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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증인 공동체, 4월3일

기타 조회 수 10152 추천 수 56 2005.04.04 14:09:06
성경본문 : 사도행전 2:22-32 
2005.4.3.          
행 2:22-32

부활의 증인 공동체

베드로의 설교
복음서에 묘사되어 있는 베드로와 사도행전에 묘사되어 있는 베드로의 모습은 상당히 다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예수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고 물으신 다음, 이어서 제자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나서서 “주는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고 대답했다는 보도를 보면 복음서에도 베드로의 수제자다운 면모가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것 같지만 전반적으로는 매우 평범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예수님의 뜻과 전혀 상반되는 행동을 할 때가 많았던 인물이 사도들의 대표 격인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놀랍도록 변신합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던 그가 예루살렘 사람들을 향해서 대담하게 예수님을 전할 뿐만 아니라 어부로 살아가던 인물이기 때문에 구약 경전에 관한 지식이 별로 없을 듯한데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구약성서를 자유자재로 인용하면서 예수님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평생 어부로 살아온 사람이 갑자기 신학자가 된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을까요? 예수님을 믿으면 갑자기 용감해지고 갑자기 유식해지는 걸까요? 베드로가 이렇게 변화된 이유에 관한 전통적인 해석은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경험했다는 사실과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걸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이라고 전제한다면 이런 해석이 근본적으로 틀리지는 않겠지만 역사의 흐름과 과정을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할 때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도들이 경험한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사람이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했다거나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우승한 것처럼 모든 사람들을 환호와 감격으로 몰아넣은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경험될 수 없었던 아주 특이한 현상이었기 때문에 그것에 근거해서 베드로가 갑자가 용감해지거나 갑자기 신학자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도 역시 이와 비슷합니다. 그들에게 있었던 어떤 특별한 영적인 경험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술에 취했다”는 말을 듣기에 안성맞춤의 사건이었습니다(2:13).
우리가 냉정하게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성격을 들여다본다면 본문에 기록된 것처럼 예루살렘 사람들을 향해서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선포했다기보다는 매우 소극적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들은 한편으로 예수님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 근거해서 자신들과 3년 동안 함께 생활했던 예수님의 공생애를 되돌아보았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경건생활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 시대는 예수님 이후로 이미 6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유대교와는 색다른 기독교적 뿌리를 내릴 수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미처 몰랐던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60년 동안 구약성서에 비추어, 그리고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하신 말씀에 근거해서 훨씬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가는 베드로의 입을 빌려 초기 기독교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신앙고백은 하루 이틀에 결정되는 게 아니라 상당한 해석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오늘 베드로의 설교에는 초기 기독교가 걸어온 이런 신앙고백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 역사는 바로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달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신앙고백을 훨씬 깊이 있게 해석해야 하고, 그런 우리의 신앙을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기독교가 이해하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완성되어 갑니다.

다윗의 노래
베드로는 구약을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해석합니다. 그가 구약을 인용하고 있다는 말은 사도행전을 읽어야 할 독자들이 곧 구약을 알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앞에서는(2:17 이하) 요엘 예언자의 말씀을 인용했으며, 오늘 본문에서는 다윗의 시편을 세 군데 인용합니다. 오늘 본문 이후에도 다윗의 시편이 한 군데 더 인용됩니다. 이 베드로의 설교에 등장하는 다윗의 시편은 다음과 같이 네 곳입니다. 시편 16:8-11, 132:11, 16:10, 110:1.
베드로가 이렇게 다윗의 시편을 인용함으로써 주장하려는 내용은 22절에 기록된 그 사실입니다. “나자렛 예수는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는 말은 곧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거꾸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곧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셨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사실이 초기 기독교가 확신하고 있었던 예수님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신앙은 당장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반론에 부닥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는 믿고 싶지 않아서 믿지 않는 줄 아느냐, 믿을만한 증거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 이런 반박에 대해서 기독교인들은 매우 난처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그런 건 증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가장 궁극적인 현실은 결국 믿음의 문제이지만 아무런 해명도 없이 무조건 믿으라고 하는 건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믿음에 의지해서 기독교를 선포하려다가는 스스로 재림한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온갖 사이비 이단들의 주장과 만나게 됩니다.
제가 현풍에서 목회하던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사리가 분명한 어떤 여자 분이 우리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는데, 원래 그분은 통일교 신자였습니다. 몇 년 동안 누가보기에도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지금까지 몇 년 동안 현풍제일교회에서 만족스럽게 신앙생활을 했지만 요즘 꿈속에 문선명 선생이 나타나셔서 참 괴롭습니다. 아무래도 그쪽으로 가야겠습니다.” 그분에게는 어떤 신앙적, 신학적 논리가 먹히지 않았습니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문선명 선생이 그분의 모든 영혼을 사로잡았습니다. 아마 이단에 휩쓸리는 사람들의 상태가 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성적으로 진지하게 이해하기보다는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강요에 치우친다는 말씀입니다.
정통 교회라고 자칭하는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믿음의 확신을 가지라는 강요에 의존하는 신앙은 그 토대가 너무 부실하기 때문에 약간의 시험이 오면 흔들리거나, 그런 불안을 피하기 위해서 일체의 질문을 폐쇄시켜버리는 일종의 광신 상태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초기 기독교는 이렇게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경험을 충분하게 사색하고 해석하고, 나름으로 증명해보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3년 동안 자신들과 함께 살았던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에게서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해명하기 위한 흔적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이 본문은 다윗의 시편을 인용함으로써 예수님에게 벌어진 사건이 진리라는 사실을 해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위에서 베드로가 다윗의 시편을 인용한 이유는 나사렛 예수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윗의 시편이 무엇을 말하고 있기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의 증거자료가 된다는 말씀일까요?
우리가 이미 말씀을 읽으면서 이해할 수 있듯이 베드로가 인용하고 있는 시편들은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종을 썩지 않게 지켜 주실 것입니다. 당신은 나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주셨으니.”(27,27). “하느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세계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의 몸을 썩지 않게 하셨습니다.”(31).
부활에 관한 인식과 희망은 구약성서에 흔하게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죽음 이후의 삶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구약성서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서 새롭게 해석되기 시작함으로써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하는 증거로 살아났습니다. 아마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진술되기 전에는 아무도 다윗의 이 시편 말씀을 부활에 관한 증언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저 어렴풋이 어떤 미래의 사건에 대한 예고라고 생각되든지, 아니면 자신의 실존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호소로 생각되던 이 진술이 초기 기독교에 의해서 이렇게 새로운 빛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다윗의 시편을 조금 더 자세하게 보실까요? 28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주셨으니.”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을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만약 우리가 죽음으로 모든 게 끝장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건강하고 화려하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결코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인간의 살려는 의지는 ‘부조리’ 하다고 본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통찰은 옳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친다고 하더라도, 살려는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는 결국 죽음에 가까이 가는 것 아닌가요? 만약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이 의미가 있으려면 우리의 이 생명이 죽음으로 끝장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전제되어야만 합니다. 다윗이 생명의 길을 보았다는 것은 곧 이런 죽음 이후의 새로운 생명의 빛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34절 말씀은 이런 사실을 좀더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내다보며, 하느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세계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의 몸을 썩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죽음은 우리 몸이 썩는 현상입니다. 만약 우리가 죽음의 세계에 그대로 머문다면 아무리 썩지 않도록 미라 처리를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썩을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썩은 시체를 보신 적이 있는지요? 제가 중학생일 때 서울의 천호동이라는 곳의 속칭 ‘고분다리’에서 살았습니다. 그곳에는 친구들과 자주 놀던 과수원 언덕이 있었습니다. 그 양지바른 곳에 있는 무덤을 이장하는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무덤을 파자 시체를 담았던 관이 나왔습니다. 상당히 오래된 무덤인지 관 속의 시체는 살이 하나도 없었고, 대충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뼈와 머리카락만 있었습니다. 인부들이 그것을 수습해서 보자기에 싸는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무슨 생각이 있었겠습니까만 사람이 죽으면 저렇게 된다는 막연한 두려움 같은 걸 느꼈겠지요.
오늘 다윗의 말은 결국 썩게 될 우리를 가리키는 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우리처럼 똑같이 죽긴 죽었지만 썩지 않고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셨습니다. 따라서 육신이 썩지 않고 곧바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간 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합니다. 반면에 우리는 썩긴 하겠지만 예수님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곧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역시 부활한다는 의미입니다.

부활의 증인
베드로는 다윗이 말한 그대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셨다고 증언합니다. 그 부활로 인해서 이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믿고 있나요? 그렇게 믿을 수 있나요?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여기에 바로 우리 기독교 신앙의 긴장과 역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 믿어야 할는지, 아니면 믿지 말아야 할는지 말입니다.
여러분, 오늘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진술되고 있는 32절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바로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으며, 우리는 다 그 증인입니다.” 이 문장에는 두 가지 사실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남아있는 한 포기할 수 없는 명백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우리는 그 진리의 증인들이어야 합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의 부활과, 이에 근거한 우리의 부활이 아무도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드러난 사실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이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서 구약성서를 새롭게 해석했듯이 우리도 역시 그런 새로운 해석의 역사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러한 해석의 역사에 최선을 다해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증인으로서의 사명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석함으로써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기독교의 전통을 이어갈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영적인 숙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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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917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4412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4123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988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4231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4111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5149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735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3346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970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3210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924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4028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5317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4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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