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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송아지 이야기 (출 32:1-14)

창조절 조회 수 1223 추천 수 0 2023.10.15 19:40:29
설교보기 : https://youtu.be/2c_J3kA49qk 
성경본문 : 출애굽기 32:1-14 

금송아지 이야기

32:1-14, 창조절 7, 20231015

 

 

지금 팔레스타인 가자’(GAZA) 지구가 일촉즉발입니다. 지난 107()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해서 수많은 인명 피해를 일으킨 뒤에 이스라엘은 이미 훨씬 강한 보복공격을 감행했고 민간인의 엄청난 희생이 예상되는 지상군을 가자 지구에 투입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그 가자 지구에서 6-7시 방향으로 내려오면 역삼각형 지역이 나오는데, 그곳을 시나이반도라고 합니다. 이집트 땅입니다. 이집트 본토와 시나이반도 사이에 홍해 상단인 수에즈만이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이후 홍해를 건너서 도달한 지역이 시나이반도로 추정됩니다. 시나이반도 남단에 시내산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주 큰 일이 벌어집니다. 그 이야기가 오늘 설교 본문인 출 32장에 나옵니다.

 

금송아지 형상 제작

32:1절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나러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는 이야기는 훨씬 앞인 출 19장부터 시작합니다. 시내산에서 모세는 십계명을 비롯한 여러 율법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율법은 함무라비 법전처럼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법전입니다. 율법의 화룡점정은 십계명을 돌판 두 개에 새기는 것입니다. 그 일이 출 31:18절에 나옵니다. 이제 모세는 십계명 돌판을 들고 하산하면 됩니다. 이런 전반적인 준비에 예상외로 시간이 많이 들어간 것 같습니다. 시내산 아래 광야에서 머물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더는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32:1절에서 모세의 형 아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그들의 쫓기는 심정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당시 최고 문명을 자랑하는 이집트에서 살았습니다. 비록 소수 민족이기에 불이익은 받았으나, 지금 미국에 사는 한인 교포들처럼 먹고사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운만 좋으면 거기서 출세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문명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광야에서 떠돌이 신세가 된 것입니다. 당장 먹을거리와 마실 물 문제도 원활하지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미래가 아주 불투명해졌습니다. 원래의 계획이라면 출애굽 이후 석 달이면 충분히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도착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시나이반도 남쪽 광야에서 배회하는 중입니다. 과연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을지, 다른 광야 종족들처럼 계속 광야에서 연명하게 될지,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야 할지, 온갖 망상에 시달렸을 겁니다. 그들은 모세라는 지도자만 믿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에게서는 감감무소식입니다. 시내산 풍경이 출 19장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있고, 나팔 소리가 아주 크게 울렸습니다. 화산폭발 장면입니다. 이런 위험한 산에 올라갔으니 모세가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모세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해서 무작정 산에 머물러 있을지도 모릅니다. 인내심이 한계에 이른 백성들은 모세의 형 아론에게 모세 대신 우리를 이끌어줄 ’(אֱלֹהִ֗ים, 엘로힘)을 만들라고 말했습니다.

아론은 백성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불안감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론은 여성들의 장신구인 금귀걸이를 모으게 했습니다. 우리의 아이엠에프 시절 벌였던 금 모으기운동과 비슷합니다. 그 장면을 4절이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은 금 송아지 앞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다음날 이른 시간에 그들은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백성들은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았다.’라고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벗어났다기보다는 잠시 잊어버린 것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현실에서 도피하는 방식으로 불안을 해소합니다. 그게 극단적으로는 알코올중독이나 마약중독으로 나타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는 유사 중독 현상이 자주 나타납니다. 금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먹고 마시면서 뛰노는 겁니다.

 

하나님과 모세의 대화

이제 본문의 후반부가 7절부터 시작합니다. 시내 광야에서 백성들이 벌이는 일을 보신 여호와(יְהוָ֖ה,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1절까지 이어집니다. 그 핵심 내용은 네 가지입니다. 1) 이스라엘 백성이 부패했다. 2)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예배했다. 3) 이 백성은 목이 뻣뻣하다. 4) 그들을 진멸하겠다.

당신 하나님의 백성을 진멸하겠다는 말씀은 자기에 대한 부정입니다.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의미이니까요.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성경에 아주 드뭅니다. 노아 홍수 이야기에 비슷한 표현이 나옵니다. 6:6-7절에서 하나님은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을 두 번이나 한탄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모든 생명체가 멸절될 정도로 사람이 악하다는 뜻입니다. 이런 표현을 요즘 우리는 실감합니다. 인간이 기고만장 자랑하는 인간 문명으로 지구의 생명체가 완전히 멸절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누가 완전히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작은 판단 잘못과 컴퓨터의 오작동으로 핵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고, 지구의 평균 기온이 2도만 상승해도 지금의 생태계는 유지되지 못합니다. 노아 시대와 모세 시대와 오늘이 형식만 다르지 내용은 똑같습니다.

11절부터 모세의 호소가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는 만드는 대목에서는 하나님 호칭이 엘로힘으로 나왔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절하겠다는 대목에서는 야훼로 나왔는데, 여기 모세가 호소하는 대목에서는 야훼 엘로힘으로 나옵니다. 성서학에서 말하는 E 문서와 J 문서가 모세의 호소 대목에서 종합된 것입니다. 이 대목이 출애굽기를 기록한 사람이 말하고 싶은 핵심입니다. 내용은 네 가지입니다. 1) 왜 당신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는가? 2) 하나님의 백성을 애굽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게 하시려는가? 3) 진노를 그치시고 당신 백성에게 화를 내리지 마시라. 4)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야곱)과 맺은 당신의 약속을 잊지 마시라.

모세의 이 호소는 시대를 초월해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호소이자 절규입니다. 매우 어려운 역사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풍전등화의 순간을 많이 겪었습니다. 온갖 수모와 모욕도 당했습니다.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서 8세기 초에 북이스라엘이 멸망했습니다. 6세기에는 급기야 남유다마저 신흥제국 바벨론에게 박살이 났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졌고, 수많은 사람이 죽고 노예로 팔리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없어진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찾은 원인은 금송아지 숭배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보이는 형상을 신으로 섬긴 겁니다. 지금 우리가 자본을 신으로 섬기듯이 말입니다. 금송아지 제작과 자본숭배가 왜 멸망해야 할 정도의 잘못인지를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영혼의 눈이 밝은 선지자들만 그 문제를 뚫어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선지자들입니다.

금송아지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분단 역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절은 통일 왕국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시절에 나라가 남과 북으로 나뉘었습니다. 여로보암 장군이 반역을 일으켜서 북이스라엘을 세웠습니다.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 백성이 남쪽 지역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지 않게 하려고 금송아지 상 두 개를 만들어 북쪽 지역 벧엘과 단에 설치했습니다. 그 이야기가 왕상 12:25절 이하에 나옵니다. 바벨론 포로 신세로 떨어진 자신들의 운명을 고대 이스라엘 왕조 역사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정평이 난 여로보암의 금송아지 제작 사건과 연결해서 해명하려고 출애굽기를 기록한 선지자는 금송아지 이야기를 오늘 본문에서 다시 거론한 겁니다. 금송아지 숭배가 죽음의 길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숭배한 잘못은 인정하나,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멸절될 수는 없는 거 아니냐, 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호소했습니다. 이런 호소는 형식상 하나님을 향한 것이나 실제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겁니다. 일종의 설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상에서 놀림감이 되게 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믿으라고 백성들에게 설교하는 중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약속을 맺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으라고 말입니다. 그 약속은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가나안 온 땅을 자손에게 주셔서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믿음을 견지하면서 이스라엘은 주변의 막강한 제국 틈바구니에서도 지난 수천 년 동안 지금까지 버텨왔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이제는 일종의 작은 제국이 되어서, 그리고 미국이라는 거대 제국의 힘을 빌려서 팔레스타인을 박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건 아닐까요?

저는 지금 가자 지구와 이스라엘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해서 논평할 처지가 아닙니다. 국제 정세를 속속들이 파악할 능력도 없습니다. 하마스의 기습 공격을 옹호하는 건 말이 안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의 과도한 보복공격도 지지하기 어렵습니다. 남한과 북한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호전성을 용납해야 한다고 저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남한 정부의 선제공격 운운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한편으로 인간에게는 평화의 능력이 근본에서 부족한 게 아니냐, 하고 느끼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아무리 상황이 어두워도 평화로운 세상을 향한 열망은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사태처럼 비인간적이고 잔혹한 기습 공격을 당했을 때 기분 같아서는 몇 배 앙갚음을 해주고 싶겠으나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하면서 평화의 길을 찾아가는 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돌이키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 마지막 14절에 따르면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호소에 설득당한 겁니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완전성에 금이 가는 표현으로 들립니다. 완전하신 분이라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미리 알고 대처했었어야 하니까 말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완전하고 절대적이기에 뜻을 바꾸는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철학자는 신의 무감정(apathy)을 주장합니다. 신이 인간처럼 희로애락을 표출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저 높은 곳에 홀로 고고한 태도로 존재하면서 세상을 관조하는 신 표상을 가장 옳다고 보는 겁니다. 성경은 그렇게 하나님을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인간과 개인의 삶에 개입하십니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십니다.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탄식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자기 생각을 알리기도 하고, 심판하기도 하며, 생각을 바꾸기도 합니다. 그런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인격적인 존재라고 말합니다. 인격적이라는 말은 그분과 우리가 대화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하나님 표상이 구약과 신약 전체에 널리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분이 인격적인 존재이기에 우리는 그분께 기도를 바칩니다. 우리의 생각을 알립니다. 조금 경솔한 표현일지 모르나,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처럼 그분을 설득해야 합니다. 우리를 용서하시라고, 심판을 거두시라고, 구원의 약속을 기억해주십사, 하고 말입니다.

일부 자연과학자들은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인격적인 하나님 표상을 유치하다고 여깁니다. 그들이 볼 때 세상은 인격적인 존재가 개입할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철저하게 자연과학의 메커니즘으로 돌아가는 듯이 보입니다. 기도한다고 해서 전쟁이 끝나지도 않고, 기도한다고 해서 코로나 판데믹이 완전히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더 나아가서 입에 담을 수 없는 참혹한 현실을 보면 하나님의 인격성을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죄가 없는 이들이 억울한 일을 당합니다. 이번 하마스 이스라엘 전쟁으로 어린이들까지 많이 죽었습니다. 간혹 지진과 쓰나미로 수천, 수만 명이 생명을 잃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불행한 일들은 많습니다. 선하시고 능력이 많으시며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운 일들이 세상에 많이 일어납니다.

이런 사고방식에 젖은 현대인들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세계관으로 떨어집니다. 하나는 불행과 고난, 그리고 그런 일을 당한 사람들 앞에서 나타나는 냉소주의입니다. 이동권 확보를 위해서 출근 시간에 지하철 타기 방식으로 투쟁하는 장애인들을 향한 대한민국 대중들의 태도에서 여실히 나타납니다. 다른 하나는 삶의 신비에 대한 무지와 불신입니다. 이 두 가지 세계관은 서로 통합니다. 삶은 이기적 유전자의 활동 공간일 뿐이기에 가치 여부를 따질 수 없는 겁니다. 어느 전제적인 통치자가 있다고 합시다. 유전자가 그 사람을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들었으니 책임을 물으려면 그 사람이 아니라 유전자에 물어야 합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결국 우리를 냉소주의자가 되게 합니다. 세상을 기계적으로가 아니라 유기적이고 인격적으로 보아야만 우리는 남의 불행을 자신의 불행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멸절당할지 모른다는 사실 앞에서 책임감 있게 살려고 노력하고, 악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빗대서 말하면 감히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도록 설득하는 겁니다. 그런 용기가 생기고 의욕도 생깁니다. 기계가 아니라, 유전자가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금송아지 이야기를 읽으면서 당시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두가 금송아지를 소유하려는 겁니다. 오늘 이야기 이후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 문제는 반복되었습니다. 모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을 돌이키시라고 하나님을 설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설득당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5:20)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 문장을 자신에 대한 절망이 깊은 곳에 하나님을 향한 희망이 더욱 넘쳤다.’라고 읽어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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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589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333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290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3303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491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4104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516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3036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649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602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295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693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177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308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831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631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314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532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450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957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652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512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768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657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677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264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903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508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752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472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557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842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4049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642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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