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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길, 복음의 길

기타 조회 수 13950 추천 수 47 2006.10.29 15:22:17
성경본문 : 로마서 3:21-26 
2006.10.29. 롬 3:21-26
율법의 길, 복음의 길

1517년 10월31일
올해는 종교개혁 489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517년 10월31일을 종교개혁 기념일로 삼는 근거는 마틴 루터의 어떤 행위와 연관됩니다. 그는 베를린에서 남쪽으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작은 도시 비텐베르크의 성당 사제였으며, 그 대학 교수였습니다. 신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 당시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가르침이 신학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그는 95개 조항의 신학적 명제를 대자보 형식으로 비텐베르크 성당 문 위에 붙였다고 합니다. 그 날이 바로 1517년 10월31일이었습니다. 루터는 가톨릭교회를 부정하고 새로운 교회를 설립할 생각을 한 게 아니라 단순히 신학적인 담론을 제시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매우 소박한 의도에서 시작한 신학운동이 그 당시 여러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매우 빠른 시간에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교권으로 해결해보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결국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1054년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분열 이후 이제 제2의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루터가 대자보로 내건 95개 조항은 주로 면죄부와 교황 무오설에 대한 문제 제기였습니다. 그 뒤로 루터는 많은 신학적인 문제를 제시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명제는 오직 성서,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이 세 가지입니다. 그 당시 로마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규정한 근거를 성서만이 아니라 교회라고 강조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루터는 교회의 권위를 배제하고 성서만을 내세웠습니다. 또한 가톨릭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은혜와 인간의 업적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인간의 업적을 제외하고 오직 은혜라는 사실만 내세웠습니다. 세 번째의 오직 믿음은 로마가톨릭교회가 강조하고 있는 믿음과 행위에 대한 반대 주장입니다. 믿는 사람이 의롭다고 인정받는 데에는 행위는 필요 없고 오직 믿음만 필요하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가톨릭교회는 교회제도와 사제들, 그리고 신자들의 행동에 무게를 둔다면, 개신교회는 그런 것들을 상대화하면서 주로 신자들의 내면적 변화에 무게를 둡니다.

율법의 길
가톨릭교회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은 아닙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 선생의 가르침에 따르면 어떤 경우에도 신자들의 행동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신자들이 믿는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하는데 실제의 삶에 아무런 변화도 없다면 그 믿음이 있는 것인지 조차 알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덕스럽게 행동하고, 신앙적인 모범을 보이고, 밖에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개신교회에서도 이런 행위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좋은 나무라고 한다면 당연히 좋은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행위라는 것이 절대적인 규범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순수한 신앙으로 시작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계속 강조되는 과정에서 결국 신앙 자체는 뒤로 밀려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헌금, 예배참석, 전도를 독려하기 위해서 달란트를 제도를 시작했다고 합시다. 날이 가면서 아이들은 신앙 자체에는 신경이 무뎌지고 무조건 달란트를 많이 받기 위해서 달려듭니다. 선의에서 시작한 제도지만 결국 주객이 전도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현상의 한 전형을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누가 보더라도 모범적이고 경건했습니다. 종교적인 차원에서나 사회적인 차원에서 누구에게나 존경받을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실천하는 일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과 가장 극단적으로 대립했던 사람들이 바로 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던 종교 엘리트들이 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과 적대적이었을까요?
오늘 본문의 배경도 역시 이런 율법입니다. 로마서 자체가 로마에 살고 있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의 비밀을 가르치고 있는 말씀입니다. 21절 말씀에서 바울은 율법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율법서와 예언서가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이르는 새로운 길은 율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바울은 무슨 이유로 하나님의 법인 율법을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합니까?
율법의 길은, 또는 율법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율법은 율법을 지키는 자와 지키지 않는 사람을 구별합니다. 유대인들의 자부심을 자신들이 모세의 율법을 가진 민족이라는 사실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을 조롱하는 데서 자신들의 종교적 우월감을 만끽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관용과 자비와 정의와 평화인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과 자신들을 구별하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유대인이라고 하더라도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별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죄인, 세리, 창녀 같은 사람들은 율법대로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이에 반해 바리새인들은 전문적으로 그런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천착하기보다는 다른 사람과 비교함으로써 어떤 종교적인 만족감을 얻게 하는 율법의 길은 인간 구원에 적합할 수 없었습니다.
둘째, 율법은 결국 아무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오늘 본문의 앞 구절인 롬 3:9-20절이 의미하는 것은 “모두가 죄인이다.”라는 사실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율법대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위선적으로, 또는 상대적으로는 어느 정도 율법을 지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것을 모두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20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아무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 줄 따름입니다.” 이런 문제는 실제의 삶에서 그대로 적용됩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어떤 법칙을 준수하는 것으로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면 그건 불가능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마음에 들도록 모든 법칙을 지키려고 한다면, 거기에는 결코 행복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위에서 저는 율법의 길을 두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구별이며, 둘째는 율법준수의 실패입니다. 이 두 가지는 곧 율법의 길이 모순이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자신이 지킬 수도 없는 율법을 통해서 다른 사람과 구별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 아닌가요?  

복음의 길
바울은 율법과는 아무 관계없는 새로운 길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에서 매우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본문이 복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그 내용 상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진 복음의 길입니다. 율법의 길과 대비해서 복음의 길에도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복음은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습니다. 위에서 율법의 길은 기본적으로 차별로부터 시작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누가 더 많이 기도하는가, 누가 더 많이 자선을 베풀었는가, 누가 십일조를 더 많이 했는가 하는 것으로 서로 차별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길은 전혀 다른 패러다임입니다. 차별이 아니라 보편성입니다. 그 사람이 유대인인가, 이방인인가 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22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십니다.”
오늘 우리의 시각으로는 바울의 이런 진술이 담고 있는 전복성과 파격성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주류는 이방인 선교에 관해서 소극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도들과 동생들이 중심이 되는 예루살렘 공동체는 유대교로부터 독립할 의지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유대교 전통 안에 머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그들은 바리새파, 에세네파, 사두개파처럼 유대교 안에서 나사렛파로 자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그들이 여전히 유대인의 율법을 지켰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방인을 구별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 당시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11-14절에 따르면 바울과 베드로는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들이닥치자 베드로는 그들이 두려워 슬그머니 그 자리를 피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차별화를 신앙의 본질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전히 율법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하늘나라에서 상급의 차이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그런 차이가 무의미합니다.
둘째, 복음의 길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율법의 성취가 아니라 은혜와 믿음입니다.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제 더 이상 율법의 성취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집니다. “거저” 베푸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믿음”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런 선물을 받습니다.(26절) 이런 말씀에 근거해서 루터는 솔라 그라티아, 솔라 피데를 언급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는 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 앞에서 유대인들은 당황했을 겁니다. 이런 논쟁이 초기 그리스도교 안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오늘날도 역시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고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합니다. 너무 오랫동안 자본주의 안에서만 살아와서 그런지 몰라도 무언가를 힘들게 해야만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모든 신앙적 삶과 사회적 삶이 무기력하게 되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무런 절제도 없이 편안한 것만을 추구해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공부도 해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고, 사회봉사도 해야 하고, 시련도 겪어야 하고, 나름으로 교회 공동체 활동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루는 데 절대적인 조건이 아니라 그것에 의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저 베풀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르게 믿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
지금까지의 설교를 듣고 무언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요? 그게 왜 중요한가요?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것을 어떻게 믿음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인가요? 일단 23절을 읽어보세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린 인간이 바로 우리의 실존입니다. 여기서 영광으로 번역된 헬라어 “독사”는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그게 무엇인지 실증적으로는 모르고, 다만 그것을 잃어버린 상태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참된 기쁨과 참된 평화를 현재 우리는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목이 마를 때 참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참된 만족을 지속적으로 누리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 일시적으로 주어진 생명마저도 죽음으로 해체되고 맙니다. 바울에 따르면 우리의 이런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린 결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로 하여금 그 영광에 이르게 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사도들에게서 배웠고, 그 진술을 참되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사도들이 진술하고 있는 바로 이 사건, 즉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우리의 운명을,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죽음 이후의 생명까지를 온전히 맡긴 사람들입니다. 이 진술에 근거해서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신뢰하고, 그것을 희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총으로, 값없이, 오직 믿음만으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이를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의 현재의 삶과 미래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그분을 향한 신뢰이며 믿음입니다. 솔라 그라티아, 솔라 피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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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4014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714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579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822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712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734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319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960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565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813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534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623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903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4111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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