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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자유의 토대

주현절 조회 수 15698 추천 수 0 2011.02.27 22: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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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4:1-5 

영적 자유의 토대

고린도전서 4:1-5, 주현절후 8째 주일, 2011년 2월27일

 

     지금 우리에게 바울은 위대한 사도요 신학자요 영성가요 성경 집필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살던 당시에는 별로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방 그리스도교의 태두입니다. 바울은 당시 유대 그리스도교 지도자들과 별로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보도에 따르면 바울은 거의 이단 논쟁이라고 이름 붙여도 괜찮을 정도로 그들과 싸우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 그리스도교에서 파송한 사람들이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 와서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만이 아니라 토라와 할례도 병행해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그런 가르침을 가리켜 ‘저주받을’ 다른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바나바를 공개적으로 책망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바울은 유대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에서 더 이상 복음을 전할 수 없었습니다. 마게도냐, 아가야 등, 지금의 그리스 지역으로 선교의 자리를 옮겼습니다.(행 16:6-10 참조)

     바울이 그리스 지역에서 세운 교회 중의 하나가 오늘 설교 본문의 배경인 고린도교회입니다. 바울이 세웠다고 해서 교회가 일사분란하게 바울이 원하는 식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지도자들도 나름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선교가 바울만으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컨대 로마교회는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기 전에 세워졌습니다. 고린도교회 구성원들 사이에도 세력 다툼이 적지 않았습니다. 고전 1:10-17을 보면 당시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우들이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복음공동체에 이런 분파 현상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더구나 이 분파에 그리스도 파가 따로 있다는 사실은 해괴하기까지 합니다. 지금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어떤 특별한 사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예수의 제자들과 바울 등이 살아있던 시절에도 이렇게 파가 나뉘었다는 걸 감안하면 오늘 한국의 그리스도교 분열도 이해가 가긴 합니다. 바울은 교회의 분열이 정상적인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게바와 아볼로는 바울과 신학적인 차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당시에 교회를 이끌어가던 훌륭한 일꾼들이었습니다. 자신을 포함해서 그리스도의 일꾼들이 분파의 장본인이 되었다는 현실을 그냥 두고 넘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해명이 필요했습니다. 그 해명이 고전 1-4장의 내용입니다.

     고전 4:1-5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꾼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만약 교회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분리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주인 행세를 하기 때문에 분리되겠지요. 바울은 일단 자신들이 일꾼이라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그 일꾼에게는 두 가지 속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적인 속성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이고, 다른 하나는 외적인 속성으로 ‘충성’된 자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1, 2절) 하나님의 비밀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입니다. 이것이 비밀인 이유는 밖으로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일단 그 비밀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준비가 된 사람이라고 한다면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비밀,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 충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충성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사실 특별한 게 아니라 당연한 것입니다. 문제는 당연한 사실을 그대로 따르기가 어렵다는 데에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그래서 분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정작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영적인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이며, 오직 그리스도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사실이 명백하다면 당연히 다른 사람의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겁니다. 이 사실을 그는 3a절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했습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고린도교회에서 파당이 일어나면서 얼마나 많은 소문과 험담들이 오갔을지 상상이 갑니다. 바울을 흠집 내는 이야기도 많았겠지요. 바울은 보기에 따라서 교회의 지도자가 되기에는 약점이 적지 않은 사람입니다. 일단 예수님을 생전에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열두 사도에 들지 못합니다. 당시 교회 지도자가 되기 위한 자격은 주님의 부활을 경험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역사적으로 볼 때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 안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다만 먼 훗날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의 이 경험은 사도들의 경험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런 약점 때문에 바울은 사도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 당시에 많았습니다. 바울은 다른 편지에서도 자신의 사도권을 방어하기도 했습니다. 제삼자가 보기에는 구차스럽지만 바울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몸이 약하기도 하고, 성격이 과격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험담을 들었지만 바울은 본문에서 사람들의 그런 판단을 작게 여긴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일꾼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집불통이기 때문에 이런 발언을 하는 게 아닙니다. 다른 사도들은 다 틀렸고 자기만 옳다는 말도 아닙니다. 바울은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고전 4:3b) 참으로 놀라운 진술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판단에서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자기의 판단에서도 자유롭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 판단에 묶입니다. 설령 자기 판단의 논리가 부족하더라도 그것을 무조건 방어하고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주장이 허물어지면 자기의 인격 전체가 허물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싸울 때 처음에는 서로 논리적으로 대하다가 나중에는 감정적으로 대합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집단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폭력까지 행사합니다. 종교전쟁까지 일어납니다. 사람이 이성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할 경우가 많습니다.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는 바울의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이 자신의 생각과 신앙에 확신이 없어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닙니다. 그는 4a절에서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는 무엇이 옳은지 아닌지, 무엇이 참 복음이고 무엇이 사이비 복음인지를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평소에 신학논쟁에서도 늘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전했습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의 자신감에 찬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는 말은 근본적으로 사람의 판단이 진리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판단과 인식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가 아닙니다. 사람은 질그릇과 같습니다. 질그릇이 토기장이의 뜻을 정확하게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예외는 없습니다. 자연과학자들도 모든 것을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의사들이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 하지 못합니다. 신앙의 문제에서도 모두가 동의하는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서로 입장이 다를 때가 있었고, 사도들도 똑같았습니다. 지난 2천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이런 일은 반복되었습니다. 판단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4b절) 이런 영성이 쉽지 않습니다.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서로 자신들이 옳다는 사실을 전제한 채 상대방의 신앙행태를 비난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먹어도 되는지 아닌지 서로 입장이 달랐습니다. 여러 은사 문제로 시끄러웠습니다. 여자가 교회에서 머리에 수건을 써야하는지 등등의 문제들입니다. 바울은 이런 주제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전했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고기를 먹어도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 절제하는 게 좋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생각을 절대화하지는 않았습니다. 주님만이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 본문에서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고 이르면서 주님이 어둠에 감춰진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실 것이라고 했습니다.(5절) 종말에 모든 것의 실체가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고전 13:12절에서 그는 주님이 오시기 전인 지금 우리의 영적인 상태는 거울로 보는 것과 같고, 주님이 오셔야만 얼굴을 대면해서 보듯이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주님이 오시는 때는 어느 때는 예수의 재림을 가리킵니다. 2천 년 전 유대 청년의 모습 그대로 오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설명한 대로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수는 없습니다. 그 예수는 이미 부활체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의 재림은 부활 생명이 그 실체를 온전히 드러내는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때를 가리켜 종말이라고 말합니다. 종말은 마지막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기자는 새롭게 시작되는 세계를 가리켜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이라고 묘사했습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그때는 씨앗의 세계로부터 꽃의 세계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생명은 씨앗 안에 꽃이 숨어 있어서 그것이 무엇인지 실증적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무죄한 자의 죽음을, 악의 원인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먹이사슬로 지탱되는 이 세상의 생명 메커니즘을 지금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때가 되어야 지금 우리가 잠정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의 속살이 완전히 드러날 것입니다. 마치 개인의 운명도 죽음을 통과해야만 그 실체가 드러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오시는 종말 이전에는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일까요? 바울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긴 했습니다만, 그 말을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새겨들어야 합니다. 바울도 끊임없이 판단하고, 때로는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중에 논쟁을 하셨습니다. 안식일 논쟁은 대표적인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바리새인, 사두개인, 제사장 계급에 속한 사람들과의 논쟁으로 인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스도교 역사는 이런 논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문제는 독단적인 태도입니다. 진리의 차원에서 논쟁을 하는 것과 자기와 다른 입장의 사람들을 독단적으로 억압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전자는 종말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지만, 후자는 과거의 차원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에서 시작된다면, 후자는 다른 것에 종속적인 영혼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위의 설명이 어떤 분들에게는 의미가 없이 들렸을지 모르겠습니다. 신학자도 아니고, 목사도 아닌 사람들이니 이런 문제를 너무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말입니다. 정말 그런가요? 지금 바울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를 다시 보십시오. 서로 자기가 잘난 것처럼 파당을 짓는 상황입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싸웁니다.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에 따라서 서로 편이 갈렸습니다. 마치 한국교회의 분열과 비슷합니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루터교 등으로 갈렸습니다. 서로가 판단하고 판단을 받습니다. 세상살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편을 만드는 일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우리 영혼이 시대정신에 철저하게 종속되어 소진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영적인 시야를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게 하십시오. 그분만이 무엇이 알곡이고 무엇이 쭉정이인지 판단하십니다. 그분만이 무엇인 참 생명이고 무엇이 거짓 생명인지 구분하십니다. 그분의 판단에 여러분의 삶을 맡길 때 여러분의 영혼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이 자유는 무엇이나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방종의 자유가 아니라 바울의 표현처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겠다는 겸손한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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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February 28, 2011
*.239.93.193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판단의 절대기준이 나를 부리거나 ,나로부터 산출된다면 얼마나 내 생각의
자유가 틀에 갇히는지 많은 경험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타인으로부터 구속받은 절대기준보다 더 괴로운것은 항상 내가 만든 나의 절대기준을
내가 지키고 남에게 강요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판단 , 심판하실 분은 오직 주님이라는 목사님의 말씀에
새롭게 전 변하였습니다. 모두에게 모든 판단을 하게끔 주님만이 허락을 하실수 있기에
믿음속에서 자유롭게 나는 나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었으며 타인의 판단에 노기와 넘치는 호응에서 벗어났습니다. 자칫하면 나의 판단이란 왠지모를 짐을 의무감으로부터 던져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이것도 나의 판단의 다른 모습인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런나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나의 판단을 진정으로 주님께 맡긴다는 것이 어떤의미인지 먼저 알게 되었으니까요.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나는 나의 판단이 짧든지, 모자라든지, 심지어 오류가 있든지 나와 남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주님의 충실한 종으로 큰 실천으로 나를 기도속에서 옮기는 것이 중요한것 같습니다. 나의 판단을 맡아주실 주님이 계신다는 사실에 다시한번 내 영혼이 자유롭다는 것을
오늘 목사님 말씀속에서 다시 알게되어 설레입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울산에서 진인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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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28, 2011
*.120.170.250

진인택 님,

대글을 잘 읽었습니다.

본인의 깨우침을 잔잔하게 잘 설명하셨네요.

주님의 판단에 우리의 운명과 미래와 지금의 삶 전체를 맡긴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우리가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판단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도

역시 성서와 기독교 가르침의 세계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겠구요.

그 길이 멉니다.

멀어도 즐거우면 멀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길에 친구들이랍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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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바다지기

February 28, 2011
*.177.206.111

목사님의 말씀을 읽은 제게 주님은 더욱 겸손할 것을 말씀하시네요.

젊은 날 바른 바탕도 근거도 없이, 단지 젊다는 이유만으로

기성 세대들을 판단하고 비난했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주먹을 치켜 올리며 정의로운 것처럼 행동했었지요.

물론 노 씨나 전 씨에 대한 판단은 사회적인 판단을 근거한 것이었지만...

 

이제 세월이 많이 지났네요.

그리고 이제 저도 누군가의 판단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제 모습과 몸가짐과 말을 추스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됩니다.

 

목사님의 책과 글을 읽는 동안

솔직하게 참 많은 혼돈이 일어납니다.

그 동안 우쭐한 생각으로 해 오던 설교의 문제점들을

목사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서

이젠 전처럼 설교하는 것이 많이 망설여집니다.

물론 목사님의 주장이 성서나 하나님 말씀처럼 절대적인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배우고 있다는 뜻이지요.

 

목사님의 권고대로 에세이식 설교를 시도해 보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반응은 상관없이 말입니다.

사족도 줄이려고 합니다만 오랜 습관이라 쉽지 않네요.

다만 어덯게 하면 청중들을 무시하지 않고

그들과 마음을 같이 하는 설교를 할까 나름 고민하며 설교합니다.

 

가르침에 늘 감사드힙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당시 바울의 사역에

바울이 가졌던 아픔과 고통이 조금은 느껴지네요.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느껴지는 동질감이라까요..

 

다비아에 초대해 주시고,

다비아에 잘 어울리지 않는 제게 방까지 허락해 주심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비아에 얼룩을 만드는 것은 아닌지 내심 조심스럽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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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28, 2011
*.120.170.250

박 목사님,

에세이 식 설교를 시도하신다니, 좋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완전히 소화된 내용이

자신의 고유한 신앙적 색깔로 나오는 설교니까요.

그래서 창조적일 수 있습니다.

아마 목사님은 그게 가능할 겁니다.

사람을 보는 눈,

사물과 자연을 보는 눈,

그리고 역사를 보는 눈이,

더 근본적으로 성서와 신학을 보는 눈이 있으시잖아요.

비록 청중들이 다 이해하지 못하고

목사님의 고유한 영적 호흡을 천천히 알고 전달받을 겁니다.

위 설교에서 바울의 영적 아픔을 느끼셨다구요?

제가 미처 표현하지 못한 대목까지 전달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설교는 그렇습니다.

텍스트의 중심에 닿아 있기만 하면

설교자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과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

청중들에게 전달됩니다.

이런 관점을 붙드는 것이 바로 성령론적 설교라 할 수 있지요.

바울의 영적 고민과 연민을 우리 함께 느끼면서

복음 선포의 길을 가보십시다.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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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March 03, 2011
*.255.183.133

박목사님, 목사님의 설교댓글을 읽는 중에 저도 모르게 울컥 감동이 밀려와서 이렇게 댓글로 인사를 드립니다. 

그동안 목사님의 글을 읽어 오면서, 목사님께서 참 겸손하신 분이심을 이미 알았지만,

역시, 그 겸손하심은 바로 하나님 말씀 앞에서의 겸손이셨군요.!

 

정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그리고 박목사님의 겸손한 마음을 생각하다가 저는 사도바울의 기도가 생각났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옙1: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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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3]달팽이

March 01, 2011
*.78.246.71

2월 마지막 주일에 대학 때 부터 아내와 같이 다녀든 교회를 떠났습니다.

15년 정도 다녀네요.

마지막 전체 교회앞에 떠나는 인사를 하고 나왔습니다.

 

여러분과 저 사이에 벽이 존재하기 보다는 투병한 유리가 있는데

우리는 이 투명한 유리에 먼지가 쌓이지 않게 매일 입김을 불면서 털어 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너무 오래 쌓여 자신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유리넘어의 밝은 세계도 보지 못하고 자페증에 걸릴수 밖에 없다고...

저희 가정은 이 역사를 순례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해

더 이상 안주하지 않고 순례의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말씀으로 깨우쳐 주신 목사님과,

깊은 사랑과 애정으로 저희 가정을 사랑해 주신 교우들께 감사를 드린다고...

 

오늘 말씀을 통해 저의 판단이 영적 순례의 길에 자유함을 줍니다

교회동공체를 떠나는 저희 가정과,  남아 있는 교회공동체나

서로를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때론 서로의 떠남이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들여다 보며

더 깨어 있는 믿음으로 이끌어 주시길 기도할 뿐이네요..

 

더욱더 주님안에 겸손한 삶과 자유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을 또다른 새로운 만남과

교회 공동체를 만나 역사속에 순례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나라를 소망하여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아가는 길에 게으러지 않게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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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01, 2011
*.120.170.250

달팽이 님이 어련이 알아서 잘 했겠습니까.

15년 동안 몸과 마음을 담았던 공동체를 떠난다는 건

웬만한 결기가 아니고서는 안 되는 일인데요.

자유로운 영혼이라면

사실 떠나고 말고도 따로 없기는 합니다.

다른 이의 판단뿐만 아니라

나의 판단까지 유보할 수 있는 영혼의 자유이겠지요.

멋진 순례의 길이 되기를 바라고,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리고 일시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구체적인 개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달팽이 님 가족에게

매 순간 영적인 진보가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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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웃겨

March 01, 2011
*.152.114.153

 바울의 통찰이 새삼 놀랍습니다.

이천년 전 사람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그의 인간이해가 놀랍도록 깊어서요.

우리가 얼마나 절대적이지 못한 사람의 판단에 

 휘둘리고 좌절하고 우쭐하는 존재인지...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겠다" 는 짧은 진술에서

사실을 사실대로 본 사람의  깊은 고백이라는 울림이 있습니다.

억지로 강화시킨 심리적 자기확신도 아니고 자기 비하도 아닌 

성령에 접촉된  이 만이 가질 수 있는 자유로움과 자기 확신!

이런 것이 시대의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살아갈 진정한 내적 힘일텐데요.

살아갈 수록 이런 힘이 너무나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설교듣기가 제 컴퓨터로 잘 안되서

못 듣다가 오늘 딸애 컴으로 들었더니 되네요.

역시 설교는 육성이 좋네요. ^^

그런데 설교가 좀 짧아지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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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01, 2011
*.120.170.250

웃겨 님,

바울은 이천년 전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지요? ㅎㅎ

맞는 말이긴 한데요.

그는 사실 우리보다 훨씬 미래의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답니다.

영적으로 거인이니까요.

우리는 어린애구요.

설교를 조금 짧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원고 양도 약간 줄였어요.

그래도 위 설교는 30분 약간 넘어요.

같은 말을 반복만 하지 않았으면

25분에 끝나는 건데 아쉽네요.

25분이 내 목푭니다.

좋은 3월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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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바다지기

March 02, 2011
*.177.206.111

설교를 짧게 하시겠다는 말씀에

못된 짓 하다가 들컨 녀석처럼

화들짝 놀랜답니다.

 

이번주 제 설교 동영상을 보니까  38분이더라구요.

저도 3월 안으로 30분에 끝내는 훈련부터 하려고

방송실에 25분이 지났음을 알리는 경고판을

28분이 지났음을 알리는 경고판을

그리고 30분이 되었음을 알리는 경고판을 준비시켰습니다.

 

그러려면 수요 예배 설교부터 줄이는 노력을 하려구요.

오늘부터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갑자기 겨울로 되돌아 가버린 듯한

변덕스러운 날씨네요.

늘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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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02, 2011
*.120.170.250

좋습니다.

설교를 맥시멈 30분 안에 끝내기로

우리 서로 노력해볼까요? ㅎㅎ

압축적으로 설교 내용을 전하면서도

청중들이 알아듣기 어렵지 않게 해야 하는데,

그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닌 거 같습니다.

어떤 설교 형식이든지 완벽한 게 없다는 걸 전제하고

청중들의 입장에서 약간 짧은 듯하게 느낄 정도로 하면 어떨지요.

설교에서도 과유불급은 옳은 것 같습니다.

불순한 일기에 건강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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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바다지기

March 04, 2011
*.177.206.111

목사님의 댓글을 읽다 말고

교회 홈페이지에 올린

지난 수요일 설교를 들어가 보았습니다.

31분 43초 걸렸더군요.

30분 이내 설교 도전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많이 줄였다는 의미에서는 성공적이었지요.

 

특히 수요일 설교는 초신자들보다는 성숙한 성도(직분자들)들이

회중석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설교자들은 편하게 설교를 하곤 하지요.

저도 나름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기도하면서

철저하게 원고를 준비해서,

몇번을 읽으면서 구어체로 바꾸려는 노력까지 해 놓고도

강단에 올라서기만 하면 부연설명이 길어지곤 하지요.

그러다보면 수요 예배 설교는 40분~ 50분을 넘어갈 때도 있습니다.

참고 들어 주는 교인들이 저보다 더 훌륭한 신앙인들이지요.

지금 생각해보니 참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네요.

 

더 노력하면서 충분한 설명과 세련된 요약

그리고 그 안에 가득한 성령의 인도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가 가득한 설교를 실천해 나가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profile

[레벨:3]Simon

March 04, 2011
*.215.80.26

어렵네요.

..........

참으로 어렵더군요.

에세이식 설교와 인문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통찰력있는 설교.

설교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갖고있는 이민교회의 목사입니다.

어찌어찌 해서 꿈도 꾸지않았던 개척을 하게 되었고

온갖 홍역을 치르며 1년반을  달려왔습니다.

 

평신도 시절, 그리고 부교역자 시절

질리게 들어왔던 막무가내식 선포위주의 설교에 회의를 느껴서

올바른 설교자로 선다는 부담감을 평생 잃지 않으리라 다짐했었습니다.

물론 그 시기에 읽었던 정목사님의 설교비평 서적 3권은

커다란 충격과 함께 가능성으로 다가왔었습니다.

 

그러나 흔히들 말하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민교회 목회를 하다보니

이제 서서히 회의가 생기기도 합니다.

호주 이민자들의 강력한 보수성과 아울러서

새로운 스타일의 설교와 교회 분위기에 도무지 적응을 못하고 하려고도 하지않는......

 

마음이 너무나 무겁고 답답해서 대구에 계시는 어느 목사님께(제 기준으로는 설교다운 설교를 하시는)

이메일로 도움을 청했는데 목사님의 조언은 '양보하지 말라'는 것 이었습니다.

자신이 전하는 복음에 확신이 있다면 성도들의 반응에 너무 민감해 하지 말라는 조언이셨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그게 쉽지 않습니다.

 적응 못하고 떠나가는 성도들의 뒷모습을 보는 안타까운 아내의 눈빛과

그 다음으로 제게 보내지는 원망의 눈빛.....

풀 죽은 어깨의 두 아들....

 

지금 브리즈번은 비가 내립니다.

두 달전 홍수와는 달리 촉촉한 비가 내려서 마음이 더 가라앉는군요.

회원가입 한 지는 6년 정도 된것 같은데 이제야 글을 올립니다.

 

한국의 꽃샘추위가 그리워집니다.

건강하시길...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rch 04, 2011
*.120.170.250

Simon 님,

정말 오래된 다비안이시네요.

2005년이면 아주 대구성서아카데미가 걸음마를 배울 때지요.

무슨 연유로 이 사이트를 그렇게 일찍 들어오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시몬 님이 힘들어 있고 대목이

나름으로 의식이 있는 한국의 모든 목회자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랍니다.

아무리 그리스도교 근본에 바르게 서서 목회하고 설교해도

신자들이 외면하면 모든 게 허사가 되고 말 거든요.

제가 직접 경험한 일입니다.

어떤 모임에서 특강을 한 후에 질문을 받았습니다.

내가 맡고 있는 교회가 작다는 사실을 빗대면서

아무리 좋은 책을 쓰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으로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교회를 크게 키우지 못했으면 무능력한 거 아니냐,

바른 설교와 교회의 크기가 상관 없다는 당신의 말은

작은 교회 목회자들의 자기 변명 아니냐 하는,

듣기에 따라서 트집잡기 식의 까칠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요즘 평신도들은 목회자를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이려고 합니다.

(이런 말 하다가 여기 평신도 다비안들에게 내가 몰매 맞을지 몰라서, 음.....)

뜨레스 디아스, G 트웰브 같은 프로그램을 하자고 합니다.

한국교회에 이런 교회성장 프로그램이 많잖아요.

어떻게 해서라도 다른 교회처럼 성장해야 한다는 요구를 노골적으로 하는 거지요.

요즘은 목회자들보다 평신도들이 교회성장에 더 집착합니다.

그걸 목회자들이 감당하기가 어려운 거지요.

어떻게 합니까?

목회자의 길이 원래 그런 것인데요.

가족들에게 미안한 일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저의 설교론, 목회론, 교회론은

어떻게 보면 허망해보입니다.

한국교회에 맞지 않는 거지요.

목회자 개인이 뚫고나가기에는

현실교회의 상황이 너무 척박합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 어려움을 크게 겪지 않았습니다.

내가 맡고 있는 교회에서는 그런 충돌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다른 목사님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시몬 목사님이 가까운데 계시면

따끈한 차라도 마시면서 이야기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 됐습니다.

힘을 내고 꾸준히 앞을 향해서 나가봅시다.

우리에게는 사람이 줄 수 없는 특별한 기쁨이 있으니까요.

주님의 은총이...  

 

profile

[레벨:3]Simon

March 05, 2011
*.171.200.128

비가 그친 교회당 앞의 잔디는 푸르기만 합니다.

창 너머로 비 그친 뒤의 유난히 깨끗한 세상을 보면서

지금도 여전히 내일 있을 예배의 설교준비를 위해서 낑낑거리고 있습니다.

 

하도 답답해서 올린 글이었는데 친절하게 대해 주시니 몸 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다비아에 회원으로 가입하게 되었던 건

신대원 시절 '신학과 철학'이라는 과목을 수강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때 교수님이 교재로 사용한 책이 정목사님이 번역하신 판넨베르그의 책이었지요.

아마 '한들출판사'의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솔직히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번역자가 누구인가 확인해보다가 목사님의 책 몇권을 보게 되었구요.

저의 신학에 대한 접근 방법 자체가 문제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어서

또 기독교 사상을 통해서 접한 설교비평에서 해머로 머리를 맞은 듯한

강력한 충격을 느꼈습니다.

 

첫째는 글쓰기였습니다.

저는 사실 목사가 되기전에 어느 고등학교의 국어교사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제일 불만이었고, 예배시간 마다 은혜를 도무지 받을 수 없었던 것이

대부분의 목사들이 사용하는 문장과 단어들의 편협함,

또 문법과 전혀 상관 없이 '은혜만 되면 다' 라는 식의

말도 안되는 문장의 나열에 환멸을 느낄 정도였거든요. 

글을 읽으면서 '이 분의 설교언어들은.....?'하는 기대감이 생기게 되었고요.

 

또 하나는 '인문학적 성서읽기'라는 반가운 모토 때문이었습니다.

고등부 교육전도사 시절이나, 전임 부교역자로 있을 때

제가 줄기차게 주장했던 것이 '생각 좀 하면서 성서를 읽으라'는 것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더군요.

'은혜를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지...'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맞는 말이지요.

진정한 의미의 '질문과  토론'이(거기에는 의문과 심지어는 의심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생략되거나 거부되어지는 설교나 성경공부는 무익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문학적 성서읽기'가 반가웠던 것입니다.

 

아직 새로나온 책은 구하질 못했습니다.

제가 살고있는 브리즈번은 시드니와 달라서 한국 서점이 없거든요.

 

혹시 휴가 계힉이 있으시다면 한 번 들러주십시오.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rch 05, 2011
*.120.170.250

<비가 그친 교회당 앞의 잔디는 푸르기만 합니다.>

이 한 마디로 시몬 목사님의 영성을 다 헤아릴 수 있습니다.

조금만 더 힘을 내고 이 길을 가보지요.

다음과 같은 운동권 노래 아세요? ㅎㅎ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profile

[레벨:6]한밀

March 05, 2011
*.231.141.176

안녕하세요,

저는 평신도의 한사람 입니다.

두분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훌륭하신 목사님들이 계셔도 평신도가 제대로 받쳐주지 못하면

힘들게 목회를 하시는구나 하는 나름대로 반성을 해봅니다.

 

저는 이곳 미국에서 나름대로 개척교회에 애착이 있어서

몇군데 개척교회를 섬겼던 경험이 있습니다.

지금도 물론 개척교회를 섬기고 있구요.

 

제생각에는 영성있는 설교, 인문학적인 설교가

교회부흥에 있어 성도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어

성도들을 떠나게 하거나 잘 적응을 못하게 하는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오히려 그러한 설교들을 목말라 하고있는 성도들도

많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목사님들이 아무리 좋은 설교라 할지라도

전달 방법에 있어 꾸준한 훈련과 노력이 필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정 목사님은 설교자가 설교를 잘 전달하기 위해서 하는 노력(테크닉)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계신것 같으신데...

 

정목사님이 자주 사용하시는 이야기중에

유명한 음악가의 악보(성서 텍스트)를 연주자(설교자)가 잘 연주해내기 위해서는

그 악보사이 사이에 있는 것들도 표현해내야 하는데,

특별히 설교자들은 성서를 해석하고, 그 말씀을 선포하는 과정에서

설교자 개개인의 노력과 설교자로서 필요한 외적인 요소들도 겸비한다면

성도들에게 더 은혜가 되는 말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아무리 좋은 설교의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선포될 때,

설교자의 부족한 역량으로 인해 그 설교가 잘 전달이 안된다면,

만약 일반적인 연설이나 강연과는 달리,

목사님들의 설교에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설교자의 개인적인 역량과는 상관없이 은혜를 끼쳐나갈 수 있다고 한다면 할말은 없겠지만,

 

목사님들이 준비하신 내용을 그냥 읽어 내려간다던가,

그 내용들이 잘 준비가 안되서, 아니 원고 준비는 잘되었더라도

그 내용의 전달에 있어서, 그 전날 성령님께서 부어주신 크나큰 은혜로

밤새워 설교를 받아 적었을찌라도,

설교 당일날 전달이 제대로 되지않아 성령님께서 계획하신 성도들을 향한 은혜에

절반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다면,

설교자의 말씀 전달을 위한 노력에도 게을리하지 않는것이

유명한 음악가의 악보를 연주하려는 연주자들의 자세여야하지 않을까요...

 

저도 개인적으로 정 목사님의 책 "설교란 무엇인가?"를

이틀동안 정신없이 읽고난 후 (저희 목사님에게 조언을 해드리기 위해서...) 

지금 섬기는 개척교회의 목사님에게 전달해드렸는데

두 주가 지난 지금까지 아무얘기가 없으시군요....

"그 책 읽으셨나요...?" 물어보기도 그렇고...ㅎㅎㅎ

 

사도바울에 대한 설교말씀은

바울신학이나, 사도바울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어서

몇번씩 설교말씀을 읽고 있습니다......

 

특별히 해외에서 개척하시면서

고생(?)하시는 사이몬 목사님에게

힘내시라고 응원을 보내드리고 싶습니다............홧팅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rch 05, 2011
*.120.170.250

한밀 님,

설교전달 기술 훈련은 무익한 것이라는 내 말은

과장법이라는 거 아시지요?

저 위 Simon 목사님의 닉이

시몬이 맞아요, 사이몬이 맞아요?

시몬이 더 성서적이고 시적인 것 같은데요. ㅎㅎ

한밀 님의 응원을 받으니 불끈 힘이 납니다.

좋은 주일을 맞으세요.

profile

[레벨:5]이진숙

March 05, 2011
*.177.17.39

판단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길 소원합니다.  그날이 오기나할런지요? 끝이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을 몰라서, 비밀을 몰라서 그런가요? 변죽만 울리다 늙을 것 같은 좋지 않은 예감에 서글퍼집니다. 다시한번 화이팅할때인 줄 알지만 뭉기적거리고 있습니다.    주님 오셔서 토닥거려주소서.

 

 

 simon목사님 설교준비하실때 "양보하지마십시요"  양보하지 않은 생명의 말씀을 갈구하는 영혼들을 보십시요. simon목사님 힘내세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rch 05, 2011
*.120.170.250

이진숙 님,

재미있으신 분입니다.

변죽만 울리다 늙을 것 같은 좋지 않은 예감, 음,

그런 예감을 느꼈다면

중심의 힘을 맞볼 날도 멀리 않았을 겁니다.

내가 도사처럼 말하는 걸 용서하세요.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나도 여전히 변죽에 머물러 있답니다.

죄송하게도요.

산상변모 주일이 내일입니다.

profile

[레벨:3]Simon

March 06, 2011
*.33.33.197

밀알님, 이진숙님

응원 감사합니다.

그리고 정목사님 호주 사람들은 저를 시몬이라고 부르지 않고 사이먼이라 부르더군요.

벌써 시간이 산상변모 주일을 맞았네요.

주님께서 저의 마음부터 변화시켜 주시길.....

profile

[레벨:6]한밀

March 06, 2011
*.255.229.218

호주식 발음으로 "사이먼"목사님으로 부르려니

사이가 멀게 느껴 지는군요 (사이~먼, 목사님...ㅋㅋ)

 

정 목사님,

오늘 새벽에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 느헤미야서의 설교말씀을 들으면서

 

느헤미야는 비젼을 품은 사람이었고,

느헤미야서에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성전재건에 대한 말씀을 들었다는

성경말씀이 없기때문에 아마도 느헤미야는 개인의 비젼을 위해 노력한결과

민족과 하나님의 비젼을 이룰수 있는 성경의 인물이 되었고,

그로인해 영적인 부흥까지 누릴 수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말씀을 들으면서,

 

인문학적인 성서읽기 방식으로 다른 자료들을 참고하지않고 느헤미야서를 해석할때

적어도 느헤미야서의 저자는 한개인의 영웅적인 업적들을 기술하기보다는

그 일들을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술하려했든지,

아니면, 성전재건의 당위성과 당파성을 가지고 있는 느헤미야서의 저자가

느헤미야를 통해 성전재건과 이스라엘의 신앙회복, 영적부흥을 가져옴을 강조하는것인지,

 

인문학적인 성서읽기를 통한 말씀해석이 모든 성경본문을 통해 가능한것인지,

느헤미야서는 어떻게 해석이 되는지 궁금합니다.

(아마도 다른 곳에서 질문을 드려야될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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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9 대림절 주의 날과 십일조 [49] 2009-12-07 16383
848 성령강림절 믿음과 행함의 긴장관계 [25] 2009-09-14 16342
847 기타 생명이 죽음을 삼키다, 7월2일 2006-07-02 16335
846 성령강림절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눅11:5-13) [10] 2013-07-29 16311
845 성령강림절 예수 그리스도는 누군가? [16] 2010-07-19 16285
844 성령강림절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삼상 17:32-49) [8] 2015-06-21 16246
843 창조절 제자의 길과 소유의 길 (눅 14:25-33) [10] 2013-09-08 16151
842 기타 하늘생명의 밥 [1] 2006-08-20 16137
841 성령강림절 예수는 생명의 밥이다 [22] 2009-08-10 16097
840 주현절 성령 임재와 마술 [21] 2010-01-11 16084
839 성령강림절 요한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 [17] 2009-07-27 16053
838 성령강림절 은혜의 보좌 앞으로! [28] 2009-10-26 16039
837 주현절 하나님의 ‘선택의 신비’ [10] 2011-01-17 16024
836 성령강림절 천국, 질적인 변화의 세계 [18] 2011-07-24 15989
835 기타 낡은 것과 새것 [2] 2004-07-02 15969
834 주현절 이사야 예언의 성취 (눅 4:14-21) [7] [1] 2013-01-27 15963
833 사순절 “나는 아니지요?” [23] 2011-04-18 15913
832 성령강림절 세례 요한의 죽음 (막 6:14-29) [10] 2015-07-13 15849
831 기타 메시야니즘의 기초 [1] 2008-05-01 15818
830 기타 하나님을 알자 [4] 2004-06-30 15817
829 주현절 가난한 사람들 [23] 2011-02-06 15797
828 기타 신앙적 일상과 재림신앙 [2] 2006-10-15 15751
827 사순절 여호와를 알리라! [16] 2011-04-11 15737
826 성령강림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6] 2008-06-08 15731
» 주현절 영적 자유의 토대 [22] 2011-02-27 15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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