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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j_HSux-skB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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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무엘상 3:1-10 |
사무엘의 하나님 경험
삼상 3:1-10, 주현절 후 2주, 2024년 1월 14일
사무엘은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이자 정치 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종교와 정치 두 권력을 손에 잡았던 인물은 흔하지 않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이 부족사회인 사사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그는 초대 왕 사울을 선정해서 세웠다가 사울이 왕 노릇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자 그를 폐위시키다시피 하고 다윗을 왕으로 세울 정도로 막강한 리더십을 행사했습니다. 사무엘의 출생과 어린 시절 이야기는 독특합니다. 그의 어머니 한나는 오랫동안 불임으로 고생하다가 하나님께 아들을 주시면 여호와께 바치겠다고 서원 기도를 바쳤습니다. 사무엘은 젖을 뗄 나이가 되었을 때 실로에서 제사장으로 있는 엘리의 손에 위탁되었습니다. 그는 불교의 동자승처럼 자란 셈입니다.
그런 세월이 한참 흘러서 엘리 제사장이 후계자를 결정해야 할 시기가 왔습니다. 순리대로 한다면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 중에서 한 사람이 후계자가 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그 두 사람이 백성들의 존경은커녕 비난받을 짓만 골라서 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삼상 2:12절 이하와 22절 이하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엘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문제가 많아도 자기 핏줄인 아들을 후계자로 삼을지, 자기 핏줄은 아니나 자식이나 마찬가지였던 사무엘을 후계자로 삼을지를 말입니다. 엘리의 마음이 복잡했을 겁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바로 그런 상황에서 오늘 설교의 본문 이야기가 나옵니다. 엘리 제사장은 눈이 잘 안 보일 정도로 늙었습니다. 그는 잠을 자려고 자기 침상에 누웠고, 사무엘도 하나님의 궤 옆에 누웠습니다. 일상에서 늘 루틴으로 일어나던 일입니다. 삼상 3:4절에 따르면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부른 줄로 알고 달려가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평소에 엘리 제사장이 늙어서 움직이기 힘드니까 밤중에 소변을 보고 싶거나 물을 마시고 싶을 때 사무엘을 불렀겠지요. 엘리는 사무엘에게 부르지 않았으니 가서 자라고 일렀습니다. 이런 일이 이어서 세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그제야 엘리는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사무엘은 다시 자다가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네 번째입니다. 그는 스승이자 영적인 멘토인 엘리 제사장이 가르쳐준 대로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당시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집에서, 요즘으로 바꾸면 실로 교회당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일까요? 늙은 엘리와 젊은 사무엘은 어떻게 여호와께서 부르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까요? 오늘 설교 제목처럼 사무엘은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경험한 것일까요?
성경에는 실제로 여호와께서 음성으로 특정한 인물을 부르시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표현이 여러 군데에 나옵니다. 창 15장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여호와의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집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이 구절 외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여러 번 듣습니다. 출 3장에는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하나님이 ‘모세야, 모세야!’ 하고 부르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모세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신약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도대체 이런 신적인 부르심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대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먼저 강인한의 시 ‘라일락나무에서 흐르는 밤’에서 1연을 읽겠습니다. “라일락나무 연초록 가지와 가지 사이로/ 바람이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일 때/ 안돼, 안돼/ 연등(燃燈)인 양 꽃숭어리를 흔들며/ 라일락나무 말갛게 눈흘긴다.” 시인은 라일락과 바람이 서로 대화한다고 묘사했습니다. 일종의 의인화입니다. 여기서 꽃과 바람이 실제로 대화하는 건 아닙니다. 시인에 의해서 사물과 사물이 엮어내는 시적 세계가 현실로 드러난 겁니다. 이런 시를 읽으면서 말도 되지 않는다거나, 거꾸로 바람과 꽃의 말을 사실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시 쓰기의 깊이와 세상의 신비를 모르는 사람이겠지요.
‘사무엘아, 사무엘아!’라는 여호와의 부르심은 어떤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경험에 대한 문학적 메타포(은유)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아브라함과 모세도 거부할 수 없는 어떤 절대적인 경험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부르셨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아우구스티누스도 그런 부르심을 경험했고, 마틴 루터와 존 웨슬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런 경험이 가능합니다. 그런 경험이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개야, 하고 부르셨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어떤 절대적인 것에 대한 경험 말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경험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그런 경험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사무엘 같은 사람에게만 그런 경험이 있고 우리에게는 없는 것일까요?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셨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경험이 없는 걸까요? 왜 생명 충만감이 없을까요? 왜 바다를 처음 본 어린아이처럼 세상과 사물을 신비롭게 경험하지 못할까요?
들을 귀
문제는 ‘들을 귀’ 여부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 11:15)라고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계 2:7절에도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똑같은 말을 듣거나 글을 읽어도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듣는 사람이 있고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들을 귀는 단순히 머리가 좋다거나 지식이 많다거나 인격이 훌륭하거나 착하다고 해서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뛰어난 사람들이었지만 예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율법 준수와 성전 수호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자체에 관한 말씀이 들리지 않았던 겁니다. 예수의 제자들도 예수 말씀을 어려워했습니다. 예수께서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의 반응이 요 6:60절에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예수와 하나 될 때만 생명을 얻는다는 말을 이해할만한 귀가 제자들에게도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귀가 있을까요?
들을 귀 운운하는 이런 설명을 어떤 분들은 어딘가 불편하고 어색하게 받아들일지 모릅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게 설명하기만 하면 자기는 얼마든지 알아들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말이 되는 말을 들어도 들리지 않는 일이 우리 일상에서 종종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서 양자역학은 닐스 보어나 하이젠베르크가 직접 설명해도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인공지능의 메커니즘에 관한 전문가의 설명을 들어도 우리는 대충 그렇다는 사실만 느끼지 세세한 내용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서양 음악에서 중요한 화성학 강의를 지금 우리가 들었다고 합시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정치인들이 사생결단 싸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개인이 작은 세계에 갇혀 있어서 상대방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는 겁니다. 부부 사이에도 대화가 안 되곤 하지 않습니까. 그 사람의 인격이 천박하기에 그런 게 아니라 각자가 세상을 다르게 인식하고 살기에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방안에만 갇혀 있으면 방 밖의 이야기가 비현실로 들리는 겁니다. 이런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어떻게 하면 귀가 열릴까요? 어떻게 하면 주님께서 알파와 오메가이시며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앞으로 오실 자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는 여호와의 음성을 들은 사무엘처럼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그 정답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저도 아는 게 충분하지 않으니까요. 그래도 제가 오늘 설교자로 나섰으니까 제가 알고 있는 한도 안에서라도 말씀드려야겠지요. 답은 어떻게 보면 아주 간단하고 명백합니다. 하나님을 먼저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배우는 게 최선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잘난 척하는 소리, 대박 나게 해주겠다는 장사꾼들의 호객 소리, 막장 드라마에서 배우들이 앵무새처럼 쏟아내는 값싼 소리 말고, 하늘에서 울리는 소리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경험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배운 다음에야 비로소 자기도 직접 그런 경험 안으로 조금씩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주현절 후 둘째 주일입니다. 주현절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오신 예수께 신성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기리는 절기입니다. 주현절은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받은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주현절 후 첫째 주일이었던 지난 1월7일 성서일과(lectionary) 셋째 말씀인 막 1:4-11절은 예수께서 요한에게 받은 세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요단강물에 잠겼다가 올라올 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면서 다음과 소리가 하늘로부터 들렸다고 합니다. 막 1:11절입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질적으로 전혀 다른 사건이 예수께 일어났다는 사실을 저렇게 표현한 겁니다.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게 불교식으로 말씀드리면 예수께서 ‘해탈’(解脫)을 통해서 열반(涅槃)에 이르신 겁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중간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흘러나오는 빛에 휩싸였다고 합니다. 놀라서 땅에 엎드리자 ‘사울아, 사울아!’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행 9장) 이후로 바울은 자기가 박해하던 예수의 복음을 유럽 전역에 전파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존재 자체가 변한 겁니다. 바울 용어를 그대로 빌리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겁니다. 세상과 자기의 삶을 완전히 새로운 방향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험이 곧 하나님 경험입니다. 그런 경험이 구원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이런 경험 없이 교회에 다니는 일은 지루하고 피곤해질 수 있습니다. 설교하는 당신은 경험했냐, 하고 묻고 싶으신가요?
누미노제
저의 대답은 설교가 진행되면 간접적으로 주어질 것이라고 보고, 이런 경험을 종교학이 어떻게 말하는지를 먼저 설명하는 게 좋겠습니다. 루돌프 오토가 『Das Heilige』라는 책에서 가장 궁극적인 종교 경험을 ‘누미노제’(Numinose)라고 이름을 붙인 뒤로 이 용어는 신학과 종교학과 철학에서 두루 쓰입니다. 절대자 앞에서 피조물이 느끼는 ‘거룩한 두려움’을 가리킵니다. 쉴라이에르마허 용어로 바꾸면 ‘절대 의존 감정’이고 바르트 용어로 바꾸면 ‘절대타자’ 경험입니다. 이를 일상적인 말로 바꾸면 세상을 낯설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일상을 놀라워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어제와 똑같은 오늘이지만 내용상으로는 완전히 다릅니다. 너무 낯설고 너무 놀라워서 하늘이 갈라지고 하늘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울린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하늘은 겨울나무이기도 하고 서리이기도 하고 낮달이기도 합니다.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일상의 매 순간이 흥미진진하겠지요. 걷기도 재미있고, 설거지도 재미있겠지요. 이와 비슷한 느낌을 오래전에 졸저『세상은 마술이다』에 담았습니다. 현대인들에게 그런 경험이 없으니까 일상이 단조로워집니다. 그런 단조로움을 견디지 못하기에 돈에 더 매달리겠지요. 더 심각하게는 알코올과 마약과 도박에 의존하겠지요. 정치도 중독으로 나타날 수 있고, 소비도 중독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땅에 묻힌 보물을 모르니까 잡동사니에 한눈을 파는 겁니다.
울프 다니엘손은 『세계 그 자체』라는 책에서 물리학이 제시하는 모형과 세계 그 자체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인간이 물리의 세계 안으로 아무리 깊이 들어가도 결국에는 실체 도달할 수 없는 그 대상이 바로 ‘세계 그 자체’라는 겁니다. 이 책에서 한 대목만(215쪽) 읽겠습니다. “중요한 요점은 모형과 실재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 한가운데에 있으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생물학적으로 제한된 능력을 가지고서 최대한 많이 배우고 이해하고자 노력할 수 있을 따름이다. 나는 물리학자일지는 몰라도 우주를 온전히 이해하는 데 필요한 물리학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앞으로 그럴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물리학자의 책이라기보다는 신학자의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세계 그 자체’를 하나님이라는 용어로 바꾸면 신학이 말하는 내용과 거의 일치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궁극적인 미래이기에 끊임없이 수행하듯이 배우고 찾고 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경험이 그렇게 전문적인 공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이냐, 하고 질문하고 싶으실 겁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또는 천사가 갑자기 나타나서 어떤 사람을 부르시는 것처럼 생각될만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 이야기를 그런 수준에만 읽으면 오해하는 겁니다. 성경은 하나님 경험에 이르는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시(詩)처럼 절대적인 경험의 한순간을 메타포와 상징 형식으로 쓴 책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하기 전에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구도 정진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그 이야기를 읽어야 합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이사야 등등, 모든 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도 역시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밥벌이해야 하고, 가정생활을 꾸리면서 세상살이에 쫓기는 일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경험에 전적으로 집중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뾰족한 대답이 따로 있는 건 아닙니다. 최소한 교회 전통 안에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따라가는 삶이 최선일지 모릅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2천 년 그리스도교 영성이 가리키는 그 하나님 경험의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 제자들이 처음에는 예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에 예수에게서 부활 생명을 경험했듯이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중요합니다. 사도는 사도의 역할을 하고, 교사는 교사의 역할을 하는 겁니다. 수도사와 목사와 신학자와 일반 신자는 각자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하나님 경험을 함께 나누고 발전시켜 나간다는 뜻입니다. 이런 구원론적 공동체라면 우리의 운명을 맡길만한 공동체가 아닐까요?
소리의 세계에 귀명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실제로 명창처럼 소리를 하지는 못하나 귀로는 소리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명창이 될 수는 없어도 귀명창은 될 수 있습니다. 저도 사실은 귀명창 수준을 넘어서지는 못했습니다. 귀명창도 실제 명창과 똑같이 득음이라는 소리의 깊이로 들어간 사람이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2024년 한해 우리 모두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는 하늘의 소리를 들었던 사무엘처럼 하나님 경험이 더 깊어지고 명료해지며 풍성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 경험에 이르는 길은 멉니다. 먼 정도가 아니라 끝이 없습니다.
산티아고 순례는 40일만 열심히 걸어가면 끝나지만
하나님 경험이라는 길은 죽어야 끝나기 때문입니다.
힘들거나 지루하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즐겁고 신바람 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경험이 깊어지는 즐거움이 없다면
우리 인생의 무게를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하나님 경험이 늘 새로워지는 경험이 없는 목사라면
목회와 설교와 예배 행위가 얼마나 고달프겠습니까.
하나님 경험보다 더 재미있거나 더 의미있거나 더 행복한 일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올 한해 잊지 맙시다.
영적인 득음(得音)의 길이니까요.
나도 올 한해 그 길을 이전보다 더 잘 가보겠습니다.
하나님 경험이 더 깊어지고 명료해지며 풍성해지는 한해가 되기를 원합니다.
소유지향적 삶으로 부터 존재지향적인 삶으로 삶의 발상전환이 일어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