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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찬양

성탄절 조회 수 15971 추천 수 0 2011.01.02 23: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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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에베소서 1:3-14 

그리스도 찬양

엡 1:3-14/ 성탄절후 둘째 주일/ 1월2일

 

     오늘 설교의 본문인 엡 1:3-14절은 2천 년 전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부르던 찬송의 내용입니다. 그들은 예배와 기도 모임에서 이 내용으로 기도하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여기에 그들의 가장 기본적인 신앙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천 년 전 초기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도 똑같이 불러야 할 찬송입니다. 찬송은 영혼의 깊은 곳에서 나오는 기도이며 신앙고백입니다. 생명의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영혼의 노래입니다. 오늘 많은 경우에 예배와 찬송이 형식으로 떨어지거나 감정에 치우칩니다. 양쪽 모두 찬송의 근본 의미를 놓치는 겁니다. 영혼의 노래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누구를 찬송하는 걸까요? 답은 명확합니다.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우리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의 창조주 되심을 영혼의 깊이에서 인정하는 영적 태도가 바로 찬송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따라가겠습니다.

 

    신령한 복

     본문은 찬송의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셨다는 사실이 그 이유입니다. 영적인 복은 세상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상대화되지 않는 복입니다. 세상의 출세나 재산증식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영적인 복을 세속적인 복과 혼동합니다. 수입이 많아지고 자식이 잘 되는 것을 영적인 복으로 간주합니다. 성서에 후손과 땅에 대한 약속이 나옵니다. 물질적으로 넉넉하게 살게 될 것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핵심은 아닙니다. 복의 근원이 하나님께 놓여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지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복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면서도 그런 세속적인 복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사람들이 무당을 찾아가는 것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속칭 ‘남묘호랑개교’를 따르는 사람들과도 다를 게 없습니다. 이런 설명은 그렇게 고상하고 어려운 게 아닙니다. 아주 실질적인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 가난하지만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는 가족관계에서 사는 게 좋은지, 돈은 많지만 서로 경쟁하고 욕심에 치우친 가족관계에서 사는 게 좋은지 생각해보십시오. 둘 다 원하시나요? 둘 다 가능한 게 아닙니다. 더구나 신령한 것과 세속적인 것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에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원천적으로, 전적으로 신령한 것에만 집중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게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구원에 이르기를 힘쓰라고 말했습니다. 영적 각성을 말합니다. 이런 영적 각성이 없으면 우리는 순식간에 세속적인 복에 치우치게 됩니다.

     신령한 복은 구체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5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런 표현이 약간 이상하게 들릴지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똑같은 차원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존재론적으로, 선재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우리는 예수님께 의존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처럼 자식을 두는 분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믿는 이들의 관계에 대한 은유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분리되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생명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건 분명합니다. 그 무엇으로도 우리 스스로 생명을 완성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죽는 것은 물론이고, 죽기 전이라도 공허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사죄를 얻고, 생명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그 사실을 에베소서 기자는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문장을 정확하게 읽어야 합니다. 우리의 ‘업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생명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곧 신령한 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두 가지 질문을 하게 될 겁니다. 당연히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는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 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도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믿는 사람도 늙고, 실수하고, 공허감을 느끼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생명을 얻었는데도 불구하고 손에 잡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구원의 확신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믿음이 없어서 그런가보다 하고 낙심합니다. 거꾸로 이런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열정적으로 매달리기도 합니다. 부흥회를 쫓아다니거나 특새에 참석합니다. 여러 종류의 신앙프로그램에 매달립니다. 그런 행사에 참석할 때는 뭔가 뜨거운 경험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입니다. 마치 통증 환자가 모르핀을 맞는 것과 비슷합니다. 약효가 떨어지면 다시 아픕니다. 사죄를 받고 생명을 얻었는데도 왜 이런 삶이 계속될까요?

     또 다른 질문은 그리스도의 피로 어떻게 사죄를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도의 피는 십자가 처형을 가리킵니다. 예수님 당시의 십자가 처형은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인 차원의 형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법에 의해서 사형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을 실질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종교적으로 해석된 교리를 믿고 있어서 그 사건의 실질적인 맥락을 놓칠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모세의 율법을 지키면서 가장 종교적인 사람들이었던 유대인들은 십자가의 죽음을 사죄의 길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룩한, 종교적인 죽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에게 십자가의 죽음은 사회 전복을 시도했던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당시 모든 이들이 가장 비참한 죽음으로 생각하던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았다거나, 구원받았다거나 생명을 얻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그런 주장을 하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얼마나 무시했을지는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찬송은 두 가지 질문이 따라온다고 위에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여전히 생명을 완전히 얻지 못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십자가 처형은 저주스러운 죽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궁금하게 생각할 내용입니다.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조건 믿어야 하나요? 계속 의심만 해도 될까요? 성서의 대답을 들어봅시다.

 

    구원의 비밀

     에베소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사죄를 ‘비밀’이라고 말합니다.(9절) 비밀은 아는 사람만 압니다. 그것은 일종의 암호와 같습니다. 군대에서 암호를 통해서 피아를 구분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적군은 암호를 알 수 없습니다. 아군이라 하더라도 암호를 듣지 못했으면 알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 사건은 비밀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확 드러난 일이라면 무의미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 처형은 거리끼고 미련한 것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사죄의 길이라는 사실은 비밀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사실도 겉으로 어떤 표시가 나는 게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만 아는 비밀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 비밀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에베소서 기자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8절) 지혜와 총명이 비밀의 문으로 들어가는 열쇠입니다. 지혜와 총명이 단지 지적인 능력을 가리키는 건 아닙니다. 머리가 좋다고 해서 이 비밀을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깨닫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바울은 이사야서(29:14)를 인용해서 하나님이 세상의 지혜와 총명을 폐하신다고 말했습니다.(고전 1:20) 예수의 십자가를 미련한 것으로 보는 세상의 지혜와 총명이 무능력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최고 지성인들이라 할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못했지만 세리와 죄인들은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이 바로 지혜와 총명입니다.

    마지막 질문은 다음입니다. 왜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정하고, 어떤 사람은 인정하지 않는 건가요? 왜 비밀을 아는 사람이 있고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를 향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을까요? 왜 우리는 부처나 공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운명을 걸게 되었을까요? 대답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질문입니다. 우리가 남보다 더 똑똑하거나 잘난 것은 아닙니다. 삶의 조건이 특별히 좋거나, 특별히 나쁜 것도 아닙니다. 다른 이들보다 더 착한 것도 아닙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예수의 피를 통해서 우리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믿게 된 것일까요?

     에베소서 기자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11절) 에베소서 기자는 이 사실을 5절에서도 이미 언급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그의 예정 이외에는 다른 대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샘터 교회로 모이고 있습니다. 여기에 어떤 이유와 근거가 있을까요? 나의 의지와 노력이 개입된 건가요? 아닙니다. 그분의 계획에 의해서 예정된 것이라는 대답 이외에는 없습니다. 이런 대답으로는 여러분들의 노력이 인정받지 못해서 허무한가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책임도 결국은 그 모든 것을 예정하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닙니다. 섭리와 예정은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가르침입니다.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 앞에서는 우리의 논리가 폐기될 수밖에 없다는 고백이며, 영적 통찰입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신령한 복을 받은 사람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어떻게 잘잘못을 계산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여러분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왜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을 말했는지, 그래서 왜 하나님을 찬송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았을 겁니다. 우리도 그들과 똑같이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찬송을 부르기에는 여러분이 감당해야 할 세상 삶이 너무 혹독하거나, 반대고 너무 지루하거나, 또는 너무 자극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살아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영혼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허락하신 신령한 복에 전적으로 기울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실제로 그렇게 살아간다면, 당연히 그래야하지만, 어떤 형편에서도 그리스도를 찬양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이 생명의 가장 분명한 현실성(reality)입니다. 2011년 한해 우리 모두 주님을 찬양하며 살아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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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아침햇살

January 03, 2011
*.137.80.246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책임도 결국은 그 모든 것을 예정하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닙니다. 섭리와 예정은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가르침입니다.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 앞에서는 우리의 논리가 폐기될 수밖에 없다는 고백이며, 영적 통찰입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신령한 복을 받은 사람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어떻게 잘잘못을 계산할 수 있겠습니까?"

목사님 이 부분에서 궁금해 집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으로  그리스도를  의존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신령한 복을 누리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닌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하심은 무엇인지 설교시간에 제가 잘 듣지 못했나 싶어서 궁금했는데 여기서도 잘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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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04, 2011
*.120.170.250

아침햇살 님,

좋은 질문을 하셨네요.

그 대목에서 좀 비약이 있었거든요.

섭리와 예정은 어떤 영적 경험의 한 면을 말하는 것이지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 한 면은 구원의 신비에요.

그 사실 앞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이라는 뜻이에요.

구원의 밖으로 떨어진 사람에 대한 것은

여기서 관심이 없어요.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남편과 내가 어떻게 결혼했을까, 하고 말이에요.

그 사실이 놀랍지요?

예정된 것이라는 말을 하게 되지요?

지금 내 남편과 결혼하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좋은 한 주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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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웃음

January 03, 2011
*.135.199.136

제가 좋아하는 구절로 신년을 맞아 설교를 들으니 정말 좋았습니다.

 

목사님 설교내용과는 다르지만 제가 좋아하는 이유는

 

4절에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입니다.   우리가 태어나가도 전에 인간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택하셨다는 말씀이 너무 이상하기도 하지만 저는 이해가 됩니다.

 

또 4절에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했는데  5절에 보면 이것을 예정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인간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세상이 탄생하기도 전에 우리가 흠이 있을것을 아시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하신걸까요?

 

저도 이 구절에 큰 감동을 받습니다.

 

더군다나 12절에 보면 "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했는데..  저는 이 구절을 정말 사랑합니다.

 

우리가 천국가서 하나님을 영원히 찬송한다?  저는 이말을 별로 안좋아했습니다.

 

저는 그래서 12절을 사랑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는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의 찬송이 되는것이라는것을요...

 

예술을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도자기를 만든 사람이 아주 귀한 도자기를 만들었으면 그 도자기가 도자기를 만든 사람을 스스로 칭찬하는것이 아니고

 

도자기 자체가 그 사람의 찬송이 되는것입니다.  전시회를 관람하는 사람들이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그것을

 

만든이를 찬송하겠지요... 도자기가 주인의 찬송이 되는 순간입니다.

 

제가 하나님앞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형태의 그런 찬송을 드리는것이 아니고 제가 하나님께서 전부터 바라던 찬송이 되어

 

찬송한다는것이 제게 큰 기쁨이며 행복입니다.

 

그것도 비밀중 하나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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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04, 2011
*.120.170.250

웃음 님,

놀랍군요.

저 성경구절을 좋아한단 말이죠?

정말 재미 없는 구절인데요. ㅎㅎ

12절 해석이 재미 있네요.

하나님이 우리를 찬송한다는 거에요?

그건 너무 진도가 많이 나간 것 같군요.

헬라어로 자세하게 분석해야 정확하겠지만,

내가 보기에 그 구절도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한다는 뜻일 겁니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좀 혼란스럽기는 하지요.

주일에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가족이 한국에 다니러 온다니 잘 됐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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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웃음

January 04, 2011
*.155.235.162

제글이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찬송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의미도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의 찬송이 된다는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찬송 자체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고 영광돌리는것이 아니고,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찬송자체가 되는거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을 찬송하는 찬송가 자체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따로 찬송가를 부르는게 아니고 우리 자체가 하나님의 찬송가가 되어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쁜 어린아이를 보거나 착한일을 한 어린아이를 보고나서

 

저 아이가 누구집 자식인가? 참 대견하구만... 저 아이의 부모가 잘 교육시켰구나... 하는 말을 할수도 있지요?

 

그 아이가 그의 부모를 찬송하지 않아도 그 아이가 그 부모의 찬송이 된 경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찬송을 올리는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한 찬송자체가 되는거지요..

 

헬라어로 자세히 분석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저도 정확히 알았으면 좋겠네요...

 

제 아이들이 저를 닮지 않아서 좋습니다.^^

 

얼른 들어와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네요....

 

목사님도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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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January 04, 2011
*.23.36.226

우리가 하나님의 찬송이 된다.

그러네요.

제대로된 하나님의 찬송이 되어야 할텐데...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2011년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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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流水不爭先

January 04, 2011
*.173.40.132

우리가 하나님의 찬송이 된다.

 

마음이 조금 무거워 지는듯 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이었을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신게 아닌가요 

 

우리네 삶의 치열함보다

하나님의 열심을 노래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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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웃음

January 04, 2011
*.135.199.136

정목사님 글을 위에 두고 약간의 딴 글을 자꾸 쓰는게 죄송스럽네요...

 

우리가 하나님의 찬송이 되는것은

 

우리가 아직 죄인 이었을때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신것이 아니라는걸 말씀 드립니다.

 

물론 언제 죄인이 되었는냐에 대한 생각이 별도로 있을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아담의 타락을 기준으로 이야기하자면....

 

이미 그 전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안에서 예정하시고 택하셔서 우리를 그의 찬송이 되게 하려하신거지요..

 

이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 그의 영광을 드러내야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올때 완성되는 찬송임을 의미한다고  할수 있습니다.

 

내가 부활하여 그분의 찬송이 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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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낙타

January 06, 2011
*.197.136.131

올해 부터 청년회 새가족부를 맡게됐습니다.

 

첫주에 무려 5명이나 등록하셔서 접견?하게 됐습니다.

(역시 새해에 뭔가를 해야한다는 의지를 엿볼수 있었습니다.)

하필? 우리교회 오게 된 이유가 뭐냐. 왜 왔냐. 등등 뻔한 질문을 던지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회에 온 이유도, 목적도, 원인도 참으로 다양했습니다.

완전 감 못잡으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이하 완감못ㅋㅋ) 

 

목사님 설교에서 한명의 구원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게 되어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과정이 정말

'비밀'로 밖에 설명이 안되는 이유를 알게되는 시간이였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중에 완감못 분이 먼저 그 비밀가운데 들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깨닫게 되었구요.

도리켜 보면 저 또한 그랬던거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 대해 자랑하지 못하며 겸손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끊임없이 나한테 원인이 있음을 찾으려는 못된 습관을 오늘도 발견합니다.ㅠㅠ

 

완감못 분한테 문자 날려야겠습니다. 이번주에 교회오면 빵 준다고...^^

 

p/s 물에 빠진 사람을 구원한다 할때 구하는 사람에게 선택권이 있지 않을까요?ㅋ 그래야 구한 사람에게 고맙다고(찬양)

하겠죠. 더 허우적 거리며 불쌍한 표정짓는 갈급한 영혼이 늘어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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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06, 2011
*.120.170.250

낙타 님,

교회에서 큰 일꾼으로 활약할 분 같네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때

빠진 사람보다 구하는 사람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말이 재미있군요.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과 섭리를 그렇게 연결시킬 수 있다는 것은

낙타 님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진지하게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에요.

새해에 맡은 청년부 새가족부 일, 열심히 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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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아델포스

January 07, 2011
*.201.77.210

전 좀 다른 생각을 해 봤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원한다할 때 구하는 사람에게는 선택권이 없다고요.

구하는 사람은 무조건 구해야 하는 겁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죠.

단, 구함을 받는 사람에게 오히려 선택권이 있죠.

자신이 구함을 받을 건지 받지 않을 건지는 구함을 받는 자의 권리(?)죠.

역설적이긴 하죠.

 

하나님의 은총,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사람, 누구에게나 열려있죠...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말씀하시고

이미, 누구에게나 말씀을 선포하시고 계시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대답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은

이미 우리의 곁에 던져져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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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7 성탄절 만물의 찬양 (시 148:1-14) [2] 2023-12-31 1358
1036 대림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2] 2023-12-24 2331
1035 대림절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 (사 61:1-4, 8-11) [2] 2023-12-17 2544
1034 대림절 하나님의 날: 새 하늘과 새 땅 (벧후 3:8-13) [2] 2023-12-10 2509
1033 대림절 깨어있음이란? (막 13:24-37) [2] 2023-12-04 2812
1032 창조절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다! (엡 1:15-23) [2] 2023-11-26 1304
1031 창조절 은혜를 갈망하는 시인 (시 123:1-4) [2] 2023-11-19 1364
1030 창조절 외면당한 사람들 (마 25:1-13) [5] 2023-11-12 1467
1029 창조절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의 역설 (마 23:1-12) 2023-11-07 1211
1028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마 22:41-46) [7] 2023-10-29 1502
1027 창조절 재림신앙 (살전 1:1-10) [4] 2023-10-22 1465
1026 창조절 금송아지 이야기 (출 32:1-14) 2023-10-15 1347
1025 창조절 모퉁이 머릿돌이신 예수 (마 21:33-46) 2023-10-09 1297
1024 창조절 과정으로서의 구원 (빌 2:1-13) 2023-10-01 1335
1023 창조절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마 20:1-16) [2] 2023-09-24 1463
1022 창조절 홍해 이야기 (출 14:21-31) 2023-09-17 1458
1021 창조절 도반 공동체 (마 18:15-20) [4] 2023-09-10 1402
1020 창조절 '악' 앞에서 (롬 12:14-21) [4] 2023-09-04 1589
1019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2023-08-27 1333
1018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마 15:21-28) [6] 2023-08-20 1694
101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2] 2023-08-08 1899
101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 13:31-33, 44-50) [2] 2023-07-30 1832
1015 성령강림절 여기 계신 하나님 (창 28:10-19a) [4] 2023-07-23 1960
1014 성령강림절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1-11) 2023-07-16 1484
1013 성령강림절 영혼의 안식 (마 11:16-19, 25-30) [4] 2023-07-09 1768
1012 성령강림절 인신 제사의 유혹 (창 22:1~14) 2023-07-03 1461
101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4] 2023-06-25 1955
1010 성령강림절 성령과 하나님 사랑 (롬 5:1~8) 2023-06-18 1617
1009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2023-06-11 1764
1008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2023-06-05 1718
1007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2] 2023-05-28 1631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1932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1756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2046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1529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1964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2385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2587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2084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2030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2033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3083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2454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2401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2895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2779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632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641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689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756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719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493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443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3484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675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4299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702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3172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790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741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423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839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312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447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963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758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451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660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584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4079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786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655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894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774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811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397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3028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637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886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601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708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979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4190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768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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