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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로고스 (요일 1:1-10)

부활절 조회 수 606 추천 수 0 2024.04.08 21:00:31
설교보기 : https://youtu.be/5dRnyroM_ck 
성경본문 : 요한일서 1:1-10 

생명의 로고스

요일 1:1-10, 부활절 2, 202447

 

 

신약성경의 서신들은 대개 인사말로 시작해서 본론을 다룬 다음에 인사말로 끝내는데 요한1서는 그런 인사말 없이 다짜고짜 본론부터 말합니다. 인사말을 주고받을 수 없을 정도로 뭔가 다급한 사정이 있어 보입니다. 요일 1: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생명의 말씀이라고 할 때 그 말씀은 그리스어 로고스의 번역입니다. 로고스는 말, 단어, 이야기, 그리고 이성, 이치, 합리성 등등을 가리키는 철학 용어입니다.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가장 근본적인 힘이라는 뜻입니다. ‘저 사람은 로고스가 없어.’라는 말은 그 사람에게 세상과 삶을 바르게 판단할 능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로고스라는 단어는 요 1:1절에 집중적으로 나옵니다.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로고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를 통해서만 세상을 바르게 이해하고 생명을 경험할 수 있기에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요한복음에 영향을 받은 요한1서도 첫 문장을 요한복음에서 거의 그대로 따왔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없는 부가적인 설명이 특이합니다. 그 생명의 로고스를, 즉 생명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듣고 보고 손으로 만졌다.’라고 말입니다.

본문이 이렇게 말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교인 일부가 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일이 있었습니다. 요일 2:19()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요한이 우리에게서 나갔다.’라고 말할 때 나간 이들은 초기 영지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훗날 교회를 위태롭게 할 정도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훗날 등장한 대표적인 인물이 마르키온이라는 신학자입니다. 그는 구약성경을 교회에서 완전히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유명합니다. 137년에 로마에 가서 활동하다가 이단 판정을 받은 다음 144년에 정통 교회에서 떨어져나와 새로운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이런 혼란의 조짐을 미리 느낀 요한1서는 오늘 본문에서 이를 경고한 것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이 교부들로부터 배척당한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부정한다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예수가 실제로 몸으로 살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겁니다. 그들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라면 인간적인 한계가 있으면 안 됩니다. 신이 인간과 똑같다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그들은 역사에서 살았던 예수의 겉모습과 본질을 구분합니다. 예수의 본질은 완전히 영적인 존재였고 그의 육체는 가짜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입니다. 십자가에서 받은 예수의 고통과 고난도 가짜입니다. 신이 고통받으면 안 되니까요. 이런 주장을 가리켜서 가현설(docetism)이라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예수께서 깨달은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를 깨닫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 영적인 깨달음과 지식이 바로 영지(靈知, 그노시스)입니다. 거칠게 표현해서, 예수 믿는다고 너무 나대지 말고 조용히 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신비롭고 오묘한 구원의 깊이로 들어가면 된다는 뜻입니다. 아주 고상하고 매력적인 종교 현상으로 보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영지주의 스승이 등장한다면 영성이 대단히 높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겁니다. 현대의 지성적인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경향을 보이니까요. 여러 가지 점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과 교회 안에서 부대끼지 말고 혼자 조용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 거지요. 상당히 설득력이 있기도 하고, 크게 잘못되지도 않아 보이는 영지주의 그리스도인들을 교부들은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잘한 일일까요, 경솔한 건가요?

오늘 본문에서 요한이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라고 예수에 대한 물적 경험을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이 육체로 살았던 분입니다. 제자들은 그와 함께 먹고 마시고 여행을 다니고 웃고 슬퍼하기도 했습니다. 실제의 삶을 함께 살았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지주의의 기본 관점인 영육 이원론은 들어설 여지가 없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에게는 정통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영지주의자들에게 육은 악하고 영만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삶에서 가능한 한 육체적인 삶은 부정되어야 하고 영적인 삶은 권장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지주의 스승들은 대개 금욕적으로 살았습니다. 지금 수도원에서 사는 수도자들처럼 적게 먹고 마시고, 기도와 성경 읽기와 묵상에 전념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금욕적인 삶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산다고 해서 인간이 깨끗해지거나 순결해지는 게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금욕생활을 하면서 자신은 육체로 죄를 지은 게 없으니 괜찮다고 주장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본문은 10절에서 그 문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이 구절에서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바로 초기 영지주의자들입니다. 요한이 지금 그들의 인격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인간론과 죄론을 비판하는 겁니다. 그들은 육체가 아무리 죄를 범했어도 영만 깨끗하면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에서 짚었듯이 육체의 욕망을 철저하게 억누르는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영지주의자들도 있었으나 거꾸로 퇴폐적으로 살았던 영지주의자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금욕적으로 산 사람들은 자신들이 실제로 죄를 범하지 않았으니까 죄가 없다고 말했고, 어쩔 수 없이 육체적 욕망에 떨어져서 살았던 사람들은 그런 삶이 자기의 영혼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으니까 죄가 없다고 말한 겁니다. 양쪽 모두 위선입니다. 위선적인 삶으로 구원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는 죄의 지배를 받는데도 받지 않는 것처럼 자기와 다른 사람을 반복해서 속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위선적인 삶의 태도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나타난 특정한 종교 현상만이 아니라 오늘 21세기 현대인의 삶에도 그대로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인의 정신 구조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죄에 대한 의식이 희박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번 총선에 나선 어떤 후보는 서울 서초동에 있는 30억짜리 아파트를 사면서 모자란 돈을 대부업체에서 빌렸다고 합니다. 이자가 비싸니까 나중에 새마을금고에서 대학생 딸 이름으로 사업자 기업 운전자금대출로, 편법인지 불법인지 모르겠으나, 11억을 빌려서 빚을 갚았다고 합니다. 한창 아파트 열풍이 불 때 벌어진 일입니다. 본인은 전혀 죄의식이 없었을 겁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 방식으로 부동산에 투자한다고 생각했을 테니까요. 저는 어느 특정한 한 사람을 파렴치하다고 비판하려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에 사는 현대인들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이 그렇다는 뜻입니다. 당장 실정법에 걸리지만 않거나 피할 수만 있다면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강한 겁니다. 거의 종교 같습니다. 스스로 자기를 지킬 수 없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법조인들도 자신들의 행위를 돈과 연결하고, 거의 성직이라 할 수 있는 의료인들도 자신들의 행위를 돈과 연결합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나 이 시대가 그런 경향을 보이는 건 분명합니다. 인격이 왜곡되어서가 아니라 시대정신에 휩쓸려서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사는 겁니다. 일종의 현대판 영지주의 현상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영지주의에서 나타나는 영육 이원론의 유혹을 버텨냈습니다. 육체와 영혼을 구분은 하나 분리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인격 전체가 총체적으로 죄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인정하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육체만 병든 게 아니라 우리의 영혼까지 병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겁니다. 예배 때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고, 우리 죄의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에게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태도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예배 때마다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그리스도교 예배 형식을 구질구질하게 여길지 모르겠으나 저는 인간과 구원에 대한 가장 정확한 통찰이 여기에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9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우리를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초기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인간을 이해하는 데에 죄 문제를 매우 철저하게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금욕적으로 살아도 죄에서 자유로운 게 아니며, 영혼을 아무리 육체와 분리해도 죄에서 자유로운 게 아니라는 사실을 뚫어본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영적 통찰을 유대 율법주의자들과의 투쟁에서 배웠습니다. 이미 예수께서는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실천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가리켜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즉 위선자라고 일갈하셨습니다. 바울은 율법이 진노를 일으킨다고(4:15), 즉 사람을 죽인다고 말했습니다. 율법이 나빠서가 아니라 오히려 선해서 죽이는 겁니다. 역설적입니다. 차라리 죄가 있다고 인정하면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는데, 죄가 없다고 하니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며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서 8절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고 했고 10절에서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라고 짚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처럼 죄를 인정하면 실제 삶에서 뭐가 달라진다는 겁니까? 정통 그리스도인과 영지주의 그리스도인 사이에 실제 삶에서 무슨 차이가 있나요? 지금 그리스도인과 일반 사람 사이에 실제 삶에서 무슨 차이가 있는지라는 질문으로 바꿔도 됩니다. 이 차이를 수치로 계산할 수는 없으나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서 9절은 미쁘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집중하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주의자들처럼 율법에 매달리거나 영지주의자들처럼 신비한 진리를 깨우침으로써 선해지고 의로운 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는 사실에 우리의 실존과 운명을 맡김으로써 죄 문제를 극복하는 겁니다.

죄 문제의 해결에서 열쇠는 생명이 로고스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7절에서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했고, 9절에서 우리 죄를 자백하면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 너무 엄청난 발언이라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곧이들으려 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들어도 이런 말은 조금 이상하긴 합니다. 예수의 피가 마술을 부리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여기서 를 언급한 이유는 예수의 죽음이 구약의 희생 제사와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은 깨끗한 짐승을 잡아서 그 피를 제단에 뿌림으로써 죄를 용서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상징이지만 그 상징에는 놀라운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피는 바로 생명의 실체입니다. 피가 있어야만 우리의 생명이 유지됩니다. 죄는 생명을 파괴합니다. 탐식이 우리의 건강을 해치듯이 말입니다. 생명을 얻으려면 생명을 파괴하는 죄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피를, 즉 자기 생명을 바치는 게 곧 죄를 용서받는 길입니다. 그래서 구약 유대인들은 아직은 살아있어야 하니 자기를 바칠 수는 없고 대신 짐승을 바쳤습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자기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죽어야 죄에서 해방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전통을 알고 있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의 제사의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완성되었다고 믿었기에 지난 2천 년 동안 매번 예배를 드릴 때마다 죄를 용서해달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다시 정리하면, 죄의 원인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의 분리이며,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죄를 용서받는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분리가 해결됨으로써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죄 문제가 우리 삶에서 얼마나 실질적인지를 생각해봅시다.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에서 압도적인 1위를 달리는 통계가 자살률이고, 압도적인 최하위를 달리는 통계가 출산율입니다. 세계가 부러워할 정도로 경제가 부흥했고 K 문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마당에, 그리고 2천 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전무후무할 정도로 그리스도인 숫자와 교회 숫자와 신학교 숫자가 늘어난 마당에 삶의 질이 최저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우리의 삶이 어딘가 크게 훼손되고 왜곡되어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삶의 훼손과 왜곡은 곧 죄의 결과가 아닐까요?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 이유는 죄가 없다.’라고 주장하는 영지주의에 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죄를 위선으로 바꿔서 조금 더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나보다 상대가 더 나쁘다는 사실에 매달리는 방식으로 정치적 이득을 보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위선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정치 권력과 명예를 손에 넣은 사람들의 연봉을 교사 수준으로 하향 평준화하는 건 어떨까요? 그런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으면서 나라를 구하려고 대통령이 되거나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나섰다면 그건 위선이고 죄입니다. 그런 위선과 죄가 구조적으로 뿌리를 내린 이 시대는 우리의 생명을 훼손하고 왜곡합니다. 빈부격차가 점점 늘어나는 세상에서 스스로 자기를 지켜낼 힘이 없는 젊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며, 자기를 실현할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는 젊은 사람들이 결혼도 안 하고 아기도 낳지 않습니다. 모두 기성세대의 책임입니다.

다시 예수의 피로 돌아갑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무죄한 자의 죽음을 대표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절규하고 죽었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살아있는 자로 경험되었다는 사실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토대입니다. 죽기 전의 생명체로 되돌아온 게 아니라 종말에 실현될 미래의 생명으로 변화되었기에 그 어떤 기자도 부활의 주님 앞에 카메라를 들이밀고 인터뷰를 시도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절망했던 제자들이 더는 절망감에 떨어지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미래의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충만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들에게는 이제 살아있음의 의미와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많은 사람이 원하는 무병장수와 럭셔리한 인생이 살아있음의 본질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받는 고난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생명에 영혼의 눈이 열림으로써 죄로부터 해방되고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생명을 향한 희망으로 충만해진 사람이 왜 위선에 떨어지겠으며, 자기의 영혼만은 순수하다고 자기를 합리화할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그리스도교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발생했기에 오늘 본문이 그를 가리켜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로고스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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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소유와존재

April 09, 2024
*.254.11.100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걸 인정한다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든 일이 되어 있을까요?

인정해버리면 쉬운데 왜 그렇게 인정이 안될까요?

우리의 실존을 관통하는 성서의 가르침이 진리라는 걸 안다고 하면서도

왜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할까요?

나의 존재가 인간이길 거부하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건 아닐까요?

말씀이 점점 내 심장으로 가까이 다가옴을 느낍니다.

심장에 닿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몹시 두렵습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기에

다가오는 그 순간을 당겨서 살아보려고 애를 써봅니다.

또한 인간 실존 너머에 계신 그분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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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09, 2024
*.181.143.52

그분은 인간 실존 '너머'이면서

동시에 인간 실존 '안'이고 

인간 실존과 '함께'이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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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1994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3037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2410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2352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2841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2726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582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594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648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709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676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436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380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3410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598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4212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626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3117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738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694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375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784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258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398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916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715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400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613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540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4035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737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601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850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732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756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345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980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586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839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554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650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928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4138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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