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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성령강림절 조회 수 1175 추천 수 0 2023.08.27 18:21:59
설교보기 : https://youtu.be/Np_iR_c8gkE 
성경본문 : 출애굽기 2:1-10 

모세의 출생 이야기

2:1-10, 성령강림 후 13, 2023827

 

 

아기 모세

오늘 설교의 성경 본문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가장 행복한 장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레위 지파에 속한 한 남자와 여자가 결혼했다는 말로(2:1) 이야기가 시작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신랑은 아므람이고, 신부는 요게벳입니다. 6:20절에 따르면 요게벳은 아므람의 고모입니다. 당시는 근친결혼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 결혼하기보다는 잘 아는 사람과 결혼하는 게 결혼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곤란한 상황을 방지하는 제일 나은 방법이라고 생각했겠지요. 부부는 아기를 낳았습니다. 2:2입니다.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새로 태어난 남자아이가 잘생겼다고 합니다. 독자들은 그런 표현에서 미소를 지을 겁니다. 자기 아이가 잘생겼다고 생각하지 않을 엄마가 어디 있겠습니까. 잘 생겼기에 석 달 동안 숨겼다는 말도 약간 이상하게 들립니다. 잘 생기지 못했으면 숨기지 않았다는 말이 되니까요. 아기가 잘 생기지 않았어도 당연히 숨겼을 겁니다. 숨기는 이유는 오늘 본문 앞 대목인 출 1:15-22절에 나옵니다.

당시 역사적 배경은 고대 이스라엘이 애굽의 고센에서 소수민족으로 살던 시절입니다. 야곱과 열두 아들을 비롯한 70여 명에 이르는 대가족이 수년 지속한 가뭄을 피해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이주한 뒤로 4백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후손의 숫자가 기하급수로 늘었습니다. 위기의식을 느낀 애굽 왕은 이스라엘 산파들에게 이스라엘 여자가 아들을 낳으면 모두 죽이라고 은밀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스라엘 여자들은 애굽 여자보다 훨씬 건강해서 산기가 있어서 달려가면 이미 아들을 낳았다고 산파들은 둘러댔습니다. 이제 왕은 더 강력한 조치를 취합니다.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무조건 나일강에 던지고 여자아이는 살려두라고 했습니다. 정말 말이 되지 않는 명령입니다. 애굽 당국은 나름으로 이런 명령의 필요성을 역설했을 겁니다. 남자아이를 나일강에 던져서 나일강의 신이 구할지 아닐지를 시험해보라거나, 나일강에서 살아나는 아이라야 용맹한 애굽의 군사가 될 수 있다는 말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1:22절에 따르면 애굽 왕의 명령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제국에 사는 그의 모든 백성에게 내린 것입니다. 이스라엘만 차별하는 정책이 아닌 거 같긴 한데, 확실한 내용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석 달을 버틴 산모 요게벳은 아기 울음소리가 커져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아기를 나일강에 던질 준비를 합니다. 이 아기는 요게벳에게 세 번째입니다. 첫째는 아들 아론이고 둘째는 딸 미리암입니다. 갈대 상자를 하나 준비했습니다.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역청과 나뭇진을 바른 갈대 상자에, 이는 노아 방주를 연상케 하는데, 아기를 넣어 갈대숲 사이에 두었습니다. 이 순간 어미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상상이 갑니다. 미혼모가 아기를 외국으로 입양시키는 심정이었을는지요. 아기가 담긴 갈대 상자가 어디로 떠내려가는지를 그의 누이 미리암이 멀리서 지켜보는 중이었다고 합니다.

그 절묘한 순간에 그 자리에 애굽 왕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왔습니다. 보통은 왕궁 목욕실에서 목욕했겠지요. 이날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공주는 시녀들과 함께 나일강으로 나왔습니다. 특별한 꿈을 꾼 것일까요, 갑자기 시원한 강바람을 몸으로 느끼고 싶었을까요, 또는 그녀는 정기적으로 나일강 강가를 산책하곤 했을까요? 모든 사건은 여러 일이 우연히 겹쳐서 발생합니다. 그녀들이 갈대 상자를 발견했습니다. 공주는 시녀들에게 갈대 상자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 안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을지 궁금했겠지요. 6절이 그 순간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공주가 아기를 불쌍히 여겼다고 합니다. 이런 연민은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공통된 감정입니다. 문제는 이 아기가 히브리 사람의 아기였다는 겁니다. 무엇을 보고 그렇게 판단했는지 본문이 설명하지는 않으나 할례 흔적이 중요했을 겁니다. 할례는 이스라엘 남자아기가 태어난 후 팔 일 만에 행하는 시술이었으니까요. 히브리 사람, 즉 이스라엘 사람은 애굽 사람들에게 혐오 받던 이들이기에 이 아기를 당국에 신고하거나 그냥 못 본 체해도 됩니다. 그런데 공주는 왕궁에서만 살아서 그런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해서 관심이 없었는지, 아니면 어린 생명에 대한 연민이 아주 강해서 그런지 이 아기를 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누이 미리암이 공주에 달려와서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7)라고 말합니다.

바로의 딸은 허락합니다. 미리암은 집으로 돌아가서 어머니를 불러옵니다. 공주는 그녀를 유모로 결정합니다. 당연히 아기를 키우는 삯을 주겠다고 합니다. 공주는 이 유모가 아기의 생모라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습니다. 바로 얼마 전만 하더라도 아기를 더는 숨길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갈대 상자에 넣어서 나일강 갈대숲에 내려놓았는데, 앞으로 어떻게 키우겠다는 건지 당시 상황에 관해서 우리가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이스라엘 남자아기를 무조건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이 그렇게 철저하게 지켜지지 않았나 봅니다. 모든 정책에는 예외가 있습니다. 더구나 공주가 선택한 일이니 누가 옆에서 토를 달겠습니까. 이렇게 아기 모세는 우여곡절 끝에 어머니의 손에 자라게 되었습니다.

 

아기 엄마

엄마의 손에 자란다는 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중요합니다. 아기는 엄마의 손길과 숨결과 감촉을 그대로 전달받습니다. 후각과 청각도 엄마에 의해서 더 풍성해집니다. 언어 발달 역시 어릴 때 엄마와의 소통이 매우 중요합니다. 엄마의 언어 습관이 아기들에게 그대로 전달됩니다. 언어는 단순히 의사 교환의 기능만 있는 게 아닙니다. 세계를 인식하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하이데거라는 철학자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쌍욕을 입에 달고 사는 조폭들은 세상을 그런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겁니다. 지금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우리 말과 글 구사력이 크게 떨어집니다. 오래전에 데이비드 고든 교수가 쓴 우리 목사님은 왜 설교를 못 할까?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인터넷을 통해서 짧은 글만 읽고 쓰던 젊은이들이 신대원에 들어오니까 설교 형식의 긴 글을, 일종의 논술 형식의 글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는 단순히 글 쓰는 기술이 부족한 게 아니라 논리적인 사유가 안 된다는 뜻입니다.

저는 우리나라에 외국어가, 특히 영어가 과도하게 많이 사용되는 게 상당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이 자주 출입하는 카페나 식당에 영어 문구가 많이 나옵니다. 인터넷 쇼핑 광고 문구를 보면 영어가 과반입니다. 순전히 영어로만 나오는 선전 문구는 저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영어 유치원이 성행한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기가 막힌 일이지요. 제가 언어 학자가 아니기에 잘못 생각하는지 몰라도, 한 사람에게 모국어는 하나만 가능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중 모국어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긴 합니다. 중요한 건 어느 정도로 언어를 구사하는 게 모국어 능력인지를 봐야겠지요.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담아내는 에세이나 시를 두 가지 언어로 완벽하게 한 인간이 표현할 수 있을까요? 단적인 예로 우리나라 팔도 사투리를 영어로 번역할 수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유엔 총회나 미국 상하 의원 의사당에 가서 영어로 연설한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자신의 마음과 영혼을 담은 우리 말로 연설하고 통역을 두는 게 훨씬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말은 단순히 단어와 문장의 나열이 아니라 그 사람 존재 자체가 드러나는 사건이니까요. 어머니 품에 안겨서 어머니의 말소리와 그 표정과 숨소리와 살 냄새까지 맡는 아기들의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사건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칫 죽을 수도 있었던 아기 모세가 어머니 품에서 자라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신앙을 어려서부터 배울 수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어릴 때 하나님 신앙을 배운다고 해서 모두 위대한 신앙인이 되는 건 아니나 한 인간의 인격과 신앙 형성에서 어린 시절의 신앙공부는 아무리 강조해서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 교우들도 자녀들 문제로 걱정하는 분들이 없지 않을 겁니다. 복음을 더 깊이 이해하는 사람으로 자라주면 좋을 텐데, 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씨를 뿌릴 뿐입니다. 어떤 성과가 날지는 아무도 정확하게 예상할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자녀들에게 신앙의 열매가 없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나타날 것입니다. 모세가 마흔 살에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미디안 광야로 피신해서 사십 년을 목자로 살다가 늘그막에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경험했듯이 말입니다.

모세가 생모의 손에서 몇 살까지 자라다가 공주의 아들로 정식으로 입양되었는지 오늘 본문은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제가 추정하기로는 당시 일반적으로 젖을 떼는 나이인 7-8세가 아니었을지요. 그 정황을 본문 10절이 이렇게 압축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이 아기는 엄마 품을 떠나 공주의 아들로 입양되었습니다. 아기는 앞으로 왕궁에서 자랄 것입니다. 모세를 다룬 만화 영화의 제목이 이집트 왕자입니다. 당시 애굽은 가장 잘 나가는 제국이었습니다. 피라미드만 보더라도 그들의 문명이 얼마나 고도화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가장 수준 높은 교육을 받게 될 겁니다. 교육에는 역사, 철학, 예술, 문학, 정치를 비롯한 종교까지 포함됩니다. 철저하게 애굽인 중의 애굽인으로 어른이 되는 겁니다. 유사시에 그는 애굽의 왕 바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공주는 이 아이에게 모세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애굽 작명가에게 받은 이름일까요? 모세라는 이름을 지은 이유는 공주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의 이름은 상징적입니다.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물에서 건짐을 받은 아기가 팔십 년 후에 하나님의 백성을 물에서 건져낸 인물이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모세의 카리스마를 드러낸 홍해 사건은 엑소더스, 즉 출애굽에서 가장 중요했습니다. 홍해에서 건짐을 받은 사건은 곧 하나님의 구원이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일의 출발이 바로 레위 남자와 여자의 결혼을 통한 아기 출생이었습니다. 그들의 결혼을 씨앗이라고 한다면 홍해 사건은 구원의 꽃이고 열매입니다.

 

아기 예수

저는 모세의 출생 이야기를 읽으면서 예수의 출생 이야기가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마태복음 전승에 따르면 요셉과 마리아는 예루살렘 가까운 베들레헴에서 남자아기를 낳았습니다. 헤롯 왕은 예수를 제거하려고 세 살 아래 남자아이는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아기를 나일강에 던지라는 애굽 왕의 명령과 비슷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를 안고 애굽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헤롯이 죽은 다음에 요셉 가족은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나사렛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요셉은 목수로 살았고, 예수께서는 당연히 목수 일을 배우다가 서른 살에 출가하여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모세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레위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태어났듯이 예수께서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남자 요셉과 여자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몸으로 태어나서 우리와 똑같이 먹고 마시면서 살았습니다. 그게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고 은혜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호흡하셨던 그런 공기를 지금도 호흡하고 있으며, 그가 보았던 하늘과 별과 해와 달을 우리도 보고, 그가 슬퍼하고 기뻐했듯이 우리도 슬퍼하거나 기뻐합니다. 그가 빵을 먹었듯이 우리도 밥을 먹습니다. 그가 중력을 느끼면서 두 발로 걸었듯이 우리도 두 발로 걷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똑같은 조건에서 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평소에 얼마나 절감하시는지요?

물에서 건짐을 받은 모세가 자기 백성을 홍해에서 건져냈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게 구약이 말하는 구원의 클라이맥스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구원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이 홍해 사건을 그 뿌리로 합니다. 그 사실을 선지자들은 반복해서 외쳤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이 홍해 구원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출발은 세례입니다. 원래 세례는 요단강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세례를 가리키는 영어 baptism은 헬라어 βάπτισμα에서 온 단어입니다. 그 헬라어 밥티스마는 물에 잠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침례교회는 세례라고 하지 않고 침례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침례가 아니라 약식 세례를 받습니다. 침례냐 약식 세례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의미를 경험하는 게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서 죄와 죽음에서 건짐을 받아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교회야말로 참된 의미에서 엑소더스 공동체입니다. 이런 일이 가상 공간이 아니라 현실 공간에서 벌어졌다는 게 중요합니다. 그 출발은 예수라는 아기의 출생입니다.

위르겐 몰트만의 글에서 모든 아기는 잠재적으로 메시아적 사건이다.’라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두 가지 의미입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분명히 아기였을 때가 있었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아기들의 미래가 열려있다는 의미입니다. 아기를 키우는 젊은 부모들은 미래의 메시아를 키운다는 생각을 해도 좋습니다. 교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은 하나님의 구원이 실행되는 거룩한 시간이며 거룩한 공간입니다. 땅은 거룩하고 하늘도 거룩하며 바다도 거룩합니다. 그 공간 안에서 구원 지향적으로 사는 이들이 있고, 폭력지향적으로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방사선 오염수를 앞으로 30년 이상 계속 태평양에 방류하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실천하기 시작한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 그리고 이를 방조하는, 아니 어정쩡하게 들러리 역할에 머무는 대한민국 정부는 자신들의 태도가 얼마나 무책임하고, 폭력적인지를 알기나 하는 걸까요?

모세의 출생 이야기는 단순히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한 인물 모세의 영웅 신화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신비와 능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비밀스럽게 발생하니까 일상의 그 궁극적인 비밀을 눈여겨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때가 되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1:15)라고, 또한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17:21)라고 말씀하신 게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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