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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의 자기 증거

기타 조회 수 11421 추천 수 29 2004.07.02 16:24:36
성경본문 : 민수기 20:1-13 

야훼의 자기 증거
                        
민 20:1-13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겪은 여러 사건들의 모음집인데, 특
히 백성들의 숫자를 계산하는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광야의 일들은 오랜 세월을 거쳐 민담으로 전승되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약간씩 가감 수정
될 수 있기도 하고, 새롭게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의 경우에 일제
식민지 36년 동안 일어났던 사건들이 역사의 흐름과 함께 새롭게 해석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한 예를 들자면 일전에 아무개 탤런트가 정신대 할머니 이야기를 주제로 누드 촬영을 했다가
여론의 호된 비판을 받고 도중 하차 한 일이 있습니다. 정신대 이야기는 분명히 일제 시대에
일어났던 가장 끔찍하고 비열한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오랜 세월 파묻혀 있었습니
다. 정확한 배경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십여 년 전쯤 몇몇 할머니들의 증언에 의해서 이것
이 사회 문제로 부각되었고, 현재는 '정대협'을 중심으로 일본의 반성과 사죄를 받아내기 위
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설교가 씁쓸한 이야기로 시작된 것 같아서 좀 그렇지만, 우리가 성
서의 사건을 읽을 때 그 사건과 연결된 많은 사람들의 역사 해석이 그것에 담겨 있다는 사실
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려는 것이었습니다.

물부족
오늘 본문은 물 문제로 야기된 사건입니다. 광야를 유랑 중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카데스
에 자리를 잡은 즉시 어려운 상황에 빠졌습니다. 먹을 물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몰려들어 따졌다고 합니다. "우리 겨레가 야훼 앞에서 죽을 때 우리도 함께
죽지 못한 것이 한이다. 너희는 어찌하여 야훼의 회중을 이 광야로 끌어내어 우리와 우리 가
축이 함께 죽게 하느냐? 어쩌자고 우리를 에집트에서 데리고 나와 이 못된 고장으로 이끌었
느냐? 어찌하여 우리를 곡식도 무화과도 포도도 석류도 자라지 않고 마실 물도 없는 이 곳으
로 끌어내었느냐?"(3-5).
요즘이야 수도꼭지만 틀어 물을 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심각하게 느끼지 못하겠지
만 지금부터 3천5백년 전 척박한 광야에 내몰려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것이 자신들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습니다. 가뭄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모습을 티브이 화면에서
볼 때가 있습니다. 여성들이 한 동이의 물을 구하기 위해서 서너 시간을 걷기도 합니다. 그렇
게 해서라도 물을 얻어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렇게 살아가는 이들
이 있는데,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모세와 아
론에게 불평하고 따졌습니다. 그들이 그만큼 생존의 위기를 느꼈다는 말이 되겠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에서 겪어야 했던 가장 큰 문제가 아마 물부족이었던 탓인지
출애굽기에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두 군데나 보도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출애굽기 15장22절
-27절에 나오는데, '마라'에 도착한 이들이 오염된 물을 발견하고 불평하자 야훼가 모세를 통
해서 특별한 방식으로 마실 수 있는 물로 정수(淨水)시켰습니다. 출 17:1-7에는 오늘 본문과
거의 비슷한 내용의 사건이 보도됩니다. 르비딤이라는 곳에서도 역시 물을 발견하지 못한 이
스라엘 백성들이 불평을 하자 야훼는 나일강을 치던 모세의 지팡이로 바위를 치게 했습니다.
그러자 바위에서 샘이 터졌다고 합니다.
아마 오늘 본문이 다루고 있는 사건은 출애굽기 17장의 사건과 똑같은 것으로 보입니다.
같은 사건이 약간 다른 방식으로 전승되고 이렇게 각각의 문서로 편집되는 과정에서 출애굽
기와 민수기에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비슷한 사건이 이렇듯 여러 방향에서 전승되었다는 말
은 그것으로 인해 당했던 고통의 기억이 그만큼 강렬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이
사건이 하나님 야훼와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야훼의 꾸중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을 들은 모세와 아론은 당혹스러웠습니다. 자기들 나름대로 최선
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백성들의 원망이었습니다. 모세도
아마 이런 사태를 어느 정도 내다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식수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을 테니까 말입니다. 모세가 그 광야의 지리를 아무리 잘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많은 백성들을 데리고 정확하게 물길을 찾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
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백성의 대표자들을 설득해서 나름대로 문제를 풀어보려는 노력을
적지 않게 했겠지만, 결국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모세의 입장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자신들의 입장을 야훼 하나님께 아뢰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만남의 장
막 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지팡이를 가지고 회중을 불러모아라. 그리고 형 아론과 함께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 바위에게 물을 내라고 명령하여라. 그리하면 네가 이 바위에서 터져 나오는 물로 회중과
가축을 먹일 수 있으리라."(8). 이 말씀대로 모세가 사람들을 모으고 지팡이로 그 바위를 두 번
치니 샘이 터졌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건의 실체를 정확하게 풀어낼 길이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 사건
은 신문기자의 사실보도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해석이 전승의 과정을 통해서 완성
된 민담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표현된 대로 야훼 하나님이 입을 열어서 우리 인간이 알아들
을 수 있는 언어로 말씀하셨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모세의 마음에 야훼
하나님이 일종의 깨달음으로 자신의 뜻을 알리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모세가 지팡이로
바위를 치니까 바위에서 샘이 터졌다는 이 이야기를 단순히 초자연적 사건이라고 우길 필요
는 없습니다. 자연적인 현상과 초자연적인 현상이 그렇게 완전히 이질적인 것은 아닙니다. 다
만 우리의 눈에 그렇게 비칠 따름이지 근원적으로 이 두 현상은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결합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백성이 원망을 산 모세가 야훼 하나님의 뜻을 깨
달아 가는 과정에서 물이 나올만한 장소를 기억해냈을지 모릅니다. 프로이트가 밝혀 냈듯이
인간의 무의식에는 평소에 전혀 드러나지 않는 엄청난 정보가 저장되어 있습니다. 아주 특별
한 순간에 이 무의식이 의식의 세계로 드러나게 되면 우리가 초자연적이라고 부를만한 기억
이 되살아나게 됩니다. 모세의 무의식이 이렇게 작동되었을 가능성은 많습니다. 모세의 영적
인 감수성이 원래 예민한데다가 현재의 상황이 그의 정신을 매우 강한 힘으로 자극했을 테니
까 말입니다.
본문이 말하려는 바는 바위에서 샘이 터졌다는 그 사실보다 이런 일이 있은 다음에 야훼
께서 모세와 아론을 꾸중하셨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믿지 못하여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이 회중에게 줄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12). 우리는 이 이야기의 전개가 약간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여기서 발
견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의 원망 때문에 궁지에 몰린 모세가 하나님 야훼의 말씀에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했다면 당연히 칭찬을 받아야 하는 게 순서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모세가 야훼
하나님께 꾸중을 들었다고 증언합니다.
이 민담의 역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세와 아론이 가나안에 입성하지 못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이 물 문제와 연결해서 해명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모세가 가나안 입성 바로 직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불평 불만에 사로잡히고 급기야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섬길 정도니
까 그들 중에서 스무 살 넘은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하
나님을 직면하고 율법을 부여받은 모세도 역시 그런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다는 사실은 받아
들이기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약속의 땅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면 결국 그럴만한 사정이 있
어야 하는데, 그것이 곧 본문 사건 안에서 해명되고 있습니다.

야훼의 영광
모세가 꾸중을 들은 이유는 그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야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였다는 데에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성서읽기는 벽에 부닥칩니다. 도대체 모세의 행동
중에서 무엇이 야훼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한 것일까요? 본문만 들여다보아서는 도저히 그 이
유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세가 지팡이로 바위를 칠 때 한번이 아니라 두 번
친 것이 문제였다고 말합니다. 모세의 혈기가 작동해서 감정적으로 내려쳤다는 말입니다. 물
론 사람이 감정이 상하면 아무리 야훼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감정에 휘둘려서 처
리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놓고 발언한 내용이 야훼 하나님의 꾸중을 듣게 되
는 이유일까요? "반역자들아, 들어라. 이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해 주랴?" 이 책망은 백
성들을 물이 없는 곳으로 이끌고 온 자신의 책임을 피해보려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
러나 우리는 백성을 향한 모세의 이 발언이 하나님의 노여움을 받을 만큼 심각하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원래 예언자들은 이런 모세의 발언보다 훨씬 과격하게 선포했습니다. 예컨대 세
례 요한 같은 사람의 독설은 도저히 하나님의 예언자라고 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따라서 모세
의 이런 말이나 행동 때문에 야훼 하나님이 모세의 운명을 처리하셨다는 것은 지나치게 자의
적인 해석입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우리는 모세의 어떤 행위가 야훼 하나님의 꾸중을 들을 만 한 것이었는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근거도 없이 야훼 하나님이 모세를 꾸중했으며, 가나
안에 들어갈 수 없게 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분명히 그럴만한 문제가 있기는 하겠지만 우리가
그 문제를 풀어낼 만큼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할 뿐입니다. 그 이유는 이 민담 전승에 참여한 사
람들의 생각을 우리가 따라잡기에는 그 거리가 너무 멀다는 데에 있습니다.

모세의 불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한 이유를 약간은 잡아
낼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믿지 못하여 ..."(12).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한 이유는 모
세의 불신앙에 있었으며, 그 불신앙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는 한계였습니다. 물론 모세가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는 이 진술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간단하게 대답을 찾
을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미루어 짐작하는 방식으로만 이 문제에 접근할 수 있습니
다. 인간의 믿음이라는 것이 몇 가지 행동으로 정확하게 판단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말입니
다. 더 나아가서 모세의 불신앙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게 바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중심도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이 민담이 무슨 이유로 그렇게 위대한 모세의 불신앙을 거론
하고 있는가, 그래서 결국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이유를 이것과 연결시키는지
배워야 합니다.
"너희는 나를 믿지 못하여..."라는 이 진술이 모세의 양심에서 나온 고백이라고 보면 안될
까요? 자신의 모든 삶을 던져 민족을 이끌어냈는데, 이제 가나안 입성 바로 직전에 더 이상 나
아가지 못하고 숨을 거두어야 할 모세가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보면서 자신의 불신앙이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이유였다고 반성하는 게 아닐까요? 그렇지 않다면 어느 누가
모세의 불신앙을 거론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이 민담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에 의해서 그렇
게 해석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모세의 개인적인 고백이었든지, 아니면 후대의 해석이었든지
이 사건에서 제기되는 핵심은 바로 모세의 불신앙입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늘 하나님을 참되게 믿으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이 지향하는 것도 역시 신앙이며, 신약의 복음서와 편지도 역시 인간 삶의 핵심을
이 신앙에 두었습니다. 어려운 조건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에
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다는 게 바로 핵심 주제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민족의 위대
한 지도자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그 책임이 그의 불신앙에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드러남
모세만 하나님을 믿지 못한 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
다. 어쩌면 모세의 불신앙은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야기된 측면이 없지 않습
니다. 가나안 입성 직전에 모세가 행한 설교인 신명기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야훼께서는
너희 때문에 나에게까지 노하시어 말씀하셨다. '너 또한 그리고 들어가지 못하리라'..."(신
1:37). 모세의 이런 고백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를 지적
하고 있습니다. "그 샘물은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와 다투었다고 해서 므리바 샘이라고 불리지
만,"(13).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의 고된 삶을 견디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불평하고 원망
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보다는 그래도 생존이 보장된 에집트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
다. 그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불평이기도 했습니다. 모세에게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
안 직전까지는 이끌고 갈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을 감당할만한 믿음은 없었다고 보아야합니다.
그런데 성서는 야훼와 다툰 이곳이 곧 "야훼께서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낸 곳이기도
하다"고 증언합니다. 역사의 아이러니이며 반전입니다. 개인과 민족은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끝없이 불평하고 불안해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야훼 하나님은 자기를 증거하십니다. 이게 곧
성서가 해석하고 있는 인류의 역사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의 역사도 이런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마실 물이 없는 상황 때문에
우리가 가나안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
식으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혹시 요즘의 대통령 탄핵 사태 앞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변혁과 개혁의 물결이 이런 증거는 아닐까요? 먼 후일 우리의 후손들은 이 사실을 실증적으
로 확인하겠지만 오늘 우리는 영적 시각으로 이를 믿고 용감하게 이런 운동에 동참할 뿐입니
다. 그 결과는 야훼 하나님께 맡기고 말입니다.
<2004.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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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260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3278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473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4087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506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3017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637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591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279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683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162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299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818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612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304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512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440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939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632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494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756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638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662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250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86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490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738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464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543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829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4037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619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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