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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자녀, 빛의 열매

사순절 조회 수 21423 추천 수 1 2011.04.03 23: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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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에베소서 5:8-14 

빛의 자녀, 빛의 열매

에베소서 5:8-14, 사순절 넷째 주일, 2011년 4월3일

 

     빛의 자녀

     초기 그리스도교가 시작할 때의 상황이 어땠는지를 감안해야만 신약성서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그들은 종교적으로나 정치 사회적으로 소수파였습니다. 주변 세계로부터 무시당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볼 때 한편으로는 무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식하다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한 유대인 남자를 메시아로 믿었다는 뜻입니다. 당시 십자가 처형은 가장 부끄럽고 저주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위험하다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예수를 퀴리오스(주)로 믿었다는 뜻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들은 바로 그 예수가 심판주로 재림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신앙은 유대교에도 위험하고, 로마정치에서도 위험했습니다. 무식하면서도 위험한 주장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당시에 왕따를 당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야기입니다. 내용은 다르지만 세계 모든 나라로부터 무시당하는 북한 집단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에베소서에 따르면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빛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8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당시 교회 밖의 사람들이 이 말을 들었다면 코웃음을 쳤을지 모릅니다. 빛은 자신들의 세계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어둠에 속한 이들이었습니다. 제 삼자가 볼 때 이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헬라 로마 문명을 보십시오. 정치, 예술, 철학, 건축에서 대단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지금의 서양철학은 그 근원이 모두 헬라 철학에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모르고는 서양철학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로마의 학문은 지금도 서양 학문의 기초입니다. 로마법과 수학, 의학, 역사학을 모르고는 현대 서양의 그 어떤 학문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빛의 자녀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영원한 진리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모든 제도는 빛을 상징합니다. 이들에 비해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내세울 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빛의 자녀라고 주장한다는 것은 어불성설로 들릴 수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근거로 자신들이 감히 빛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근거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참된 빛으로 인식하고 경험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에게 로마의 법과 헬라의 철학, 유대의 종교는 빛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빛이었습니다.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지금 우리까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으로 고백하는 신앙의 기초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 1:9)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인가요? 예수가 어떻게 참 빛인가요? 여러분은 이미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통해서 생명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좀더 직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구절도 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복음서에 나오는 모든 치유, 축귀 등은 예수를 통해서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에 대한 해명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리스도교의 기본 교리이기 때문에 따라가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생명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오히려 세속의 주장들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아프지도 않고 어려운 일도 없이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일련종정, 속칭 남묘호랑개교 같은 유사종교들이 약속하는 것들입니다. 또는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제시하는 것들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오히려 반대의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고난과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실하게 예수님을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과 십자가의 운명을 받아들였습니다. 바울도 그렇습니다. 그가 어디서 최후를 마쳤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는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삶을 생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만족이 불가능하고, 결국 죽어야 할 운명을 참된 생명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죽어서 천당에 가는 것인가요? 천당을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라고 말한다면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천당을 저 우주 어느 곳에 자리한 별천지로 생각한다면 틀린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생명의 리얼리티는 어떤 구체적인 삶의 프로그램이나 프로젝트가 아니라 예수님의 운명에 나타난, 그러나 아직은 여전히 은폐되어 있는 하나님의 구원행위, 즉 생명사건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한 가지 사실에 매달렸습니다. 거기에 자신들의 미래와 운명을 걸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일치되는 것이었으며, 생명과 일치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부활에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부활은 생명이 죄로 인해서 처해진 죽음이라는 운명을 벗어나는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빛이라고 선포할 수 있었으며, 자신들도 예수 안에서 빛의 자녀라는 사실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신앙인식과 경험을 오늘 우리는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을 놓치면 근본을 놓치는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빛은 더 이상 헬라 철학자들의 지혜로부터 오는 게 아니며, 또한 로마 황제들의 권위로부터 오는 게 아니었습니다. 빛은, 진리는, 생명은, 구원은 죄와 죽음을 극복하신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온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당시 시대정신과 대결했습니다. 당시 시대정신은 오늘의 시대정신과도 똑같이 매우 합리적이고 대중적이고 매력적이었습니다. 사람을 잘 살게 할 만하고, 지적이게 보이게 하고, 행복하게 할 만합니다. 사람들이 빛이라고 믿고 따를 만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지 않았지만 그 시대정신에 주눅이 들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예수 경험이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는 주변 상황이 아무리 열악해도 그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그들은 담대하게 예수가 참된 빛이며, 그 예수 안에서 자신들이 빛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진술은 낭만적인 차원도 아니고 심리적인 차원도 아니고 인격적인 차원도 아닙니다. 삶, 죽음, 생명, 세계, 우주에 대한 전인적인 새로운 인식입니다. 혁명적인 인식전환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를 그렇게 경험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삶의 치장물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까요? 좀더 노골적으로 질문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와의 관계가 끊어지면 어둠으로 떨어진다는 두려움을 실제로 느끼고 있나요? 대답하기 곤란할 겁니다. 형식적으로는 예수와의 관계가 생명의 빛으로 들어가는데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는 에베소서 기자의 고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빛의 열매

     자신들의 정체성을 빛의 자녀라고 본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가지 곤란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교회 안에서 부도덕한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참으로 곤혹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빛의 자녀라고 한다면 세상의 자녀와 뭔가 달라도 달라야 하는데,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상황이 매우 심각했던 것 같습니다. 에베소서 기자는 11절 이하에서 그 사실을 지적합니다.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둠의 일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고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부도덕한 행위는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서도 심각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육체의 일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주술,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 이렇게 15개 항목입니다.(갈 5:19-21) 이런 부도덕성들은 복음의 위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복음의 본질을 외면하고 이런 추문에만 관심을 보입니다. 본질은 숨겨지고 형태만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빛의 자녀들이 모인 교회에 이런 부도덕한 일들이 벌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두 가지 이유가 아닙니다. 우선 교회 공동체에 속한 이들이 모두 빛의 자녀는 아닙니다. 모두 복음의 세계로 들어온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를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또 다른 이유는 인간의 실존적인 한계입니다. 사람은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미 바울도 스스로 인정한 바입니다. 교회론적인 차원에서 보면 지금 현실의 교회는 아직 승리한 교회가 아니라 싸움 중의 교회입니다. 따라서 교회에는 비본질적인 요소가 없을 수 없습니다. 상처가 없을 수 없습니다. 이런 상처들로 인해서 결국 빛의 자녀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기자는 빛의 자녀가 된 것으로 끝나지 말고 빛의 열매를 맺으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바울은 그것을 사랑, 희락, 화평 등, 9가지 성령의 열매를 언급합니다.(갈 5:22, 23)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 수 있다는 주님의 말씀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런 가르침을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라고 말입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의 가르침과 비슷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기자가 말하는 빛의 열매에서 방점은 ‘빛’에 있습니다. 열매는 빛에 따라오는 것입니다. 앞에서 빛은 생명에 대한 메타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또 하나의 다른 메타포가 있습니다. 보는 것입니다. 빛은 보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리스도가 빛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우리 인식의 근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빛의 자녀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무엇이 빛의 열매인지를 보게 되었다는, 즉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어둠의 일들은 어둠 속에 있는 한 드러나지 않습니다. 알지 못하면 악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습니다. 어둠에 빛이 비춰야만 어둠의 일들이 드러나듯이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열매와 열매 아닌 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걸 인식하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에베소서 기자는 아직 빛이 비춰지지 않은 이들을 가리켜 잠자는 자, 죽은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설명이 옳기는 하지만 관념적으로 들린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비춰진다는 게 무엇인지 확실하게 다가오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도 모든 걸 판단하기 어렵다고 말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모든 것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주는 게 아닙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의 인식은 빛을 받아도 여전히 제한적이긴 합니다. 그러나 최소한 무엇이 빛의 열매인지 아닌지는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영적인 현실을 여러분에게 억지로 납득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경험해보지 않고 말만으로는 따라가기 힘들 겁니다. 빛은 마치 도(道)와 같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실증적으로 보여줄 수는 없으나 도를 따라가는 사람들에게는 명백한 삶의 길인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영혼에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비쳐졌습니까? 그를 통해서 생명의 세계가 더 밝아졌습니까? 빛의 열매와 어둠의 일이 분간이 가나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빛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은 이들입니다. 생명의 빛으로 더 깊이 들어가십시오. 빛의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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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April 04,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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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공증,CCTV,사진,편지,습관,행동,녹취록들이 그 행위의 발생 자와 동일시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증거자료가 100% 일치하는 자의 생명을 좌지우지 하는 재판을 여러 번 본바 있었습니다.

증거가 증인을 우선하는 사건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계심과 예수님의 부활증거자료로 하나님의 녹취자료, 성경말씀을 제시하며 출발합니다.

그래야 제가 빛의 자녀임을 다시 한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죄의 모습을 말씀으로, 빛으로 알게 하시고 죄의 삯을 주님의 부활하심으로 깔끔하게 사해주심을 믿습니다.

생명의 빛으로 나의 어둠을 빛 속의 빛으로 자녀 삼아주심을 내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셔서 나를 조용하게 만들었고 더 많이 웃을 수 있음을 확인합니다.

노기를 줄이고 의심의 말들을 절제하며, 노와 의심보다는 사랑을 우선시하는 행동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빛의 열매 맺음을 주님의 빛으로만 맺게 해달라고 기도 드립니다.

죄의 마음에서 출발한 내 약은 이기주의를 경계합니다.

사랑의 말씀들이 지금도 내게 들어와 가슴을 울렁이게 합니다.

몇 번 만나서 어색함이 사라지고 더 사랑스러워진 연인을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는 마음으로 성경책을 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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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05, 2011
*.120.170.250

진인택 님은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인가요?

글쓰기의 논리와 형식이 독특해서요. ㅎㅎ

빛의 열매가 빛으로만 맺게 해달라는 기도가 정곡을 찌르네요.

생명의 빛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간 거 이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더 무엇이 있을까요.

영성가들의 '빛의 노래'를 듣고 싶군요.

(나도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라틴어로 된 노래가 있을 법 한데요.

좋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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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happypig

April 22, 2011
*.203.167.97

저도 목사님과 똑같은 마음이네요.

아주 글을 이끌어 감이 독특하면서 모든 것이 논리적이고 오류가 없어 깨끗하네요.

그래서 목사님의 "빛의 자녀, 빛의 열매"설교 말씀이 확~~ 요해가 되네요.

그렇잖아도 이 번 목사님 설교를 제 문서에 저장시켜 저도 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쇄나 복사해

나눠 주고자 해요.

얼굴 모습도 예수님 믿는 사람이군요.

진인택님을 보니 저도 저의 프로필 '새싹'을 '제 사진'으로 바꾸고 싶네요.

님처럼 빛의 자녀로 보일런 지는 몰라도 말이예요.ㅎㅎ

감사합니다.

 

*아참 다비아 사이트에 질문이 있어요. 이 질문을 보시고 관리자 되시는 분이나 운영자 되시는 분은 저에게 꼭 답변을 주시기 바랍니다.

♣글을 쓰거나(쪽지가 날아 올 때가 있잖아요.무슨 상품추천권 당첨되었단가라고요), 추천을 하면 다음과 같은 글이 왼쪽 상단에 떠요 즉 "서버에 요청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요"라고요.

그리고 동시에 가운데 쯤에 "저장되었습니다", "보관되었습니다"하고 "확인"이 뜨지요.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왼쪽 상단에 열려 있는 알림표는 돌아 가지 않아요. 그래서 할 수 없이 "확인"을 누루고 "저장함"에 들어가 보면 쪽지가 등록이 않되어 있어요. 왜 그런가요?

아는 분 !  제게 가르쳐 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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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9]신짱구

April 04, 2011
*.196.241.189

자주 들어오곤 하지만 글은 잘 남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깨달음을 얻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참 대단하십니다.

다른 이들이 생각지도 못한 부분들을 아주 깊이 있게 말씀 하십니다.

목사님 맞습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얻었습니다.

생명의 빛으로 더 깊이 들어가서 빛의 열매를 얻어야 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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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05, 2011
*.120.170.250

신짱구 님,

안녕하세요?

다비안 중에 짱구엄마라는 분이 있는데,

얼핏 그분인가 했더랍니다.

제 설교와 글이 신짱구 님의 구도적 여정에 도움이 된다니 다행입니다.

빛의 세계로 들어가면,

빛이 우리를 집어삼키면

무엇이 생명인지 알게 되겠지요.

성령의 빛이여, 저희를 비추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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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April 04, 2011
*.104.19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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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주일의 설교 '빛의 자녀, 빛의 열매' 는 미묘하지만 큰 차이의 말씀이셨습니다.

결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빛에 대함', '빛으로 인함'에 대한 것을

목사님께서 섬세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사실 '빛'의 가시적인 결과에만 늘 주목했기에

그리고 대부분의 '빛의 열매'에 속한 것이

깊은 인식에 의한 것이기 보다는

결과론적인 산물로 지정된 모양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식의 근거로서의 '빛'에 대하여

다시 생각케 되니 새롭습니다.

결과는 다음의 일이지만요.

 

마침 모래알님의 홈피에서 이외수 선생님의 글귀가

통하는 듯 하여 옮겨봅니다.

 

"하늘이 햇빛과 비를 내려 사과나무를 꽃피우는 것은

결코 사과가 먹고 싶어서가 아니다.."

 

빛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교감 사이에서

자연스레 열리는 열매가 열리도록 늘 비추어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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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6]맑은그늘

April 05, 2011
*.40.145.82

유니스님 안녕하세요?

그냥 댓글 달아봐요.ㅋ

댓글에 외수형님이 나와서 반가워요. ㅎ

제가 자칭해사 외수형님 보좌관이거든요.ㅋ

엊그제 만나서 참 반가웠어요. 악수도 하고.ㅋㅋ

아직 거시기는 그대로 있는 것 같던데요/

(혹시 거시기가 뭔지 모르진 않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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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April 05, 2011
*.104.195.47

맑은그늘님, 차 한잔도 못하고 뭐그리 바삐 가신건지..

거시기는 아직 철거를 못했습니다.

문제는 철거도 못한채로 새로운 사람들 만날 일들이

자주 생긴다는 거가 부담스러버요...으흑...

아름다운 봄날 꽃그늘이 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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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05, 2011
*.120.170.250

유니스 님,

아이콘이 캡슐로 바뀌었네요.

저 안에 뭔가 신비한 가루가 들어 있을 듯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인식론은

기본적으로 성령론적이라고 보면 됩니다.

근원적인 것에 대한 깨우침이

우리 내부의 지성적 활동이라기보다는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영에 의한 것이라는 거지요.

그것을 빛이라는 메타포로 묘사하는 겁니다.

이런 그리스도교의 입장은 단순히 감상적인 신앙의 차원이 아니라

이 세계와 인간에 대한 훨씬 깊은 차원에서 제시된 것이기 때문에

일반 학문의 인식론과도 얼마든지 진리의 차원에서 논의가 가능한 거지요.

모래알 님과 이외수 선생도 비슷한 경험들을 하시는 분들이군요.

수성제일약국 앞길이 두배로 확장된 것을 축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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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April 05, 2011
*.139.124.107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 저는 종종 강물의 발원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번 주도 예외없이 '근거'에 대한 말씀을하시는군요.

예수님께서 열매를 보면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알수 있다고 하셨는데,

빛의 열매들은 '빛'이라는 나무에서만 열린다는 '만고불변의 법칙'을 말씀해 주시는군요.

(이 법칙을 헬라인들은 '로고스'라고 불렸다고 들었는데요.)

그러니 그 빛의 세계에서만, 올바른 열매들, 빛의 열매들이 맺어진다는 게 당연한 것이구요.

 

우리가 이런 근거들을 놓칠때 본질을 외면하고 추문에만 휩싸이게 되는 거 같습니다.

이런 추문에 휩싸일때, 또한 우리는 이런 '추행'을 행하지 않으려 행위들에 많은 에너지를 소진하게 되고요.

그리고 이런'추행'에 근거해서 사람들을 비판하고 자랑하고, 칭찬하는 거 같습니다.

 그러나 '빛'에 근거한 열매들, 성령의 열매들은 그래서 결코 자랑할 수 없나 봅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으며.. 사도바울의 고백이 오늘 목사님의 말씀에 겹치네요.

말씀을 듣는다는 게 이렇게 큰 축복이었군요. 목사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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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05, 2011
*.120.170.250

라라 님,

추행을 막아보려고 무진장 애를 쓰고,

또 실패하고, 그걸로 비판하고... 하는 설명이 재미 있군요.

우리는 오래된 근원에서 나오는 생수를 마시고 살지요?

그 맛을 안다면 더 이상 다른 것을 기웃거리지 않을 텐데요.

좋은 하루, 행복하게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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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April 05, 2011
*.139.124.107

예, 목사님,

근원에서 나오는 생수의 맛을 아는 것은 비단 사람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제 매일묵상에 올려주신 '개나리'를 읽다가, 이 세상 모든 생명체는

태양을 해바라기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살아 있다고 하는 것, 생명이 있다고 하는 것은

본질을, 빛을 본능적으로 '해바라기'하게 되어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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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April 05, 2011
*.239.93.193

焚書 坑我

焚書 坑我

두번째 줄은 g흔하지 않은 한자 행서체로 바꿔서 입력해 보았는데

다른 컴에서도 보이려나.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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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April 05, 2011
*.139.124.107

예, 진인택님, 잘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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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happypig

April 22, 2011
*.203.167.97

저는 잘 안 보여서 그 차이를 몰랐지요.

그래 네이버에 "지식iN"에 들어가 로그인하고 등록하여 답변을 얻었습니다.답변자 분께서 행서체외에도

전서체, 예서체 , 해서체로 해서 보여 주시더군요. 그래서 "캡쳐"를 사용해 저의 문서 중 "내그림"에 저장해 놓았고요.

저는 디카도 없고 카메라에 담은 사진들을 컴에 옮기는 것을 아직 배우지 못했어요.그러나 저는 꿈이 있어요.

예전에는 중학교 선생이었지만 건강상 그만 두었고 지금은 주일하교 영어교사 하나님께 영광 드리고 있지요.

아주 많은 도움을 받아요.캡쳐을 사용해 컴에 나오는 그림들을 저장해요. 물론 스크랩도 하긴 하지만 잘 안 써요.

왜냐하면 내문서에 자주 들어가 그 때 그 때 필요한 것을 뽑아 쓰거든요.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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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April 06, 2011
*.115.209.77

예수님을 통한 생명의 리얼리티는 어떤 구체적인 삶의 프로그램이나 프로젝트가 아니라 예수님의 운명에 나타난, 그러나 아직은 여전히 은폐되어 있는 하나님의 구원행위, 즉 생명사건,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일치되는 것이었으며, 생명과 일치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통하여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행위와,생명과 구원의 리얼리티가

저에게도 한층 더 생명의 빛으로 다가오기를 소망하면서 오늘도 좋은 메시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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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초신자의 특권

April 06, 2011
*.244.165.234

목사님,

일반인들이 기독교인들의 행태를 보고 기독교를 이런저런 맥락에서 비판하는 것을 볼 때 불편하듯이

다음의 맥락을 볼때도 전 깜짝 놀랬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생명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오히려 세속의 주장들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아프지도 않고 어려운 일도 없이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일련종정, 속칭 남묘호랑개교 같은 유사종교들이 약속하는 것들입니다. 또는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제시하는 것들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오히려 반대의 삶을 말합니다. "

 

물론 세속적이고 유물론적이라는 바탕을 공유한다는 차원에서는

같이 언급될 수도 있을법 하지만, 그것이 불러올 사회적 결과는 엄청나게 다를것입니다.

빛의 자녀에게 빛을 가리게 만드는 인간내면의, 그리고 사회적 관계의 숨겨진 욕망과 체계의 힘을 작동하지못하게 하는

(종교적 차원이 아닌) 사회적 차원의 노력일뿐일 것입니다.

 

설교의 핵심내용이 아니라  예를 든 것일뿐인 부분적인 것을 가지고 언급하기가 조심스럽긴합니다만

이렇게 핵심비교내용도 아닌데, 굳이 이런 맥락에서 이렇게 예를 드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잘 몰라서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이런 식의 질문이 처음이 아닌듯 합니다.

재밌는 것은 이런 식의 맥락을 접할 때마다 놀라서 질문던지는 저도 변하지않았고,

목사님도 이런 예를 드는 것을 계속하시고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신념이나 믿음은 참 변하기 어려운 것인가 봅니다.

 

 진리의 빛에 열려있다는 것은, 생명을 살아가는 삶을 열어간다는 것은 무엇인지를 다시 자문하게 됩니다.

생명있는 것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가려는 사회적 환경을 고려하는

사회학으로써의 맑시즘을 기독교가 껴안는다는 것은 불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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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06,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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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초신자'입니까? ㅎㅎ

의아하다고 생각하신 부분을

내가 다시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요?

아마 어떤 설명이 나올지 알고 있을 겁니다.

마르크시즘과 기독교의 관계는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로 다룰 수 있을 정도로

그 배경이 복잡하니까 여기서 말할 수는 없겠구요.

그냥 방향만 짚는 게 좋겠지요.

마르크시즘이 사회과학으로 옳으냐 아니냐는

여기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에요.

가장 이상적인 경제 정치 이념이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것의 현실성은 미뤄두구요.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사회과학은 아니라는 것을 전제해야 합니다.

사회과학을 껴안는 것은 가능한 일이죠. 물론.

이는 마치 기독교 신앙이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것과 비슷한 거에요.

그렇지만 기독교 신앙이 진화론은 아닌 거에요.

복지사회를 구현해서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히 옳지만

그것을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는 거지요.

이건 그렇게 복잡한 문제가 아닌데요.

20세기 초에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이 스위스에서 전개되었어요.

일종의 기독교 마르크시즘 운동이에요.

초기 바르트도 여기에 참여했어요.

그러나 결국 그 운동은 바로 깃발을 내리고 말았답니다.

20세기 중후반에 마르크시즘은 다시 해방신학, 또는 민중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와 이웃하며 지내게 되었는데,

그것도 지금은 다 힘을 잃고 말았어요.

개인적으로 애석하게 생각하지만

그게 역사의 현실이에요.  

그리고 진리의 빛에 열려있다는 것의 기독교적인 입장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주어집니다.

이는 곧 생명이 인간의 자체적인 노력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

밖에서 주어진다는 주장이지요.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지금 실증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것이 이뤄져야만 알 수 있어요.

무책임한 태도처럼 보이지는 않을는지요.

그래도 그게 기독교 신앙이니까 어쩔 수 없답니다.

재림을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그 어떤 표상으로도 그것을 구체화할 수 없어요.

재림의 사건이 임해야만 인식할 수 있어요.

이것이 관념적인 것처럼 보이겠으나

그것보다 더 정확한 것도 없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기다림이에요.

밖에서 생명이 주어지기를 기다리는 거지요.

그러면 역사참여는 어떻게 하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기다림의 영성이 참된 앙가주망을 가능하게 할 거에요.

내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마지막 질문으로 돌아가서,

기독교는 마르크시즘을 껴안을 수 있고, 그래야만 합니다.

그러나 동일시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복지국가가 하나님 나라는 아니기 때문이에요.

사실 그런 복지 국가 자체가 불가능한,

그래서 비현실적인 이데올로기지만요.

그런 사회 프로그램들은 잠정적인 것이잖아요.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기독교가

그런 잠정적인 사회 프로그램에,

그것의 휴머니즘이 아무리 가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를 동일시할 수는 없는 거지요.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어요.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어려운 문제입니다.

앞으로 더 서로 고민해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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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초신자의 특권

April 07,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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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사회과학(오류도 많죠)이지만 앞으로 고민해야할 여지가 너무나 많은

그래서 배워야할 것은 배워야하는 사상을 왜 이런 맥락에서 이렇게 굳이 이용하는 데는 어떤 무의식적 구조가 작용할까? 라는

것이 저의 의문의 핵심입니다.

하나의 사상을 종교와 동일시하는 오류가 역사상 있었다면 비판받아야하죠.

이것은 오류투성이 기독교인을 보고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과 같을수도 있을듯 합니다.

자본주의와 결합한 기독교가 자체반성을 많이 하는듯 하지만,

끊임없이 제자리걸음하게 하는 어떤 패턴이 있지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지금의 정권을 끊임없이 비판하면서도

이 구조를 유지시키게 만드는 어떤 내적 구조가 혹시나 기독교인으로서의 나에게 있지나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소 멀리 나간듯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저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구조를 껴안는 것이냐 굴복이냐?

껴안기위해서는 난 지금 어떤 고민과 기도를 해야하는것일까?"

여전히 잘 모르겠고 갈 길이 멀어보입니다.

사랑하기가 가장 어려운듯 합니다. 그러니 아직 초신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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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07,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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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신자 님,

뭔가 오해하고 있는 거에요.

내가 마르크시즘을 비판한 게 아닌데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절대적인 어떤 생명 사건이라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행위의 상대성을 강조한 거에요.

부활 생명은 복지 향상과는 다르다는 거지요.

이 문제는 어떤 무의식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 문제에요.

그런 거는 잘 아실 텐데요.

마르크시즘에 대한 무의식적인 거부가 아니라

인간 행위에서 나오는 것의 잠정성을 말하는 거에요.

설교는 이 세상을 복지사회로 가꿔나가야 할 당위나 이념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의 운명을 통해서 행하신 사건인 케리그마에 집중하는 거에요.

그런 말이 너무 추상적으로 들리지요?

이 현실은 자본과 권력이 장악하고 있는데,

맨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타령만 하고 있으면,

결국 이 구조를 고착화시키는 거 아닌가 하고 말이지요.

골치 아프지요?

지난 2천년 동안 풀리지 않은 건데,

하루이틀에 풀지지 않을 겁니다.

주님이 오셔야만 우리가 모든 수수께기의 실체를

직접 대면하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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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떡진머리

April 13,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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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시즘도 워낙 다양해서 무엇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지가 보다 명확해야 할 듯 합니다.

특히 사회주의의 몰락이후 이 문제는 더욱 중요한 듯 합니다.

일반적으로 '통속적 맑스주의'라고 칭해지는 부분부터 이를 극복하고자 했던 알튀세르나 네그리 등 그리고 '자본론'조차 읽지 않고 맑스주의 대열에 합류한 들뢰즈를 한 틀에 묶어서 이야기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고 통속적 맑스주의를 기독교가 포용하더라도 권력화된 맑스주의가 기독교를 포용하지 않으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맑스의 저작에서 보이는 '근대성'에도 이 문제는 천착되어 있습니다.

네그리나 알튀세르는 아주 쬐금 밖에 몰라 말씀드리기는 어렵고 여전히 알송달송한 들뢰즈적 사고로는 양자의 포응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사랑'이라는 접속을 통해서 일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기존의 권력화되고 지층화된 기독교의 긍정을 통해서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고유한 영역으로 보이는 부분과의 대립은 없어 보입니다.

들뢰즈의 철학은 통속적 맑스주의 처럼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어떤 세상을 만들겠다고 공갈도 치지도 않고 허풍을 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스스로가 그리스도가 되지 않으려고 하니 기독교와도 크게 맞장뜰일도 없겠습니다.

기독교의 '사랑'이라 불리우는 것이 모든 것들 - 자연, 사람 등 - 과의 만남을 긍정하듯이 그리고 사랑의 접속을 통하여 새로운 것들이 창조되듯이 들뢰즈의 '잠재성'이란 범주에 사랑이란 것도 녹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니 어쩌면 사랑이 '잠재성'자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권력은 강요의 방식이 아니라 우리들로 하여금 그것을 능동적으로 욕망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누구도 비켜서 있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또한 새로운 것들을 욕망하기도 합니다.

정권에 대한 부정은 단순히 그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배치를 통해서 부정됩니다.

이 배치는 새로운 생성을 만들어 냅니다.

못을 박는 망치가 사람의 머리와 배치될 때 '살인기계'가 되듯이, 입이 음식과 만나면 먹는 기계가 되고 연인의 입술과 만나면 사랑의 기계가 되듯이 말입니다.

모든 사물은 단일한 본성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 성질은 무엇과 배치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기독교인으로 '나'도 어떻게 배치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저 역시도 49년 동안 기독교를 종교로 가지고 있지만 새로운 배치를 통하여 새로운 생성물을 만들어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권력은 끊임없이 내부로 포섭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정권이건, 종교 건 간에 말입니다.

집사로, 안수집사로, 장로로 끊임 없이 내부로 유혹하고 꼬셔댑니다.

스스로 그러한 직분과 자리를 욕망하게 만듭니다.

여기서 고개를 돌리는 것, 외면하는 것이 최초의 배신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배신을 통해  탈주가 가능하다는 것을 압니다.

'논개'가 되지 않을 바엔 굳이 '이런 구조'를 껴안을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체제를 배반해야 합니다.

성서는 배신의 역사입니다.

그 배신이 새로운 탈주를 통한 생성을 만들어 내는 역사입니다.

카인, 모세, 요나, 베드로, 유다 뿐만 아니라 유대 민족의 신에 대한 배신과 탈주를 통해 새로운 관계가 생성되는 역사입니다.

기독교인 되기가 체제에 대한 긍정속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양체'로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다양체의 생성을 가능하게 하는  내면적  흐름과  잠재성의 힘을 우리는 '사랑의 힘'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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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더럼

April 08, 2011
*.17.2.6

초신자 특권님

정 목사님의 말씀 처럼

현실은 자본과 권력이 장악하고 있는데 십자강와 부활 타령만 하고 있어

현 지배구조를 고착화하는데 기야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지요.

저도 한 때 특권님 처럼 그런 생각을 했지요.

 

그러나 그 구조를 변화를 시키는 원동력은 누구이고

그 구조의 기본이 되는 가치관과 도덕 문화적 풍토는

어디서 구할 수 있을 까요.

저는 그 근본적인 가치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오하 부활의 메세지에서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지배구조 변화와 무관하다고 할 수없겠지요.

더 고민 해 봅시다.

밫의 열매는 구조 변화를 위한 방향제시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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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나노

April 08,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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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안녕하세요~  지난주 서울샘터교회 갔던 바람의 아내(?) 입니다 ^^

목사님 글이 워낙 예리해서인지 괜히 긴장하고 갔던것 같은데

의외로ㅎㅎ 따뜻하게 맞아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다비아에서 글이나 동영상으로만 설교를 듣다가 직접 예배에 참여하니

또다른 감동이었습니다!

 

저는 결혼하고 다비아에서 공부시작한지 일년쯤 된 새내기입니다.

남편은 다비아 매니아이구 목사님을 멘토라고 늘 얘기합니다.

목사님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설교자리에서 방황하고 있었을거라고...

지금도 참열심히 고민하고 공부하길래 저도 덩달아 공부합니다. ^^

 

그동안 소위 믿음좋은 청년이라는 말 들었는데

그게 모두 자기집중이었다는걸 많이 깨닫고 있습니다.

자기집중 그것이 죄라고...

자기집중을 벗어나 하나님께 집중한다는게 아직 제겐 쉽지않고,

그렇게 할말많던 기도도 지금은 어떻게 기도할지 고민이 많아졌습니다.

이 아둔한 영의 눈이 언제쯤 뜨게될지... 흑 ㅠㅠ

 

하지만 분명한건 제 신앙이 훨씬 자유로와졌고, 상식적여진듯하고

기독교가 참 깊이있고 무한하고 신비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모르지만 그런 생각이 듭니다 ^^;;)

 

감사인사 드린다는게 말이 길어졌어요..

생각을 집중하고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목사님 건강조심하시구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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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08, 2011
*.120.170.250

아, 나노 님,

안녕하세요?

지난 주일에 교회에서 만났지요?

남편이 바람, 박재진 목사이잖아요.

나도 두분을 같이 만나서 반가웠고,

두 분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더군요.

나노 님은 매력이 많은 분 같아 보였어요.

왕년에 믿음 좋은 청년이었다가

다비아 만나는 바람에 그 믿음 다 잃었나요? ㅎㅎ

아마 영혼의 깊이에서 기도가 우러나올 날이

그리 멀지 않았을 겁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우리의 삶 자체가 기도요.

젊은 목사 부부가 신학과 신앙에 대해서

진솔하게 대화하면서 살아간다니

보기에 좋습니다.

아, 일방적으로 듣는 입장이라고 했나요?

어쨌든지 듣는 것 자체도 쉬운 일이 아니에요.

목사의 길이라는 게 너무 단순해서

자칫하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는데,

그걸 벗어나는 길은 신학적 영성이 최선이에요.

나노 님이 기독교의 깊이와 신비를 조금씩 느낀다니

앞으로 두분의 대화가 더 깊어질 겁니다.

잘 지내세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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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happypig

April 22, 2011
*.203.167.97

목사님!감사해요.

제가 이 다비아 사이트를 통해서 예배를 회복했어요.

올해와 같은 사순절도 종려주일도 부활절도 없을 것 같아요. 아니 앞으로는 계속해서 UP될 것같네요.

저희 교회는 부활절에 맞추어 "다니엘기도"를 드렸어요.

제목은 "아브라함과 함께 하는 축복의 여행"이었는데 너무나 많은 것을 깨닫고 축복의 원리를 배웠지요.

그동안 저의 삶을 보상받는 확신을 받았지요.

너무 기쁘고 감사하며 춤을 추웠지요.

목사님! 저는 조울증외에도 협십증 ,척추 등 아픈 곳이 많았었는데 금 번 기도회를 통해 조울증은 거의 85% 치유받았어요.

아직 제가 약을 먹으니끼요. 그러나 지금은 약을(약도 많이 줄었지요) 먹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약도 가져 가신다는 응답을

받았어요.

그외에 다른 아픈 곳은 제가 조울증을 앓으며 생긴 것들이지요.

협심증 , 허리아품(교통사고도 있지만 우울증에 있으면 밖에 출입도 않아고 대인기피증 ,공황증, 불면증...)에 시달렸는데

이 모든 병도 다 고침을 받을 것 같네요.그리고 내 가족,내 이웃이 ,제가 있는 모든 곳이 이제 축복을 받으리라는 확신이 와요.

사실, 지금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답니다.

지금 시간이 없네요.예배드리러 교회가야해요.

오늘 편지 작성하다 날아가지만 않했으면 더 많이 썼을텐데...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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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9 사순절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과 믿음 [27] 2010-03-22 17044
868 사순절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26] 2009-04-06 17027
867 사순절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라! [13] 2011-03-21 17007
866 대림절 임마누엘 예수 [17] 2007-12-23 16940
865 대림절 성령 세례와 심판 [36] 2009-12-14 16936
864 부활절 나를 따르라 (요 21:15-19) [10] 2013-04-14 16929
863 주현절 하나님의 은폐, 하나님의 침묵 [17] 2010-01-18 16918
862 성령강림절 대재앙 앞에서 [8] 2008-05-25 16773
861 주현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24] 2011-01-09 16767
860 창조절 삭개오 이야기 (눅 19:1-10) [14] 2016-10-30 16738
859 사순절 믿음이란 무엇인가? [11] 2008-02-17 16660
858 성탄절 성탄에 참여하는 길 [18] 2007-12-25 16646
857 부활절 예수는 왜 선한 목자인가? [11] 2009-05-04 16642
856 성령강림절 믿음과 종됨의 관계 file [18] 2010-10-04 16602
855 성령강림절 율법을 넘어서 [2] 2008-06-29 16566
854 성령강림절 한 말씀만 하소서 [17] 2010-06-07 16538
853 사순절 여호와는 가까이 계시다 (사 50:4-9) [10] 2013-03-24 16534
852 대림절 주의 길을 준비하라! (눅 3:1-6) [11] 2012-12-09 16528
851 기타 다윗왕조의 존재근거 [1] 2006-08-06 16462
850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이다! [12] 2011-05-22 16410
849 대림절 주의 날과 십일조 [49] 2009-12-07 16382
848 성령강림절 믿음과 행함의 긴장관계 [25] 2009-09-14 16341
847 기타 생명이 죽음을 삼키다, 7월2일 2006-07-02 16335
846 성령강림절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눅11:5-13) [10] 2013-07-29 16310
845 성령강림절 예수 그리스도는 누군가? [16] 2010-07-19 16284
844 성령강림절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삼상 17:32-49) [8] 2015-06-21 16245
843 창조절 제자의 길과 소유의 길 (눅 14:25-33) [10] 2013-09-08 16149
842 기타 하늘생명의 밥 [1] 2006-08-20 16136
841 성령강림절 예수는 생명의 밥이다 [22] 2009-08-10 16095
840 주현절 성령 임재와 마술 [21] 2010-01-11 16084
839 성령강림절 요한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 [17] 2009-07-27 16052
838 성령강림절 은혜의 보좌 앞으로! [28] 2009-10-26 16038
837 주현절 하나님의 ‘선택의 신비’ [10] 2011-01-17 16024
836 성령강림절 천국, 질적인 변화의 세계 [18] 2011-07-24 15987
835 기타 낡은 것과 새것 [2] 2004-07-02 15968
834 주현절 이사야 예언의 성취 (눅 4:14-21) [7] [1] 2013-01-27 15963
833 사순절 “나는 아니지요?” [23] 2011-04-18 15912
832 성령강림절 세례 요한의 죽음 (막 6:14-29) [10] 2015-07-13 15847
831 기타 메시야니즘의 기초 [1] 2008-05-01 15817
830 기타 하나님을 알자 [4] 2004-06-30 15815
829 주현절 가난한 사람들 [23] 2011-02-06 15797
828 기타 신앙적 일상과 재림신앙 [2] 2006-10-15 15751
827 사순절 여호와를 알리라! [16] 2011-04-11 15736
826 성령강림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6] 2008-06-08 15730
825 주현절 영적 자유의 토대 [22] 2011-02-27 15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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