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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편 23:1-6 |
부족함 없는 삶, 가능한가?
시 23:1-6, 부활절 4주, 2024년 4월 21일
히브리어 성경 시 23편은 ‘다윗의 시편’이라는 단어로 시작됩니다. 우리말 성경도 <다윗의 시>라는 표제를 달았습니다. 시 23편을 노랫말로 하는 찬양곡이 많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노래는 나운영 작곡의 ‘시편 23편’입니다. 이 시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그 노랫말이 담백하면서도 깊이가 있고, 은혜롭다는 데에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서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로 끝납니다. 우리가 이렇게 인생을 산다면 대만족이겠지만 실제로 이렇게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부족함이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많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한평생
어떤 분은 시편 23편을 쓴 사람이 모두에게 추앙받는 왕 다윗이니까 그럴만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다윗과 관련된 서사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도 웬만한 거는 알 정도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당신이 걸어온 인생을 다시 살아볼 생각이 있냐고 묻는다면 그는 십중팔구 ‘노땡규’라고 말할 겁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다.’라고 노래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의외의 대답이겠지요. 저는 다윗의 인생살이에서 이 대답의 근거가 되는 몇 대목만 짚겠습니다.
그는 시골 목동이었다가 왕의 사위가 된 다음 명실상부 통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는 입지전적 인물이었으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순탄하지 못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처음 아내인 공주 ‘미갈’과의 관계도 오랫동안 원만하지 못했고, 자식들 문제도 죽을 때까지 속을 썩였습니다. 큰 왕자 암논이 배다른 공주인 다말을 성폭행하는 일이 벌어졌고, 이로 인해서 다말의 친오빠인 압살롬이 암논을 죽였습니다. 압살롬은 왕위 찬탈까지 시도합니다. 다윗은 야반도주하듯이 압살롬에게 쫓겨 요단강 건너편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요압 장군이 반란군을 진압합니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한 ‘압살롬의 난’입니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대성통곡을 합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삼하 18:33) 다윗이 늙자 왕위 승계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다윗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은 암논과 압살롬과 아도니야와 솔로몬입니다. 암논과 압살롬이 죽었으니까 아도니야가 왕위를 물려받을 차례입니다. 아도니야는 요압 장군과 제사장 아비아달 등등과 함께 세력을 모았습니다. 나단 선지자와 밧세바는 다윗을 찾아가 아도니야 왕자로 인해서 밧세바와 그의 아들 솔로몬이 죽게 되었다고 하소연합니다. 다윗은 솔로몬이 왕위를 물려받을 것이라는 어명을 선포했습니다. 그가 정확하게 판단한 것인지 아니면 밧세바와의 특별한 관계로 어쩔 수 없었던 것인지를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후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도니야가 왕위를 차지하려고 나섰을 때 그에 관한 성경 기자의 설명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왕상 1:6절입니다.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훗날 솔로몬은 아도니야를 죽입니다. 성경이 전하는 다윗의 한평생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이 ‘부족함이 없다.’라고 노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누구나 알만한 그 대답을 말씀드리기 전에 인간 실존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그 실존을 일단 정확하게 뚫어보아야만 그 대답이 설득력 있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고 그 사람이 행복했다거나 훌륭하다고 추켜세우면서 부러워하고, 거꾸로 그런 좋은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소외된 사람을 무시하기도 합니다.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이니까 어쩔 수 없긴 합니다.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존경받고 인정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외적인 조건들은 삶의 비본질적인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부분은 숨겨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그런 문제들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실존의 본질은 영혼의 불안입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유명 유튜버나 유명 가수와 배우, 천문학적 연봉을 받는 프로 운동선수와 벤처기업가들도 시 23:4절이 가리키듯이 ‘죽음의 골짜기’를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 영혼의 불안은 세상의 그 어떤 조건으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인기 ‘짱’인 사람도 고독하고, 돈이 많아도 불안하고, 자식이 많아도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근원적으로 자기 소멸이라 할 수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합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조금 더 구체적인 예를 드는 게 좋겠습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젊은 여성이 있다고 합시다. 남성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타 중의 스타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 사람은 남이 모르는 불면증이나 변비가 심할 수가 있어요. 혹은 결벽증으로 힘들어 할 수 있고, 남을 의심하는 버릇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어요. 매일 악몽에 시달릴지도 모르고요. 공주와 왕자 신분이라도 똑같이 하루 세끼 먹어야 하고 배설해야 하고, 사람과 부대껴야 하고, 외로움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직면해야 합니다. 영혼의 불안이라는 인간 실존의 깊이에서 보면 미국 라스베이거스나 뉴욕 맨해튼에서 초호화판으로 사는 사람이나 부탄 산골 오두막에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나 다를 게 전혀 없는 겁니다. 초호화판으로 사는 사람들은 죽음의 골짜기를 감추고 좋은 모양만 밖으로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도 영혼의 만족이 안 되니까 좋은 조건에 더욱더 매달립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가 오히려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어쨌든지 이런 인간 실존을 넘어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겉으로만 본다면 다윗이 영웅호걸로 살았으나 실제 삶에서는 불안과 고통의 연속이었던 거와 같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이 시편 23편을 찬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그에게는 여호와 하나님과 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친밀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 신앙이 그를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아낼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는 뜻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대답을 너무 뻔하거나 너무 종교적이라서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우리의 하나님 신앙은 정말 비현실적일까요? 주관적인 종교적 망상에 떨어진 것일까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다윗이 말하는 부족함이 없는 삶의 근거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다.’라는 문장에 담겨 있습니다. 이 문장은 다윗의 실제 경험에서 우러나왔습니다. 왕이 되기 전 다윗은 본래 직업이 목동, 즉 목자였습니다. 양과 목자의 관계가 어떤지를 그는 실감하고 있었습니다. 골리앗과 일대일 결투하는 자리에 나온 다윗은 사울 왕에게 자신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양을 지킬 때 사자나 곰이 양 새끼를 물어가면 자기가 끝까지 따라가서 사자나 곰과 싸워 새끼를 구해냈다고 말입니다. 목자는 양을 지키려고 위험을 감수합니다. 특별한 때는 목숨을 걸기도 합니다. 목자와 양은 공동운명체입니다. 이런 목자를 알기에 양들은 목자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릅니다. 똑같은 심정으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목자가 실제로 양의 안전을 완벽하게 보장해줄까요? 늘 푸른 풀밭과 물가로 자신들을 이끌어줄까요? 물론 그렇지 못합니다.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작년에 갔던 장소에 다시 갔는데 이번에는 풀이 하나도 없을 수 있고, 작년에 양들이 물을 마셨던 시냇물이 비가 오지 않아서 마를 수도 있습니다. 목자가 아무리 잘 지킨다고 하더라도 양들에게 어려움은 일어납니다. 천재지변도 일어나고 전염병도 돕니다. 새끼 양을 낳다가 죽는 엄마 양도 있겠지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모두 인생을 평안하게 사는 건 아닙니다. 예상하지 못한 온갖 소용돌이가 각자의 인생살이에서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찬양합니다. 이게 가능한가요? 어떻게 가능한가요?
양이 목자를 믿고 따르듯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자기의 인생 시간표나 나기 나름의 인생 손익계산서에 민감하지 않다는 게 우선 중요합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보다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걸 더 궁극적인 삶의 목표로 삼기에 자기 인생길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낙심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불행한 일이 벌어지면 피곤하고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그런 일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길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삶의 그런 깊이를 알고 느끼고 믿는 사람이 있고, 그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있겠지요. 다윗은 그런 삶의 깊이를 경험했기에 시편 23편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겁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다윗은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노래했습니다. KJV은 ‘I will fear no evil.’라고 번역했습니다. 루터는 해(evil)를 Unglück(불행)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나는 그 어떤 해로운 일이나 불행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약간의 어려움이나 불행을 몸서리치듯이 두려워합니다.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심리 현상입니다만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니까 삶이 황폐해지고, 종종 난폭해지는 겁니다. 아주 성실해 보이는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보이는 인간 이하의 행동도 사실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약자들에게, 특히 여성들에게 ‘묻지 마’ 방식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남성들은 대게 심리적인 두려움에 갇혀 있는 겁니다. 누구나 인생살이에서 죽음의 골짜기를 살아내야 하기에 두려움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겠지요. 그 두려움에 점점 더 깊이 매몰되는 사람이 있고, 거기서 벗어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주께서 함께하심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를 4절에서 분명하게 짚었습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입니다. 이 사실을 알기에 그는 그 어떤 어려움이나 불행이 닥쳐도 그걸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은 주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신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지팡이는 목자들이 양을 인도할 때 사용하는 도구이고 막대기는 짐승과 싸울 때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양들은 비가 오나 눈이 와도, 비탈길을 만나도 불평하지 않고 목자를 따라서 갑니다. 결국에는 목자가 자기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이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억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목자와 양이 오랜 관계를 통해서 그런 절대적인 믿음이 형성됩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정리하면 절대적인 믿음은 하나님과 관계가 깊어질 때 은총으로, 즉 선물로 주어집니다.
혹시 이런 믿음은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신가요? 합리적인 게 잘못은 아니나 진리가 늘 합리적으로만 경험되는 게 아닙니다. 이성과 합리성으로 무장한 사람이 세상과 삶을 늘 정확하게 판단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세상과 삶의 깊은 차원은 이성과 합리성 안에 갇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사랑이 늘 합리적이던가요? 물리학에서 양자의 세계가 합리적이던가요? 죽을 고생을 치르면서 에베레스트산을 올라가는 산악인들의 행위가 합리적인가요? 합리성으로만 말하면 연봉이 높아야만 행복한 거겠지요. 사람은 합리적이지 않아도 사랑하고, 자기 안위를 넘어서서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투쟁하고, 자기를 희생할 줄 압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은 생명의 새로운 세계를 맛보게 합니다. 그래서 어려움과 불행이 겹쳐서 일어나도 하나님께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자기를 지키신다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이게 실제로 가능할까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으세요?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자기 인생 시간표를 따라가면서 치열하게 사느라, 그리고 늙어서는 죽음 문제에 쫓겨서 이런 문제를 깊이 있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오늘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lectionary) 셋째 말씀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사실을 전합니다. 요 10:11절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느니라.
예수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냥 목자가 아니라 한걸음 저 나아가서 ‘선한 목자’로 고백했습니다. 선한 목자는 늘 양과 함께합니다.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함께합니다. 그 사실을 역사적 예수의 운명에서 경험했기에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와 로마의 거대한 세력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나갔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후손인 우리에게는 그들의 경험이 왜 그대로 전달되지 않는 걸까요? 제자들이 뭔가를 착각한 것일까요?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로 선한 목자로 경험하고 있나요?
오늘 현대인들에게 문제는 자신의 영적 정체성을 양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잘 알아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으니까 목자 같은 존재는 없어도 괜찮다고 여깁니다.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목자 표상은 오히려 거추장스럽습니다. 과도한 자신감과 맹목적인 자아숭배라는 특징으로 사는 겁니다. 그럴듯해 보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에 잘 적응하고 나름 노력하면 남부러워할 거 없이 만족스럽게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돈만 많으면 풀밭은 지천으로 널려있고, 마실 물도 수도관과 정수기를 통해서 자동으로 공급받습니다. 현대 지성적인 젊은이들에게 그리스도교는 종교적 잔소리꾼이나 현실과 동떨어진 허풍쟁이나 아첨꾼처럼 느껴질지 모르겠네요. 자신들은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야 할 양이 아니니까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하고 싶겠지요. 맞는 말인가요? 선한 목자 없이 사람이 삶을 제대로 살아낼 수 있을까요?
설교 앞 대목에서 인간 실존이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는 거와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무리 즐기면서 살아도 인간은 본래 고독하고 불안하다고 말입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그런 실존을 외면하고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신처럼 따릅니다. 그게 그나마 자신들에게 위로가 되니까요. 이런 위로는 임시처방입니다. 목마른 사람이 술을 마시거나 설탕물을 마시는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라는 사실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 사람들의 인생에는 근원적인 생명의 깊이에서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