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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하나님이다!

부활절 조회 수 16411 추천 수 0 2011.05.22 22: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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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한복음 14:1-14 

예수는 하나님이다!

요 14:1-14, 부활절 다섯째 주일, 2011년 5월22일

 

     예수님은 누구인가요? 어리석은 질문처럼 보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누구나 답을 알고 있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대답은 마태복음 기자가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엘리야, 세례 요한,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대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나, 하고 물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입니다.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라고 대답합니다. 두 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그렇게 당연한 건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이 세상은 이미 구원받아야 합니다. 예수님 이전이나 이후나 세상은 달라진 게 별로 없습니다. 고난과 불행은 계속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증거가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도 사람처럼 자식을 둔다는 것이 말이 될까요?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대답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복음서는 예수가 누구냐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 질문과 대답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가 누구냐에 따라서 자신들의 운명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가 얼마나 절박했으면 요한복음 기자가 요한복음 14-17장까지 자그마치 4장에 걸쳐서 변증했겠습니까. 요한복음 14-17장은 소위 예수님의 고별사입니다. 공관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요한복음만의 고유한 말씀입니다. 본문 요 14:1절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한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불안해했다는 뜻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공동체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요한복음은 학자들에 따라서 다르지만 대개는 기원후 100년 어간에 기록된 복음서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경험했던 이들은 거의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 예수님을 본 사람만 몇 명이 남았을 겁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 믿고 있지만 예수님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모든 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조짐도 없습니다. 신앙의 근본적인 토대가 흔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은 이런 신앙의 근본에 대해서 근심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거처를 마련하려고 아버지 집에 가셨으며, 거처가 예비 되면 다시 오신다고 말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의 중간 시기입니다. 중간 시기에는 모든 게 불안한 법입니다. 요한은 그런 불안을 극복하게 하려고 이 고별사를 기록했습니다.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제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도마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하는데, 그곳이 어딘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단지 도마만의 말이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인 중에서 적지 않는 사람들인 한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뜻입니다. 이 진술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공관복음서의 주제와 일치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어떤 곳을 찾을 게 아니라 예수님 자체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7절) 다른 한 제자인 빌립이 등장해서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 말도 당연히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9절) 그 뒤로 이어지는 말씀도 다 여기에 연결됩니다. 13절과 14절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다 들어준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모든 걸 구하는 대로 얻을 수 있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권능이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선언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 말씀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우주물리학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과 비슷합니다. 유대교가 그리스도교를 결국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신처럼 여기는 전통은 유대교가 아니라 이집트와 로마입니다. 파라오와 시저는 인간이지만 신으로 추앙받았습니다. 파라오나 시저는 그렇게 불릴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생명 여탈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나사렛 예수는 무기력한 인물이었습니다. 노동자의 아들입니다. 아무런 정치적 경제적 권력이 없었습니다. 살아생전에 거대한 종교단체를 조직하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그런 이를 신으로, 특히 창조주 하나님과 일치한다고 믿는다는 것은 제 정신으로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으니까 당연히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물론 복음서에는 여러 종류의 기적이 나옵니다. 오병이어, 물이 포도주 되는 이야기, 죽은 자를 살렸다는 이야기 등등입니다. 그런 기적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성서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의 문헌에도 자주 나옵니다. 동정녀의 몸으로 태어난 것이 바로 그 증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거꾸로 복음서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한계를 그대로 인정합니다. 외로워하기도 하셨고, 자신이 감수해야 할 십자가 죽음을 힘들어하는 모습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을 전지전능하고 무소불위하신 하나님과 비교하기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으라는 말은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는 요한복음 공동체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근심거리입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하나님으로 믿어지나요?

     사도 요한이 무엇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다시 보십시오. 바로 앞에서 잠깐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본 사람은 바로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했습니다.(9절) 예수님을 보았다면 사실은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거의 죽고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보지 못한 사람들만 교회에 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본 사람들의 증언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요한의 증언이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 안에 계시다고 합니다.(10절) 반복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믿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11절) 이게 말이 될까요?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안에 거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분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전혀 차원이 다른 예수님과 하나님이 어떻게 서로의 안에 거한다는 말인가요? 이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삶에 자신을 일치시키고 드러내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은 하나님의 행위였고,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나요? 그 증거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시다는 증거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그 이외의 것들은 결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다른 선지자들에게도 일어난 것들입니다. 예수님께만 일어난 유일한 사건은 부활이었습니다. 그 부활의 빛에서만 그 나머지 사건들도 구원의 현실이 됩니다. 치유, 축귀, 순종, 사명 등도 부활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이 원하는 모든 행복한 삶의 조건들도 궁극적인 생명인 부활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생명을 잃는다면 좋은 직장과 연봉과 가족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이 아들, 즉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대한 최종적인 증거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요한복음 전체가 이미 그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만이 아니라 모든 복음서의 전제조건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간다거나 예수님을 통해서만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는 본문도 그런 사태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너무 자주 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멀게 느낍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신기한 소문 정도로 듣습니다. 조금 더 나가면 죽었다가 다시 살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습니다. 그런 정도로 생각해도 좋습니다. 문제는 부활이 우리의 삶과 깊숙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남의 이야기로 남거나 아니면 언젠가 부활할 거라는 막연한 느낌으로만 남습니다. 부활이 신앙의 중심에 자리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왜 부활의 영성에 천착하지 못할까요?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이 엄청난 인식과 신앙의 토대가 부활이라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대한 실질적인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요한복음의 가르침에는 두 가지 실질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피안이 아니라 차안에서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피안적입니다. 구약성서는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세계 전체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그분을 아주 짧은 시간과 공간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직접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이 역사에서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인간적 실존에서 살았던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서 찾지 않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절대생명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유대인처럼 메시아를 기다리거나, 헬라인처럼 철학에 매달리거나, 로마인처럼 세계를 지배하려고만 했을 겁니다.

     둘째,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와 그의 모든 운명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과의 일치에서만 우리는 죄와 죽음을 극복하고 참된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너무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과의 일치를 통한 참된 생명은 말장난이 아닙니다. 종교적 감수성도 아니고 자기 합리화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영성이자 고유한 삶의 능력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운명과 일치할 수 있는지, 거기서 나오는 삶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신가요? 여러분들은 대부분 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신약성서도 늘 그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다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간접적으로 이에 걸맞은 경구만 한 가지 드리겠습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경구가 그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만큼 여러분은 그분의 운명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참된 깨우침을 가리킵니다. 사랑이라는 말도 됩니다.

     오늘 본문의 첫 마디로 다시 돌아갑니다. 요한 공동체는 근심을 떨치기 힘들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요한의 설명을 다시 들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에 따라서 저도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마음에 근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미래에 대해서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염려해도 여러분의 운명과 미래를 여러분의 뜻대로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미래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미래를 책임지십니다. 이 사실을 사도 요한이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바꾸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요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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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빛속으로

May 23, 2011
*.216.120.30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씀이 계속 마음을 울리게 합니다. 부활의 빛속으로 들어간다는건 결국 눈을 감고 온몸을 맡기는것인데.. 아직도 전 그 빛앞에서 눈을

부릅뜰려고 애쓰는자처럼 느껴지는군요.. 참 하나님이셨던 빛이신 예수님속으로 언제쯤 전 들어갈수 있을런지..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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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23, 2011
*.120.170.250

빛속으로 님,

참 빛이신 주님과의 완전한 일치는

종말에서나 가능하겠지요.

지금 우리는 일치되었다가 떨어졌다가 하면서

부분적으로만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부분적인 관계도 사실은 그분의 은총일 뿐이지요.

그분을 빛으로 인식하고 경험하려면

그분에게 일어난 일을 잘 알아야겠지요.

그리고 기다려야겠지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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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May 23, 2011
*.115.208.201

목사님, 요즘 몇 권의 책을 읽으면서 느낀점이 있다면

예수의 제자들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신비로운 형상의 하나님을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새롭게 깨닫게 되면서

구약 성서가 기록한 하나님 인식의 새로운 전환이 그들에게 일어난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인식의 전환의 결정적인 사건은 역시 예수가 죽은 후에 뭔가 큰 사건을 제자들은 경험한것 같습니다.

왜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은 조상대대로 유전되어 내려온 유대교의 전통을 과감하게 벗어 버리고 새옷을 입게 되었는지

여전히 저에게는 아직은 풀어야할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솔직히 예수가 신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 한편 여전히 이 세상을 주관하는 신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목사님, 조금만 더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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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24, 2011
*.120.170.250

별달 님,

예수가 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솔직하지만 옳은 생각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아마 '신'에 대한 별달 님의 선입견이 작용하겠지요.

어떤 초월적이고 전지전능한 존재로서의 신 표상말입니다.

일단 그것을 접어놓아야 합니다.

그런 신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부분적인 거에요.

우리는 아직 하나님을 전체적으로는 모릅니다.

그 말은 그분이 여전히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알리고 있다는 뜻이에요.

십자가에 자신을 제한하신 하나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전능이 아니라 무능력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라는 거지요.

이런 교리는 어떤 신학적 자기 합리화가 아니라

실체에 대한 통찰이고 경험이에요.

오늘 대답은 이겁니다.

"하나님은 인간 예수에게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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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May 24, 2011
*.139.124.107

목사님, 답글에서 귀한 말씀 듣고 갑니다.

"하나님은 인간 예수에게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셨다."

제가 이 말씀의 깊이는 한참 모르지만,

불현듯,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부활안에

우리가 교리로 아는 지식보다,

훨씬 더 깊이 숨겨져 있는, 그 무언가가 환히 드러나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베레호모시면서 베레데우스셨던 예수님의 본질에 대해서도

새롭게 눈이 떠 지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 예전에도 이 말씀을 하셨을텐데,

요즘, 제가 부활시리즈 말씀을 들으면서,

이제야 정신이 드는 가 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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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May 26, 2011
*.115.210.50

목사님,  늘 좋은 가르침 감사합니다.

저는 요즘 또 하나의 문제에 부딪혀 있는중 입니다.

유대인들은 애굽의 노예살이와, 자신들의 역사에서 항상 자신들과 함께하였다고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아직도 믿고 있는 반면, 그들은 왜 예수에게서 목사님이 말씀 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아직도 발견해내지 못하고 있는지

오늘날 한국의 전 교인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며 구원자로 믿고있는데 

유대인들은 예수는 단지  나사렛 목수의 아들,  한사람의 유대인,

또는 유대 회복을 위한 운동가 정도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들은 아직도 오로지 유일신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고 있더군요..

 

삼위 일체 교리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당시 거대한 로마제국을 안정시키고 

통합시키기 위해서는  로마에 펼쳐져 있던 여러 사상과 철학을 우선 통일 시켜야할 목적으로

유대인들의 신만이 아닌 세계의 보편적인 신이 될수 있는 예수를 선택하였고 결국 그후로 

삼위일체 교리까지 이어지게 되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이런 문제 앞에서 저는 너무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목사님, 오늘 한국교회는 왜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과, 또 유대인들이 신이라고 인정하지않는

예수와 하나님을 동시에 믿고 있는 건가요? 

저의 답답증을 좀 풀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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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27, 2011
*.120.170.250

답답증을 내가 풀어들이기는 불가능합니다.

좀 극단적으로 이렇게 질문해볼게요.

왜 어떤 사람에게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중에서 가장 존경받을만한 대통령으로 경험되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매국노처럼 경험될까요?  

어느 쪽이 실체일까요?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 경쟁합니다.

구약성서 해석과 역사해석에서 경쟁합니다.

가능하면 배타적으로 경쟁하지 말고

상호적으로 경쟁했으면 합니다.

그런 우여곡절의 역사가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사이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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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삼송

May 23, 2011
*.109.42.2

가장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를 이제껏 그냥 고민없이 생각없이 지내 왔는데 목사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고민할수 있는 시간을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이 참 인간이시면서 동시에 참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실존적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종교적 사람은 되겠지만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기에는 영원한 숙제가 될 것입니다. 설교말씀을 들으면서 내면적 성찰과 동시에 말씀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 같아 감동이 됩니다. 예수님만이 저의  운명을 책임지시고 저의 미래를 맡길수 있습니다. 아멘. 목사님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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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24, 2011
*.120.170.250

삼송 님,

그리스도교 교리와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무조건 믿는다거나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방법이 아니라

아주 엄정한 태도로 자신을 성찰하고

주변 세계와 대화하거나 투쟁하는 방식으로 변증했습니다.

요즘 제기되는 물리학이나 철학자들의 기독교 비판으로

쉽게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토대가 탄탄한 거지요.

그리스도교 영성이라는 바다로 조금씩 깊이 들어가면

한편으로 두렵기도 하겠지만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모두의 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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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May 29, 2011
*.239.93.193

아는 만큼 변한다는 말씀이 무척이나 오늘따라 비범하게 와 닿습니다.

평범한 죄인이 할 것 다하고 살아갑니다. 죄인을 묶어 놓는 줄이 어느덧 길어서 옷자락에 들어가 안 보이는 것 같으니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도마의 질문을 저도 한적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이라시는데.. 뭔가 좀 알았다가 몰랐다가 왔다 갔다 합니다. 목사님 말씀하신 피안, 차안을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습니다. 도마와 저는 그런 질문조차 하지 말아야 하는데 워낙 모릅니다. 무지한 죄를 갖고 있습니다. 죄성은 강하면서 모르면서 짓고 살아갑니다. 돌아가기 싫어서 잔디밭 가로질러 가는 경범죄인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게 큰 죄의 건 수를 살면서 범하고 살아갑니다. 모른다고 순진한 게 아닙니다. 이런 나의 죄를 깨끗이 없애 주시고 새 생명 주시려 오신 주님을 깊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살아온 나의 과거가 시야를 좁히고 사고를 틀어주려 하지 않습니다. 전 사람들을 가르쳐 본 적이 있었습니다. 무지하고 질문하는 제자를 가장 좋아하고 동시에 어려워합니다. 그리고 질문과 의심을 섞는 제자들을 가장 싫어합니다. 저도 지금 이 순간도 배우고 있습니다. 배움은 믿음을 가지고 하는 만큼 스승의 잠재력을 잠식함을 은밀히 알게 되었습니다. 성실한 배움은 가슴 터질 것 같은 깨우침을 선물함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다비안에서 그런 경험을 시작부터 지금까지 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성령이 오셔서 어느 날 그렇게 궁금하고 의심스런 마음들은 이미 사라 졌습니다. 다만 네가 지금 마음이 편치 못한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 이시라는 확신에 흔들이 있어서가 아니라 더 알고 싶어 마음이 조급할 뿐입니다. 더 가까이 이 땅에 오실 주 하나님을 영접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며 생명을 가지고 오시고 그 생명을 새롭게 보여 주셨습니다. 전 그것을 오늘 더 알게 되어서 기쁩니다. 앞에서는 이해하는 척, 동조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자기 혼자 원인과 결과를 따지고 사고를 깊게 하는 것 보다는 나의 상식을 깨끗이 비우고 들어보니 비워 진자리보다 더 많은 기쁨이 채워지니 감사합니다.

오늘은 김호석교수님의 향피리연주 찬송가를 들으면서 목사님 말씀 공부하니 분위기, 기분 너무 좋습니다. 라이선스 mp3 곡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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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29, 2011
*.120.170.250

진인택 님,

공자 님 말씀처럼 배워 깨닫는 기쁨은

우리 삶의 최고 경지이지요?

사람이 선생은 아니고요.

또는 모두가 스승이자 제자입니다.

제가 생명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그런데 그게 말로 설명이 안 되는 겁니다.

안 되는 걸 억지로 하고 있어요.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요.

생명은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현재적이기도 하고 미래적이기도 한,

생물학적이기도 하고 관념적이기도 한,

우리가 규정하거나 범주화할 수 없는,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 사건이라거나,

또는 하나님의 존재방식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어떤 것이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도대체 그게 무엇이고,

어떻게 경험하고,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요?

성령의 도움을 기다릴 수밖에 없겠군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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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May 29, 2011
*.239.93.193

죄송합니다. 향피리 연주 찬송가는 파일첨부 허용용량을 초과하는 사이즈라서 못 올릴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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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6 사순절 여호와를 찾으라, 부르라! (사 55:1-9) [17] [3] 2013-03-03 23350
915 성령강림절 토기장이 하나님 [11] 2010-09-06 22935
914 부활절 ‘여호와 이레’의 믿음 [23] [39] 2009-05-11 22835
913 창조절 이방인 나병환자의 믿음 (눅 17:11-19) [10] 2013-10-13 21883
912 성령강림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17] 2010-06-27 21718
911 성탄절 은총의 깊이로! [14] 2010-12-26 21585
910 사순절 빛의 자녀, 빛의 열매 [25] 2011-04-03 21423
909 성령강림절 성령을 받으라! [13] 2011-06-12 21331
908 주현절 은사와 성령 (고전 12:1-11) [6] 2013-01-21 20959
907 사순절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 (겔 37:1-14) 2017-04-02 20770
906 창조절 마지막 심판과 생명 완성 (마 25:31-46) [15] 2011-11-13 20724
905 부활절 부활의 증인 공동체 [17] 2011-05-01 20690
904 성탄절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2009-12-28 20647
903 성령강림절 모세의 무덤이 없는 이유 [28] 2008-10-19 20246
902 주현절 두려워 말라! (사 43:1-7) [11] [1] 2013-01-13 19877
901 성령강림절 기도와 믿음 file [20] 2010-10-19 19845
900 기타 다윗의 통곡 [1] 2006-08-27 19738
899 성탄절 그리스도의 평화 (골 3:12-17) [9] 2012-12-30 19647
898 기타 성만찬 공동체 [2] [1] 2006-09-10 19608
897 성탄절 영광과 평화의 노래 2010-12-26 19433
896 성령강림절 영적인 사람 [11] 2008-05-11 19332
895 창조절 하나님께 마음을 두라! (살전 2:1-8) [6] 2011-10-23 19242
894 성령강림절 믿음과 구원 file [4] 2010-10-31 19053
893 성령강림절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 file [12] 2010-11-22 18699
892 주현절 예수는 하나님의 지혜다 [3] 2011-01-30 18556
891 성령강림절 복음의 능력, 믿음의 능력 [10] 2009-11-02 18523
890 사순절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 [11] 2010-03-29 18163
889 성령강림절 의인과 죄인에 대한 질문 [3] 2008-06-01 18120
888 기타 사람 차별 마시오! [1] [2] 2006-09-24 17984
887 부활절 예수의 기이한 빛 (베드로전서 2:1-10) [16] 2011-05-16 17901
886 성령강림절 나아만과 게하시 (왕하 5:1-14) [6] 2013-07-08 17900
885 주현절 창조의 빛, 인식의 빛 [15] 2009-02-23 17890
884 부활절 막달라 마리아와 부활의 주 [17] 2011-04-24 17792
883 창조절 하나님과 금송아지 상 (출 32:25-35) [7] 2011-10-17 17762
882 사순절 우리의 생각과 다른 하나님 [2] 2010-03-08 17745
881 성령강림절 그리스도의 가난과 우리의 부요 [23] 2009-07-13 17666
880 대림절 소망의 하나님, 우리의 소망 file [5] 2010-12-06 17653
879 창조절 예수 재림과 영적 각성 (살전 4:13-18) [11] 2011-11-06 17628
878 성령강림절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 [8] 2010-08-09 17421
877 기타 예배로서의 삶 [5] [1] 2006-09-03 17330
876 주현절 포도주 사건의 실체와 의미 [20] 2007-01-14 17265
875 창조절 불행한 부자 이야기 (눅 16:19-31) [10] 2013-09-29 17204
874 성령강림절 하나님은 누구인가? file [8] 2010-09-26 17181
873 기타 무엇을 기다리는가? [3] [2] 2004-06-14 17162
872 기타 높은 사람, 낮은 사람 [2] [2] 2006-10-08 17147
871 주현절 원수사랑, 가능한가? [16] 2011-02-22 17114
870 사순절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과 믿음 [27] 2010-03-22 17045
869 사순절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 [18] 2011-03-27 17044
868 사순절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26] 2009-04-06 17028
867 사순절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라! [13] 2011-03-21 17008
866 대림절 임마누엘 예수 [17] 2007-12-23 16940
865 대림절 성령 세례와 심판 [36] 2009-12-14 16936
864 부활절 나를 따르라 (요 21:15-19) [10] 2013-04-14 16929
863 주현절 하나님의 은폐, 하나님의 침묵 [17] 2010-01-18 16918
862 성령강림절 대재앙 앞에서 [8] 2008-05-25 16773
861 주현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24] 2011-01-09 16767
860 창조절 삭개오 이야기 (눅 19:1-10) [14] 2016-10-30 16738
859 사순절 믿음이란 무엇인가? [11] 2008-02-17 16660
858 성탄절 성탄에 참여하는 길 [18] 2007-12-25 16646
857 부활절 예수는 왜 선한 목자인가? [11] 2009-05-04 16643
856 성령강림절 믿음과 종됨의 관계 file [18] 2010-10-04 16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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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3 사순절 여호와는 가까이 계시다 (사 50:4-9) [10] 2013-03-24 16535
852 대림절 주의 길을 준비하라! (눅 3:1-6) [11] 2012-12-09 16528
851 기타 다윗왕조의 존재근거 [1] 2006-08-06 16462
»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이다! [12] 2011-05-22 16411
849 대림절 주의 날과 십일조 [49] 2009-12-07 16383
848 성령강림절 믿음과 행함의 긴장관계 [25] 2009-09-14 16341
847 기타 생명이 죽음을 삼키다, 7월2일 2006-07-02 16335
846 성령강림절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눅11:5-13) [10] 2013-07-29 16311
845 성령강림절 예수 그리스도는 누군가? [16] 2010-07-19 16285
844 성령강림절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삼상 17:32-49) [8] 2015-06-21 16245
843 창조절 제자의 길과 소유의 길 (눅 14:25-33) [10] 2013-09-08 16150
842 기타 하늘생명의 밥 [1] 2006-08-20 16136
841 성령강림절 예수는 생명의 밥이다 [22] 2009-08-10 16096
840 주현절 성령 임재와 마술 [21] 2010-01-11 16084
839 성령강림절 요한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 [17] 2009-07-27 16052
838 성령강림절 은혜의 보좌 앞으로! [28] 2009-10-26 16038
837 주현절 하나님의 ‘선택의 신비’ [10] 2011-01-17 16024
836 성령강림절 천국, 질적인 변화의 세계 [18] 2011-07-24 15989
835 기타 낡은 것과 새것 [2] 2004-07-02 15968
834 주현절 이사야 예언의 성취 (눅 4:14-21) [7] [1] 2013-01-27 15963
833 사순절 “나는 아니지요?” [23] 2011-04-18 15912
832 성령강림절 세례 요한의 죽음 (막 6:14-29) [10] 2015-07-13 15847
831 기타 메시야니즘의 기초 [1] 2008-05-01 15817
830 기타 하나님을 알자 [4] 2004-06-30 15815
829 주현절 가난한 사람들 [23] 2011-02-06 15797
828 기타 신앙적 일상과 재림신앙 [2] 2006-10-15 15751
827 사순절 여호와를 알리라! [16] 2011-04-11 15736
826 성령강림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6] 2008-06-08 15730
825 주현절 영적 자유의 토대 [22] 2011-02-27 15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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