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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6ccjl_iphj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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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빌립보서 2:1-13 |
과정으로서의 구원
빌 2:1-13, 창조절 5주, 2023년 10월 1일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각자 다를 겁니다. 아멘, 할렐루야, 하는 방식으로 확신이 있다고 답하는 분들은 소수고, 구원받은 것으로 믿기는 하나 실제로는 잘 모르겠다고 답하는 분들이 많겠지요. 성경에는 적극적인 대답으로 보이는 문장들이 종종 나옵니다. 12년 하혈증으로 고통받던 여자에게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막 5:34) 시각장애인인 바디매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 10:52) 빌립보 감옥을 지키던 간수에게 바울은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구원을 연극이나 음악회 초대권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이비 이단들은 자기 집단에 들어온 사람들만 구원받는다고 역설합니다. 자신들 교회가 오늘날의 노아 방주라거나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열정으로 살아가는 거 자체야 누가 탓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구원의 실체가 무엇이냐, 하는 게 중요하겠지요. 그들의 구원이 헛것이라면, 또는 구원의 내용이 턱없이 빈약하다면 그런 열정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구원(σωτηρία)을 가장 간략한 교리문답으로 말하면 죄와 죽음에서 건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말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니체나 프로이트가 비판했듯이 인생살이에 자신감이 없는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자신들은 세상을 당당하게 살고, 아쉬울 것도 없으니까 굳이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구원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교회의 책임도 큽니다.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까. 이렇게 도식적이면서 공격적인 방식으로 구원을 말하니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당신들이나 구원받으라.’라고 냉소적으로 반응합니다. 우리가 신천지 등등, 사이비 이단을 보듯이 말입니다.
바울의 구원론
바울은 구원 문제를 자신의 실존에서 가장 치열하게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바울은 본래 예수의 다른 제자들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유대교에 충실했던 인물입니다. 비유적으로 다른 제자들을 일반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바울은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소수의 신학자와 목회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걸었던 유대교를 포기하고 당시 신흥종교였던 그리스도교를 선택했습니다. 바울의 인생 대반전에는 구원 문제가 놓였습니다.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이후에 구원에 관한 이전의 생각과 경험이 완전히 바뀐 겁니다. 북한의 고위급 인사가 남한으로 망명하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바울은 새롭게 경험한 구원을 죽을 때까지 숨 가쁘게, 때를 얻든지 못 얻는지 전했습니다. 감옥에 갇혀서도 그 구원 문제에 천착했습니다. 빌립보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인 빌립보서도 감옥에서 쓴 겁니다. 2: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바울은 이 문장에서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그냥 구원이라고 하지 않고 ‘너희 구원’(ἑαυτῶν σωτηρίαν)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남과 비교되는 게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 옆에 붙어 있으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바다에서 수영하다가 쥐가 나서 빠지려고 할 때는 구조원이 와서 살려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다른 사람이 해결해줄 수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에도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두 사람이 밭에 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받고 다른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합니다. 두 여자가 맷돌질하다가 한 사람만 데려감을 받습니다.(마 24:40, 41) ‘너희 구원’이라는 말은 구원이 각자의 책임이라는 뜻입니다. 믿음 좋은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나 자식으로 인해서 구원받는 게 아닌 거지요. 이는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어도 그 사람이 여러분을 대신해서 숨을 쉬어주지 못하는 거와 같습니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는 말씀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관점은 구원이 한번 손에 넣으면 완성되는 소유가 아니라 계속 완성되어야 할 과정이라는 사실입니다. 자격증을 따는 게 아니라 진리를 향한 거룩한 열망입니다. 이 문장을 NIV는 “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구원받았으니까 이제 안심하고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게 아니라 치열하게 그 구원을 향해서 계속 가까이 가라는 겁니다. 빌 3:12절에서 바울은 이 문제를 더 명시적으로 언급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절에서는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다.’라고 했고, 이어서 14절에서 ‘푯대를 향해서 달려간다.’라고 했습니다. 구원을 구도의 ‘과정’으로 본 겁니다.
이렇게 구원을 향해서 계속해서 나아가고 달려간다는 게 실제로 무슨 뜻일까요? 일단은 예배에 빠지지 않고, 기도하고, 성경 읽고, 교회 봉사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긴 합니다. 이런 경건 생활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한국 교회에 이런 프로그램들이 다양하게 개발되어 있습니다. 각종 방식으로 성경을 읽습니다. 성경 쓰는 이벤트도 있고요. ‘특새’(특별 새벽기도회)로 유명한 교회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프로그램을 따라가는 것처럼 자리를 잡은 겁니다. 비유적으로 멋진 옷을 차려입고 명품 핸드백을 들고, 최첨단 스마트폰을 들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테이크아웃’ 하듯이 일상의 외양을 갖추는 겁니다.
이런 경건 생활 자체가 푯대를 향해서 달려간다거나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에 딱 떨어지는 건 아닙니다. 그런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이라고 해서 구원의 과정에 들어선 사람이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 유대교의 바리새인으로 살 때 이미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열정을 기울여서 하던 것들입니다. 현대인들이 겉으로 볼 때 고급스러운 인생을 하는 듯하나 삶 자체는 점점 더 빈곤해지고 혼란해지듯이 신앙 프로그램 자체에 치우치다가는 그리스도교 영성과는 거리가 멀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예컨대 교회 지도자급 그리스도인들이 만났을 때 구원에 관해서, 하나님의 존재에 관해서, 죽음과 부활에 관해서 생각을 나누기보다는 부동산과 주식 이야기를 더 많이 한다는 사실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들의 인격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구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외칠 정도로 구원에 가까이 가려고 몸부림쳤습니다.
두려움과 떨림
치열하게 자기 구원 문제를 붙들었던 탓인지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중심에 들어간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두려움과 떨림입니다. 두려움과 떨림이 없으면 신앙은 모양만 남을 뿐이지 피폐해집니다. 2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두려움과 떨림으로 살아가기는 어렵습니다. 이 시대가 끊임없이 반대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인생살이는 본래 고달프니까 가능한 한 재미있게 웃으면서 살아야 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온갖 웃음 치유 선생들이 인기를 끄는 이유도 그게 현대인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그런 시대정신에 휩쓸리기 쉽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웃으면 복이 와요.’ 수준으로 신앙생활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마당에 두려움과 떨림이라니, 정말 거리가 먼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브라함, 모세, 이사야 등등,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하나님의 놀라운 일 앞에서 두려워하고 떨었던 백성입니다. 예수 제자들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생한 하나님의 일을 보고 두려워하고 떨었습니다. 이 두려움과 떨림을 전문 용어로 ‘누미노제’, 즉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합니다. 강도를 만나거나 사업체가 완전히 망해서 두려워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두려움은 그냥 걱정과 공포입니다. 하나님 경험에서 오는 거룩한 두려움은 우리의 존재 자체가 완전히 새로워질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사막에서만 평생 살던 사람이 처음으로 북극에 갔을 때 나타나는 현상과 비슷합니다. 예수 제자들도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자기를 부인하고, 재산을 포기하고, 부모까지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가요?
딱히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영혼의 눈이 밝은 사람이라면 다 알만한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1백 년 전에 어디에 있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시간이 너무 길면 줄여도 됩니다. 어머니 자궁 안에서 배아로 시작했습니다. 그 배아가 여러분의 시작입니다. 배추씨가 땅에 심어져 싹이 트면서 배추로 자라듯이 말입니다. 앞으로 1백 년 뒤에 여러분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는 평균 90년을 지금과 같은 인간 형태로 삽니다. 그런 인간 형태는 시간과 더불어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긴 시간을 놓고 본다면 우리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적절합니다. 우리 인생이 허무하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그리고 좁은 공간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엄청난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그 사실을 직면한다면 한편으로 두렵고 떨리면서, 다른 한편으로 황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경험이 있다면 돈이 많거나 권력이 크다고 해서 자랑하지 않고, 없다고 해서 기가 죽지도 않겠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달리 우리 자신의 운명만 보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일을 봅니다. 그걸 놀라워합니다. 그걸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벌을 내리실까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그분과 그분의 하는 일이 완전히 새롭기에 충격받는 겁니다. 칼 바르트의 신학 개념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절대타자’로 경험하는 겁니다. 아주 낯선 존재로 경험하는 겁니다. 그 낯선 하나님을 외면하지 않고 직면하고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 겁니다. 매 순간 두려움과 떨림으로, 말하자면 영혼이 잠들지 않고 깨어서 삶을 삶답게 살아갈 겁니다.
캐노시스 그리스도론
바울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얼마나 새롭게 하셨는지를, 그래서 우리가 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야 하는지를 초기 그리스도교 찬송가를 인용해서 설명했습니다. 빌 2:6-11절입니다. 캐노시스(낮춤) 그리스로론으로 일컬어지는 대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같은 분이셨으나 종의 형체로 사람과 같이 낮아지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퀴리오스)로 시인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빌 2:11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ΚΥΡΙΟΣ)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 예수는 가장 비천한 방식으로 죽은 자였습니다. 사람에게서 버림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도 버림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런 자를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말이 잘 안 됩니다. 우리는 정치 권력자와 부자와 학자들을 높이 봅니다. 뭔가 세상을 크게 바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따라다닙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나오면 세상도 그만큼 좋아질 것이라고, 구원에 가까이 갈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게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바울을 비롯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셨다고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죽음이 극복되었다고 말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와 죽음의 운명에 떨어지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죽음이 극복된다면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퀴리오스’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퀴리오스라는 헬라어는 히브리어 ‘아도나이’와 같은 의미입니다. 라틴어는 도미누스이고 영어로 Lord로 표현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곤란할 때 ‘아도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가 퀴리오스라는 말은 당시 사람들에게 ‘인간이 신이 되었다.’는 말로 들렸습니다. 유대교인들만이 아니라 로마인들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이런 찬송가를 부를 수 있었던 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에게 하나님께만 가능한 궁극적인 생명 사건이 발생했다고 믿었습니다. 그 생명 사건으로 죄와 죽음은 능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더는 자기 연민에 떨어지지 않고 자기 소명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겁니다.
어떤 이들은 부활에 관한 과학적인 증거가 어디 있냐고 물을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자연과학도 이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하나의 방법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근거로 유전자 결정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전자가 유기체를 숙주로 삼아서 자기를 발현하는 게 진화론의 핵심이라는 겁니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하나님도 인간의 뇌를 통해서 유전자가 만든 것입니다. 반대로 유기체가 진화 현상에서 더 상수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전반적인 추세는 유전자가 아니라 유기체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일상적인 예를 들어 중증 장애인 남자와 결혼하는 비장애인 여자의 마음과 행동을 유전자 메커니즘으로 해명할 수 없습니다. ‘전체는 부분의 합을 초월한다.’라는 문장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왜 ‘퀴리오스’인지는 모든 비밀이 드러날 종말에 명명백백하게 알려질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그 비밀을 간직한 종말론적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런 인생이 얼마나 기대됩니까? 얼마나 흥미진진합니까? 이것보다 우리의 영혼을 더 생생하게 하는 일은 세상에 없습니다. 지난 2천 년 역사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사실을 자기 삶의 추동력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삶의 정체성을 순례자로 여긴 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모든 교리도 순례자의 운명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마십시오. 아직 갈 길이 멉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는 더 알아야 하고, 더 생각해야 하고, 더 살펴야 하고, 더 기도해야 합니다. 이를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천만다행입니다. 구원파가 말하듯이 구원이 이미 끝난 문제라면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시시할 겁니다. 산티아고 순례자들이 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길을 시작하듯이 오늘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구원의 신비롭고 놀라운 세계 안으로 한 걸음씩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룰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