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2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성령강림절 조회 수 1760 추천 수 0 2023.08.08 07:19:46
설교보기 : https://youtu.be/hIqFCiLOcTY 
성경본문 : 로마서 9:1-5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9:1~5, 성령강림 후 10, 202386

 

 

바울의 격정

바울이 로마서를 집필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로마서는 16장까지 있습니다. 2천 년 전 필기도구가 열악했던 시절에 이렇게 긴 글을 쓰려면 보통 수고가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요즘 얇은 책 한 권 쓰는 품이 들어가겠지요. 바울이 혼자 책상에 앉아서 직접 글을 쓴 게 아닙니다. 그의 옆에는 글을 대신 써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16:22절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바울의 비서라 할 더디오는 바울이 말하는 걸 받아쓰다가 마지막 인사 대목에서 자기 개인 인사말을 덧붙였습니다.

로마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분들은 당시 바울의 심정이 매우 격정적이었다는 사실을 느꼈을 겁니다. 중간에 울컥하는 표현들이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설교 본문인 롬 9:3절이 그중의 하나입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여기서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은 유대민족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다소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습니다. 보통 유대인이 아니라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 할 정도로 유대인 소수 정예에 속했습니다. 유대교에 대한 열정이 유달리 강했기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으로 여기고 박해했습니다. 그 사실을 그는 여러 번 고백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경험한 뒤로는 오히려 예수를 전파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와 베드로보다 더 열정적인 예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 내용이 갈 1장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바울은 강경파에 속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야고보와 베드로 같은 이들과 갈등을 겪었습니다. 2:11절 이하에 따르면 바울은 베드로를 위선자라고 책망했습니다.

이런 갈등의 중심에는 토라(율법) 문제가 들어있습니다. 로마서도 핵심적으로 그 문제를 다룹니다. 유대교 전통에서 사는 사람들은 율법으로 의로워진다고 생각했으나 바울은 믿음으로 의로워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사실을 강조하다 보니까 바울은 유대 전통을 다 포기한 사람이구나, 유대교에서 볼 때 배교자구나, 하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전반부에서 그런 비난을 받을만한 내용이 많이 나오기는 합니다. 한마디로 율법으로는 인간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그런 비난이 오해에서 불거졌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유대민족을 배신하거나 율법 자체를 부정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롬 9:3절에서 격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유대 형제자매를 위한 일이라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고 말입니다. 바울의 이런 말은 일종의 문학적 수사입니다. 실제로 끊어져도 좋다는 말은 당연히 아닙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올인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다음에는 자기가 자랑하던 것을, 말하자면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고 베냐민 지파이며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며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는 사실을 배설물처럼(3:5~8) 여길 정도였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바울의 이런 격정적이라면 격정적이고, 과격하다면 과격한 발언을 이해하려면 오늘 본문의 앞 단락에서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 맥락을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8:31~39절이 그것입니다. 이 단락에는 9:3절과 대구를 이루는 구절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8:35절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야.” 8:39절입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헬라어 문장으로만 본다면 8장에 나온 단어(χωρίσει)9장에 나온 단어(πὸ)가 다르기는 하지만 문맥상 의미는 같습니다. NIV 번역은 9:3절에서 cut off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8:35절과 39절에서 separate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분리하다, 떼어놓다, 갈라놓다 등등, 비슷한 뜻입니다. 루터 성경은 세 구절에 똑같이 scheiden라는 단어로 나오는데, 그 뜻은 갈라놓는다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도 똑같이 끊어냄이라는 단어로 나옵니다. 바울은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끊어질지라도운운하기 전에 아무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지 못하며, 그 어떤 세상의 세력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지 못한다고 외쳤습니다.

이런 바울의 외침이 말이 될까요? 설득력이 있게 들립니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근거를 대라고 말하면 여러분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내려는 세력의 목록을 먼저 확인해봅시다. 35절에는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이 나옵니다. 38절과 39절에는 사망, 생명, 천사, 권세자, 현재 일과 장래 일, 능력, 높은, 깊음, 다른 피조물이 나옵니다. 이를 일상적인 단어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가난, 고독, 허무, 오해받음, 죽음, 장애, 난치병, 악한 권력자 등등입니다.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운명을 총망라합니다. 이런 운명에 떨어지면 사람들은 삶에 대한 열정을 잃습니다. 신앙도 무너집니다. 이런 저주스러운 운명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지 못한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삶에서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절대적이라는 말에 동의하시나요?

바울은 롬 8:31~39 단락에서 끊을 수 없다.’라는 표현 못지않게 또 다른 강한 표현을 반복했습니다. 로마서를 집필하면서 벌어진 바울의 격한 심정이 전달됩니다. 31절에서는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했고, 33절에서는 누가 고발하리요.’라고 했으며, 34절에서는 누가 정죄하리요.’라고 했습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세력도 대적하지 못하고, 고발하지 못하고, 규탄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아주 강렬한 표현입니다. 대단한 자신감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강한 어조로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의롭다 하셨다는 사실을(33b) 그가 확신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너희들이 옳다.’라는 인정을 받았다는 겁니다. 더는 세상이 말하는 기준에서 인정받지 않아도 됩니다. 세상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는 한 사람에게서 진실하게 사랑을 받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지 않아도 아쉬울 게 전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을 누가 대적하고, 누가 고발하고, 누가 정죄하겠습니까? 하루 세끼 일용할 양식만으로 삶을 충만하게 누리는 사람을 누가 높은 자리와 값비싼 자동차와 명품 핸드백과 목걸이에 마음을 빼앗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말이 그렇지 우리가 어떻게 세상에서 인정받지 않고 살 수 있나, 너무 비현실적인 주장 아닌가, 하고 질문할만합니다. 하나님에게서 인정받았다고 해서 당장 세상의 모든 문제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는 건 아닙니다. 여전히 외롭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며, 아쉽기도 하고, 어떤 때는 두렵기도 합니다. 인정받으려는 욕구도 완전히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약속받은 것이지 삶이 이미 완전해진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유적으로,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이 아직은 뛰어나게 연주하지 못하나 백건우나 조성진이나 임윤찬처럼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약속받은 거와 비슷합니다. 약속의 무게를 아는 사람은 완전한 삶을 향해서 수행하듯이 나아갑니다. ‘하나님이 의롭다 인정하셨다.’라는 명제의 중심으로 들어가려고 전심전력을 기울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으로 깊이 들어갑니다.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이 점점 더 피아노 세계 안으로 들어가듯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셨다는 바울의 이런 진술이 실제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알려면 율법(토라)에 대한 바울의 생각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율법 전문가였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검찰, 판사, 변호사 등등, 전문 법조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중에서도 바울은 소수 엘리트 집단에 속했습니다. 정말 순전한 마음으로 율법에 최선을 다했으나 결과로는 절망감이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킬수록 인간의 무능력만 드러난다고 보았습니다. 그 문제를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저는 바울의 이런 문제의식이 단순히 종교적 관념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 삶의 정수라고 생각합니다. 현대들은 대개 일종의 세속적인 율법주의자로 삽니다. 점수 계산으로 삶을 이해하는 겁니다. 높은 점수를 딸지는 몰라도 삶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을 고액 연봉으로 바꿔서 생각해도 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율법이 삶의 기준이었듯이 오늘날 자본주의 대한민국에서는 고액 연봉이 삶의 기준이니까요. 일단 사람은 자기가 받는 연봉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더 많이 받으려고, 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받으려고 합니다. 상위 1%에 해당하는 고액 연봉을 받아도 그것으로 삶을 충만하게 살지 못합니다. 거기에 매달릴수록 자기의 한계만 더 드러납니다. 자기의 한계가 드러나니까 절망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운 길을 찾았습니다. 율법의 죄책감에서 해방되어 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혔습니다. 율법을 얼마나 반듯하게 지키느냐 하는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깊이 경험하느냐 하는 관점으로 바뀐 겁니다. 비유적으로 자녀들이 아버지나 어머니의 말씀을 얼마나 잘 듣느냐 하는 데서부터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깨달은 겁니다. 공부를 못하거나 게을러도 그분들은 자기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워하게 되었습니다. 조금 다른 비유를 들면 이렇습니다. 이전에는 자기가 왜 이렇게 못생겼는지, 가난하게 사는지, 머리가 나쁜지, 몸이 약한지에만 신경을 쓰다가 이제는 자기가 지금 여기서 이렇게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신비하고 놀라워진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다고, 고발하지 못한다고, 정죄하지 못한다고, 판단하지 못한다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었습니다.

 

만물 위의 하나님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9:3)라는 바울의 진술은 실제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사실이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4절에서 언급한 이스라엘의 탁월한 종교적인 전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자 됨, 영광, 언약, 율법, 예배, 약속은 자랑할만합니다. 바울이 볼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런 전통이 말하는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은 아닙니다. 9:8절에 따르면 육신의 자녀가 있고 약속의 자녀가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그게 안타까운 겁니다. 이스라엘 동족은 그에게 애증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특권이 있었으나 그 특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복잡한 심경으로 바울은 오늘 설교 본문의 마지막 절인 5절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한마디로, 바울은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우리말 성경의 이 문장에 다음과 같은 각주가 달렸습니다. “또는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께 세세에 찬양이 있으리로다.” 두 문장은 물론 다르긴 하지만 실제로는 같은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외아들이라는 표현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고후 4:6)이라는 표현, 그리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14:9)라는 표현이 다 똑같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롬 8:3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죽었으나 다시 살았고, 하나님 우편에 계시며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신다는 말은 예수의 신성에 대한 바울식의 표현입니다. 예수에게서 신성이 온전하게 드러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9:5절에서 두 가지가 언급되었습니다.

첫째, 그는 만물 위에 계십니다. 만물 라는 말은 만물을 초월한다는 뜻입니다. 막연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태풍을 보십시오. 기상관측용 슈퍼컴퓨터로도 태풍의 경로를 완벽하게 예측할 수 없습니다. 태풍 경로에 영향을 주는 요소가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많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이 거의 맹신하다시피 하는 자연과학은 세상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그것도 지나간 것에 대한 측정과 분석이지 미래의 세상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자연과학이 말할 수 없는 그런 현상을 초월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만이 만물을 초월하는 존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둘째, 그는 영원히 찬양받으십니다. 이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도 찬양을 받긴 합니다. 명예를 얻기도 합니다. 훌륭한 사람들은 분명히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영원히찬양받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도 계속 그렇게 훌륭할 수는 없습니다. 종종 실수도 하고, 나이 들어서 치매에 걸리기도 합니다. 모든 이들은 곧 죽고 없어질 겁니다. 얼마 전에 저는 팀 켈러(1950~2023) 목사의 부고 소식을 듣고 놀랐습니다. 아직은 한창 일할 나이에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21세기 C.S. 루이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유명한 설교자요 기독교 문필가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519일 그의 SNS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고 합니다. “남편이자 아버지, 할아버지, 멘토이자 목사, 친구이자 학자인 팀 켈러는 오늘 아침 집에서 서거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만물 위에 초월하는 분이시고, 영원히 찬양받으실 분이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이 안타까운 겁니다. 보통 안타까운 게 아니라 자기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각오를 할 정도로 안타까운 겁니다. 바울의 이런 심정이 느껴지면 우리도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에 들어온 거지요. 먼 이야기로 들리시나요? 세상일에 바빠서 이런 것에 관해 생각해본 적이 없으신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말은 단순히 관념적인 기독교 교리가 아닙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무너지지 않는 삶의 근본 능력입니다. 8:3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소리 높여 외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으니까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승리의 기쁨을 노래하게 되었습니다. 삶에서만이 아니라 죽음에서도 우리의 기쁨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삶과 죽음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profile

[레벨:9]소유와존재

August 08, 2023
*.254.11.100

일단 사람은 자기가 받는 연봉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더 많이 받으려고, 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받으려고 합니다. 상위 1%에 해당하는 고액 연봉을 받아도 그것으로 삶을 충만하게 살지 못합니다.

거기에 매달릴수록 자기의 한계만 더 드러납니다. 자기의 한계가 드러나니까 절망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 부자들을 보면 볼 수록 자기의 한계가 드러나 절망한다는 말에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궁극적으로 아무도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만 살아가지 못하는 실존에 때로는 많이 힘들때도 있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August 08, 2023
*.104.32.91

소유존재 님은 느끼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씀하시는군요. 좋습니다.

자기 한계 앞에서 절망하지 않는 삶을 가리켜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출 9:12)라고 표현합니다. 

그런 완악한 마음으로 살면 자신의 참된 실존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불행한 일이지요.

상위 1%에 속한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제가 자세하게는 모르나

대충은 압니다.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겠습니다.

아무리 럭셔리 한 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거기'입니다.

높은 권력과 명예를 누린다고 해도 별거 없습니다.

이런 말이 소유와존재님에게 들리지 않을지도 모르죠.

1만명 교인이 모이는 교회 목사라고 하더라도 

그런 목회 업적를 통해서 목사가 구원받지 못한답니다. 

영혼이 자유롭지 못한 거지요.

작은 교회 목사가 힘들 때도 있으나

하나님과의 관계만 분명하면 아쉬울게 없어요.

늘 배부르면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없듯이

늘 좋은 조건 안에서 살면 실제 삶을 누리지 못한답니다. 

삶이 실제로 힘들 때가 있다는 걸 저도 이해합니다.

무시당할 수도 있고, 정말 피곤할 때도 있겠지요. 

그건 그것대로 풀어나가면 되고,

절망하지 않는 듯한 포즈를 취하면서 멋지게 사는 이들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위선이 몸에 베어서 그렇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70378
1052 부활절 부족함 없는 삶, 가능한가? (시 23:1-6) 2024-04-21 431
1051 부활절 죽은 자 가운데서 (눅 24:36b-48) [2] 2024-04-14 538
1050 부활절 생명의 로고스 (요일 1:1-10) [2] 2024-04-08 577
1049 부활절 예수 부활의 첫 증인들 (막 16:1-8) [4] 2024-03-31 683
1048 사순절 향유를 손에 든 여자 (막 14:1-11) [4] 2024-03-24 744
1047 사순절 새 언약의 날 (렘 31:31-34) [2] 2024-03-17 647
1046 사순절 죽임에서 살림으로! (엡 2:1-10) [6] 2024-03-10 891
1045 사순절 십자가의 길과 하나님의 능력 (고전 1:18-25) [2] 2024-03-04 928
1044 사순절 예수 승천과 하나님 우편 (벧전 3:18-22) [9] 2024-02-18 1249
1043 주현절 예수의 변모 사건 (막 9:2-9) [5] 2024-02-11 978
1042 주현절 여호와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 (사 40:21-31) [6] 2024-02-05 1026
1041 주현절 예수의 배타적 권위 (막 1:21-28) [4] 2024-01-28 932
1040 주현절 부름-버림-따름 (막 1:14-20) [2] 2024-01-21 992
1039 주현절 사무엘의 하나님 경험 (삼상 3:1-10) [2] 2024-01-14 1028
1038 주현절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 (행 19:1-7) [5] 2024-01-07 1032
1037 성탄절 만물의 찬양 (시 148:1-14) [2] 2023-12-31 1197
1036 대림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2] 2023-12-24 2143
1035 대림절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 (사 61:1-4, 8-11) [2] 2023-12-17 2342
1034 대림절 하나님의 날: 새 하늘과 새 땅 (벧후 3:8-13) [2] 2023-12-10 2325
1033 대림절 깨어있음이란? (막 13:24-37) [2] 2023-12-04 2628
1032 창조절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다! (엡 1:15-23) [2] 2023-11-26 1179
1031 창조절 은혜를 갈망하는 시인 (시 123:1-4) [2] 2023-11-19 1234
1030 창조절 외면당한 사람들 (마 25:1-13) [5] 2023-11-12 1338
1029 창조절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의 역설 (마 23:1-12) 2023-11-07 1082
1028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마 22:41-46) [7] 2023-10-29 1373
1027 창조절 재림신앙 (살전 1:1-10) [4] 2023-10-22 1325
1026 창조절 금송아지 이야기 (출 32:1-14) 2023-10-15 1219
1025 창조절 모퉁이 머릿돌이신 예수 (마 21:33-46) 2023-10-09 1163
1024 창조절 과정으로서의 구원 (빌 2:1-13) 2023-10-01 1207
1023 창조절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마 20:1-16) [2] 2023-09-24 1328
1022 창조절 홍해 이야기 (출 14:21-31) 2023-09-17 1332
1021 창조절 도반 공동체 (마 18:15-20) [4] 2023-09-10 1265
1020 창조절 '악' 앞에서 (롬 12:14-21) [4] 2023-09-04 1449
1019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2023-08-27 1202
1018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마 15:21-28) [6] 2023-08-20 1569
»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2] 2023-08-08 1760
101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 13:31-33, 44-50) [2] 2023-07-30 1694
1015 성령강림절 여기 계신 하나님 (창 28:10-19a) [4] 2023-07-23 1820
1014 성령강림절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1-11) 2023-07-16 1361
1013 성령강림절 영혼의 안식 (마 11:16-19, 25-30) [4] 2023-07-09 1646
1012 성령강림절 인신 제사의 유혹 (창 22:1~14) 2023-07-03 1319
101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4] 2023-06-25 1814
1010 성령강림절 성령과 하나님 사랑 (롬 5:1~8) 2023-06-18 1485
1009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2023-06-11 1635
1008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2023-06-05 1586
1007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2] 2023-05-28 1511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1813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1629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1912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1400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1824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2260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2441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1957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1905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1916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2956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2322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2265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2754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2650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490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507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552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619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587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331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287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3299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491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4104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516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3032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649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602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291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693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177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307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828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627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314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531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448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956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652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511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767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655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676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262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903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506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750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468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555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841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4046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639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986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