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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 (사 40:21-31)

주현절 조회 수 7610 추천 수 0 2024.02.05 09:10:51
설교보기 : https://youtu.be/YHQ5k-d0Xms 
성경본문 : 이사야 40:21-31 

여호와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

40:21-31, 주현절 후 5, 202424

 

 

고대 유대인들에게 기원전 587년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연도입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무너진 해이기 때문입니다. 주민들의 집은 물론이고 왕궁과 성전이 불에 타고 파괴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난민이 되고 노예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정치, 종교, 문화, 상업, 예술 등등, 모든 사회 체제가 해체되었습니다. 지도급 인사들은 상당수가 바벨론 제국으로 끌려갔습니다. 거기서 신세 한탄을 하면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세월이 오십 년 가까이 흘렀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제국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즘의 재일교포나 재미교포들처럼 거기서 돈을 번 사람도 생겼고,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도 나왔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과 그곳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바벨론 제국의 모든 문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세대입니다. 조상의 고향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이 간절하지 않았고, 여호와 하나님 신앙도 별로 절실하지 않았습니다. 조상들이 섬기던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책임지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바벨론 체제에서 버텨내는 게 그들에게는 중요했습니다.

우리의 일제강점기 후반 시기와 비슷합니다. 일제강점기 초중반까지는 애국지사로 활동하다가 후반기에 친일로 돌아선 사회 지도급 인사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최남선과 이광수입니다. 몇 년만 있으면 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전으로 끝나고 우리가 해방되리라는 사실을 그들이 알았다면 친일로 돌아서지 않았겠지요. 그들이 볼 때 일제강점이라는 구도는 바뀌지 않으니까 이를 현실로 인정하고 최선의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벨론 포로 후반기 고대 유대인들이 처한 상황이 바로 그랬습니다. 한마디로 이게 현실이니 어쩔 수 없다.’라고 체념한 겁니다.

바로 그때 한 선지자가 나타납니다. 그가 누군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습니다. 그가 선포한 설교 텍스트만 남았습니다. 그 텍스트가 사 40-55장입니다. 이 텍스트는 기원전 8세기에 활동한 이사야의 설교(1-39)와는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신학계에서는 이 텍스트를 쓴 사람을 제2 이사야라고 부릅니다. 56-66장은 또 다른 익명의 제3 선지자가 썼습니다. 각각 저자의 활동 시기가 다르고 내용도 다릅니다. 거칠게 주제를 압축하면 제1 이사야는 심판을, 2 이사야는 위로를, 3 이사야는 희망을 주제로 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을 기록한 제2 이사야를 우리는 편의상 일반적인 용어인 이사야로 부르겠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씀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40:1입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어떻게 위로해야 할까요? 사람은 무엇으로 위로를 받습니까? 따뜻한 말 한마디로 위로를 받기도 할 겁니다. 어떤 분들은 티브이 연예 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 위로를 받을 수 있겠지요. 심리 전문가와 상담을 통해서 위로를 받고, 그 방송 시청자들이 위로를 받는다는 말도 합니다. 이를 압축해서 말하면, 실컷 웃거나 실컷 울기만 해도 힐링의 효과가 있다는 겁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심리 기제가 작동하기에 심리적인 방식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치료와 위로가 실제로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건 일시적입니다. 영혼의 위로가 참된 위로입니다. 영혼의 위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사야는 바벨론 포로기라는 어두운 시절을 살던 동족에게 하나님에 관해서 설교했습니다. 그 내용이 사 40:12절부터 나옵니다. 문학적으로도 높은 수준의 문장입니다. 그 문장을 귀 기울여서 듣는 사람은 그야말로 영혼의 위로가 하늘로부터 폭포수처럼 내려오는 듯한 경험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세상의 그 어떤 세력과도 비교할 수 없는 존재이십니다.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접시저울로 산들을, 막대 저울로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

이사야가 이런 설명을 통해서 말하려는 핵심은 당시 유대인들이 한편으로 두려워하고 다른 한편으로 부러워하던, 그래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시나브로 잃어가게 하던 바벨론 제국이 얼마나 초라한 것들인지를 뚫어보라는 것입니다. 궁창에 앉으신 하나님 앞에서 땅에 사는 사람은 메뚜기(22)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귀인들을 폐하시고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하셨습니다. 귀인들은 귀족과 왕족을, 사사들은 법조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의 운명을 24절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그들은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졌으며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 그들은 말라 회오리바람에 불려 가는 초개 같도다.

 

겨우버티는 것들에 불과하다는 표현이 매우 강렬합니다.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졌고, 겨우 뿌리를 내렸다고 말입니다. 히브리어와 영어와 독일어 문장으로 읽으면 그 느낌이 더 강합니다. 그것들은 아예 심기지 않았고 뿌려지지 않았고 뿌리를 내리지도 못하나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다가 하나님의 입김으로 인해서 거센 바람에 날리는 검불 신세를 면치 못한다고 했습니다. 바벨론 고관대작의 실존이 이런 검불에 불과하니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사야의 저런 소리는 현실을 너무 모르는 소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 고관대작의 권위는 하늘을 찌릅니다. 교양과 품위도 상당합니다. 바벨론 제국의 문명은 당대 최고였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미국은 현대판 바벨론 제국이고 로마제국입니다. 미국의 힘을 일일이 나열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군사력은 제쳐놓고라도, 21세기 문명의 총아인 IT 세계를 미국이 견인하고 있습니다. 구글과 유튜브와 넷플릭스와 CHAT GPT가 모두 미국을 근거지로 합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배짱도 미국이 뒷배 역할을 하기 때문이고, 이스라엘이 모든 세계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파멸에 가까울 정도로 군사 공격을 가하는 이유도 미국의 승인이나 묵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는 미국이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려는 게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천하무적 세력인 바벨론 권력자들을 겨우버티는 검불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이사야 선지자의 설교가 과연 설득력이 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요즘 저는 솔로몬의 모든 영광이 들의 백합화 하나만 같지 못하다는(6:29) 예수님의 말씀을 점점 더 실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도 화두로 삼아보십시오. 들풀은 너무 사소하고 솔로몬의 영광은 너무 귀하고 고급스럽습니다. 비교 자체가 안 됩니다. 연봉 100억을 버는 펀드매니저와 2천만을 받는 사람이 비교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예수 말씀을 알아들으려면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새로워져야 합니다. 보십시오. 솔로몬의 영광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의 재산과 그의 지혜와 그의 권위를 사람들은 부러워합니다. 그런 부러움을 빼놓으면 솔로몬의 영광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들풀은 다른 이들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습니다. 옆에서 누가 예쁘다고 말하든 않든 상관없이 자기 존재에 충실합니다. 사람이 부러워하는 자랑거리에 마음을 두는 솔로몬의 삶은 모래 위의 집이며,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 들풀의 삶은 반석 위의 집이라고 말해도 됩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삶에 충실하게 산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객관적으로 볼 때 행복한 조건들이 확보되어야지, 그냥 주관적으로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으로는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조현병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는 사람이 자기가 왕자나 공주라고 착각할 수 있으니까요. 북한 주민들이 자기 나라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고 착각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이 설정해놓은 행복한 삶의 기준에 들어가려고 애씁니다.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그런 기준 안에 들어가도 사실은 특별한 게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어도 그거라도 붙들지 않으면 삶을 버텨낼 수 없으니까 거의 무의식적으로 솔로몬의 영광과 비슷한 것들을 찾으려고 매달리듯이 삽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들풀의 자유와 솔로몬의 영광 사이에서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어중간한 자리에 서서 사는 게 아닐는지요. 안타깝게도 인생의 시간이 지나면서 들풀의 자유는 비현실적인 관념으로 여기고 솔로몬의 영광만을 실질적인 현실로 받아들일 수도 있긴 합니다.

오늘 설교의 역사적 배경인 바벨론 포로 말기를 살았던 고대 유대인의 영혼도 우리와 똑같은 갈등을 겪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들의 실제적인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바벨론 제국의 힘은 여전히 막강했습니다. 사실은 얼마 후인 기원전 539년에 바벨론은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 의해서 패망합니다. 이 사실을 유대인들은 내다보지 못했습니다. 50년 가까운 포로 생활에 지쳐갔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관한 생각을 이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바벨론이라는 현실에서 어떻게 버텨내느냐, 거기서 어떻게 남부럽지 않게 사느냐만 중요했습니다. 40:27절에 그들의 심정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었습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야훼께서는 나의 고생길 같은 것은 관심도 두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내 권리 따위, 알은 체도 않으신다.

 

여러분은 언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즉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느끼시나요?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삶이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이겠지요. 사업이 파산하거나 실연당하거나 크게 병들었을 때 말입니다. 각자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상황에서도 헤쳐나갈 길을 허락해주신다는 사실만은 기억해두십시오.

그런데 그런 어려움이 없이 인생이 잘 풀려도 하나님을 생생하게 경험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게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생생하게 경험하지 못한다는 말은 생명 충만하게 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뭔가로 충만하고 역동적으로 보입니다. 아이들 교육에 온몸을 불사르는 젊은 어머니들이 있습니다. 돈벌이에 신바람을 내는 사람들도 있고요. 정치 놀이에 매몰되기도 합니다. 이런 일을 빼놓고는 우리의 일상을 말하기 어려우니까 이왕이면 재미있게 그런 일을 하면 됩니다. 단순히 재미가 아니라 전쟁에 나선 전사처럼 목숨을 걸고 그런 일을 하는 경우가 더 흔합니다. 생명 충만과는 거리가 먼 현상입니다.

 

당신이 말하는 생명 충만이라는 게 도대체 뭔데, 그리고 어떻게 거기에 이를 수 있는데, 하고 질문할 분들이 계시겠지요. 이런 질문에 딱 떨어지는 대답을 드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 이사야 선지자가 분명한 대답을 주었습니다. 31절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고 올라감 같은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앙망한다는 말은 믿고 희망하고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믿고 기다리는 삶의 경지가 그렇게 쉬운 건 아닙니다. 이와 관련해서 세 가지 차원을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첫째, 우선 믿고 기다리는 대상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앞에서 여호와께서 어떤 분인지를 감동적인 필치로 묘사했습니다. 바벨론 귀족과 왕족과 고위 법관을 회오리바람에 날리는 검불 같이 만드신다는 표현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나라에는 조물주 위에 건물주가 있다고 하는데, 5백억짜리 건물주가 있다고 합시다. 그는 숨을 쉬지 않고 사는 게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숨을 쉬어야 합니다. 그는 매일 먹어야 하고 매일 배설해야 합니다. 그게 막히면 죽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언젠가는 그런 순간이 들이닥칩니다. 자랑거리인 건물과의 인연도 곧 끝납니다. 회오리바람에 불려가는 검불과 같은 거죠.

우리가 믿고 기다리는 여호와는 5백억짜리 건물주가 아닙니다. 이사야가 12절 이하에서 반복해서 말하듯이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존재이십니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을 존재 유비가 불가능한 절대타자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비슷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은 모두 빅뱅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인간의 모든 자연과학 발전과 기술도 모두 빅뱅 이후에 속합니다. 하나님은 빅뱅을 일으킨 분이시니까, 즉 빅뱅 이전에 존재하신 분이니까 이 세상의 것으로 비교될 수 없다는 말이 맞습니다.

둘째,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가, 또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우리는 대개 자기 꿈의 실현을 인생이라고 여기지 않습니까. ‘그래, 네가 하고 싶은 거를 마음껏 해봐.’ 하고 세상은 우리를 가르치고 부추깁니다. 자기 꿈을 펼치는 데 조금이라도 방해를 받는 거 같으면 무조건 치받으면서 싸우려 듭니다. 사람이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는 세상이 과연 어떤 세상일까요? 요즘 젊은이들 표현으로 갓생으로 살면 어떤 세상이 될까요. 인간이 신처럼 되는 세상이겠지요. 바벨론과 로마의 자기 숭배이겠지요. 신이 아닌데 신이 되려고 하니까 생명으로부터 소외되는 겁니다. 자신의 일상에서 이를 실제로 경험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셋째, 현대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우리의 삶은 어떤 방식으로도 완전해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완전한 행복이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면 속상하고 짜증도 납니다. 지옥이 따로 없이 지금 이 세상이 지옥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먹고살 만한 사람들인데도 더 욕심을 내고, 사회적 지위가 있는데도 정치 권력에 욕심을 냅니다. 세상이 왜 이럴까요? 세상은 본래 그렇습니다. 이상향을 뜻하는 유토피아(utopia)없는 장소라는 뜻과 좋은 장소라는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합니다. 모두가 원하는 그런 이상향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한 사람은 맑은 날을 원하고 다른 한 사람은 비 오는 날을 원하는데, 어떻게 두 사람이 원하는 걸 동시에 다 채워줄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이 아직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 앞에서 불안해하거나 당혹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많겠으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완성될 순간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20세기 전반기 첼로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첼리스트로 불리는 파블로 카잘스는 95세에도 매일 첼로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첼로 거장이 왜 그렇게 연습하느냐는 질문에 아직도 배울 게 많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에게 첼로 연습은 기다림입니다. 음악의 더 근원적인 세계를 기다리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유치원 종일반에서 늦은 시간에 아빠나 엄마가 자기를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주님의 다시 오심을 믿고 기다립니다. 그런 사람은 날개를 퍼덕이며 공중으로 솟구치는 독수리처럼 새로운 힘, 즉 생명 충만감을 얻을 것입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영적 긴장감 가운데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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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은혜

February 05, 2024
*.234.134.106

종말론적인 세계관과 세상을 뒤덮고 있는 시대정신 사이에서
우린 오늘 무엇을 리얼리티로 붙들고 사는가?
이 엄중한 화두를 우린 얼마나 진지하게 자문하며 살까요?
마음은 원이로되 그렇게 살아내지 못하는 자신의 연약함을
얼마나 아파하며 탄식할까요?

뼛속까지 자본주의 숭배에 세뇌된 우리가
분연히 전자를 붙들고 살기로 결단하고 선택하는 동력이 믿음일진데

그 믿음의 근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에 대한
각성과 경험치에 좌우되겠죠?

이사야를 통해 호소하시는 당신의 창조능력의 어떠하심은
흡사 인생막장에 떨어진 욥에게 나타나 자연계 구석구석을
보여주시는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군요
욥이 이를 통해 자유함을 얻는 눈이 새롭게 뜨여졌던것을 알고 있음에도 

신앙을 동원해서라도 욥의 처지에 안떨어지려 안간힘을 쓰는 우린 

그 분의 창조능력 경험은 물로이고

이제껏 알지못했던 아니 머리로만 알고 있던 그 분을 새롭게 경험하기란 불가능한걸까요?

세상과 그 분을 겸하여 섬기는 지금의 애매한 포지션으로
그 분의 창조능력을 낯설게 경험하기란 언감생심일터이고
그 분의 요구와 내 실력의 현주소 사이의 갭은
도무지 좁혀지는 않는 가운데 세상 연조만 쌓여가는것 같군요
그 분에 대해 들은 풍월만 잔뜩 축적되어갈뿐
세상살이의 원심력과 관성, 타성에 속절없이 휩쓸려 살아가고 있으니 

바벨론 체제하의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우리는
고작 우리 후대에게 들려주는 '이사야 후서'의 글감 스토리를 남겨주고 있는건 아닐까요?

우린 지금 어디쯤에 와있고, 어딜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요?

남은 여정속에 그동안의 시행착오가 헛수고가 되지 않을 전복의 기회가 오기나 하는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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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05, 2024
*.181.143.12

각각 자기 믿음의 분량만큼 살아낼 수밖에 없는데, 

역설적이게도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자기 믿음의 분량이 가볍다는 걸 알고

믿음이 부족한 사람은 자기 믿음의 분량이 제법 나간다고 여기는 게 문제 같습니다.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자세만 유지하더라도 

그분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품을 닫지 않을실 테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 비유에 나오듯이 등잔과 기름이라는 최소한의 준비만 갖추고 있으면

졸다가도 '신랑이 오신다.'라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에

정신을 차리고 등불을 든 손을 흔들면서 춤을 출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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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소유와존재

February 06, 2024
*.254.11.100

매주 목사님의 설교를 함께 나누는 벗이 있습니다.

평소에 설교문을 나눌 때마다 조금씩 이해가 깊어진다는 말을 자주 했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나눌때는 갑자기 이런 말을 하더군요

"배우면 배울수록 너무 비현실적이다. 이해가 점점 안된다..."


한편으로는 당황했지만, 한편으로는 감사했습니다.

성서의 세계를 아무런 저항?없이 이해하는 벗의 모습에 뭔가 꺼림직했었거든요

제가 한마디 했습니다. 

"그래서 성서에서는 복음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믿으라고 한 거다."라고 말이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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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06, 2024
*.181.143.12

제 설교문으로 벗과 함께 나눔을 하신다니, 

한편으로 부끄럽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고맙기도 하네요.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믿을 수는 없고,

이해하는 데서 끝나서도 안 되고,

바르게 이해하면 믿음의 단계로 들어가기도 하며,

바르게 믿을 때 이해가 열매를 맺는 거겠지요.

안셀름이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으나

알기 위해서라도 믿으라고 말입니다.

이해와 믿음은 서로 다른 길이 아니라 

진리에 이르는 한 가지 길에 대한 두 가지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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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좋은나무

February 06, 2024
*.222.228.129

이번 이사야 설교문을 몇 번을 곱씹고 있네요. 한 문장 한 단락 모든 내용이 다른 때보다 더 밀도있게 다가옵니다. 이 설교문으로 성도들과 나누고 싶은데, 제가 조금이라도 제2이사야의 영성과 시야 안으로 들어가도록 좀 더 묵상과 사색이 필요할 듯 싶습니다. 밥 안 먹어도 이 설교문으로도 배부르네요 ㅎㅎ. "각자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입니다하나님께서 그런 상황에서도 헤쳐나갈 길을 허락해주신다는 사실만은 기억해두십시오." 헤쳐나갈 길을 허락해주신다는 사실.... 목사님 설교복기를 통해 잘 들었습니다. 더 많은 하실 말씀이 있으셨지만 시간 상 못하셔서 마저 다 듣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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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06, 2024
*.181.143.12

좋은나무 님이 제가 설교문을 작성하고 교정하고

출력해서 교정하고 설교 전과 후에 다시 교정하는 그 순간들을

저와 함게 호흡하듯이 따라왔나 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좋은나무 님에게 '새 힘'을 주시겠지요.

그분만이 허락하실 수 있는 그 '새 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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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0 부활절 생명의 로고스 (요일 1:1-10) [5] 2024-04-08 7294
1049 부활절 예수 부활의 첫 증인들 (막 16:1-8) [4] 2024-03-31 6987
1048 사순절 향유를 손에 든 여자 (막 14:1-11) [4] 2024-03-24 7550
1047 사순절 새 언약의 날 (렘 31:31-34) [2] 2024-03-17 7327
1046 사순절 죽임에서 살림으로! (엡 2:1-10) [6] 2024-03-10 7327
1045 사순절 십자가의 길과 하나님의 능력 (고전 1:18-25) [2] 2024-03-04 7468
1044 사순절 예수 승천과 하나님 우편 (벧전 3:18-22) [9] 2024-02-18 7716
1043 주현절 예수의 변모 사건 (막 9:2-9) [5] 2024-02-11 7582
» 주현절 여호와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 (사 40:21-31) [6] 2024-02-05 7610
1041 주현절 예수의 배타적 권위 (막 1:21-28) [4] 2024-01-28 7788
1040 주현절 부름-버림-따름 (막 1:14-20) [2] 2024-01-21 7594
1039 주현절 사무엘의 하나님 경험 (삼상 3:1-10) [2] 2024-01-14 7723
1038 주현절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 (행 19:1-7) [5] 2024-01-07 7715
1037 성탄절 만물의 찬양 (시 148:1-14) [2] 2023-12-31 8305
1036 대림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2] 2023-12-24 9637
1035 대림절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 (사 61:1-4, 8-11) [2] 2023-12-17 10112
1034 대림절 하나님의 날: 새 하늘과 새 땅 (벧후 3:8-13) [2] 2023-12-10 10160
1033 대림절 깨어있음이란? (막 13:24-37) [2] 2023-12-04 10229
1032 창조절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다! (엡 1:15-23) [2] 2023-11-26 7733
1031 창조절 은혜를 갈망하는 시인 (시 123:1-4) [2] 2023-11-19 7853
1030 창조절 외면당한 사람들 (마 25:1-13) [5] 2023-11-12 8284
1029 창조절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의 역설 (마 23:1-12) [2] 2023-11-07 8148
1028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마 22:41-46) [7] 2023-10-29 8098
1027 창조절 재림신앙 (살전 1:1-10) [4] 2023-10-22 8298
1026 창조절 금송아지 이야기 (출 32:1-14) 2023-10-15 7886
1025 창조절 모퉁이 머릿돌이신 예수 (마 21:33-46) 2023-10-09 7653
1024 창조절 과정으로서의 구원 (빌 2:1-13) 2023-10-01 7758
1023 창조절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마 20:1-16) [2] 2023-09-24 7952
1022 창조절 홍해 이야기 (출 14:21-31) 2023-09-17 8033
1021 창조절 도반 공동체 (마 18:15-20) [4] 2023-09-10 7807
1020 창조절 '악' 앞에서 (롬 12:14-21) [4] 2023-09-04 8351
1019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2023-08-27 7752
1018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마 15:21-28) [6] 2023-08-20 8181
101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2] 2023-08-08 8414
101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 13:31-33, 44-50) [2] 2023-07-30 8299
1015 성령강림절 여기 계신 하나님 (창 28:10-19a) [4] 2023-07-23 8371
1014 성령강림절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1-11) 2023-07-16 8171
1013 성령강림절 영혼의 안식 (마 11:16-19, 25-30) [4] 2023-07-09 8346
1012 성령강림절 인신 제사의 유혹 (창 22:1~14) 2023-07-03 7933
101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4] 2023-06-25 8212
1010 성령강림절 성령과 하나님 사랑 (롬 5:1~8) 2023-06-18 8217
1009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2023-06-11 8282
1008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2023-06-05 8225
1007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2] 2023-05-28 8230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8228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8211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8323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7936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8373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8497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8778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8262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8404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8278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9506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8675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8374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8731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8827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8744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9791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9279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8964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8859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10037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10390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10898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12893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12369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12811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9382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9005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9107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9953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8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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