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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만과 게하시 (왕하 5:1-14)

성령강림절 조회 수 20322 추천 수 0 2013.07.08 09: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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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열왕기하 5:1-14 

나아만과 게하시

왕하 5:1-14, 성령강림절후 제7주, 7월7일

 

 

오늘 우리는 제1독서에서 까마득하게 오래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기원전 9백년 어간 북이스라엘에서 벌어졌던 이야기입니다. 지금부터 2천9백 년 전 이야기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에는 유명한 선지자 두 사람이 활동했습니다. 한 사람은 엘리야이고 다른 한 사람은 엘리사입니다. 이 둘은 사제지간입니다. 불수레를 타고 승천했다고 알려진 엘리야 시대가 끝난 뒤에 엘리사가 뒤를 이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아람(수리아)과 경계를 맞대고 있었습니다. 그 두 나라는 서로 싸우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평화롭게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대로 괜찮게 지내던 시절에 어떤 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 내용이 오늘 설교 본문인 왕하 5:1-1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

아람에는 나아만이라 이름 하는 유명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에 대해서 성서본문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나아만은 아람이 큰 위기에 빠졌을 때 용맹을 떨친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아람 왕 아래서, 요즘 식으로 국방 장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나병 환자’였습니다. 한센병이라 불리는 이 나병은 지금도 천형으로 불릴 정도로 고치기 힘든 난치병이었습니다. 그 병에 걸린 사람은 격리되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완전히 격리되지 않을 걸 보면 그의 병이 나병이라기보다는 악성 피부병에 가까워 보입니다. 고대인들은 그것을 구분하지 못해서 뭉뚱그림으로 나병이라고 불렀습니다.


나아만의 집에는 이스라엘에서 온 젊은 여자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아람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벌일 때 아람에 의해서 포로가 되어 나아만 장군의 집에 와서 집안일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당시 전쟁은 늘 그런 식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지면 당장 사람이 죽고, 도시가 파괴될 뿐만 아니라 많은 재물을 강탈당하고 사람마저 포로로 잡혀 갑니다. 이 이스라엘 여자는 나아만의 집에서 주인과 좋은 관계를 맺고 지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나아만의 아내인 여주인에게 나아만 장군의 병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자기의 고국인 북이스라엘의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에게 가면 나아만 장군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 일개 여종의 신분으로 집주인에게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쉽지 않습니다. 포로로 잡혀 온 여자의 말을 집주인이 귀담아 듣기도 어렵습니다. 이 여자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여주인과 허물없이 지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어쨌든지 나아만은 이스라엘 여자의 말을 듣고 왕에게 가서 사마리아에 다녀올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왕이 거절할 리가 없습니다. 나아만은 국가를 구한 장군이었으니까요. 나아만의 병이 낫기만 한다면 나라의 반이라고 떼어주고 싶었을 겁니다. 왕은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는 친서를 나아만의 손에 들려 보냅니다. 친서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이 친서를 받아든 이스라엘 왕은 사색이 되어 옷을 찢었다고 합니다. 고칠 수 없는 나병을 고쳐달라는 아람 왕의 요구는 아람이 이스라엘을 군사 공격하기 위해 트집을 잡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엘리사는 왕에게 나아만 장군을 자기에게 보내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이 엘리사의 집 문에 당도했습니다. 그 장면을 성서기자는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지만,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아람은 당시에 주변을 압도할 정도로 큰 나라였습니다. 나아만은 왕을 옆에서 모시는 국방장관이자 경호실장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람의 제 2인자인 셈입니다. 나아만의 행차는 아주 당당했을 겁니다. 그가 아람을 출발할 때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옷 열 벌을 갖고 왔다고 합니다. 요즘 식으로 바꾸면 수억 원 이상 되는 선물 보따리입니다. 수행원들의 숫자도 적지 않았겠지요. 그가 지금 엘리사의 집 앞에 당도한 겁니다. 동네 사람들도 구경나왔겠지요. 엘리사가 당장 뛰어나가 나아만을 맞이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심부름 하는 사람을 시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말만 전했습니다. 나아만은 모욕적으로 느꼈습니다. 그럴만합니다. 혹시나 해서 병을 고쳐보려고 왔지만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12절) 그리고 곧장 돌아섰습니다. 그의 수행원들이 밑져야 본전이니 엘리사의 말을 일단 따르라고 조언했습니다. 나아만은 그 조언을 받아들여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그의 피부가 아이의 피부처럼 깨끗해졌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나요? 선지자 엘리사의 초자연적인 카리스마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엘리사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많이 행한 선지자입니다. 오늘 본문 앞과 뒤에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성서기자들은 엘리사 선지자의 초능력적인 카리스마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이 중요합니다. 바로 그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전하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바로 이어지는 왕하 5:15-19절에 나아만 장군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가 나옵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나아만이 사마리아의 흙을 노새 두 마리에 실어서 고국으로 가져간 사건입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만 희생 제사를 드리겠다는 상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아람 왕을 도와서 림몬 신당에서 제사를 드리더라도 용서해달라는 언급입니다. 나아만은 비록 아람이라는 이방 나라의 장군이었지만 하나님을 바로 인식하고 바로 섬기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의 요청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으로 나아만의 이야기는 해핑 앤딩으로 끝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왕하 5:20절 이하에서 이 이야기가 더 이어집니다. 엘리사의 사환, 또는 제자인 게하시의 등장입니다.

 

게하시

게하시는 엘리사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재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나아만은 병이 나은 걸 감사하는 마음으로 엘리사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 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거절했습니다. 나아만이 다시 강력하게 말했으나 엘리야는 다시 거절했습니다. 나아만은 어쩔 수 없이 고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옆에서 보고 있던 게하시는 엘리사 몰래 나아만을 뒤좇아 가서 엘리사의 심부름이라 하면서 은과 옷을 달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아무 보답도 못한 것이 내심 찜찜했었습니다. 게하시가 요구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게하시는 그걸 집에 감추고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엘리사 앞에 섰습니다. 엘리사가 묻습니다. 어디 갔다 오느냐? 게하시가 대답합니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았습니다. 엘리사는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이할 때에 내 마음이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왕하 5:26) 이 말을 들은 그 순간에 게하시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그는 엘리사와 오랫동안 함께 생활한 사람입니다. 엘리사가 어떤 능력이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알면 어쩌나 하고 마음 한편이 불안했었겠지요. 그래도 이번 사건만큼은 엘리사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사실 그대로 발각된 겁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겁니다.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이렇게 책임을 물었습니다.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왕하 5:27) 게하시는 부끄러움으로 얼굴도 들지 못하고 엘리사 앞에서 물러나왔습니다. 그러자 곧 나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평소에도 엘리사를 이렇게 속이곤 했을까요? 몇 가지의 추정이 가능합니다. 게하시가 원래 물질적인 욕심이 많았을지 모릅니다. 이건 게하시만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사람은 누구나 돈에 욕심을 냅니다. 욕심이라고까지는 하지 않아도 그런 유혹을 늘 받습니다. 아니면 게하시에게 갑자기 큰돈을 쓸 일이 생긴 것인지도 모릅니다. 엘리사의 제자로서, 또는 수행비서로서 활동했으니까 게하시에게 재정적인 여유는 없었을 겁니다. 또는 엘리사가 돈에 대해서 너무 청렴하니까 이렇게 몰래 비자금으로 숨겨두었다가 위급할 때 엘리사를 위해서 돈을 쓰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또 하나의 추정은 이방인에 대한 적대감입니다. 나아만에게서 이런 돈이라도 받아내는 게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의 정당한 권리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엘리사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에게서 일정한 액수의 기부금을 받아서 엘리사 선지학교의 운영기금으로 사용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번에는 돈이 많은 나아만의 병을 고쳤으니까 기부금을 좀더 두둑하게 받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게하시가 도적질을 한 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의 것을 약탈한 것도 아닙니다. 당연히 받아야 할 걸 받은 것입니다. 나아만도 보답의 기회를 얻게 되어서 기뻐했습니다. 그런데도 게하시는 엘리사에게 크게 꾸지람을 듣고 나병에 걸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무엇이 실체적 진실인지를 지금 우리는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이런 일련의 이야기를 통해서 성서기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이 이야기에는 세 인물이 나옵니다. 엘리사, 나아만, 게하시입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이방 사람이었지만 나병이 나았고, 게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오히려 나병에 걸렸습니다. 평생 우상을 섬기면 살았던 나아만과 평생 엘리사 곁에서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던 게하시의 운명이 역전되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전하는 성서기자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엘리사가 게하시를 책망하면서 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26절) 게하시의 잘못은 때를 분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할 때입니다. 모든 것을 물질적인 손익계산으로만 생각하는 세상의 논리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닙니다. 그걸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병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이미 나병에 걸린 겁니다. 나병은 피부가 곰팡이류에 오염되어서 결국 모든 감각을 잃게 되는 병입니다. 불에 닿아도 그 뜨거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게하시의 나병은 단지 육체적인 나병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더 근본적으로 영적인 나병이 문제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감각이 죽는 겁니다. 성서기자는 이방인 나아만이 이제 영적 감각이 살아났고, 거꾸로 하나님의 백성인 게하시가 영적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인 게하시만이 아니라 북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영적으로 무감각한 병에 걸렸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닐까요?


시대에 대한 영적 분별력이 무감각해졌다는 말을 실질적으로 생각하십시오. 그런 상태에 들어가면 본인이 그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어떤 집단이나 어떤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총체적으로 무감각해질 수도 있습니다. 지난 인류 역사에서 그런 것을 우리는 많이 경험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기도 했습니다. 경제 성장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지금 이 시대는 영적으로 나병환자입니다. 웬만한 자극을 받아도,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도 영혼이 별로 아프지 않습니다. 조금 생각이 살아있는 사람들도 세상이 다 그런 건데 어쩔 수 없지 하고 그냥 지나갑니다. 성서기자는 지금 게하시 사건을 통해서 북이스라엘을 향해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지금이 어찌 ... 받을 때이냐.’


어떻게 때에 대한 분별력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그 답을 여러분은 이미 아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로 깊이 들어가는 게 성서가 제시하는 답입니다. 이를 너무 뻔한 답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이는 마치 바흐의 <파르티타>를 듣고 별 거 아니네, 지루하네, 하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적인 분별력이 회복된다는 말은 다음의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합니다. 첫째, 하나님 경험은 절대 생명에 대한 경험입니다. 이런 경험이 있다면 우리의 분별력을 떨어뜨리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둘째, 우리의 인식은 근본적으로 성령의 빛 비춤에 의해서 열립니다. 분별력은 우리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이해되십니까? 동의하십니까? 그런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고, 생명의 영이고, 진리의 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로 하나님의 ‘때’를 바르게 분별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영적인 나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 설교듣기는 서울샘터교회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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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6]리옹~

July 10, 2013
*.45.241.141

하루를 말씀으로 열 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영적으로 무감각하고 오히려 영적인 귀차니즘에 허우적거리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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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10, 2013
*.94.91.80

제 설교가 리옹 님의 삶에 도움이 된다니 다행입니다.
같은 시대에 살면서 같은 기독교 신앙으로 교제한다는 게
생각해보면 대단히 특별한 일이지요.
그것이 특히 다비아 사이트를 통해서 이뤄지고 있군요.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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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굶주린 늑대 

July 10, 2013
*.18.118.229

좀 이상한 질문일지 모르겠지만,
이스라엘 역사에서 은이나 옷이나 양이나 소를 받은 때가 있었나요?

딱히 기억나는 것은 출애굽 당시 이웃집에 패물을 구한 것, 가나안 정복시 전리품을 챙긴 정도 입니다.

 ‘지금이 어찌 ... 받을 때이냐.’

그런 것을 받거나 구해도 좋은 때가 있었나요?

이 역시 종말론적 고백 혹은 이스라엘의 메시아 신앙인지 궁금합니다.

아니면 저 역시 마음 한구석에서 그런 것을 구하고 있어서
이런게 궁금한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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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10, 2013
*.94.91.80

이상한 질문은 아니에요.
이스라엘 역사에 뇌물을 받던 때는 많았어요.
'지금이... 받을 때냐' 하는 문장은
받아도 좋을 때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 문제점을 강조하는 문학적 수사입니다.
종말, 메시아 신앙 등등을 연결하는 것은
여기서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예거 님이 지금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폭 넓고 깊게 생각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고요.
'있는 그대로' 볼 필요가 있어요.
profile

[레벨:20]굶주린 늑대 

July 11, 2013
*.18.118.229

'때' 라는 것에 집착해서 '받을 때'라는 것에 머무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을 기억할 때' 라는 것을 떠올린다면
굳이 '받을 때' 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을 것 같은데,
복잡하게 생각한 것보다 오히려 너무 단순하게 생각해버린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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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March 18, 2014
*.220.104.49

하나님과 멀어지거나 아니면 하나님께로 집중을 하거나 하는 상황을 잘 모른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서서히 뜨거워지는 물속의 개구리 같은 상황에 있는지 누가 얘기해도 귀 닫다가 큰변 당합니다. 경고이자 일깨움까지 저에게 말씀해주시는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목사님께 마음을 열게 해준 성령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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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3 기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1] 2004-07-05 9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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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1 기타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2004-07-18 9670
980 기타 믿음과 사랑의 뿌리, 7월25일 2004-07-25 9347
979 기타 말씀 망각의 심판, (8월1일) 2004-08-05 8602
978 기타 기도란 무엇인가? (8월8일) [2] 2004-08-08 12854
977 기타 모세의 소명, 2004.8.15. 2004-08-16 9737
976 기타 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2004-08-22 9414
975 기타 평화를 위한 분열, 8월29일 [5] 2004-08-30 8486
974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449
973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9169
972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935
971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299
970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342
969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308
968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176
967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683
966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363
965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300
964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376
963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9079
962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428
961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136
960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8956
959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516
958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637
957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659
956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483
955 기타 세례 요한의 증언, 1월16일 [1] [1] 2005-01-17 13041
954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622
953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1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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