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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성령강림절 조회 수 2421 추천 수 0 2023.08.08 07:19:46
설교보기 : https://youtu.be/hIqFCiLOcTY 
성경본문 : 로마서 9:1-5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9:1~5, 성령강림 후 10, 202386

 

 

바울의 격정

바울이 로마서를 집필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로마서는 16장까지 있습니다. 2천 년 전 필기도구가 열악했던 시절에 이렇게 긴 글을 쓰려면 보통 수고가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요즘 얇은 책 한 권 쓰는 품이 들어가겠지요. 바울이 혼자 책상에 앉아서 직접 글을 쓴 게 아닙니다. 그의 옆에는 글을 대신 써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16:22절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바울의 비서라 할 더디오는 바울이 말하는 걸 받아쓰다가 마지막 인사 대목에서 자기 개인 인사말을 덧붙였습니다.

로마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분들은 당시 바울의 심정이 매우 격정적이었다는 사실을 느꼈을 겁니다. 중간에 울컥하는 표현들이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설교 본문인 롬 9:3절이 그중의 하나입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여기서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은 유대민족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다소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습니다. 보통 유대인이 아니라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 할 정도로 유대인 소수 정예에 속했습니다. 유대교에 대한 열정이 유달리 강했기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으로 여기고 박해했습니다. 그 사실을 그는 여러 번 고백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경험한 뒤로는 오히려 예수를 전파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와 베드로보다 더 열정적인 예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 내용이 갈 1장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바울은 강경파에 속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야고보와 베드로 같은 이들과 갈등을 겪었습니다. 2:11절 이하에 따르면 바울은 베드로를 위선자라고 책망했습니다.

이런 갈등의 중심에는 토라(율법) 문제가 들어있습니다. 로마서도 핵심적으로 그 문제를 다룹니다. 유대교 전통에서 사는 사람들은 율법으로 의로워진다고 생각했으나 바울은 믿음으로 의로워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사실을 강조하다 보니까 바울은 유대 전통을 다 포기한 사람이구나, 유대교에서 볼 때 배교자구나, 하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전반부에서 그런 비난을 받을만한 내용이 많이 나오기는 합니다. 한마디로 율법으로는 인간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그런 비난이 오해에서 불거졌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유대민족을 배신하거나 율법 자체를 부정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롬 9:3절에서 격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유대 형제자매를 위한 일이라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고 말입니다. 바울의 이런 말은 일종의 문학적 수사입니다. 실제로 끊어져도 좋다는 말은 당연히 아닙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올인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다음에는 자기가 자랑하던 것을, 말하자면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고 베냐민 지파이며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며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는 사실을 배설물처럼(3:5~8) 여길 정도였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바울의 이런 격정적이라면 격정적이고, 과격하다면 과격한 발언을 이해하려면 오늘 본문의 앞 단락에서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 맥락을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8:31~39절이 그것입니다. 이 단락에는 9:3절과 대구를 이루는 구절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8:35절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야.” 8:39절입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헬라어 문장으로만 본다면 8장에 나온 단어(χωρίσει)9장에 나온 단어(πὸ)가 다르기는 하지만 문맥상 의미는 같습니다. NIV 번역은 9:3절에서 cut off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8:35절과 39절에서 separate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분리하다, 떼어놓다, 갈라놓다 등등, 비슷한 뜻입니다. 루터 성경은 세 구절에 똑같이 scheiden라는 단어로 나오는데, 그 뜻은 갈라놓는다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도 똑같이 끊어냄이라는 단어로 나옵니다. 바울은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끊어질지라도운운하기 전에 아무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지 못하며, 그 어떤 세상의 세력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지 못한다고 외쳤습니다.

이런 바울의 외침이 말이 될까요? 설득력이 있게 들립니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근거를 대라고 말하면 여러분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내려는 세력의 목록을 먼저 확인해봅시다. 35절에는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이 나옵니다. 38절과 39절에는 사망, 생명, 천사, 권세자, 현재 일과 장래 일, 능력, 높은, 깊음, 다른 피조물이 나옵니다. 이를 일상적인 단어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가난, 고독, 허무, 오해받음, 죽음, 장애, 난치병, 악한 권력자 등등입니다.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운명을 총망라합니다. 이런 운명에 떨어지면 사람들은 삶에 대한 열정을 잃습니다. 신앙도 무너집니다. 이런 저주스러운 운명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지 못한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삶에서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절대적이라는 말에 동의하시나요?

바울은 롬 8:31~39 단락에서 끊을 수 없다.’라는 표현 못지않게 또 다른 강한 표현을 반복했습니다. 로마서를 집필하면서 벌어진 바울의 격한 심정이 전달됩니다. 31절에서는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했고, 33절에서는 누가 고발하리요.’라고 했으며, 34절에서는 누가 정죄하리요.’라고 했습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세력도 대적하지 못하고, 고발하지 못하고, 규탄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아주 강렬한 표현입니다. 대단한 자신감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강한 어조로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의롭다 하셨다는 사실을(33b) 그가 확신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너희들이 옳다.’라는 인정을 받았다는 겁니다. 더는 세상이 말하는 기준에서 인정받지 않아도 됩니다. 세상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는 한 사람에게서 진실하게 사랑을 받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지 않아도 아쉬울 게 전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을 누가 대적하고, 누가 고발하고, 누가 정죄하겠습니까? 하루 세끼 일용할 양식만으로 삶을 충만하게 누리는 사람을 누가 높은 자리와 값비싼 자동차와 명품 핸드백과 목걸이에 마음을 빼앗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말이 그렇지 우리가 어떻게 세상에서 인정받지 않고 살 수 있나, 너무 비현실적인 주장 아닌가, 하고 질문할만합니다. 하나님에게서 인정받았다고 해서 당장 세상의 모든 문제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는 건 아닙니다. 여전히 외롭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며, 아쉽기도 하고, 어떤 때는 두렵기도 합니다. 인정받으려는 욕구도 완전히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약속받은 것이지 삶이 이미 완전해진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유적으로,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이 아직은 뛰어나게 연주하지 못하나 백건우나 조성진이나 임윤찬처럼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약속받은 거와 비슷합니다. 약속의 무게를 아는 사람은 완전한 삶을 향해서 수행하듯이 나아갑니다. ‘하나님이 의롭다 인정하셨다.’라는 명제의 중심으로 들어가려고 전심전력을 기울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으로 깊이 들어갑니다.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이 점점 더 피아노 세계 안으로 들어가듯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셨다는 바울의 이런 진술이 실제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알려면 율법(토라)에 대한 바울의 생각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율법 전문가였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검찰, 판사, 변호사 등등, 전문 법조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중에서도 바울은 소수 엘리트 집단에 속했습니다. 정말 순전한 마음으로 율법에 최선을 다했으나 결과로는 절망감이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킬수록 인간의 무능력만 드러난다고 보았습니다. 그 문제를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저는 바울의 이런 문제의식이 단순히 종교적 관념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 삶의 정수라고 생각합니다. 현대들은 대개 일종의 세속적인 율법주의자로 삽니다. 점수 계산으로 삶을 이해하는 겁니다. 높은 점수를 딸지는 몰라도 삶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을 고액 연봉으로 바꿔서 생각해도 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율법이 삶의 기준이었듯이 오늘날 자본주의 대한민국에서는 고액 연봉이 삶의 기준이니까요. 일단 사람은 자기가 받는 연봉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더 많이 받으려고, 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받으려고 합니다. 상위 1%에 해당하는 고액 연봉을 받아도 그것으로 삶을 충만하게 살지 못합니다. 거기에 매달릴수록 자기의 한계만 더 드러납니다. 자기의 한계가 드러나니까 절망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운 길을 찾았습니다. 율법의 죄책감에서 해방되어 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혔습니다. 율법을 얼마나 반듯하게 지키느냐 하는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깊이 경험하느냐 하는 관점으로 바뀐 겁니다. 비유적으로 자녀들이 아버지나 어머니의 말씀을 얼마나 잘 듣느냐 하는 데서부터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깨달은 겁니다. 공부를 못하거나 게을러도 그분들은 자기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워하게 되었습니다. 조금 다른 비유를 들면 이렇습니다. 이전에는 자기가 왜 이렇게 못생겼는지, 가난하게 사는지, 머리가 나쁜지, 몸이 약한지에만 신경을 쓰다가 이제는 자기가 지금 여기서 이렇게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신비하고 놀라워진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다고, 고발하지 못한다고, 정죄하지 못한다고, 판단하지 못한다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었습니다.

 

만물 위의 하나님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9:3)라는 바울의 진술은 실제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사실이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4절에서 언급한 이스라엘의 탁월한 종교적인 전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자 됨, 영광, 언약, 율법, 예배, 약속은 자랑할만합니다. 바울이 볼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런 전통이 말하는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은 아닙니다. 9:8절에 따르면 육신의 자녀가 있고 약속의 자녀가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그게 안타까운 겁니다. 이스라엘 동족은 그에게 애증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특권이 있었으나 그 특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복잡한 심경으로 바울은 오늘 설교 본문의 마지막 절인 5절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한마디로, 바울은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우리말 성경의 이 문장에 다음과 같은 각주가 달렸습니다. “또는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께 세세에 찬양이 있으리로다.” 두 문장은 물론 다르긴 하지만 실제로는 같은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외아들이라는 표현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고후 4:6)이라는 표현, 그리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14:9)라는 표현이 다 똑같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롬 8:3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죽었으나 다시 살았고, 하나님 우편에 계시며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신다는 말은 예수의 신성에 대한 바울식의 표현입니다. 예수에게서 신성이 온전하게 드러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9:5절에서 두 가지가 언급되었습니다.

첫째, 그는 만물 위에 계십니다. 만물 라는 말은 만물을 초월한다는 뜻입니다. 막연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태풍을 보십시오. 기상관측용 슈퍼컴퓨터로도 태풍의 경로를 완벽하게 예측할 수 없습니다. 태풍 경로에 영향을 주는 요소가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많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이 거의 맹신하다시피 하는 자연과학은 세상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그것도 지나간 것에 대한 측정과 분석이지 미래의 세상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자연과학이 말할 수 없는 그런 현상을 초월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만이 만물을 초월하는 존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둘째, 그는 영원히 찬양받으십니다. 이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도 찬양을 받긴 합니다. 명예를 얻기도 합니다. 훌륭한 사람들은 분명히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영원히찬양받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도 계속 그렇게 훌륭할 수는 없습니다. 종종 실수도 하고, 나이 들어서 치매에 걸리기도 합니다. 모든 이들은 곧 죽고 없어질 겁니다. 얼마 전에 저는 팀 켈러(1950~2023) 목사의 부고 소식을 듣고 놀랐습니다. 아직은 한창 일할 나이에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21세기 C.S. 루이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유명한 설교자요 기독교 문필가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519일 그의 SNS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고 합니다. “남편이자 아버지, 할아버지, 멘토이자 목사, 친구이자 학자인 팀 켈러는 오늘 아침 집에서 서거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만물 위에 초월하는 분이시고, 영원히 찬양받으실 분이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이 안타까운 겁니다. 보통 안타까운 게 아니라 자기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각오를 할 정도로 안타까운 겁니다. 바울의 이런 심정이 느껴지면 우리도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에 들어온 거지요. 먼 이야기로 들리시나요? 세상일에 바빠서 이런 것에 관해 생각해본 적이 없으신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말은 단순히 관념적인 기독교 교리가 아닙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무너지지 않는 삶의 근본 능력입니다. 8:3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소리 높여 외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으니까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승리의 기쁨을 노래하게 되었습니다. 삶에서만이 아니라 죽음에서도 우리의 기쁨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삶과 죽음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profile

[레벨:9]소유와존재

August 08, 2023
*.254.11.100

일단 사람은 자기가 받는 연봉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더 많이 받으려고, 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받으려고 합니다. 상위 1%에 해당하는 고액 연봉을 받아도 그것으로 삶을 충만하게 살지 못합니다.

거기에 매달릴수록 자기의 한계만 더 드러납니다. 자기의 한계가 드러나니까 절망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 부자들을 보면 볼 수록 자기의 한계가 드러나 절망한다는 말에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궁극적으로 아무도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만 살아가지 못하는 실존에 때로는 많이 힘들때도 있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August 08, 2023
*.104.32.91

소유존재 님은 느끼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씀하시는군요. 좋습니다.

자기 한계 앞에서 절망하지 않는 삶을 가리켜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출 9:12)라고 표현합니다. 

그런 완악한 마음으로 살면 자신의 참된 실존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불행한 일이지요.

상위 1%에 속한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제가 자세하게는 모르나

대충은 압니다.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겠습니다.

아무리 럭셔리 한 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거기'입니다.

높은 권력과 명예를 누린다고 해도 별거 없습니다.

이런 말이 소유와존재님에게 들리지 않을지도 모르죠.

1만명 교인이 모이는 교회 목사라고 하더라도 

그런 목회 업적를 통해서 목사가 구원받지 못한답니다. 

영혼이 자유롭지 못한 거지요.

작은 교회 목사가 힘들 때도 있으나

하나님과의 관계만 분명하면 아쉬울게 없어요.

늘 배부르면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없듯이

늘 좋은 조건 안에서 살면 실제 삶을 누리지 못한답니다. 

삶이 실제로 힘들 때가 있다는 걸 저도 이해합니다.

무시당할 수도 있고, 정말 피곤할 때도 있겠지요. 

그건 그것대로 풀어나가면 되고,

절망하지 않는 듯한 포즈를 취하면서 멋지게 사는 이들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위선이 몸에 베어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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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3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10239
992 기타 영광의 경험 [3] 2004-07-02 9567
991 기타 노동하는 인간(2) [2] 2004-07-02 9216
990 기타 무엇이 진실한 예배인가? [1] 2004-07-02 9941
989 기타 수행으로서의 신앙생활 [1] [1] 2004-07-02 8827
988 기타 돌무더기에 얽힌 사연 [1] 2004-07-02 9860
987 기타 메시아적 행위와 교회 [1] 2004-07-02 9583
986 기타 사랑이란 무엇인가? [1] 2004-07-02 15668
985 기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1] 2004-07-05 9534
984 기타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1] 2004-07-11 9813
983 기타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2004-07-18 9838
982 기타 믿음과 사랑의 뿌리, 7월25일 2004-07-25 9549
981 기타 말씀 망각의 심판, (8월1일) 2004-08-05 8818
980 기타 기도란 무엇인가? (8월8일) [2] 2004-08-08 13016
979 기타 모세의 소명, 2004.8.15. 2004-08-16 9887
978 기타 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2004-08-22 9580
977 기타 평화를 위한 분열, 8월29일 [5] 2004-08-30 8691
976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625
975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9399
974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10121
973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490
972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549
971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551
970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360
969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866
968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564
967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494
966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555
965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9303
964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613
963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322
962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9152
961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722
960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796
959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847
958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660
957 기타 세례 요한의 증언, 1월16일 [1] [1] 2005-01-17 13189
956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797
955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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