 환청을 듣는 법이니까요. 정신이 똑바르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종종 환청을 듣습니다. 전직 대통령을 간첩이라고 하거나 남북평화를 위한 종전선언 시도를 반국가적 행태로 몰아갑니다.

이삭은 원래 자식이 없던 아브라함이 백 세에, 그의 아내 사라가 구십 세에 낳은 외아들입니다. 사라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 얻은 이스마엘로 만족하려고 했습니다. 이삭은 그야말로 아브라함에게 자기 생명보다 더 소중한 아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다는 말은 곧 아브라함 자신을 아끼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아들을 번제로 바칠 생각을 했냐, 아니냐가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가 어떤 절대적인 음성을 경험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런 음성 앞에서 우리는 ,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거나 , 알겠습니다.’ 그 외에는 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 죽음이 코앞에 들이닥친 순간이라고 상상해보십시오. ‘빛이여 있어라.’라는 말씀처럼 아브라함의 영혼을 화염처럼 사로잡은 하나님의 그 명령을 그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거래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100년도 채 살지 못하는 인간이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과 어떻게 거래할 수 있겠습니까. 오해는 마십시오. 말이 안 되는 명령도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거나, 특히 교회 조직에 무조건 충실해야 한다거나 교회 목사나 설교자의 말을 하나님의 절대명령으로 여기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운명과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절대적인 음성을 듣고 사는 사람이 있고, 그런 경험이 전혀 없이 밋밋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칼을 아들의 목이나 명치에 들이대는 절체절명의 순간까지 나아갔습니다. 눈을 감고 아버지의 처분에 자신을 맡기는 이 아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는 눈에 보이는 유일한 미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미래를 완전히 포기하는 순간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이게 우리 일상생활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일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가시적인 미래만을 현실로 여기니까요. 그걸 포기하면 삶 자체가 무너진다고 생각하니까요. 속된 표현으로 가난한 인생은 망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래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10:28) 건성으로 대하면서 사니까요. 자기가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대상을 포기하는 순간까지, 자기를 부정하는 순간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하나님 경험은 불가능합니다. 이게 말이 될까요? 그런 순간이 여러분에게 오기를 원하시나요? 자기가 부정당할까 걱정이 태산 같나요?

아브라함은 바로 그 순간에 눈을 들어서 살폈습니다. 숫양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양은 뿔이 수풀에 걸려서 꼼짝 못 했습니다. 숫양은 번제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전부터 숫양이 거기 묶여 있었는지, 길을 잃은 숫양이 아브라함의 이상한 행동을 보고 놀라서 도망가다가 거기 걸렸는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은 처음에 숫양을 보지 못하다가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니까 보인 겁니다. 저는 아브라함이 숫양을 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아들 이삭을 실제로 죽이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유혹을 받기는 했으나 마지막 순간에는 돌이켰을 겁니다. 입다와는 다른 사람이었거든요. 입다는 전쟁 영웅이었지만, 아브라함은 믿음의 표상이었거든요.

 

여호와 이레

본문은 마지막 단락에서 여호와 이레를 거론합니다. ‘여호와께서 준비하심이라는 뜻입니다. 그 사실에 눈을 뜨는 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려는 핵심입니다. 생존의 불안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작은 일상에서 시작해서 교회 공동체와 인류의 미래에 관해서 모두 생존의 불안을 경험합니다. 모든 행복한 조건을 갖춰도 그 불안을 넘어서기가 어렵습니다. 그 불안한 심리에서 온갖 불행한 일들이 파생합니다. 이렇게 물질적으로 풍요롭다는 21세기 현대인들조차 생존의 불안에, 또는 허무에 떨어지는 이유는 자기가 아는 생존 조건에만 길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걸 아무리 넘어서려고 해도 잘 안 됩니다. 칼을 들고 광신자처럼 설치는 아브라함을 천사가 뜯어말리듯이 우리 영혼을 각성하게 하는 강력한 힘이 우리를 붙들어줘야만 이미 준비된 숫양이 우리 눈에 들어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숫양이 무엇인지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은 다 아실 겁니다. 생존에 필요한 것은 이미 주어졌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이 주어졌습니다. 숨도 쉴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의 자존심이나 허영을 자극하는 그 이외의 것들이 부족할 뿐입니다. 우리 교회가 아주 작으나 교회로서의 생존에 필요한 면모를 다 갖추었습니다. 영혼의 눈이 밝은 사람은 칼과 불이 가리키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밀착해서 살아가기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삶을 준비시켜주시는지를 실감합니다. 그런 순간의 절정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즉 아무도 피하지 못할 죽음과 새로운 생명 안에서 예수그리스도와 하나 된 사람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광기처럼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인신 제사의 유혹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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