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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의 구원신탁

기타 조회 수 11586 추천 수 40 2004.07.02 16:06:31
성경본문 : 이사야 55:1-5 

이사야의 구원신탁

이사야 55:1-5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이사야 40-55장을 집필한 제2 이사야
의 예언입니다. 아직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이 제2 이사야는 1-39장을
집필한 이사야보다 대략 150년 이후의 인물로서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된 기원전 587년부터 바벨론이 멸망한 553년 사이에 예언자
로 활동했습니다. 주로 포로기 이전의 예언자들은 심판을, 포로기와 그
이후 예언자들은 구원을 예언하기 마련인데, 이 제2이사야는 시기적으로
는 포로기 예언자이면서도 심판을 예언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43:22이하
에서 그는 심판을 예언합니다. 그렇지만 제2 이사야가 활동한 시기가 포
로기였던 만큼 그는 심판 예언에 머무르지 않고 구원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대신 전하던 예언자들은 아무리 하나님의 뜻
이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하더라도 자기가 처한 시대적 상황을 무시하고
전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흡사 위대한 작곡가들이 거의 비슷한
음악적 세계를 경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시대적 표현 방식을 달리했던 것
과 비슷합니다. 자기 민족의 포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선포한 제2 이사
야의 구원 신탁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습니까?

돈 없이 배부르게 먹음
오늘 본문은 장터에서 볼 수 있는 한 장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
리는 여기서 장사꾼들의 호객 행위를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습니다. 하
루종일 땀 흘리며 일한 사람은 갈증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그런 사람을
향해서 '여기 시원한 음료가 있으니 오라'고 부릅니다. 얼마나 반가운 소
리이겠습니까? 먹을 게 없는 사람들도 오라고 합니다. 목이 타는 듯 갈
증을 느끼는 사람들, 하루종일 먹지 못한 사람들에게 마실 음료와 먹거
리는 구원입니다. 나도 어렸을 때에는 이런 경험을 종종 했습니다. 먹는
문제를 절실하게 생각할 수 있었던 그 때가 그리워지는 것은 웬일일까
요? 요즘 결식 어린이와 노인에게 먹거리를 제공하는 단체가 많은 것 같
습니다. 간혹 그런 프로그램이 지나치게 기계적인 방식으로 운영되기 때
문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어쨌든지 생존의 위기에 노출된 사람들
에게, 특히 스스로 그것을 해결할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한다는 것은 그 무엇에 비교할 수 없는 귀한 일입니다. 인간이 생존
하기 위해서는 사실 먹거리만 필요한 게 아니라 적당한 정도의 교육과
의료를 제공받아야만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나라가
되려면 소위 복지에 속하는 이런 조건들을 개인의 능력에 상관없이 사회
가 떠맡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에는 이런 문제들이 개인에게
거의 일방적으로 떠맡겨져 있기 때문에 능력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
이에 놓인 삶의 조건이 점점 더 벌어질 뿐입니다.
이사야는 '돈 없이' 먹고 마실 수 있다고 예언합니다. 가난한 사람들
에게는 돈을 받지 않고 먹거리를 제공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일은 시장
판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시장의 논리는 야박합니다. 이익을 남기는
일이 없으면 시장이 형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장의 논리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별로 깊은
감동을 느끼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자선단체의 일을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할뿐입니다. 먹을 게 없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사
람에게 음료수를 제공하는 일은 자선사업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론적
행위입니다.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자선사업, 또는 복지행정이라는 말로
부르고 있습니다만 이런 일은 결코 인간의 도덕심을 함양하기 위한, 또
는 정의로운 사회를 열기 위한 안전장치가 아닙니다. 우리가 교양인으로
살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존재방식입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는 시장논리와 맞서 싸워야 할 책임과 사명이 있습
니다. 비록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제도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하
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기독교인은 그런 요소들이 자기 스스로를 절대화
하지 못하도록 도전해야만 합니다. 어떤 면에서 기독교인들은 분열주의
자들입니다.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에 치중된 사회질서를 분열시킴으로
써 생명의 힘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도록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회 질서를 허물어내고 절대적인 질서가 자리를 잡도록 하는 일
에 용기를 내지 않습니다. 이런 무기력증은 우리 신앙의 모든 부분을 사
로잡고 있습니다. 남북분단 체제를 당연시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이용
해서 자기의 이득을 취하려는 태도를 우리 교회 질서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수학능력 시험이라는 교육 구조에서 모든 삶을 희생당하고 있
는 청소년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신앙을 이용해서 그
런 구조에 적응하려고 합니다. '돈 없이' 마시고 먹을 수 있는 사회를 향
한 상상력이 아니라 '돈 놓고 돈 먹는' 사회를 즐기려고 합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세계
이사야의 예언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돈을 써 가
며 양식도 못되는 것을 얻으려 하느냐? 애써 번 돈을 배부르게도 못하는
데 써 버리느냐?"(2절). 이사야의 이 말을 무슨 뜻일까요? 많은 돈을 들
여 미술품을 산다거나 또는 마약을 사는 것일까요? 그런 것은 먹을 수도
없고, 먹어봐야 배부르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그런 뜻
을 아닐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된 마실 물과 먹거리도 역시 사실적인 것
이라기보다는 다른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음료와 먹거
리는 야훼 하나님보다 마르크스나 오늘의 기업가들이 훨씬 풍부하게 제
공할 수 있습니다. 한쪽은 계급투쟁을 통해서, 다른 한쪽은 이윤의 극대
화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배부르게 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입니
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영혼을 배부르게 하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삶
이 완성되는 부분은 역시 영적인 세계입니다. 물론 이 말이 육체와 영혼
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한다는 차원에서 일종의 정신주의를 의미하는 것
은 아닙니다. 인간의 육체를 만족시키는 것으로만 인간이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차원에서 우리는 영적인 배부름을 말해야 합니다. 이런
경험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확인될 수 있습니다. 한 가족이 있
다고 합시다. 돈도 많고 먹을 것도 많고, 사회적 지위도 높지만 그들 사
이에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진정한 사귐이 없다면 그들은 결코 행복
하지 않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행복한 듯이 보이기는 하겠지만 생명의
충만감 없이 그냥 그렇게 인생을 흘려보냅니다. 다른 한 가족이 있습니
다. 비록 가난하지만 그들 사이에 참된 대화와 인간의 심연에서 우러나
오는 사귐이 있다면 행복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부분들을 단지 형식적으로만 다루지 좀더 확실하게
접근하지 않습니다. 대충 '그러려니'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그게 참으로
이상합니다.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모두가 전문가인데, 가장 중요한 자
기 삶에 대해서는 아마추어로 살아갑니다. 의사, 변호사, 학교 선생, 과
학자, 건축가 등등, 자기 나름의 전문 분야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의 삶에 대해서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학 박사 학위를 받으려고 해도 최소한 10년 이상을 투자해야 하는데,
우리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삶에 대해서는 거의 한 순간도 집중하지
않습니다. 모두 알고 있다는 뜻인지 아니면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아예 포기하자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우리에
게 영적인 세계가 다가올 수 없습니다. 고(古)미술품 전문가들에게만 진
품을 식별할 수 있는 감수성이 주어지듯이 삶에 대한 전문가들에게는 영
적인 세계가 식별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집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성서가 말하는 영적인 배부름이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서의 다른 부분도 그렇지만 오늘의 본문도 역시 절대적인 삶을,
삶의 완성을, 즉 구원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저 다른 사람보다 약간 편
하고 즐겁게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에 머물러 있다면 성서를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것을 위해서라면 단지 교양 서적을 읽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 삶의 완성은 돈을 주고 사는 게 아닙니다. 그런 방식으
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 세계는 오히려 돈이 없어야만 주어
집니다. 돈에 의존해서 자기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세계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돈 없이'라는 말은 곧 삶의 완성을 위한 전제 조건
입니다. 여기서 돈은 단지 재화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피조된 것들을 뜻합니다. 피조물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절대화되
는 것 말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생명은 반드시 그 생
명의 주인인 하나님에 의해서만 완성되고 충만하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의 충만은 어떤 상태일까요? 이런 질문 앞에서
놓이면 할말을 잊습니다. 생명의 충만은 곧 하나님의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없습니다. 예언자들도 이것을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돈 없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
는 상태로 묘사되고 있습니다만, 이것이 곧 생명의 충만에 대한 직접적
인 표현은 결코 아닙니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으려니 생각하
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충만은 돈으로 빵을 사 먹는다고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생명의 충만을 가
리키는 상징은 될 수 있습니다. 비록 간접적이라도 하나님을 경험한 사
람들은 이렇게 '돈 없이' 서로 나누어 먹으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하나님
을 경험하는 사회와 공동체는 '돈 없이'도 생존이 가능한 세계를 지향하
게 됩니다. 소유가 아니라 존재 지향적인 삶으로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서 전혀 새로운 기쁨과 자유가 그 사람의 속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생명충만과 예수 오심
오늘은 대강절 넷째 주일인데, 며칠 지나면 성탄절입니다. 우리는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이야말로 모든 인류에게 구원이 임한 것이라
고, 즉 생명의 충만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수의 오심으로 인
해 벌어진 구원사건은 어떤 의미에서 생명의 충만입니까? 그가 오셨다고
해서 우리가 실제로 배부르게 된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돈 없는
사람은 배가 고프고 갈증을 느끼고 춥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를 참
되게 믿는 사람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배부릅니다. 예수를 통해서 하
나님을 보았기 때문에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여기서 행
복하다는 것은 오늘의 현실에 놓여 있는 고난과 부정과 모순을 간과하고
어떤 초월적인 현상에 매몰되어 버린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간혹 기
독교 신앙을 그런 식으로 해석한 적이 있긴 합니다. 아메리카의 흑인들
에게 자신의 운명을 그래도 받아들이고 백인 주인에게 충성해야 한다고
가르친 적도 있습니다. 혹은 여성들에게도 그런 굴레가 씌어진 적이 있
었습니다. 이런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긴 하지만 그런 혹독한 숙명 앞에
서도 생명의 충만을 경험한 흑인들의 삶을 무조건 매도하거나 부정할 필
요는 없습니다. '하늘가는 마차'라는 흑인 영가에 확인할 수 있듯이 그들
은 그들의 현실 역사 가운데서 그 어떤 백인 기독교인들도 경험하지 못
한 영적인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불치병에 걸려 죽어 가는 사람
이 지나치게 건강해서 영적인 세계를 무시하는 사람보다 삶에 대해서 훨
씬 민감하고 진지하게 대함으로써 삶의 충만을 경험하는 것과 비슷합니
다. 이것은 곧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영이 활동하신다는 증거
입니다.
제2이사야의 활동시기가 바벨론 포로기라고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이들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루 빨리 포로생활을 끝
내고 고국으로 돌아가서 다시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는 독립국가를 세우
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는 그런 다윗 왕조의 회복과
는 다른 차원에서 구원 신탁을 전합니다. 물론 그런 약속이 유효하기는
하지만 그런 정치적인 회복으로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완료되는 게 아닙
니다. 구약학자 폰 라트에 따르면 제2 이사야에 의해서 다윗 왕조와의
약속이 이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약속으로 재해석된다고 합니다. 5절
말씀에 의하면 다윗 왕조를 통한 구원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자체가
영화로워지는 사건을 통해서 이들에게 구원이 임하게 된다는 예언입니
다. 이제 제2 이사야에 의해서 하나님의 구원 약속은 귀족 계급으로부터
민중의 차원으로 확산, 심화되었습니다. 이는 곧 메시아론의 보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오심은 바로 이런 특권층 중심의 구원론을 해체시킨 사건이
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예수의 족보가 다윗에까지 올라가지만 예수
가 태어날 당시의 요셉 가문은 그런 왕족과 연결시켜서 볼만한 구석이
거의 없었습니다. 요셉은 목수였습니다. 노동자 신분이라는 게 늘 그러
하듯이 내세울만한 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인구 통계를 잡기 위해서
호적을 정리하라는 로마 황제의 명령에 따라 요셉이 만삭된 아내 마리아
를 데리고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긴 여행을 했습니다. 그들은 베들레
헴에서 잠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마굿간에서 지냈다고 합니다. 여행객들
이 많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돈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지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가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성장하다가
서른 살이 되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시작할 때 주변 사람들은 이
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의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서 새로운 삶을 발견한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대다수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의혹에 찬 눈
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예수가 그렇게 내놓을만한 게 없는
집안 출신이라는 점이 제일 중요하게 작용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새롭
게 해석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아무런 조건도 붙이지 않고
그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선포하다가 결국 십자가에 처형
당한 분이 바로 예수입니다. 그렇게 평범했던 역사적 예수가 어떻게 하
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은 어떻게 그를 양자로 삼았는가에 대한 심층적
사실과 의미를 우리가 모두 헤아릴 길은 없지만 사도의 전승과 성령의
증거로 인해서 우리는 예수가 바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여기서
의 핵심은 귀족과 명문가에서 오리라고 기대되었던 메시아가 평범한 가
정에서 오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택하시고 그를 통해서
이 세상에 새로운 생명을 싹틔우기 시작하셨습니다.

생명 충만의 경지
이 사실에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예상을 벗
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똑똑한 사람을 통해서 무언가 귀중한 일
들이 일어날 것처럼 예상하고, 그렇게 기대합니다만 하나님의 구원을 그
런 방식에 갇혀있지 않습니다. 물론 성실하게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거
두고 사회에서 출세한다는 이런 사회 질서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닙
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그런 일들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것
을 절대화하고 그런 틀에 머물러 있고 만다면 그런 일들은 돈을 주고 음
료와 먹거리를 사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이스라엘 백
성들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오셨다는 말은 곧 그가 일으키는 구원도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며, 우리의 예상과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돈을 주
고 얻은 것은 우리를 배부르게 하지 못한다는 이사야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 사건을 믿는 우리는 전혀 다른 삶의 경지에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의 삶이 영적으로 충만한 상태로 들어가는 경지입니다.
그런 경지가 어떻게 주어질까요? 이사야는 2b,3절에서 야훼 하나님
에게 나와서 그의 말씀을 들으라고 합니다. "내 말을 들어라. 너희에게
생기가 솟으리라."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게 아
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그저 형
식적으로 예배드리고 성서를 읽는 게 아니라면 우리의 예배와 말씀읽기
는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영적 충만을 경험하게 할 것입니다. 이런 일에
돈이 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돈을 내고 얻을 수 있는 것들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며 경험입니다.
어떤 면에서 오늘 우리의 삶도 2천5백년 전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비슷할 정도로 불안할 뿐만 아니라 이런 불안에 익숙
해짐으로써 더욱 더 생존경쟁에만 매달려 있습니다. 대선 불법자금을 둘
러싼 논쟁으로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이라크 문제도 역시 약육강식의
논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돈 없이 먹고 마시라는 제2 이사
야의 예언에 귀를 기울입시다. 그가 예언한 구원의 새로운 지평은 다시
5백5십 년이 흐른 다음, 평범한 목수 요셉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에 의해
서 실현되었습니다. 그가 우리를 참된 영적 만족과 충만으로 인도하십니
다.  <2003.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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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1827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2123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1599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2035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2453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2662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2163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2101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2106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3156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2525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2468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2966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2855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705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727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763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828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799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558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515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3548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757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4369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778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3250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904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822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506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919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383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522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3032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842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531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728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667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4145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856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728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963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858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883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465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3106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706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944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668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773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5049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4250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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