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2

삶의 무게 (미 6:1~8)

주현절 조회 수 3481 추천 수 0 2023.01.29 17:50:12
설교보기 : https://youtu.be/L_NWlx8NlcQ 
성경본문 : 미가 6:1~8 

삶의 무게

6:1~8, 주현 후 넷째 주일, 2023129

 

 

미가는 기원전 750~690년 어간에 유대 지역에서 활동하던 선지자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아시리아 제국의 압박을 강하게 받던 시대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선지자와 제사장으로 구분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고, 제사장들은 제사 의식을 주관했습니다. 지금 그리스도교에서는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과 설교하는 사람이 똑같이 목사나 신부지만,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그 역할이 구분되었습니다. 제사장의 활동 무대는 예루살렘 성전이지만 선지자의 활동 무대는 거리입니다. 제사장은 보수적이고 선지자는 진보적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세상이 하나님의 뜻대로 변혁되기를 갈망하던 사람들이어서 현실 유지에 급급했던 권력자들을 비판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에 유명한 제사장은 많지 않으나 유명한 선지자는 많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그리고 열두 소선지자 등이 그렇습니다. 열두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미가입니다.

 

화려한 예배의식

오늘 본문 미 6:1~8절은 크게 두 문단으로 나뉩니다. 첫째 문단은 1~5절입니다. 여기서 미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관해서 구약성경 전체의 전통에 따라서 설명합니다.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 끌어내셔서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를 통과하도록 도우신 분이십니다. 미가가 볼 때 그 모든 과정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신 분(the righteousness of the LORD)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입니다. 애굽 제국에서 소수민족으로 박해를 당했으며 광야에서 공공의 적 취급을 당하던 이스라엘을 지켜주셨으니 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경험했으니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공의를 삶의 중심으로 삼아야 합니다. 오갈 데 없이 떠돌이 신세였던 자신들의 이전 처지를 돌아보고 가난한 이들과 억울한 이들을 보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은 전혀 공의롭지가 않습니다. 화려한 제사 행위에만 정성을 쏟았습니다. 그것에 대한 문제 제기가 둘째 문단의 주제입니다. 6, 7절을 보십시오. 새번역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을 드리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면서, 이 몸의 열매(자식)를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여기에 나오는 단어를 보십시오. 수천 마리의 양, 수만의 강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 맏아들 등등입니다. 하나님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준비해야 할 목록입니다. 자식을 바치는 인신 제사는 유대교가 아니라 근동의 이방 종교에서 행해지던 의식입니다. 생존이 극도로 위태롭다고 느낄 때 사람은 정신적인 무정부 상태(멘탈붕괴)에 이르고, 거기서 자식을 신에게 제물로 바쳐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고대 이스라엘도 그런 유혹을 받긴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했던 이야기와 입다 사사가 자기 딸을 바치겠다고 서원한 이야기에서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대교는 그런 인신 제사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지금 미가 선지자는 그런 이방 종교의 인신 제사 의식까지 거론하면서 제사 행위에 지극 정성을 보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행태를 비판하는 중입니다.

번제물인 양은 실제로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 의식에서 바쳐졌습니다. 제사장은 양을 잡아서 피를 제단에 뿌리고 불에 태워서 향을 위로 올립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자기를 바치겠다는 생각이 그런 번제 의식으로 자리를 잡은 겁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이런 번제 의식 자체를 무조건 매도하면 안 됩니다. 죽음과 삶의 경계선까지 자신들을 몰고 감으로써 구원을 얻으려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 화려하고 나름대로 진정성 있는 종교의식에 지나치게 기울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종교의식의 본질이, 즉 예배의 본질이 훼손되거나 왜곡된 겁니다.

예배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미가가 바로 앞에서 짚은 출애굽과 그 이후 광야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출애굽 사건이 반복해서 언급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애굽 제국은 세상의 정치와 경제 권력이 일정한 체제를 갖춰서 사람들을 지배하는 작동원리입니다. 거기서는 늘 최대한의 성과를 올리는 방법을 찾기 마련입니다. 피라미드를 건설하려면 값싼 노동력을 동원해야 합니다. 노예와 서민들이 그 대상입니다. 올겨울 한파와 에너지값의 상승으로 가장 큰 타격을 보는 이들이 가난한 사람들이었던 것처럼, 당시 강력한 국가 건설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애굽에서 가장 큰 고통을 당하는 계층은 당연히 하층 계급이었습니다. 전쟁포로, 노예, 소수인종 등등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제국주의를 거부합니다. 그런 체제 아래서는 하나님이 창조한 일부 사람들의 삶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가 부정되는 사태를 어떻게 그대로 놓아둘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이스라엘을 애굽 제국에서 끌어내셨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 행위는 불의에 개입하여 공의를 펼치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의식입니다. 양과 숫양을 바치고 성가대의 멋진 시편 찬송가가 울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잊힌다면 그게 무슨 제대로 된 제사이고 예배가 되겠습니까? 8절에서 미가는 이렇게 호소합니다.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공의

미가는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여기서 세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공의와 인자와 겸손입니다. KJV은 이 세 가지를 정확하게 번역했습니다. to do justly, to love mercy, to walk humbly with thy God입니다. 정의롭게 행하고, 자비를 사랑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를 더 압축하면 정의와 자비와 겸손입니다. 미가가 여기서 말하려는 핵심은 정의와 자비와 겸손이 없으면서 화려하게 예배드리는 걸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정의롭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힘없는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보살펴야 한다는 사실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문제는 그걸 알아도 그렇게 살기가 어렵다는 데에 있습니다. 여기에는 정의란 무엇인가, 자비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 질문이 놓여 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뒤에는 당시 불의한 일들에 대한 구체적인 예가 나옵니다. 10절에는 불의한 재물축소시킨 가증한 에바가 나오고, 11절에는 부정한 저울거짓 저울추가 나옵니다. 에바는 바구니라는 뜻으로 물건의 양을 잴 때 사용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물건들은 장사꾼들이 이익을 남기려고 눈금을 속이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속이는 방식이 아니면 돈을 벌기가 쉽지 않았겠지요. 돈을 벌더라도 조금 벌겠지요. 속임수를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실행하면 대박을 칩니다. 요즘은 저런 속임수가 오히려 합법적입니다. 두 가지만 예로 들겠습니다.

하나는 금융업입니다. 은행은 수신과 여신에 각각 다른 이자율을 붙여서 그 차액으로 운영됩니다. 돈이 돈을 버는 구조입니다. 초국가 헤지펀드는 더 악랄합니다. 미리 정보를 빼거나 작전을 벌여서 고수익을 올리는 방식입니다. 지금 대통령 부인이 이와 비슷한 일에,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에 연루되었다는 보도가 오래전부터 있었고, 여기에 관련된 이들이 재판을 받는 중입니다. 다른 하나는 기업주와 노동자 관계입니다. 기업이 벌어들이는 금액이 노동자들에게 제공하는 임금보다 클 때 기업은 돈을 법니다. 돈을 많이 번 기업은 그걸 토대로 해서 사업을 더 확장하고 다시 더 많은 돈을 벌어들입니다. 그게 바로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기업가의 능력이라고 사람들은 인정합니다. 합법으로 여깁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들이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정당하게 대우했고, 사회로부터 받은 온갖 혜택을 제대로 돌려주었을까요? 큰 기업체로 인해서 벌어지는 기후 위기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집니까? 법망만 피한다고 해서 정의로운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일련의 현상을 나 몰라라 하는 건 가증한 에바이고 부정한 저울입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 익숙해져서 이에 관해서 별로 문제의식이 없습니다. 저는 현재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정의롭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뚜렷한 대안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인류는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격입니다. 개인과 개인이, 지역과 지역이, 나라와 나라가 합법적인 방법과 불법적인 방법을 총동원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합니다. 그 끝이 어딜지 저는 별로 낙관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린 최선의 길은 율법 실행입니다. 미가의 주장도 율법 범주에 들어있습니다. 19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곡식을 거둘 때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이삭도 줍지 말며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고 착취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라. 청각장애인을 저주하지 말며 시각장애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라. 선지자들의 설교만이 아니라 모세오경도 정의와 자비와 겸손을 삶에서 가장 높은 가치로 제시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이런 말씀에 충실하게 사는 사람도 있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말씀은 죽은 문자로 남고 불의한 재물과 가증한 에바와 부정한 저울과 거짓 저울추가 대세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오늘까지 여전합니다. 별로 좋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정말 정의와 자비는 불가능한 것일까요? 불가능한 일을 성경이 요구하는 것일까요?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아예 포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포기하지 않고 붙들고 살다가는 정신이 분열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완전

마태복음 기자는 5장에서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을 여섯 가지 반명제(Antithese)로 정리했습니다. 1) “살인”- 5:22절은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에 대한 반명제로 실제 살인만이 아니라 형제에게 화를 내는 행위가 이미 살인이라고 규정했습니다. 2) “간음”- 28절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3) “이혼”- 31, 32절은 이혼 증서를 써주고 이혼하라는 율법을, 즉 이혼 문제를 편의주의적으로 해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4) “맹세”- 34절은 맹세를 지키느냐 않느냐 하기 전에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5) “대적”-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당시로서는 나름 합법적인 율법 논리에 떨어지지 말고 악한 자를 아예 대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6) “원수 사랑”- 이웃만이 아니라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합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누구도 율법을 온전하게 지킬 수 없기에 율법을 얼마나 지키느냐 하는 기준으로 자기 삶과 다른 사람의 삶을 평가하기 시작하면 위선에 떨어집니다. 위선으로는 아무리 고상하게 살아도 하나님의 구원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정의와 자비와 겸손을 실천하려는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게 아닙니다. 그것으로 상대적인 우월감이나 상대적인 자괴심에 떨어지는 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결론적으로 마 5:48절에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perfect)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perfect)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완전성을 목표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삶의 차원이 완전히 달라진 겁니다.

정의와 자비에 관한 실행 규칙인 율법을 지키기도 힘든데, 완전해지라고 하니, 이게 말이 되나요? 우리에게 더 무거운 짐을 맡기는 듯이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순간에도 우리에 무거운 짐을 맡기는 분이 아니십니다. 율법이라는 무거운 짐을 진 이들에게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9)라고 말씀하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완전해지라고 말씀하신 걸까요?

여기서 대답을 찾으려면 우선 율법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조금 더 실질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번복되는 설명이지만 이해하고 들어보십시오. 율법적인 삶은 점수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60점짜리 인생이 있고, 80점짜리 인생이 있고, 30점짜리 인생도 있다고 말입니다. 점수에 따라서 사람이 판단 받습니다.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은 낮은 점수를 받는 사람을 은근히 무시하면서 만족스러워합니다. 살인자를 혐오합니다. 살인자를 혐오하는 사람도 일상에서 친구를 욕하고 무시합니다. 그게 바로 살인이나 마찬가지라면 누가 살인자를 혐오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런 반명제가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속으로 친구를 욕하고 미워하고 시기해도 실제 살인자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입니다. 예수께서 살인자를 두둔하려고 이렇게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사람들의 윤리적인 노력을 깎아내리는 게 아닙니다. 누가 상대적으로 더 나은가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초점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바꿔말하면, 연봉의 차이에 매달리지 말고 삶의 질에 천착하라는 겁니다.

요즘 저는 매주 목요일마다 외르크 칭크의 책 기도를 어떻게 드릴까요?2권에서 그가 쓴 기도문을 강독하는 영상을 만들어 유튜브에 올리는 중입니다. 지난 목요일인 126일에 올린 기도문의 제목은 의로운 사람도 늘 선하지는 않다입니다. 우리에게는 선과 악을 구분할 능력이 없기도 하고, 그걸 구분해서 실행할 능력은 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정의롭고, 얼마나 도덕적이고, 얼마나 진보적이고 개혁적일 수 있을까요? 한밤중에 낯선 사람이 여러분을 찾아와서 하룻밤 재워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들어주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저는 그분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정말 사정이 딱한 게 분명하다면 인근 숙박 시설을 사용할 수 있도록 돈을 주거나 숙박 시설에 데려다주겠지요. 이게 완전한 윤리는 아닙니다. 낯선 이들도 가족처럼 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교 믿음이 있어도 실제 삶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해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 일상에서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상황을 아무리 잘 풀어보려고 노력해도 개인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현상이 종종 벌어지기도 합니다. 이럴 때는 참으로 난감합니다.

저는 삶의 중심을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두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여전히 대답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삶의 중심을 두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판단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삶이 하나님 안에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알기에 생명 완성을 향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런 과정에서 시행착오가 없을 수 없으나 거기서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는 가운데 매 순간 최선의 길을 선택해서 그 길을 갑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라는 바울의 가르침이 바로 이런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묵묵히 감당하면서 하나님의 완전을 향해서 함께 길을 가는 거룩한 도반들입니다


profile

[레벨:41]새하늘

January 30, 2023
*.126.124.2

이번 설교는 몇번을 반복하고 있지만, 고민하면서 다시 읽어야 겠네요.

전체적인 맥락보다는 설교 후반부에 낯선 과객 말씀하신 부분에만 맞춥니다.

2년전 지리산 둘레길 구간에서 전남구례 구간을 지나갈때, 시내에 들려 구례 [순대백화점]에 파김치에 함께 어우러진 순대국밥에 감동 했습니다.

근처 여관을 사장님에게 물어보고 밖에 나가 찾아 가려는데, 사장님이 손수 차를 끌고 나와 깨끗한 숙박시설로 안내 해주셨습니다. 

감동 그 자체입니다.

깨끗한 숙박 시설에 편안히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저는 그냥 식당을 이용한 손님일뿐인데 친절을 베푸신 사장님께 지금도 감사를 드리고,

나중에 꼭 다시 찾아 가려고 합니다.


누가 나의 형제이고 자매일까요?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베풀때 선의이겠지요.

그 속엔 절제, 주변 상황 등이 포함 되겠지만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에게 최소한의 도움이라도 주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시는 분들이 또한 우리 주변에 많고요.


하나님의 정의, 자비, 겸손은 결국 오직, 사랑이겠지요.

솔라, 아모르!



profile

[레벨:100]정용섭

January 30, 2023
*.151.5.10

예, 오직 사랑, 

자기 안에 꽁꽁 갇히지 말고 이웃과 세상을 향해서 

자기를 개방하는 게 바로 사랑이겠지요.

저는 2월 중에 전남 어디 항구 도시에 가볼 생각입니다. 

전라도 음식을 먹을 수 있으려니 생각하니까 기분이 좋아지네요.

profile

[레벨:23]브니엘남

January 31, 2023
*.118.81.227

저는 목사님께서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 세 가지(to do justly, to love mercy, to walk humbly with thy God)를 설교에서 설명하시는 것이 설교의 핵심일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완전하심(teleios)과 그것을 연결시키셨네요.

우리가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 즉 온전 하신 것 같이 온전하게 되는 것은 그분의 사람 안에서 온전해 지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생명 완성이고 성숙이다. 그리고 반명제인 새 율법, 즉 생명의 영의 요구, 곧 생명 완성은 엣 율법의 요구보다 더 높은 것이니 이를 향해서 나아가라. 아멘.

profile

[레벨:100]정용섭

January 31, 2023
*.151.5.10

설교는 늘 어렵습니다.

설교자의 운명은 곤혹스러움 자체입니다.

자기도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그분과 그분의 행위와 그 뜻을

세속의 시대정신에 파묻혀 사는 회중들에게 

소통에서 늘 한계를 보이는 문자와 언어로 설명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정의와 자비와 겸손의 삶이 자기를 자랑하는 기회가 아니라

자기의 부족함을 인식하는 기회로 삼는 게 최선의 삶이 아닐는지요.

그러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의 완전에, 또는 생명 충만에 가까이 가야겠지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sort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70113
1052 기타 무엇을 기다리는가? [3] [2] 2004-06-14 19981
1051 기타 기도와 말씀 선포 [6] [2] 2004-06-30 15205
1050 기타 신앙의 외면과 내면 (빌 2:14~18) [1] 2004-06-30 14459
1049 기타 하나님을 알자 [4] 2004-06-30 18168
1048 기타 낯섬의 출처 2004-06-30 12762
1047 기타 수군대는 사람들 2004-06-30 14013
1046 기타 숨겨진 미래를 기다림 2004-06-30 12109
1045 기타 빛과 어두움 [3] 2004-06-30 15325
1044 기타 영적인 삶과 이성적인 예배 (롬 12:1, 2) [2] 2004-06-30 15549
1043 기타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막 9:14-29) [2] 2004-06-30 14422
1042 기타 세계, 계시, 하나님 (겔 39:25-29) [1] 2004-07-02 11473
1041 기타 종교와 철학을 넘어서 (고전 1:22-25) 2004-07-02 10622
1040 기타 예수의 권위 (막 1:21~28), 2003.6.1 2004-07-02 13578
1039 기타 언어의 한계와 존재론적 능력 (행 2:1-13) [8] 2004-07-02 10682
1038 기타 삶의 중심 2004-07-02 13136
1037 기타 용서의 능력 [1] 2004-07-02 17768
1036 기타 영적인 인식론 [2] [1] 2004-07-02 12773
1035 기타 두려움을 넘어서 [3] [2] 2004-07-02 11717
1034 기타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 [1] 2004-07-02 12443
1033 기타 우상과 귀걸이 [1] 2004-07-02 16319
1032 기타 평화와 두려움 [1] 2004-07-02 14070
1031 기타 하나님 나라의 통치방식 [1] 2004-07-02 14985
1030 기타 낡은 것과 새것 (고후 5:16-21) [2] 2004-07-02 18500
1029 기타 이스라엘의 고집 [1] 2004-07-02 13754
1028 기타 자유로움의 세계로! [2] [1] 2004-07-02 12686
1027 기타 비뚤게 보기와 바로 보기 [1] [1] 2004-07-02 12486
1026 기타 하나님의 나라와 영의 나라 [4] [1] 2004-07-02 13038
1025 기타 생명을 얻는 길 [1] [1] 2004-07-02 13322
1024 기타 야곱의 하나님 체험 [1] [1] 2004-07-02 12156
1023 기타 종말론적인 삶 (벧전 4:1-11) [1] 2004-07-02 11941
1022 기타 은폐와 노출 [3] 2004-07-02 11661
1021 기타 부자 이야기 [2] 2004-07-02 13990
1020 기타 흔들리지 않는 터전 [1] 2004-07-02 11681
1019 기타 자기 의와 은총 [1] 2004-07-02 11568
1018 기타 언어의 집 [1] 2004-07-02 9351
1017 기타 내면적 삶이란? [1] [1] 2004-07-02 9351
1016 기타 삶으로서의 예배 [1] 2004-07-02 9865
1015 기타 말의 구원론적 능력 [1] 2004-07-02 12029
1014 기타 불평을 넘어서 존재의 기쁨으로 [1] 2004-07-02 9555
1013 기타 주님의 재림과 생명의 완성 [1] 2004-07-02 9554
1012 기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3] 2004-07-02 10434
1011 기타 세례요한의 질문 [1] 2004-07-02 13830
1010 기타 이사야의 구원신탁 2004-07-02 11538
1009 성탄절 마리아의 노래 (눅 1:46-56) [1] 2004-07-02 12440
1008 기타 삶의 지혜를 넘어서 [1] 2004-07-02 10807
1007 기타 기쁨과 사랑의 역학관계 [1] 2004-07-02 10151
1006 기타 자유를 향한 길에 서서 [1] 2004-07-02 10966
1005 기타 사울의 어리석음 [1] 2004-07-02 12320
1004 기타 막힘에서 열림으로! 2004-07-02 12309
1003 기타 구름 타고 오십니다. 2004-07-02 11417
1002 기타 야훼의 진노와 모세의 기도 [1] 2004-07-02 11596
1001 기타 예수님을 먹다 [1] 2004-07-02 13019
1000 기타 땅을 묵혀라! 2004-07-02 11298
999 기타 마술과 신앙 2004-07-02 10774
998 기타 세계의 토대 2004-07-02 12164
997 기타 야훼의 자기 증거 2004-07-02 11411
996 기타 운명과 자유 2004-07-02 10456
995 기타 본질의 변질 2004-07-02 10514
994 기타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힘 2004-07-02 12090
993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10073
992 기타 노동하는 인간(1) 2004-07-02 9541
991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10042
990 기타 영광의 경험 [3] 2004-07-02 9389
989 기타 노동하는 인간(2) [2] 2004-07-02 9018
988 기타 무엇이 진실한 예배인가? [1] 2004-07-02 9784
987 기타 수행으로서의 신앙생활 [1] [1] 2004-07-02 8629
986 기타 돌무더기에 얽힌 사연 [1] 2004-07-02 9708
985 기타 메시아적 행위와 교회 [1] 2004-07-02 9414
984 기타 사랑이란 무엇인가? [1] 2004-07-02 15484
983 기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1] 2004-07-05 9340
982 기타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1] 2004-07-11 9621
981 기타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2004-07-18 9676
980 기타 믿음과 사랑의 뿌리, 7월25일 2004-07-25 9350
979 기타 말씀 망각의 심판, (8월1일) 2004-08-05 8609
978 기타 기도란 무엇인가? (8월8일) [2] 2004-08-08 12860
977 기타 모세의 소명, 2004.8.15. 2004-08-16 9744
976 기타 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2004-08-22 9421
975 기타 평화를 위한 분열, 8월29일 [5] 2004-08-30 8493
974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456
973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9177
972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940
971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304
970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351
969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314
968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182
967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692
966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368
965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304
964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380
963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9085
962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434
961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141
960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8961
959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527
958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639
957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663
956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486
955 기타 세례 요한의 증언, 1월16일 [1] [1] 2005-01-17 13046
954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625
953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1070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