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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래아 나자렛 사람, 3월20일

기타 조회 수 9103 추천 수 48 2005.03.20 23:31:23
성경본문 : 마태복음 21:1-11 
2005.3.20.          
마 21:1-11
갈릴래아 나자렛 사람

예루살렘 입성
예수님의 공생애의 마지막 절정을 회화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는 네 복음서가 한결같이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 입성으로부터 시작되는 예수님의 수난설화를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일주일가량 머물다가 체포당하시고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습니다. 예수님이 굳이 예루살렘으로 오신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경건한 유대인이라고 한다면 중요한 절기 때마다 성지를 방문하는 그런 풍습을 예수님이 단순하게 따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예루살렘 입성의 동기는 단순했지만 그 결과는 기독교 세계만이 아니라 세계 인류사에 결정적이었습니다.  
이런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에 가까운 벳파게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제자 둘을 불러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맞은편 마을로 가 보아라. 그러면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을 터인데 그 새끼도 곁에 있을 것이다. 그 나귀를 풀어 나에게로 끌고 오너라. 혹시 누가 무어라고 하거든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러면 곧 내어 줄 것이다.”(2,3절). 제자들은 이 말씀 그대로 따라서 일을 처리했습니다. 아마 이 나귀 주인과 예수님은 오래 전부터 친분관계가 있었을 겁니다. 그 사람과 미리 약조가 있었던 까닭에 제자들은 이 일을 쉽게 처리할 수 있었겠지요.
제자들은 나귀 위에 겉옷을 얹어놓았고, 예수님은 그 위에 올라 타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펴 놓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 길에 깔아놓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 앞뒤에 있는 사람들이 환호를 질렀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지극히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9절). 이런 장면만 본다면 예수님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크게 환영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뒤이어 읽어 가다보면 이런 환호가 곧 그를 죽이라는 고함으로 바뀌는 걸 보면 이런 환영은 아주 부분적인 현상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어쩌면 이런 환호는 늘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끼리만 벌인 ‘이벤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거룩한 드라마의 단초였다는 사실을 누가 눈치 챘겠습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당시 역사의 주류였던 로마 총독이나 예루살렘 대제사장,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모르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그들이 모를 수밖에 없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 부족했다기보다는 역사의 본질이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한 사건들이 한 나라, 전 세계를 바꾸는 사건으로 발전하게 되는 그 신비한 메커니즘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생각을 초월해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것을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훨씬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내다볼 수 있는 사람들이 곧 예언자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현재는 비록 초라하지만 미래를 크게 바꾸게 될 그 사건들의 내면을 미리 내다보며 살아갑니다.
마태는 이 예루살렘 입성 장면에 초점을 두 군데로 잡았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가 입성하실 때 환호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구약을 인용함으로써 수님에게 일어난 이 두 사건이 역사적 의미가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나귀와 환호는 별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나귀는 너무나 평범한 동물이지만 환호는 특별한 현상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개선장군처럼 환호를 받았다면 나귀가 아니라 말을 타고 입성하는 게 훨씬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치, 군사, 경제적인 부분에서 환호를 받는 분이 아니라서 말을 타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싸우고 정복하고 패권을 키우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겸손하게 기다리는 평화의 방식으로 자신의 길을 가신 분이기 때문에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는 누구냐?
나귀를 타고 환호 받는 이 예수를 보고 예루살렘 시민들이 “그는 누구냐?”하고 서로 물었습니다. 마태는 그들의 대답을 이렇게 전합니다. “이분은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신 예언자 예수요.”(11절). 이 대답은 바로 그 대목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지만 아마 마태 공동체의 신앙고백, 더 나아가서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이라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에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여전히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그 예루살렘 시민들에게 자기들을 변증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루살렘 시민들이 이들 원시 기독교 공동체를 향해서 물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들이 기다린다고 하는 그 예수는 누구냐, 하고 말입니다. 이들은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대답했겠지요.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예수는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신 예언자요.
갈릴래아 나자렛은 지명입니다. 갈릴래아는 이스라엘의 북부 지역을 가리키고 나사렛은 그 지역의 한 마을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본다면 갈릴래아는 변방 중의 변방입니다. 우리로 비교한다면 함경북도 정도라고 할까요? 더구나 갈릴래아는 전통적으로 민란이 자주 일어난 지역으로 유명합니다. 물론 유대 민족 자체가 로마 총독들이 그곳으로 부임하기를 거릴 정도로 민족의식이 강했지만, 그중에서도 갈릴래아는 훨씬 심각했습니다.
그 갈릴래아 지역에 있는 나자렛은 아주 평범한 마을이었기 때문에 괜찮은 지역의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곤 했습니다. 빌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예수님을 전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자렛에서 모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 1:45). 예수님의 출신 지역인 갈릴래아나 나자렛은 별 볼 일 없는 곳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소동으로 몰아넣고 있는 이 장본인이 아주 시시한 지역 출신이라고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루살렘 시민들이 이 예수님을 여전히 낮추어본다는 의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어떤 적대감이나 냉소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뜻으로 이 지명을 언급했다는 말씀인가요? 예수님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지역을 언급하려면 그의 출생지인 베들레헴이 훨씬 낫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설화를 설명하고 있는 마태복음 2장은 예수님의 출생지를 베들레헴으로 명시합니다. 이 베들레헴은 비록 작은 마을이지만 예루살렘과 가깝기도 하고 구약성서의 보증도 받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유다의 땅 베들레헴아, 너는 결코 유다의 땅에서 가장 작은 고들이 아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영도자가 너에게서 나리라.”(마 2:6, 미가 5:1). 왜 마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출신지를 베들레헴이라고 하지 않고 민란이 많이 발생하는 갈릴래아와 시시한 마을 나자렛이라고 전하는 걸까요?
갈릴래아와 나자렛이라는 표현에 마태의 어떤 특별한 의도가 있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나자렛이라는 지명은 예수님을 가리킬 때 늘 붙어 다니던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이름은 그가 아리마대 출신이라는 뜻이고 가룟 유다는 가룟 출신인 것처럼 나자렛 예수라는 이름은 곧 그가 나자렛 출신이라는 단순한 표현 방식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자렛이면 충분하지 갈릴래아까지 거론하는 이유는 따로 있지 않을까요? 사실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할 때는 갈릴리아도 매우 중요한 수식어로 등장합니다. 그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시작한 곳이 갈릴래아 호수였고, 부활 이후 제자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곳도 갈릴래아였습니다. 따라서 마태가 예수님에 대해 나자렛 갈릴래아 출신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표현을 오늘 본문 전체의 맥락에서 읽어야만 합니다. 마태는 본문에서 시편 118:25,26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을 환호하는 사람들이 ‘호산나!’를 외쳤다고 기록합니다. 호산나는 “이제 구원하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앞서 예수님이 타신 나귀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참된 왕으로 제시하고 있는 마태가 구체적으로 ‘호산나’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면 이미 예수님을 향한 구원론적 신앙고백이 그 밑에 깔려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런 배경을 놓고 본다면 갈릴래아와 나자렛이라는 지명은 분명히 어떤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예언자 예수
그 의미를 생각하기 전에 그 의미를 좀더 분명하게 규명해줄 또 다른 표현을 잠시 보겠습니다. 마태는 예루살렘이 소동에 빠져들게 된 이유가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신 ‘예언자 예수’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갈릴래아 나자렛은 예수님의 출신 지역을 가리키고 있고, 예언자는 그의 역할을 가리키고, 예수는 그가 한 자연인이라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가 예언자라는 말은 한편으로는 옳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틀립니다. 예언자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해서 선포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예수님도 역시 예언자이십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예수님을 엘리야나 예레미야라고, 또는 세례 요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언자의 특징은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만큼 인간의 역사를 더 정확하게 뚫어본 사람이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분명히 예언자 중의 예언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역사를 꿰뚫어보는 예언자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였습니다. 그는 그가 예언하는 그 예언 자체였습니다. 오늘 본문이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부른 것은 아마 이런 양측의 의미를 모두 포함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이면서, 동시에 그 말씀 자체, 예언 자체였다고 말입니다.
예언자라는 단어에 붙은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예수아’를 헬라식으로 발음한 것인데, 그 의미는 ‘하나님이 도우시다.’입니다. 이 이름은 예수님 당시에 시몬이나 야고보처럼 히브리 남자들에게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예언자 예수’라는 표현은 그렇게 특별한 의미가 담긴 게 아니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하고 긴박한 순간에 예수님의 본질에 대한 서술이 지나치게 평범하다는 사실이 오히려 이상한 게 아닐까요? 마태는 이미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으며(16장), 그 이외에 예수님의 모든 행위와 가르침을 이런 신앙고백 위에서 해명하고 있으면서 예루살렘 입성 장면에서는 그걸 생략한다는 게 그렇게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예루살렘 시민들의 말이기 때문에 그대로 전한 것뿐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즉시 그것을 교정하지 않았다는 걸 보면 단순히 사실을 전달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마태는 아주 지나치게 평범한 표현을 통해서 어떤 비상한 기독교 신앙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낮은 곳으로부터의 구원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렇게 보아야 합니다. 출신이 시원치 않은, 평범한 이름의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고 왕이고 메시아라고 말입니다. 그럴듯한 신분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낮은 신분의 예수님이 곧 이 세상의 참된 왕이라고 말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의 예상을 깨고 낮은 곳에서 시작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럴듯한 명예, 출세, 소유, 지식 등등으로 삶의 근거를 삼겠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선언이 바로 이 표현에 들어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에게만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이제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의 예수에게서 시작된 것입니다. 이처럼 고난당한 예수님을 이 세상의 참된 왕이며 우리의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구원이 낮은 데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가장 낮은 자리에 머문, 이 세상에서의 실패가 확인되는 한 주간입니다. 철저한 패배라 할 수 있는 예수님의 고난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행동인지 한 주간 동안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위대하게 보이고 그럴듯하게 보이는 높은 자리가 아니라 평범하고 낮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구원의 신비를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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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925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873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4357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4070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927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4173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4061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5093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683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3296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913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3152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871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976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5266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4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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