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3

여호와는 구원자다! (렘 31:7-14)

성탄절 조회 수 9711 추천 수 0 2014.01.05 23:43:32
설교듣기 : https://youtu.be/lQW2qxSji-U 
성경본문 : 예레미야 31:7-14 

여호와는 구원자다!

렘 31:7-14, 성탄절후 둘째 주일, 2014년 1월5일

 

 

7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여러 민족의 앞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기뻐 외치라 너희는 전파하며 찬양하며 말하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8 보라 나는 그들을 북쪽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 그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이 곳으로 돌아오리라 9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아니하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10 이방들이여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 떼에게 행함 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11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원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속량하셨으니 12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복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리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어다 13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라 14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며 내 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시간 여행이 가능할까요? 21세기에 사는 우리가 5세기의 삼국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이론적으로는 시간 여행이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한 이유가 여러 가지입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빛보다 빠른 비행체를 만들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생각을 통해서는 지금도 시간 여행이 가능합니다. 5백 년 전, 또는 천 년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공부하면 됩니다. 그게 역사공부입니다. 역사공부를 통해서 옛날로 돌아갈 수도 있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을 읽을 수 있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도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인 구약을 읽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읽은 구약성경 중의 하나가 오늘 설교 본문인 예레미야입니다. 이제부터 예레미야 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나겠습니다.

이 여행을 하려면 2천6백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활동한 시대가 기원전 7세기였으니까요. 렘 31:7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구절에서 당시 상황을 어느 정도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여러 민족의 앞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기뻐 외치라. 너희는 전파하며 찬양하며 말하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라는 표현에서,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 시대에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북쪽을 이스라엘이라 부르고, 남쪽을 유다라 불렀습니다. 이스라엘은 기원전 721년경에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서 멸망당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포로로 잡혀 가거나 여러 곳으로 흩어졌고, 그 지역에는 또 다른 나라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소수의 남은 자가 된 겁니다.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처량한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남쪽 유다는 아직 멸망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위기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요시아 왕이 개혁운동을 펼치다가 전사한 뒤로 개혁운동은 더 이상 진도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는 열강들이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서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중입니다.

예레미야가 선포하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신다는 겁니다. 그 구원을 8,9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남은 자들은 흩어진 이들입니다. 북쪽 땅과 땅 끝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이씨조선이 끝날 무렵 우리 선조들도 일제치하를 거치면서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등으로 흩어진 것과 비슷합니다. 그들 중에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조국으로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그 남은 자들을 불러 모아 구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맹인, 다리 저는 사람,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포함됩니다. 이런 분들은 다른 이들의 도움을 통해서만 생존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정이 딱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감격해서 ‘울며 돌아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돌아올 때 넘어지지 않게 하고 ‘물 있는 계곡’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물은 생존의 필수품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생존을 지켜주어 고국, 고향, 시온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러 모아 구원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아버지이고,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장자이기 때문입니다(9b절).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불러 모아 지키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10-14절에서 다시 한 번 더 이방인들에게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방, 즉 온 세계에 분명하게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 내용은 앞 단락의 것과 비슷합니다. 남은 자의 구원이 어떤 상태인지가 12절에 시적인 문장으로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복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리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어다.

 

예레미야가 내다본 세상은 정말 놀랍습니다. 이사야 선지자 못지않은 영적 상상력이 눈에 보입니다. 모두가 풍요롭게 살고 근심 없이 사는 세상입니다. 완전한 복지가 실현된 세상입니다. 13절에도 비슷한 내용이 반복됩니다. 처녀들이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노인은 함께 즐거워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슬픔이 즐거움으로 변하게 됩니다. 근심이 변해서 기쁨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4절에서는 ‘내 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고 선포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본문에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는 분명합니다.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 여호와야말로 참된 구원자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들은 예레미야의 이런 선포를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는 양떼와 소떼를 얻고 크게 기뻐할만한 상황이 아닙니다. 북이스라엘은 그야말로 패전국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남유다도 별로 기대할 만하지 못했습니다. 주변의 강대국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유다 사람들을 먹잇감 정도로 여길 뿐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무모해 보이는 말씀을 선포한 것일까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여기에 합당한 근거가 될까요? 이는 마치 북한이 곧 일류 국가가 될 거라는 말과 비슷한 정도로 근거가 빈약해보입니다.

우리는 이런 고백과 선포가 예레미야의 고유한 영적 통찰이며, 그의 믿음이고, 그가 경험한 신탁이었기에 얼마나 객관적인 근거가 있냐, 하고 질문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음의 질문이 더 합당합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역사에서 성취되었을까요? 그 답은 여러분이 이미 잘 아십니다.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있은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남유다도 바벨론에 의해서 패망했습니다. 바벨론 포로 시절이 50 여년 이상 흐른 뒤에 유다가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을 받기는 했으나 그들의 운명은 여전히 혹독했습니다. 근심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만족이 없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만이 아니라, 그리고 유대인들의 역사에서만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게 참으로 이상합니다. 모두가 바라는 역사의 목표인데 그게 성취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쉽게 생각해보십시오. 양떼와 소떼가 늘어나면 서로 사이좋게 나누면서 평화롭게 사는 게 아니라 서로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다툽니다. 앗시리아와 바벨론이 힘을 잃으면 뭔가 세상이 완전히 달라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래서 소외된 이들까지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으려니 기대했지만 또 다른 세력이 나타나서 죽기 살기로 싸울 뿐입니다. 그걸 우리는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페르시아가 나타나고, 로마가 나타나고, 스페인, 영국, 독일, 일본, 중국, 미국 등이 나타나서 구약시대의 앗시리아와 바벨론이 보였던 패권을 그대로 행사합니다. 지금 대한민국도 그런 패권을 쥐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기업체와 학교들끼리도 끝없이 싸웁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이 실존적으로 죄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일까요? 답답합니다. 어쨌든지 예레미야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게 이뤄질 조짐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의 선포는 우리에게 무의미할까요? 성경으로서의 권위는 없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선지자들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기에 잘못 본 부분이 있지만 근본에서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남은 자를 구원하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흩어진 자를 모으고 구원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원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속량하셨으니...”라는 말은 옳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방식과 때만은 예레미야가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레미야가 선포한 여호와의 구원이 예레미야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순간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성취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취입니다. 양떼와 소떼를 늘려주는 방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와의 일치되는 방식입니다. 모든 장애를 한꺼번에 고치는 방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하는 방식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궁극적으로 구원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이런 기독교 신앙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겁니다. 기독교가 너무 개인주의로 떨어졌다고 비판합니다. 기복주의에 떨어졌다는 뜻입니다. 일리 있는 비판입니다. 그런 비판을 들을만한 요소가 우리에게 적지 않습니다. 미국과 한국교회의 신앙은 사적인 차원으로 떨어진 게 분명합니다. 예수 잘 믿어서 복 받아서 행복하게 사는 것을 기독교 신앙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공적인 영역은 뒤로 미뤄집니다. 세상이 아무리 불의해도 교회만 잘 나오면 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가 사회혁명의 선봉자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빈익빈부익부의 왜곡된 질서를 맞서 싸워야 한다는, 즉 사회구원이 우선적이라는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은 주로 남미의 해방신학과 한국의 민중신학에서 나옵니다.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으나 극단적으로 그쪽에 치우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런 문제들은 신자들 개개인이 서 있는 자리에서 각자 능력만큼 행하면 됩니다. 교회가 전체적으로 거기에 매달릴 수는 없습니다. 사회혁명이 잘못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방식으로는 참된 만족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되지 못했다는 것도 이런 뜻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개인의 복만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사회혁명에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 사건에 몰입하는 것입니다. 그 사건을 경험하는 게 신앙의 시작이자 마지막입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기독교인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가, 하는 건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그건 각자가 선택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소박한 행복을 추구할 사람들은 그렇게 하시고, 사회운동을 하실 분들은 그렇게 하시고, 예술에 심취할 분들은 그렇게 사십시오. 예수 사건을 경험한 깊이만큼 그 삶의 자리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선적인 것은 예수를 통한 구원 경험입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에게 집중했습니다. 오늘 제2 독서인 엡 1:3-14절에서 바울은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합니다. 3절을 읽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겁니다. 그걸 아는 사람은 삶이 자기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아도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힘들기도 하고 짜증이 날 때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찬송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예레미야가 내다본 양떼와 소떼가 없어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바로 그 사실을 예수의 운명에서 경험했습니다. 삶의 어떤 조건이나 사회적 신분에 상관없이 찬송할 수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런 경험이 있는지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그런 인식과 경험이 없으면 우리가 아무리 진실하게 세상을 산다고 하더라도 예레미야의 영성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옳지만 궁극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정의감에 불타긴 하지만 참된 기쁨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복을 인식하고 경험했습니다.

우리를 찬송하게 만드는 신령한 복, 예레미야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신령한 복이 무엇인지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할까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는 분들은 이미 알고 있으니 설명이 필요 없고, 모르는 분은 설명을 들어도 알 수 없으니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이것은 설명으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신령한 복 자체는, 즉 구원 경험은 설명할 수 없고 손가락으로 지시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전하는 게 좋겠습니다. 눅 15:11-32절에는 소위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 내용은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탕자인 둘째 아들은 아버지 품을 떠났다가 고생 끝에 아버지를 기억해냅니다. 그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신령한 복이었습니다. 그의 모든 잘못까지 덮어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범생이었던 큰 아들은 아버지의 그런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설명해줘도 모릅니다. 그는 동생을 위한 잔치가 열리는 동안 불평만 했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모든 차이를, 모든 이데올로기를, 모든 시시비비를 덮어주는 아버지의 사랑에서 구원을 보았습니다. 선만이 아니라 악까지 구원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극치가 예수 사건이었습니다. 이게 너무 막연한가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뭔가 화끈한 것으로 경험되지 못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오늘 제3 독서인 요 1:9-11절은 세상을 비추는 빛이 왔으나 사람들이 그 빛을 알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오늘 꽤나 먼 시대를 시간 여행하듯이 돌아왔습니다. 예레미야 시대로부터 초기 기독교 시대를 거쳐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가 구원자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았습니다. 여기까지만 생각하면서 살아도 하나님께서 기특하게 여기실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머물 수 없습니다. 한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본 여호와의 구원은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으로 근본이 훼손된 우리가, 그래서 죽는 순간까지 방황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돌아갈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profile

[레벨:18]부스러기 은혜

January 06, 2014
*.36.153.213

초대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되심을,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경험을 어떻게 그리도 쉽게(?) 할수 있었을까요?

당시 활동하신 예수님을 직간접으로 경험함으로?
직간접으로 경험한 부모, 이웃,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
참 궁금합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의
경험이 쉽지 않음은
내가 대망하고 있는 메시아가
당시 유대인들 가졌던
메시아관의 범주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탓이 아닌지요?

만약 그렇다면
저들의 실패를 우리 역시 고스란히 되풀이
하고 있으니
저들의 실패와 비극의 역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우리의 운명 또한
저들과 크게 다를바 없는 건가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January 07, 2014
*.94.91.64

부스러기 님, 
많은 분들에게 유익한 질문을 주셨네요. 
약간의 혼동이 있군요.
예수에 대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메시아 경험이
쉽게(?), 단숨에, 확정적으로 일어난 게 아니랍니다.
그들에게도 반복해서 의심이 일어났어요.
예수 경험은 긴 시간에 천천히 자리를 잡은 겁니다.
부활 경험은 순간적으로 일어난 게 아니냐, 하고 생각하시나요?
죽은 지 3일만에 말이죠. ㅎㅎ
아니에요.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쉽지 않네요.
설명하지 않겠어요.
예수 부활 경험도 긴 과정이었다고만 말씀드립니다.
초기 기독교 신앙이 그런 과정에서 실패할 수도 있었고,
다른 길로 나갈 수도 있었어요.(당시 이단들에게서 보듯이)
유대교의 아류로 떨어질 수도 있었고,
소수 열광주의자들로 떨어질 수도 있었고,
신비적 영지주의자들로 떨어질 수도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오늘의 역사에 살아남은 기독교가 된 겁니다.
오늘의 기독교도 완성된 게 아니에요.
초기기독교부터 지금까지의 역사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어요.
진리를 향한 거룩한 싸움은 필요한 거지요.
단순히 시대정신에 영합하다보면
기독교가 무당종교로 떨어지든지
처세술이나 심리치료를 위한 단체가 되든지...
미래에 어떤 공동체가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깨어 있어야겠지요. 
그분의 선하심을 믿구요. 
2천년 기독교 전통을 공부 잘 하구요. 
주의 평화가! 

profile

[레벨:9]길위의벗

January 07, 2014
*.187.222.15

예레미야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순간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성취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완성 또한
사도들과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순간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성취될 수도 있는 거죠?
미래는 열려있고 열려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기도 하니깐요.

아무튼
목사님의 설교는
기독교의 심장을 뚫고 들어가서 좋아요.
본질이 아닌 건 내버려 두시니깐요.
사회운동, 예술, 구제 등이 사회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지만 그 자체가 기독교의 핵심은 아니니깐요.
설교자는 도덕 선생이 아니니깐요.
그런 건 기독교 심장을 뚫고 들어간 각자가
알아서 선택하겠지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January 07, 2014
*.94.91.64

좋아요.
그 길로 계속 가봅시다.
기독교 신앙의 심장 안으로 들어가서
생명의 진수를 영혼 전체로 받아봅시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도
믿질 일은 전혀 없으니 안심합시다.

profile

[레벨:13]진인택

November 28, 2014
*.176.175.230

목사님 안녕하세요. 오늘 말씀 후반부를 읽어보니 몸둘 바를 모르겠니다. 신령한 복을 제대로 모르고 멀리한 탕아가 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게 있어서 자유가 참으로 유독한 유혹입니다. 맘대로 들어왔다가 나갔다 하니 부끄럽습니다. 오늘 말씀 가슴속에 느끼면서 궁금해하면서 말로는 표현하기가 뭔가 모자라서 참아왔던 내용들이 시원하게 풀려 나가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말씀의 감동을 넘어서 예수님의 구원이 나에게 더 크게 감동과 복으로 오도록 저 또한 공부하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November 28, 2014
*.94.91.64

진인택 님도 안녕하셨어요?

제 설교의 한 대목이 진인택 님에게

은혜의 통로가 되었다니,

저도 기쁩니다.

이제 11월도 다 가는군요.

돌아오는 주일은 2014-2015년 교회력 시작인

대림절 첫주일입니다.

기쁨의 대림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sort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71326
1052 성령강림절 음란한 여자와 결혼한 호세아 [21] [1] 2010-07-25 34788
1051 성령강림절 구름기둥과 불기둥 [25] 2009-11-23 30200
1050 사순절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의 [8] 2010-02-22 28010
1049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의 하나님 [6] 2008-05-18 27923
1048 성령강림절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가? [8] [1] 2010-07-05 26705
1047 성령강림절 토기장이 하나님 [11] 2010-09-06 26642
1046 사순절 여호와를 찾으라, 부르라! (사 55:1-9) [17] [3] 2013-03-03 26496
1045 사순절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 (겔 37:1-14) 2017-04-02 26174
1044 성령강림절 이삭의 하나님, 이스마엘의 하나님? [8] 2008-06-15 25876
1043 부활절 간질병과 믿음 (마 17:14-20) [8] 2008-05-04 25715
1042 부활절 ‘여호와 이레’의 믿음 [23] [39] 2009-05-11 25434
1041 창조절 이방인 나병환자의 믿음 (눅 17:11-19) [10] 2013-10-13 24975
1040 성령강림절 성령을 받으라! (요 20:19-23) [13] 2011-06-12 24785
1039 성령강림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17] 2010-06-27 24515
1038 주현절 은사와 성령 (고전 12:1-11) [6] 2013-01-21 23997
1037 성탄절 은총의 깊이로! [14] 2010-12-26 23806
1036 성탄절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2009-12-28 23748
1035 성령강림절 모세의 무덤이 없는 이유 [28] 2008-10-19 23742
1034 기타 성만찬 공동체 [2] [1] 2006-09-10 23507
1033 사순절 빛의 자녀, 빛의 열매 [25] 2011-04-03 23496
1032 창조절 마지막 심판과 생명 완성 (마 25:31-46) [15] 2011-11-13 23476
1031 창조절 하나님께 마음을 두라! (살전 2:1-8) [6] 2011-10-23 23319
1030 창조절 삭개오 이야기 (눅 19:1-10) [14] 2016-10-30 23042
1029 부활절 부활의 증인 공동체 [17] 2011-05-01 22622
1028 성탄절 그리스도의 평화 (골 3:12-17) [9] 2012-12-30 22610
1027 성령강림절 기도와 믿음 file [20] 2010-10-19 22484
1026 대림절 주의 길을 준비하라! (눅 3:1-6) [11] 2012-12-09 22291
1025 대림절 소망의 하나님, 우리의 소망 file [5] 2010-12-06 22194
1024 기타 다윗의 통곡 [1] 2006-08-27 22085
1023 주현절 두려워 말라! (사 43:1-7) [11] [1] 2013-01-13 21934
1022 성탄절 영광과 평화의 노래 2010-12-26 21869
1021 성령강림절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 file [12] 2010-11-22 21869
1020 성령강림절 복음의 능력, 믿음의 능력 [10] 2009-11-02 21820
1019 성령강림절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삼상 17:32-49) [8] 2015-06-21 21554
1018 창조절 불행한 부자 이야기 (눅 16:19-31) [10] 2013-09-29 21257
1017 성령강림절 믿음과 구원 file [4] 2010-10-31 21162
1016 부활절 나를 따르라 (요 21:15-19) [10] 2013-04-14 21114
1015 대림절 성령 세례와 심판 [36] 2009-12-14 20932
1014 성령강림절 영적인 사람 [11] 2008-05-11 20888
1013 주현절 예수는 하나님의 지혜다 [3] 2011-01-30 20885
1012 대림절 임마누엘 예수 [17] 2007-12-23 20623
1011 사순절 우리의 생각과 다른 하나님 [2] 2010-03-08 20607
1010 성령강림절 의인과 죄인에 대한 질문 [3] 2008-06-01 20550
1009 사순절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 [11] 2010-03-29 20504
1008 성령강림절 나아만과 게하시 (왕하 5:1-14) [6] 2013-07-08 20436
1007 창조절 하나님과 금송아지 상 (출 32:25-35) [7] 2011-10-17 20330
1006 창조절 예수 재림과 영적 각성 (살전 4:13-18) [11] 2011-11-06 20288
1005 기타 사람 차별 마시오! [1] [2] 2006-09-24 20233
1004 부활절 예수의 기이한 빛 (베드로전서 2:1-10) [16] 2011-05-16 20232
1003 대림절 주의 날과 십일조 [49] 2009-12-07 20177
1002 사순절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 [18] 2011-03-27 20064
1001 기타 무엇을 기다리는가? [3] [2] 2004-06-14 20058
1000 주현절 창조의 빛, 인식의 빛 [15] 2009-02-23 20022
999 기타 높은 사람, 낮은 사람 [2] [2] 2006-10-08 19907
998 부활절 막달라 마리아와 부활의 주 [17] 2011-04-24 19771
99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의 가난과 우리의 부요 [23] 2009-07-13 19721
996 기타 예배로서의 삶 [5] [1] 2006-09-03 19645
995 성령강림절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 [8] 2010-08-09 19598
994 성령강림절 세례 요한의 죽음 (막 6:14-29) [10] 2015-07-13 19589
993 사순절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26] 2009-04-06 19539
992 성탄절 성탄에 참여하는 길 [18] 2007-12-25 19530
991 기타 다윗왕조의 존재근거 [1] 2006-08-06 19521
990 부활절 예수는 왜 선한 목자인가? [11] 2009-05-04 19509
989 대림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file [8] 2010-12-20 19435
988 주현절 포도주 사건의 실체와 의미 [20] 2007-01-14 19392
987 사순절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과 믿음 [27] 2010-03-22 19227
986 성령강림절 하나님은 누구인가? file [8] 2010-09-26 19212
985 사순절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라! [13] 2011-03-21 19183
984 기타 생명이 죽음을 삼키다, 7월2일 2006-07-02 19181
983 창조절 제자의 길과 소유의 길 (눅 14:25-33) [10] 2013-09-08 19178
982 성령강림절 믿음과 종됨의 관계 file [18] 2010-10-04 19173
981 주현절 이사야 예언의 성취 (눅 4:14-21) [7] [1] 2013-01-27 19166
980 성령강림절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눅11:5-13) [10] 2013-07-29 19152
979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이다! [12] 2011-05-22 19119
978 성령강림절 은혜의 보좌 앞으로! [28] 2009-10-26 19059
977 사순절 여호와는 가까이 계시다 (사 50:4-9) [10] 2013-03-24 19036
976 주현절 원수사랑, 가능한가? [16] 2011-02-22 18963
975 주현절 하나님의 은폐, 하나님의 침묵 [17] 2010-01-18 18962
974 성령강림절 믿음과 행함의 긴장관계 [25] 2009-09-14 18915
973 주현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24] 2011-01-09 18903
972 사순절 믿음이란 무엇인가? [11] 2008-02-17 18881
971 성령강림절 한 말씀만 하소서 [17] 2010-06-07 18865
970 대림절 관용과 주의 재림 (빌 4:4-7) [7] [3] 2012-12-17 18855
969 주현절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고전 1:18-31) [16] 2014-02-02 18809
968 성령강림절 율법을 넘어서 [2] 2008-06-29 18642
967 기타 낡은 것과 새것 (고후 5:16-21) [2] 2004-07-02 18590
966 대림절 인자가 오리라 file [8] 2010-11-28 18563
965 사순절 유혹 받으신 예수 (마 4:1-11) [10] 2014-03-09 18512
964 창조절 하나님을 기억하라 (신 8:11-18) [16] 2011-11-21 18481
963 성령강림절 요한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 [17] 2009-07-27 18480
962 성령강림절 예수 그리스도는 누군가? [16] 2010-07-19 18435
961 주현절 하나님의 ‘선택의 신비’ [10] 2011-01-17 18427
960 성령강림절 대재앙 앞에서 [8] 2008-05-25 18362
959 성령강림절 솔로몬의 꿈 이야기 [27] 2009-08-31 18327
958 성령강림절 예수는 생명의 밥이다 [22] 2009-08-10 18322
957 주현절 성령 임재와 마술 [21] 2010-01-11 18287
956 대림절 그 날이 오리라! (렘 33:14-18) [16] [1] 2012-12-02 18247
955 기타 하나님을 알자 [4] 2004-06-30 18244
954 사순절 “나는 아니지요?” [23] 2011-04-18 18200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