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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믿음

성령강림절 조회 수 12339 추천 수 135 2007.10.21 15:42:52
설교듣기 : mms://wm-001.cafe24.com/dbia/071021.mp3 
성경본문 : 누가복음 17:11-19 
mms://wm-001.cafe24.com/dbia/071021.mp3이 사람의 믿음
2007.10.21. 눅 17:11-19

오늘 분문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는 중에 일어났던 한 사건을 보도합니다. 사마리아는 북쪽의 갈릴리와 남쪽의 유대를 이어주는 중간 지역인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몹시 싫어했습니다. 그 이유는 기원전 722년에 앗시리아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뒤로 사마리아 지역 사람들이 그 지역으로 이주해온 이방사람들과 결혼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사건에 놓여 있습니다. 순수혈통주의를 주장하는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같은 하나님의 후손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갈릴리에서 유대로 내려오거나 유대에서 갈릴리로 올라갈 때 그 중간 지역인 사마리아 땅에 발을 딛기 싫어서 멀리 우회하곤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전통을 무시하고 지금 바로 그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기 위해서 갈릴리와 사마리아 경계의 한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께 돌아온 사람
그 마을에 들어서자 나병환자 열 사람이 멀찍이서 예수님을 향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그 당시의 나병환자들은 외딴 곳에 격리되어서 지냈고, 어쩔 수 없이 마을로 들어와야 할 경우에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피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부정하다, 부정하다!” 하고 외쳐야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 제사장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는 말은 이미 나병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치유행위 중에서 이번 사건은 약간 특이합니다. 누가복음 5:12-16절에 보도된 나병환자 치유사건에서는 예수님이 고쳐달라는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시면서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환자들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으며, 또한 깨끗하게 되었다는 말씀도 없이 무조건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치유능력보다는 환자들의 신앙적 태도를 강조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제사장들에게 갔다고 합니다. 그들은 제사장에게 가는 동안에 자기 몸이 이미 깨끗이 치료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본문이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 열 명이 모두 한 제사장에게 간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출신지역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해당 지역의 제사장에게 갔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제사장에게 가서 병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확인받았겠지요. 여기까지는 이들 열 명의 나병환자들에게 일어난 일과 그들의 행동은 똑같았지만, 이후로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열 명 중에서 아홉 명은 모두 제 각각 자기가 살아야 할 삶의 터전으로 돌아간 반면에 한 사람은 다시 예수님에게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는 큰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의 예를 표했습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들이 상종조차 하기 싫어하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19절)
예수님이 이렇게 믿음을 인정한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의 믿음이 무엇일까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는 고백이 기독교의 가장 일반적인 믿음의 내용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그런 신앙을 고백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그의 믿음을 구원의 조건으로 인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의 행동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다른 아홉 명의 나병환자 친구들과 함께 예수님을 멀찍이서 바라보면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친 것입니다. 이 외침은 그렇게 특별한 게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동냥을 얻는 사람들도 행인들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일반적인 행동만 보고 믿음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른 하나는 나병이 치료된 후에 그가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예수님에게 돌아와서 엎드려 감사의 예를 표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런 행동을 우리는 당연한 것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나병이 치료된 것을 확인했을 바로 그 순간을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상상해보십시오. 그의 모든 삶은 이제 정상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떨어졌던 가족과도 만날 수 있습니다. 손을 놓아야했던 직업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기쁨에 들떠 있는 사람은 나병환자였을 때의 일을 한시바삐 잊고 싶을 뿐입니다. 그가 다시 예수님에게 돌아온다는 것은 매우 귀찮은 일입니다. 나병이 나으면 돌아오겠다는 약속도 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나병이 치료된 것이 반드시 예수 덕분이라는 증거도 그렇게 확실하지 않습니다. 나머지 아홉 명이 예수님에게 돌아와서 감사의 예를 표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렇게 큰 잘못은 아닐지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볼 때 예수님에게 돌아온 이 사람의 행동은 특별한 게 분명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런 행동 자체보다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것이 중요했겠지요. 그렇지 않고서는 그가 예수님에게 돌아왔다는 사실을 해명하기 힘들며, 예수님이 그의 믿음을 칭찬ㅌ한 이유도 설명하기 힘듭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사마리아 사람
이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사실이 이 사람에게 있는 그 특별한 믿음을 설명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본문은 세 군데에서 사마리아를 강조합니다. 1) 예수님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셨습니다. 2)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3)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러 온 사람이 이 이방인 밖에 없는가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마리아, 또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사실이 본문을 관통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에게 다시 돌아와서 발 앞에 엎드린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가 유대인들 앞에서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암시합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사마리아 사람들은 전통적 유대인의 혈통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결정적인 약점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 앞에 설 때마다 자신들의 모습이 아주 초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에 의해서 율법이 없는 이방인 취급을 당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를 보면 이런 상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지역의 수가 성 우물가에서 어떤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사마리아 여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이고 저는 사마리아 여자인데 어떻게 저더러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요 4:9) 사마리아 사람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유대인이 자신에게 물을 달라는 게 너무 이상해서 그렇게 반문한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처한 입장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율법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미 과거의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몸속에 이방인의 피가 흐르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 조상의 책임입니다. 자신들이 사마리아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그 사실 때문에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다는 건 너무나 억울한 일입니다. 흡사 지난날 미국에서 흑인 노예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던 사람들이 겪어야만 했던 고통과 슬픔과 분노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숙명 속에서 평생 살아야만 했습니다. 이것처럼 억울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한국에서는 여자로 산다는 게 불편한 일이 많을 겁니다. 여기 여자분들 중에서 여자로 태어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까요? 한국에 불법으로 체류하는 외국인 노동자들도 어려움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특히 그들의 자녀들 문제는 더 그렇습니다. 그 아이들이 외국인 노동자의 자녀로 태어나고 싶은 것은 아니었겠지요. 북한에 태어나서 가난하게 사는 어린이도 많습니다. 그 아이들이 북한에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건 아닙니다. 이렇게 숙명적으로 삶의 고통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요즘도 많습니다. 그들의 슬픔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들을 무조건 열등한 사람으로 취급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많습니다.
본문이 설명에 따르면 나병이 치료된 열 명 중에서 그 사마리아 사람만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의 예를 드렸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요? 무식하고, 가난하고, 율법을 모르는, 하나님 앞에서 뻔뻔한, 뭔가 열등한 계층의 사람인 사마리아 사람이 지금 하나님에게 찬양을 드리고,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있다는 겁니다. “이웃이 누구인가?”에 관한 비유에서도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을 하나님의 뜻에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서 쓰러져 있었는데,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지나치고 말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이 나서서 그를 극진히 보살펴 주었다고 합니다.(눅 10: 29-37) 복음서는 왜 이렇게 사마리아 사람에게 호의적인가요?
물론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하나님의 칭찬을 들어야 할 사람은 아니겠지요. 그들 중에서도 몰염치한 사람들이 많았을 겁니다. 사회적인 신분이 높다고 해서 교만하기만 하다거나 신분이 낮다고 해서 모두가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만큼 사랑이 많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렇게 긍정적으로 평가하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극복하기 힘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풍성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팔복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가난하고, 우는 사람들, 배고픈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며,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배부를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속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그 낮은 자리입니다. 억울한 고통을 당한 자리입니다. 배고픈 자리이며, 슬픔의 자리입니다. 실제로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제 이야기를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기만 하지 하나님을 만난다는 보장은 없는 거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궁핍하고 초라하게 살기는 싫다고 생각하겠지요. 예수님을 믿더라도 세련되고 멋지게 믿는 게 좋다고 생각하겠지요. 지금 기독교인들의 모든 관심이 온통 거기에 쏠려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교회에서 판사, 검사가 무더기로 나오게 해달라고, 십일조 1억 바치는 사람이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그렇게 설교하더군요.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돈과 부를 하나님으로 혼동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게 아닐까요?

하나님의 은총인 믿음
이런 문제에 조금 혼란을 느끼고 있는 분들에게 저는 두 가지 사실을 깊이 생각해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세상이 주는 만족과 하나님이 주시는 만족의 분명한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만족을 모르는 사람은 세상이 주는 만족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겁니다. 생수의 맛을 모르고 사이다나 콜라 맛에만 길들여진 사람과 비슷할지 모릅니다. 둘째, 조금 더 솔직하게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늘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시는데 반해서 우리가 그걸 거부하고 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 인식하지 못합니다. 교회에 잘 나오고 몇몇 교리를 공부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과 태도가 바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바리새인들의 율법신앙입니다. 아무리 선한 일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업적으로 생각하는 순간에 그 일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는 자기를 온전히 낮추는 그곳입니다. 이게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이렇게 낮은 자리에 들어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낮은 자리에 들어서게 됩니다. 어디에서도 위로를 얻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자기를 한없이 낮추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위로를, 그의 은총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 사람들을 섬길 줄 알며, 감사할 줄도 알고, 사랑할 줄도 압니다. 다른 사람들이 놓치는 부분도 챙기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점점 깊이 들어갑니다. 오늘 사마리아 사람이 다른 아홉 명과는 달리 예수님에게 돌아와서 감사의 예를 드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남의 말을 그만 하고 당신은 어떤지 말해보라 하고 다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정말 그런 경험이 있냐고 말입니다. 그게 목사로서 딜레마입니다. 저는 여전히 완전히 낮은 자리에 들어가지 못했고, 그럴 자신도 별로 없습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아가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게 길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처럼 가장 낮은 자리에 들어서지 못하면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힐 수 없다는 사실만알 뿐입니다. 저는 제가 참된 믿음에 들어갔기 때문에 이런 설교를 하는 게 아니라 그런 길을 함께 가자는 뜻으로 설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 사마리아 사람에게 주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그를 살린, 그를 구원한 그 믿음은 무엇인가요? 그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몰랐을 겁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참된 믿음을 우리에게 본으로 보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고, 의식하지 않은 가운데서도 예수님에게 참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런 점에서 믿음도 역시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 은총이 임하는 한 가지 조건은 우리가 낮은 곳에 자리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여러분의 삶에 온전히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낮은 자리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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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박상열

October 21, 2007
*.139.176.203

'극복하기 힘든 고통을을 당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풍성해 진다'는
말씀이 와 닿습니다.
하지만 극복하기 힘든 고통중 대부분은 그 고통(사건)자체에 압도되어,
하나님을 향한 마음조차 희미해 질때가 많더군요.
낮은 자리로 가는 길엔 늘 두려운 마음이 앞서네요...
좋은 말씀 감사드리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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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1, 2007
*.181.51.23

박상열 님,
옳은 걸 지적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고통이 우리의 삶을 파괴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그것을 뛰어넘게 됩니다.
불치병으로 죽음을 눈 앞에 둔 분들이 처음에는 격하게 거부하다가
결국은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면서
놀라운 평화를 발견하는 일들이 자주 있습니다.
고통은 이 세상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게 만들게 하고,
다른 걸 희망하게 만듭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하늘나라를 희망하는 것이지요.
제가 고통 예찬론을 거론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실패한 인생이라고 간주하는 그곳에도
하나님의 은총이 임재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뿐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고통의 무지막지한 힘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워져서
온전히 하나님만을 향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겠지요.
고통의 문제는 기독교 신학에서도 아주 중요한 주제입니다.
루이스도 이 문제를 깊이 다루고 있더군요.
어쨌든지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은
성공주의, 출세지향성, 복지 등에 지나치게 관심을 많이 기울이다가
결국은 그것 너머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놓치는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좋은 주일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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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은빛그림자

October 21, 2007
*.141.3.64

완전히 낮은 자리에 이르지 못했다는,
그러나 이것이 진리이므로 같이 가자는
정목사님의 고백과 권면에 가슴이 찡해집니다.
목사님들께서는 선포하는 말씀이 곧 생활이 되어야 하는
딜레마를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부분을 딜레마로 인식하고
고민하며 다소 조심스럽게 설교하시는 목사님들이
더욱 많아지셨으면 합니다.
강하고 센 어조로 무언가를 다그치시는 듯한 느낌의 설교는
사실.. 가벼운 제 마음조차 움직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반감을 살 뿐이지요.(못돼서 그런가봐요..-_-)
아무리 생각해봐도
낮아지고자 힘쓰며 애쓰는 사역자들의 모습,
그것보다 더 좋은 설교는 없는 듯합니다.
좋은 말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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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윤만호

October 22, 2007
*.226.203.106

아멘. 고난과 낮아짐이 은혜임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profile

[레벨:0]gaedener

October 22, 2007
*.241.31.226

15절과 관련하여 오늘날 우리는 툭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산다고 하는데 과연 어떤 삶이 영광을 돌리는 것인지 알고나 하는지? 선행을 하고, 전도하고,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고..... 교회에서 강조하고 행하는 이런 것들이 그에 포함되겠지만, 영광의 시발점은 예수님으로 인해 치유를 받고, 구원을 받고 그 후 그 사실을 믿고 감사하는 일이 우선하지 않을까요? 그 후 구원의 감격에 따라 사는 삶에서 모든 성도의 자비와 사랑이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구원의 감격이 없이 인간들의 만남에서 정을 느끼고, 따뜻함을 경험하여 교회라는 단체에 연결 고리를 묶으려는 것이 선교, 전도의 태도의 부족한 부분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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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청동거울

October 22, 2007
*.119.133.86

목사님!
몇 달 만에 목사님의 따끈따끈한 설교를 읽을 기회가 오늘 아침에 왔습니다.^^*
지금까지 인터넷 없는 곳에서 살면서 가끔 이웃에 가서 목사님의 예전에 올려놓으신 설교를 외장하드에 다운 받아 집에 와서 읽어 오곤 했습니다.
욕심이 많아 처음부터 읽어 보고 싶어 처음 올리신 설교부터 그렇게 하다 보니 그 주일 설교를 바로 읽어 본지가 처음 한 달 정도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고통의 문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당하고 있는 고통의 너머에 하나님의 위로와 은총이 있다고 생각하고 알면서도 그 곳에 이르기가 힘들다는 것을 매 순간 인식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솔직 하신 모습이 오히려 위로가 되고 감동입니다..... ^^*
“제가 참된 믿음에 들어갔기 때문이 아니라 그 길을 함께 가자는 뜻으로 설교한다”는 말씀은 쉽게 듣기 힘든 말씀인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감사하라는 말을 강조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라를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태어나면서 자신이 선택 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이 땅에 보내어 졌을 때 나면서부터 고통 속에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삶일 때 과연 무엇을 감사해야 한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고 내가 세상에 보내어 진 것도 하나님의 계획과 예정 속에 있는 것이라면 내가 선택 할 수 없는 삶의 시작과 우연들의 사건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감사해야 하는지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고 그저 감사하라고만 해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욥의 기도 속에도 있듯이 나를 낳은 부모를 원망하는 삶 속에서 어찌 감사하는 삶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참된 감사는 그것을 깨닫는 것부터 시작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내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내게 주어진 고통의 문제를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려 합니다.
낮은 자로서의 삶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지기를 기도해 봅니다.
목사님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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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October 22, 2007
*.254.104.182

이 것이 목사님의 매력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목사님의 삶의 모습을 보면 참된 믿음 속으로 안들어가신 것도 아니거든요... ^^

목사님의 겸손한 태도를 보면서...

로마서 1장 11, 12절 보면 바울 사도께서도 그저 로마 교우들을 만나서 내가 한 수 가르쳐주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고... " 내가 여러분을 애타게 만나보려는 것은 여러분과 함께 영적인 축복을 나눔으로써 여러분에게 힘을 북돋아 주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함께 지내면서 여러분과 내가 피차의 믿음을 통하여 '서로 격려'를 받으려는 것입니다" 라고 하셨던 말씀이 떠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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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2, 2007
*.181.51.23

위의 은빛그림자, 윤만호, gaedener, 청동거울, 옛날처럼 님,
어제 주일은 잘 지내셨구요?
저의 설교가 조금 도움이 되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어제 본문은 설교하기가 좀 힘든 내용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위의 본문으로는
우리도 사마리아 사람처럼 감사하고 찬양하는 사람이 되자는 내용으로
설교를 합니다.
또는 아홉 사람과 비교해서 사마리아 사람의 특별한 점을 드러내곤 하지요.
더 노골적으로는 나병환자 처럼 예수님에게 간구하자고도 하지요.
그게 잘못된 설교는 아니겠지만
너무 상투적이지 않을는지요.
성서기자는 대체 예수님에게 돌아온 이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의 믿음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요?
우리의 영적 눈높이가 깊어지는 정도로
그 성서텍스트가 눈에 들어오겠지요.
좋은 한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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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아침안개

October 23, 2007
*.150.25.246

오늘 저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좋겠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 라고
예전 처럼 통성기도도 하지않습니다. 강청기도도 하지않습니다
에배당에서 부르짖으며, 밤을 새며,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낮고낮은 이자리, 더 이상 내려갈수없을것 같은 이자리가 내자리라면
이 자리에서 살아내자... 죽기밖에 더하겠나...

몇일전 아침
남편이 딸아이들의 감은 머리를 빗겨주었습니다
아프지 않게 살살 빗겨주는 남편의 손을 바라보았습니다
남편은 어떤 마음으로 아이들의 머리를 빗겨주었을까요?

먼 훗날 두 딸은 머리를 빗겨주던 아빠의 손길을 기억하며 마음 한켠이 따뜻해지겠지요
저의 고3하교길을 언제나 함께 하셨던 아버지를 기억하듯이...
지친 몸을 이끌고 버스에서 내리면 아버진 언제나 가방을 받아드셨죠

갑자기 정수라의 아버지의 의자라는 노래가 생각나네요
삼천포로 빠졌습니다^^
저의 지금 모습이 예수님께 고침받기전 사마리아 사람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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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3]달팽이

October 24, 2007
*.152.178.45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 자기를 온전히 낯추는 그 곳, 사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거부한다는 말씀이 진실해 보이네요. 오늘의 교회 공동체가 말과 행위가 온전히 투명하기 보다는 적당히를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아침에 말씀을 묵상하면서 참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거짓이 드러나고 진리를 향한 참된 믿음이 내 안에서 솟아남을 보게됩니다. 믿음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게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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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나목

October 29, 2007
*.119.163.77

안녕하세요? 처음으로 이곳을 알게 돼서 설교를 들으려고 하니 소리가 안 나오네요. 도움 부탁드립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October 29, 2007
*.181.51.23

나목 님,
설교 듣기기 안 된다는 거지요?
왜 그럴까요.
아마 컴퓨터 문제인 거 같은데,
잘 아는 친구들에게 한번 물어보세요.
쉽게 해결될 겁니다.
나는 잘 모르구요.
좋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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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0 부활절 생명의 로고스 (요일 1:1-10) [2] 2024-04-08 959
1049 부활절 예수 부활의 첫 증인들 (막 16:1-8) [4] 2024-03-31 1061
1048 사순절 향유를 손에 든 여자 (막 14:1-11) [4] 2024-03-24 1162
1047 사순절 새 언약의 날 (렘 31:31-34) [2] 2024-03-17 1078
1046 사순절 죽임에서 살림으로! (엡 2:1-10) [6] 2024-03-10 1287
1045 사순절 십자가의 길과 하나님의 능력 (고전 1:18-25) [2] 2024-03-04 1351
1044 사순절 예수 승천과 하나님 우편 (벧전 3:18-22) [9] 2024-02-18 1663
1043 주현절 예수의 변모 사건 (막 9:2-9) [5] 2024-02-11 1385
1042 주현절 여호와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 (사 40:21-31) [6] 2024-02-05 1448
1041 주현절 예수의 배타적 권위 (막 1:21-28) [4] 2024-01-28 1351
1040 주현절 부름-버림-따름 (막 1:14-20) [2] 2024-01-21 1404
1039 주현절 사무엘의 하나님 경험 (삼상 3:1-10) [2] 2024-01-14 1449
1038 주현절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 (행 19:1-7) [5] 2024-01-07 1453
1037 성탄절 만물의 찬양 (시 148:1-14) [2] 2023-12-31 1654
1036 대림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2] 2023-12-24 2643
1035 대림절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 (사 61:1-4, 8-11) [2] 2023-12-17 2866
1034 대림절 하나님의 날: 새 하늘과 새 땅 (벧후 3:8-13) [2] 2023-12-10 2815
1033 대림절 깨어있음이란? (막 13:24-37) [2] 2023-12-04 3110
1032 창조절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다! (엡 1:15-23) [2] 2023-11-26 1583
1031 창조절 은혜를 갈망하는 시인 (시 123:1-4) [2] 2023-11-19 1646
1030 창조절 외면당한 사람들 (마 25:1-13) [5] 2023-11-12 1762
1029 창조절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의 역설 (마 23:1-12) 2023-11-07 1482
1028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마 22:41-46) [7] 2023-10-29 1785
1027 창조절 재림신앙 (살전 1:1-10) [4] 2023-10-22 1756
1026 창조절 금송아지 이야기 (출 32:1-14) 2023-10-15 1640
1025 창조절 모퉁이 머릿돌이신 예수 (마 21:33-46) 2023-10-09 1585
1024 창조절 과정으로서의 구원 (빌 2:1-13) 2023-10-01 1624
1023 창조절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마 20:1-16) [2] 2023-09-24 1751
1022 창조절 홍해 이야기 (출 14:21-31) 2023-09-17 1751
1021 창조절 도반 공동체 (마 18:15-20) [4] 2023-09-10 1685
1020 창조절 '악' 앞에서 (롬 12:14-21) [4] 2023-09-04 1865
1019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2023-08-27 1621
1018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마 15:21-28) [6] 2023-08-20 1989
101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2] 2023-08-08 2183
101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 13:31-33, 44-50) [2] 2023-07-30 2131
1015 성령강림절 여기 계신 하나님 (창 28:10-19a) [4] 2023-07-23 2255
1014 성령강림절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1-11) 2023-07-16 1749
1013 성령강림절 영혼의 안식 (마 11:16-19, 25-30) [4] 2023-07-09 2054
1012 성령강림절 인신 제사의 유혹 (창 22:1~14) 2023-07-03 1736
101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4] 2023-06-25 2227
1010 성령강림절 성령과 하나님 사랑 (롬 5:1~8) 2023-06-18 1887
1009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2023-06-11 2047
1008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2023-06-05 2008
1007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2] 2023-05-28 1917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2215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2045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2345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1813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2247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2659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2872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2379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2321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2332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3356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2740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2680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3178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3061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920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945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990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3045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3013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782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744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3798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5005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4615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5027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3460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3131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3044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718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3136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610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739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3252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4048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752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936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882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4369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4082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945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4188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4074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5104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696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3310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925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3168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888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987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5275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4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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