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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https://youtu.be/gCMaKKHfDNo 
성경본문 : 로마서 8:1-11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8:1~11, 성령강림 후 7, 2023716

 

 

폭탄선언

바울은 롬 8:1절에서 과감하게 발언합니다. <개역개정><공동번역><현대 독일어 성경>(사역)을 차례대로 읽겠습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결코 단죄받는 일이 없습니다.

3)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결속된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각각 정죄, 단죄, 심판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κατάκριμα인데, 영어 condemnation(비난)에 해당합니다.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양쪽으로부터 비난받았습니다. 한쪽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율법은 모세 오경을 비롯한 그들의 모든 종교 전통을 가리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갈대아 우르를 떠나고 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출애굽 이후 광야 생활 중에 시내 산에서 율법을 전수한 모세의 후손이라는 겁니다. 자랑할만합니다. 요즘 식으로 바꾸면 대한민국의 장자 교단이라는 자부심과 비슷합니다. 가장 모범적이고 개혁적인 교회, 해외 선교를 가장 많이 하는 교회 등등, 내세울 게 많은 교회라는 자부심입니다. 그들의 율법 전통에 따르면 예수는 실패한 인물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는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라는 게 율법의 전통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율법으로 절대 비난받지 않는다는 바울의 발언은 폭탄선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한 다른 한쪽은 로마인들입니다. 당시의 최고 문명을 구가하던 로마인들이 볼 때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은 묵시적 소종파 운동을 꿈꾸는 사람들, 또는 세상살이에 불만을 느끼고 사회 전복을 바라는 광신자들이었습니다. 로마 정권은 예수에게 십자가 처형을 선고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폭력적인 반국가사범에게 해당하는 징벌입니다. 예수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이들은 비난받을 게 두려워서 자신들의 신분을 감추고 싶어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심문당하는 중에 세 번에 걸쳐서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을 부정했다고 복음서가 증언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로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흔적도 없이 끝나야만 했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실제로 그런 위기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런데 살아남았습니다. 그냥 살아남은 게 아니라 자신들을 비난했던 유대교보다 더 큰 세력이 되었고, 예수를 처형한 로마 정권의 중심 종교가 되었습니다. 이게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인간 삶을 지배하는 종교 권력과 정치 권력이 부정할 수 없는 힘이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 힘을 일반적으로 용어로 하면 진리이며, 그리스도교 용어로 하면 복음입니다. 정말 참되고 복된 소식이 사람들의 귀에 들린 겁니다. 바울이 롬 8:1절에서 한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한 사람은 종교와 정치와 세상의 그 어떤 세력으로부터 비난받지 않고 무시당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 이유를 2절 이하에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2절을 들어보십시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ζωῆ)의 성령(Πνεύμα)의 법(νόμος)이 죄(ἁμαρτία)와 사망(θανάτος)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 구절에는 대립하는 두 개념이 나옵니다. 하나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고, 다른 하나는 죄와 사망의 법입니다. 이런 진술은 너무 오래전 이야기이면서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관에서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라서 알아듣기가 까다롭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로마서는 바울이 고린도에 머물던 56년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글입니다. 당시 로마에 있던 그리스도인 공동체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이방인이 함께 모였습니다. 바울은 서유럽, 그러니까 스페인까지 가는 길에 로마에도 들르고 싶어 했습니다.(15:22 이하) 당시 지중해 연안 도시 중에 가장 잘 나가던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의 진수를 말하는 중입니다. 그 복음의 진수는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육신과 영

바울은 단순히 죄와 사망이라고만 말하지 않고 죄와 사망의 이라고 말했습니다. ‘은 헬라어 νόμος의 번역입니다. 율법과 실정법, 그리고 윤리와 도덕과 사회 규범 등등, 모든 법적 장치를 총칭해서 노모스라고 합니다. 본래 법은 인간을 살리기 위한 안전장치이고 제도입니다. 법치가 그걸 의미합니다. 문명사회는 법치가 얼마나 살아있느냐에 따라서 평가됩니다. 바울이 그런 법치를 가리켜서 죄와 죽음의 법이라고 했습니다. 법은 육신(σάρξ)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3절부터 8절까지 육신이라는 단어가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5)을 생각하고, ‘육신의 생각은 사망’(6)이며,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7) 됩니다.

육신을 따른다거나 육신의 생각이라는 표현을 인간적 탐욕과 부도덕성이라고만 보면 안 됩니다. 오히려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선한 일들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그런 일들을 통해서 자기를 완성하려는 열정이 바로 율법의 작동 원리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지킴으로써 하나님께 인정받는다고 생각했고, 로마 지성인들은 로마의 지성과 예술과 문명을 통해서 자기들의 삶이 완성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상하기는 하지만, 그건 착각입니다. 표면적으로는 교양인이고 종교적인 세련미가 있고 경제적으로 상위 1%에 드는지 몰라도 그들의 영혼은 위선, 교만, 절망에 떨어집니다. 삶의 내용은 거기서 거기이고, 삶의 포장지만 멋질 뿐입니다. 그게 바로 죄와 죽음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바울의 말은 지나치게 종교적이어서 실제 삶에서는 현실성이 부족하다고 말입니다. 상류층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멋진지 몰라서 그런다고 말입니다. 저는 우리나라 상류층 사람들이 어떻게 고급지게 사는지는 직접 경험하지 못해서 잘 모릅니다. 정부 고위급 인사들의 재산공개를 통해서 돈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우리나라에 적지 않다는 사실은 압니다. 자녀들 입시 준비로 천문학적인 돈을 지출하는 집도 있다고 합니다. 교회 헌금을 고액으로 하는 서울 강남 지역 그리스도인도 많긴 합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라는 속담처럼 돈이 많아야 어려운 이들을 돕기도 하겠지요. 대중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정치인들도 있고, 수십만 명 이상의 구독자를 확보한 유명 유튜버도 있습니다.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일들은 모두 육신을 따르는 것이고, 육신의 일이기에 우리의 영혼을 만족하게 못 합니다. 매일 맛난 음식을 질리도록 먹거나 매일 술에 취하고,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돈을 벌거나 높은 수준의 교양을 쌓아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대형 교회에서 목회한다고 해서 목사의 영혼이 자유롭지 못한 것처럼 말입니다. 바리새인 중에서도 바리새인이라고 자처하던 바울도 율법의 삶에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율법에 매달릴수록 더 절망했습니다.

바울은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되는 새로운 길을 발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영’(Πνεύμα τς ζως)을 따르는 길입니다. 그래서 그는 육신의 생각은 죽음이지만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화라고(6) 과감하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생명의 영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해결되었으니까 이제 인간은 율법에서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그것이 곧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율법에만 머물렀던 바울이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해방감이었습니다.

바울은 3절에서 율법의 해결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공동번역>으로 들어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어 그 육체를 죽이심으로써 이 세상의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 이 문장이 말이 되나요? 율법에 충실했던 유대교 고위층과 로마법에 충실했던 로마 총독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제거했습니다. 니체가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은 죽었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종교 권력과 정치 권력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신의 아들까지 제거한 겁니다. 그것이 율법과 법규와 규범의 속성이자 작동 원리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자기가 잘나야 하기에 상대방을 깎아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의 결정판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죽음이 곧 율법의 파기 선언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율법 패러다임에서 벗어난 겁니다. 이제는 율법이 도모하는 육신의 아름다움과 인기에 매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예쁘다는 말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봤자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니까요.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육신이 아니라 영을 따를 때 율법이 제대로 이뤄진다고 말합니다. 영 안에서 율법의 참된 본질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공동번역>으로 4절을 보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 속에서 율법의 요구가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졌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벌어진 사건을 예로 들어야겠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끌려온 여자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여자를 예수 앞에 무릎 꿇게 하고 이 여자를 돌로 칠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돌로 쳐야 합니다. 율법은 늘 그런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북한을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굴복시킬까요, 하고 묻습니다. 실업 수당을 너무 많이 주면 일하기 싫어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수께서는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 조문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여자에게 어떻게 생명의 기회를 주느냐가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율법 조문에 묶이지 않는 방식으로 율법의 요구를, 즉 율법의 본질을 드러내려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게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5:17)라는 예수의 말씀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생명의 영

이제 우리의 질문은 죄와 죽음의 법에서 자유롭게 하는 생명의 영이 실제로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우선 은 현대인에게는 너무 거리가 먼 개념입니다. 히브리어 루아흐이고 헬라어 프뉴마입니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영, , 바람, 공기, 기 등등이 있습니다. 큰 의미로 보면 노장사상이 말하는 도()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하이데거의 존재도 영의 범주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은 자연과학의 인과율에 고착해 있어서, 원인과 결과가 딱 들어맞아야만 확실하고 옳다고 여기기에 영을 가깝게 느끼지 못합니다. 인공지능 시대가 된 이후로 그런 경향이 더 분명해졌습니다.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겁니다. 개인 운명과 국가와 지구와 우주 등, 세상 모든 현상은 인과율의 범주 안으로 완벽하게 들어오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50층 높이 아파트에서 어떤 사람이 깃털을 창밖으로 던졌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완벽한 인공지능으로 저 깃털이 어느 자리에 떨어질지 계산해낼 수 없습니다. 거의 무한에 가깝게 많은 우연한 것이 50층 높이와 땅 사이의 과정에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바람, 새들의 날개, , 땅에서 노는 아이들 등등, 변수가 무한합니다. 우리 몸과 질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처럼 의학이 발달했는데도 왜 장애인 아이가 태어나는지 완전하게 알지 못합니다. 먼 후일 의학이 더 발전하면 그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2023년 여름호 <창작과 비평>에 유전자 조작과 인공지능이 일반화한 세상을 주제로 하는 소설이 실렸습니다. 최진영 작가의 인간의 쓸모라는 제목의 단편 소설입니다. 그 부부는 양쪽의 유전자 중에서 나쁜 걸 제거하고 좋은 성질만 모아서 완벽한 아기를 만듭니다. 성행위 없이 시험관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 아이는 인공지능의 설계에 따라서 완벽하게 교육받고 미래가 결정되었습니다. 아이는 어느 날 그렇게 짜인 세계를 뛰쳐나갑니다. 인간과 그 삶은 인과율의 법칙에만 지배받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종종 생기로 번역되는 생명의 영이 무엇일까요? 카리스마가 넘치는 설교를 듣고, 찬송가를 열광적으로 부르면서 아멘할렐루야를 반복할 때 느끼는 뜨거운 감정이 생명의 영, 즉 성령 경험일까요? 생명 진화의 원리가 그것일까요? 저도 생명의 영을 온전하게 아는 게 아닙니다. 그쪽을 향해서 가고 있을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생명의 영을 조금씩이라도 가깝게 느낄 뿐입니다. 동시에 그걸 느낄수록 하나님 경험처럼 더 아득하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습니다. 바울이 9절에서 말하는 내용이 이런 경험에 이르는 데 크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바울은 여기서 생명의 영을 하나님의 영이고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창조의 영이고, 그리스도의 영은 부활의 영입니다. 창조의 깊이로 들어간 만큼, 그리고 부활의 깊이로 들어간 만큼 우리는 생명의 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11절에서 이 문제를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오늘 앞에서 전한 저의 설교는 모두 여러분을 이 구절로 안내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σμα)도 살리시리라.

 

바울이 또 부활을 이야기하는구나, 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군요. 신약성경은 몽땅 부활 이야기라고 해도 잘못이 아닙니다. 부활은 생명에 관한 이야기니까요. 여러분이 돈을 벌고 건강을 관리하고 자식을 키우고 친구를 사귀고 취미활동을 하고 공부하는 모든 일이 다 생명을 얻으려는 데에 있는 거 아닙니까. 부활은 그런 삶의 완성에 관한 이야기니까 당연히 반복해서 언급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서 고급스럽게 사는 걸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아도 만족은 안 되고, 얼마 가지 못해서 죽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 생명의 영이,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신다고 역설했습니다. 자기에 관한 온갖 염려와 자기 소멸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말입니다. 바로 그 생명의 영이 여러분을 현재와 죽음 이후까지 온전히 지키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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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487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4098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512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3029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646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599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286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692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176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306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825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622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311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527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448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952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647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505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765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651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675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259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98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501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748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467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550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838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4044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634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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