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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배타적 권위 (막 1:21-28)

주현절 조회 수 4648 추천 수 0 2024.01.28 18:07:21
설교보기 : https://youtu.be/jnyxk3FeEQk 
성경본문 : 마가복음 1:21-28 

예수의 배타적 권위

1:21-28, 주현절 후 4, 2024128

 

 

가버나움 회당에서

예수님은 공생애 초창기에 주로 갈릴리 호수 북쪽 어촌인 가버나움에서 활동하셨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막 1:21-28절에 나오는 이야기도 그 활동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이 되어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회당에 정기적으로 모여서 성경을 읽고 그 성경에 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남자 성인이라면 그 성경 본문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사람들 앞에서 발표할 권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본문 21절에 따르면 예수께서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설교하신 겁니다. 그걸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22절에 나옵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사람들이 예수님의 교훈에 놀랐다고 합니다. 우리말 성경에 교훈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διδαχῇ(디다케)입니다. 영어 teaching에 해당합니다. 회중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란 이유는 그 가르침이 서기관과 달리 권위가 있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배타적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가르치는 자격증으로만 말하면 서기관들의 권위가 더 높았습니다. 그들은 유대교 신학 전문가들이고, 예수님은 평범한 목수입니다. 오늘날 신학대학교 교수와 평신도 노동자가 성경을 읽고 가르친다고 하면 누구에게 권위가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본문은 예수님의 손을 들어줍니다. 그 사실을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23절부터 아주 특별한 사건을 보도합니다.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더러운 귀신이라는 표현이 26절과 27절에도 반복해서 나옵니다. 더러운 귀신의 그리스어는 πνεμα κάθαρτον(프뉴마 아카다르톤)입니다. KJV 성경은 이를 unclean spirit이라고 번역했습니다. devil(마귀), satan(사탄), ghost(유령)라고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루터 성경은 unsauberer Geist(운자우버러 가이스트)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를 우리말로 정확하게 번역하면 깨끗하지 못한 영(정신)’입니다. 23절을 제가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깨끗하지 못한 영에 사로잡힌 한 사람이 회당에서 고함을 치고 있었다.”

이 사람은 누굴까요? 성경 본문은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깨끗하지 못한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니까 정신 병원에서 임상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의 생각과 행동을 제어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노 조절 장애를 앓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고 합니다. 그런 증상을 보통 뚜껑 열린다.’라고 표현합니다. 병적으로 자학하는 사람도 많고요. 뻔뻔한 거짓말과 모함도 비슷한 현상이 아닐까요? 고대인들은 정신병 현상을 모두 악하고 더러운 영에 지배받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경계선도 그렇게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도 깨끗하지 못한 영에 사로잡힙니다. 사회 전체가 정신병을 앓는 겁니다. 우리나라 자살률은 OECD 국가 중에서 최고를 기록 중입니다. 일본보다 두 배 이상입니다. 청소년 자살률도 높고, 노인 빈곤율과 노인 자살률이 특히 높습니다. 우리나라 국방력은 세계 5위입니다. 국방비를 30%만 줄여서 사회 복지비로 돌리면 이런 문제가 크게 좋아질 겁니다. 다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요즘은 값이 내려가고 있다고 하나, 수도권에서 잘나간다는 아파트값을 보면 미쳤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이런 문제를 유엔을 비롯한 국제 사회가 풀지 못합니다. 눈치 보느라 안 하는 거겠지요. 기후위기라는 말을 오래전부터 하면서도 무한 성장을 향한 열망은 전혀 줄지 않습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 보면 깨끗하지 못한 영에 사로잡혔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회당에서 소리 지르는 이 사람을 다시 봅시다. 역설적으로 어쩌면 회당에 모인 사람 중에서 이 사람만 정신이 온전할지도 모릅니다. 그는 세상 돌아가는 것을 견뎌내기 힘들었습니다. 유대는 오랫동안 로마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종교 권력자들의 손에 쥐락펴락합니다. 유대교 신학자들인 서기관들의 설교는 사람의 비위만 맞춥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무기로 어른행세를 합니다. 민중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은 어디서도 듣기 힘듭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럭저럭 잘 지냅니다. 이런 상황을 그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회당에 나와서 사람들에게 고함을 지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정신 차려야 한다고 말입니다. 사실은 예수께서도 귀신들렸다는 말을 종종 들었습니다. 3:21-22절에 따르면 예수의 친족들은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붙들려고 몰려나왔고,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예수가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에게 사로잡혔다고 비난했습니다. 도대체 누가 미친 사람이고, 누가 정신 차린 사람일까요?

 

경련

회당에서 소리를 지르는 이 사람이 어떤 이유로 깨끗하지 못한 영에 사로잡혔다는 말을 듣게 되었는지를 우리는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앞에서 짚었듯이 자기 정신을 차리고 살기에는 세상이 너무 망가졌을 수도 있고, 그 사람의 멘탈에 실제로 문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본문 24절에서 예수께 몇 마디 말을 겁니다.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왜 우리를 없애시려 합니까. 당신이야말로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사실을 나는 압니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이 사람, 그야말로 미친 이 사람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의 정체성이 선포된 것입니다. 마치 니체가 즐거운 학문에서 미친 사람의 입을 통해서 신은 죽었다. 당신들이 신을 죽였다.’라고 외친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하나님은 살아있을까요, 혹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행태가 하나님을 부정하는 건 아닐까요?

이 사람의 말에 예수께서는 일언반구 대답하지 않으시고 꾸짖으시면서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뒤로 어떤 현상이 벌어졌는지를 26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이 사람에게 나타난 경련과 큰소리는 치유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경련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경련도 있습니다. 세계관이 무너질 때 우리는 영혼의 경련을 경험합니다.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충격을 받으니까요.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뀔 때 인류는 경련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사춘기 소년·소녀들은 모두 그 시기에 경련을 일으키는 듯한 경험을 합니다. 종교 경험도 사실은 경련을 수반합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자기가 생각했던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신앙의 근본이 흔들리는 충격을 받습니다. 그런 충격이 두렵기에 사람들은 신앙의 근본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단순히 교회 생활에만 적응해서 삽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게 평온하니까요. 예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직업과 재산과 가족을 떠날 정도로 예수님에게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실은 우리의 인생 자체가 충격과 경련 가운데 놓여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큰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분들은 다 압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걸까요? 45억 년이라는 지구 역사에서 인간이 없었던 시기가 훨씬 많고, 앞으로 인간이 사라진 뒤에도 지구에는 각종 생명체가 살아남을 것입니다. 우주 전체에서 인간의 삶을 생각하면 너무 미미해서 현기증이 납니다. 우리가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도 충격이라면 충격입니다. 얼마 전 제 아내 생일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을 처음 교회에서 만났을 때 당신은 대학교 1학년 열아홉 살이었는데, 지금 벌써 예순여섯 살이 되었다.’라고 말입니다. 열아홉 살과 예순여섯 살 사이를 생각하면 충격과 경련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일상성 가운데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태평스럽게 살고 있습니다. 겉으로 태평스러운지 모르나 우리 영혼이 여전히 온전한 치유를 경험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던 이 사람에게서 벌어진 현상을 본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들의 반응을 27절이 이렇게 전합니다.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권위 있는 새 교훈이라는 표현은 이미 앞에서 예수께서 설교한 다음에 회중들이 보인 반응입니다. 그 대목에서는 설교를 듣고 놀라서 그런 말을 했고, 이번에는 정신병자가 치료되는 현상을 보고 놀라서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본문은 정신병 치료까지 디다케(teaching)에서 발생한 것으로 본 것이겠지요.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깨닫고 받아들이면 사람의 영혼이 힐링 된다고 말입니다. 과연 그런가요? 예수님의 가르침이 참된 힐링의 근원이며, 서기관 같은 사람들이 흉내 낼 수 없는 배타적 권위라는 말이 옳은가요? 그런 경험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귀신들의 순종

27b절에 아주 독특한 표현이 나옵니다. ‘더러운 귀신들도 순종한다.’라고 말입니다. ‘더러운 귀신이라는 단어는 ‘unclean spirit’이라고 이미 앞에서 짚었습니다. 깨끗하지 못한 영(정신)도 예수께 순종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권위가 압도적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깨끗하지 못한 영은 우리 안에 깊숙이, 웬만해서는 눈치채기 힘들 정도의 심연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우리를 걱정, 분노, 미움, 혐오 등등에 떨어지게 하고, 자기 연민과 자기 사랑에 빠지게 하고, 교만하게 만듭니다. 세상은 이런 삶의 방식을 크게 문제로 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걸 부추깁니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주변을 제압하는 걸 높이 평가합니다. 서로 몰려다니면서 어떤 대상을 혐오하고 조롱합니다. 우리나라 정치 영역에는 이런 조롱이 만연해 있습니다. 정치 발전을 위해서라도 정당한 비판은 필요하나 조롱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일이 되니까요.

앞에서 열거한 걱정, 분노, 혐오, 조롱 등등은 우리가 마음먹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자기 성찰을 통해서 잠깐은 그런 현상이 줄어들지만, 어느 순간에 다시 나타납니다.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거룩한 영(holy spirit)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깨끗하지 못한 영은 거룩한 영으로만 대체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내면에 사랑의 영이 없으면 혐오의 영은 물러가지 않습니다. 진리의 영이 없으면 거짓의 영은 물러가지 않습니다. 혐오와 조롱과 거짓은 매우 매력적인 현상으로 우리 삶에 나타나거든요. 예수께서는 이 사실을 정확하게 가르치셨습니다. 단순히 말로 가르치신 게 아니라 자신의 운명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서 기자는 귀신도 그에게 순종한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가르침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세례 요한에게도 있었고, 구약의 많은 선지자에게 있었다고 말할 분들도 계실 겁니다. 물론 그들도 아주 뛰어난 선생들이고 랍비이고 선지자들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사랑과 그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조상들에게서 듣고 배운 것을 전했으나 예수님은 직접 본 것을 가르치셨으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서기관들과 다르게 권위가 있었습니다. 비유적으로, 몽골 유목민들과 함께 지내다 온 사람과 그들의 이야기를 책이나 유튜브로만 접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말만 잘하면 가보지 않은 사람도 몽골 유목민과 관계된 정보를 멋지게 전할 수는 있으나 직접 가본 사람 수준에는 결코 이를 수 없습니다. 망고 맛에 대한 설명만 말로 들은 사람은 망고를 직접 먹어본 사람의 경험에 이를 수 없는 거와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본 것을 가르치신 분이었기에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14:9)라는 말씀이 바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아버지 하나님의 본질은 생명입니다. 사랑이기도 하고 해방이기도 하며 궁극적인 안식이기도 합니다. 그걸 통틀어서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얻었기에, 즉 구원을 얻었기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는 게 실제로 무슨 말인지 손에 잡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땅에서 사는 동안 화려하게 살고 인기도 끌고 존경받는 인생이 된다는 건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삶만을 원한다면 굳이 그리스도인이 될 필요는 없고 예수님을 믿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삶은 세상이 온갖 방식으로 제공합니다. 자본주의가 이런 점에서 오히려 더 능력적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세련된 인생에 관한 가르침은 교회가 아니라 유튜브가 제공하는 시대입니다. 성경과 그리스도교는 출발 자체가 다릅니다.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창조주라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교의 모든 가르침은 이 사실을 전제합니다. 우리는 생명을 선물로 받은 겁니다. 따라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하나 되는 데서만 우리의 생명은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교리의 초보라 할 이런 말이 현대인의 귀에, 우리 자녀들의 귀에 들릴까요? 저는 이 문제를 인간의 죄와 연관하여 신학적으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생명과 그 풍요로움이 세상에서 배운 방식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만 간단하게 짚겠습니다. 사람들은 늙고 병들고 죽는 걸 가장 두려워합니다. 그걸 피하려고 노심초사합니다. 당연합니다. 저는 지금 저의 칠십 대가 생명 충만의 절정기라고 생각합니다. 구십 대가 되어도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나이가 들면 잃는 것이 있겠으나 얻는 것이 여전히 많습니다. 우리 인생의 매 순간에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보물찾기하듯이 살피고 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매 순간을 아찔할 정도로 풍요롭게 경험할 것입니다.

그 엄청난 사실을 자신의 말과 행위와 운명 안에서 증명하신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생명 구원에서 그의 권위는 그 어떤 사람이나 사상과 비교 불가이고, 배타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저에게 그리스도이시고, 역설적이게도 오늘 미친 사람의 입을 통해서 선포된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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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流水不爭先

January 29, 2024
*.109.52.177

아멘 

목사님 올 한해도 강건하시기를 바랍니다


도대체 누가 미친 사람이고누가 정신 차린 사람일까요?(본문중)


목사님의 외침에서 세례요한의 외침이 오버랩됩니다

이 시대의 광야에 홀로서서 주의 길을 예비하시는 듯 


대낮에 등불을 켜고 돌아다닌 누군가도 생각나고


그럼에도 주님의 사랑에 기대어 평강을 누리시는 목사님의 삶이 부럽습니다

올 한해 더욱 정진하여 저의 삶도 평온해지기를 원하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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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29, 2024
*.137.91.189

유수부쟁선 님, 저의 건강을 빌어주시니 고맙습니다.

회원 정보를 잠깐 보니 2007년 2월에 다비아를 가입하셨네요. 

17년이 되었는데도 이렇게 덕담까지 주시면서 자리를 지켜주셨네요.

그런 힘에 의지해서 저도 '인문학적 성서읽기'를 모토로 하는 대구성서아케데미에서 

일종의 도어맨(doorman)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저의 생각과 몸에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아서 즐겁게 여기서 놀고 있으나

주님께서 '이제 됐다.' 하고 부르시면 천상병 시인의 '귀천'처럼 마음 가볍게

순종할 수밖에 없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2024년 김유동 님에게 그분의 평화가 더 없이 새롭고 풍성하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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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소유와존재

January 29, 2024
*.254.11.100

*성경과 그리스도교는 출발 자체가 다릅니다.

- 무엇이 어떻게 다르다는 말인가?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 나는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실제로 믿고 있는가? 믿고 있다면 그것이 어떤 상태일까?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창조주라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 창조주임을 영혼으로 고백하고 있는가? 

*그리스도교의 모든 가르침은 이 사실을 전제합니다. 우리는 생명을 선물로 받은 겁니다.

- 충격적이다. 과연 실제로 나는 생명을 선물로 받았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가? 생명이 뭘까?

*따라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하나 되는 데서만 우리의 생명은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 나는 실제로 생명 충만감을 하나님과 하나 되는 데서만 누리고 있는가?


요즘 저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나는 지금 이 설명에 충분히 설득되고 있는가? 성서의 하나님 경험에 온전히 설득 당하고 있는가?

끊임없이 설득시키고 있는가?

실제로 설득되지 않은 상태임을 자주 발견합니다.

오늘도 설교문을 읽어내려가는 내내 실제 삶의 방향성과 많이 다르다는 걸 발견하고

적잖은? 충격에 휩싸여 있습니다.

성경이 지금처럼 낯설게 느껴진 적이 없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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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29, 2024
*.137.91.189

성경이 '낯설게' 느껴지는 건 정말 좋은 현상이랍니다.

영혼이 살아있다는 증거에요. 

만물까지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올 겁니다.

그게 존재의 신비인 거지요.

안상학 시인의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이라는 시집에서 

'푸른 물방울'이라는 시를 한번 읽겠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지구地球는 우주에 떠 있는 푸른 물방울

나는 아주 작은 한 방울의 물에서 생겨나

지금 나같이 아주 우스꽝스럽고 조금 작은 한 방물의 물로 살다가

다시 아주 작은 한 방울의 물로 돌아가야 할 나는

나무 물방울 풀 물방울 물고기 물방울 새 물방울

혹은 나를 닮은 물방울 방울

세상 모든 물방울들과 함께 거대한 물방울을 이루며 살아가는


나는, 지나간 어느 날 망망대해 인도양을 건너다가 

창졸간에 문득 지구는 지구가 아니라 수구水球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끝없는 우주를 떠도는 푸른 물방울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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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2] 2023-08-08 5413
101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 13:31-33, 44-50) [2] 2023-07-30 5370
1015 성령강림절 여기 계신 하나님 (창 28:10-19a) [4] 2023-07-23 5513
1014 성령강림절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1-11) 2023-07-16 5010
1013 성령강림절 영혼의 안식 (마 11:16-19, 25-30) [4] 2023-07-09 5275
1012 성령강림절 인신 제사의 유혹 (창 22:1~14) 2023-07-03 4998
101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4] 2023-06-25 5444
1010 성령강림절 성령과 하나님 사랑 (롬 5:1~8) 2023-06-18 5171
1009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2023-06-11 5289
1008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2023-06-05 5287
1007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2] 2023-05-28 5139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5449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5262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5575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5001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5419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5918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6304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5562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5602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5560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6674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6085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6068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6524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6432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6302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7294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6442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6385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6406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7133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7140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7286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8498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8090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8531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6729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6454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6390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7009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6453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7936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7090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6512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7300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7058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7200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7142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7654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7428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6374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7476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7422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8442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8047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6503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7181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6409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7179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7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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