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3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막 8:27-38)

창조절 조회 수 10096 추천 수 0 2015.09.14 21:47:29
설교듣기 : https://youtu.be/uqAeg3zASRI 
성경본문 : 마가복음 8:27-38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8:27-38, 창조절 둘째 주일, 2015913

 

27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예수는 누군가?’라는 질문은 기독교 신앙에서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이게 당연한 말 같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에게 관심 없는 기독교인들도 적지 않습니다. 들은풍월에 만족해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에서 묘사했듯이 예수 없이도, 아니 예수가 없어야 오늘의 교회는 잘 돌아갈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1) 교회에 나오면 뭔가 구원에 가까이 다가간 듯한 기분이 막연하게 들 수도 있습니다. 2) 신자들끼리의 친교도 중요한 이유가 됩니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경향이 강해집니다. 교회출입이 하나의 생활로 자리 잡는 겁니다. 3) 목사처럼 교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직업적인 차원에서도 교회에 열심을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예수님이 누군지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복음서는 예수가 누군지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제3 독서인 막 8:27절에서 예수님은 로마 황제를 기리는 도시 빌립보 가이사랴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에 대한 온갖 풍문이 나돌았습니다. 제자들은 그런 풍문을 정리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여긴다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세 명의 인물들은 유대인들에게 존경받는 이들입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유대 군중들이 예수님을 전체적으로 좋게 평가했다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 자신의 생각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표로 나서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29절의 말씀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야의 헬라어 번역입니다. 메시야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이는 곧 구원자를 가리킵니다. ‘주는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대답은 세례 요한과 엘리야와 선지자라는 유대 군중들의 대답과 차원이 완전히 다릅니다. 아주 위험한 발언입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세력을 상대화하기 때문입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바둑 동호회원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바둑을 두면서 서로 실력을 뽐냅니다. 어느 날 새 회원이 들어왔습니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왕년에 프로 기사로 활동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등장으로 인해서 다른 회원들의 실력은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이 발생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등장으로 인해서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그리고 모든 종교 권력 등은 그 지위를 잃게 되는 겁니다. 세상의 진정한 변혁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세상의 여러 권력이 그리스도를 용납할 수 없는 거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30절에서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사탄아!

예수님은 이어서 31절에서 자기에게 일어날 운명을 설명하셨습니다. 고난, 버림받음, 죽음, 부활입니다. 이 사실을 제자들은 이해할 수도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바로 앞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베드로가 다시 나서서 그런 일이 예수님에게 일어나면 안 된다고 말렸습니다. 베드로의 반대에는 악의가 전혀 없습니다. 자신들이 믿고 따르던 예수님을 위하는 순전한 마음으로 말한 것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이신데, 고난과 죽음이라니, 말도 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오히려 영광을 받아야 합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를 크게 꾸짖었습니다. 33절 말씀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사탄은 하나님에게 대립하는 세력을 가리킵니다. 이것보다 더 심한 비난은 없습니다. 예수님답지 않는 표현입니다. 내가 그 입장이라면 베드로를 잘 타이르고 말 것입니다. ‘자네가 나를 위해서 그런 말을 하는 건 고맙지만 나는 내 길을 가야하니 더 이상 나를 말리지 말게나.’ 예수님이 지나칠 정도로 강하게 비난한 이유는 이 문제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도 발생했습니다.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기도할 때 사탄에게서 유혹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을 세 공관복음서가 다 전합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사탄의 유혹을 받았다는 사실만 짤막하게 보도하는(1:12,13) 반면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그 내용을 자세하게 보도합니다. 마태와 누가에 따르면 이 유혹은 세 가지입니다. 1)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을 빵으로 변화시켜 보라. 2)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 3) 마귀에게 절하면 세상의 모든 부와 권력을 주겠다(4). 당신이 메시아라는 증거를 보이라는 요구이자 유혹입니다.

 

여기서 열거된 세 가지는 세상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들리는 것들입니다. 인생의 모든 곤란한 일들을 초능력적으로 해결해줄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국가 지도자가 되려면 이런 능력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면 이런 능력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삶에 지쳐 있는 민중들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실제로 벌어지는 운명은 이런 세 가지 능력과는 반대되는 고난, 버림받음, 죽음이었습니다. 누구라도 이런 운명을 피하고 싶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체포되기 직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자기 앞에 놓인 잔을 가능하면 치워달라고 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할 때 받았던 유혹이 공생애 전체를 관통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고난과 죽음이 예수님에게 일어나면 안 된다는 베드로의 말이 왜 인간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일까요? 우리는 그건 사람의 생각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냐.’라는 말을 종종 합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는 이 둘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예컨대 어떤 젊은이가 은혜를 받았다 해서 신학교에 가는 것이 꼭 하나님의 일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가 어떤 사안을 결정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자기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가장 소박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없었으면 부활도 없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역도 물거품이 되었을 거라고 말입니다. 이런 생각이 교리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옳은 것도 아닙니다. 이 문제를 좀더 근본적인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무()에서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능력의 존재라면 굳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과정을 거칠 필요 없이 말씀 한 마디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아사상이 바로 이것입니다. 메시아는 못하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전능자 메시아여야만 합니다.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는 그런 메시아사상이 있습니다. 그런 사상이 종교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정치와 경제와 사회문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와 로마의 카이저는 메시야, 즉 신()이었습니다. 그런 이들을 향해서 민중들은 열광적인 지지를 보냅니다. 그 지지를 바탕으로 황제들은 자기절대화의 길에 더 깊숙이 빠져듭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에서 누가 메시아 대접을 받을까요? 재벌 총수로 대표되는 경제 권력자들일지 모릅니다. 그들은 한국경제를 좌지우지 합니다. 대통령부터 소시민까지 경제에 매달립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 자체를 매도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거기에 완전히 지배당하게 되어 결국은 자유와 평화를 다 잃어버린다는 데에 있습니다.

 

다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갑시다. 예수님에게 고난과 죽음이 닥치면 안 된다는 베드로의 말이 왜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일까요? 여기서 논란의 핵심은 고난과 죽음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생각과 판단으로 제한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그리스도, 즉 메시아는 승리자이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의 메시아사상입니다. 이런 메시아사상에는 고난과 죽음이 개입될 수 없습니다. 실패는 있을 수 없는 말이 됩니다. 베드로는 이런 생각으로 예수님의 운명까지 규정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행태는 아무리 선의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일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닌 것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목숨을 얻는 길

예수님은 베드로를 책망한 뒤에 제자들에게 다시 말씀을 계속하셨습니다.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어서 36절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해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사탄이라 부르면서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꾸짖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의 일은 세상의 것을 소유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일은 자기 목숨을 얻는 것입니다. 목숨은 내적인 생명이라는 뜻의 헬라어 프시케의 번역입니다. 이 프시케야말로 참된 생명입니다. 베드로는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아사상에 근거해서 세상의 것을 얻는 데에 마음을 두었습니다. 물론 그 세상의 것이 무조건 나쁜 거는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것도 많습니다. 메시아가 초능력으로 유대인들의 정치 경제적인 해방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악을 박멸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지금도 원하고 있는 그런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방식으로 사람이 목숨을 얻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적인 생명인 프시케를 얻는다는 말인가요?

 

이 질문은 내적인 생명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과 같은 겁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삶, 또는 생명은 건강하게 장수하며, 가족 우애가 깊고 세상에서 나름으로 업적을 남기는 것입니다. 이런 게 보장되지 않으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불행한 이들은 지체 장애인들, 실업자들, 요즘 유럽에서 국제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난민들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품위를 잃지 않을 정도의 생활 조건이 필요하다는 건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이런 삶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편안하고 넉넉하고, 존경받는 식으로 살았으면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으로 목숨을 얻는 게 아니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6:31 이하)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의 태도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성경의 가르침과 표현들이 손에 잡힙니까?

 

온 천하와 프시케

성경이 말하는 내적인 생명인 프시케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실현되는 사건입니다. 사람은 그 어떤 방식으로도 그것을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인간의 숙명입니다. 하이덱거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은 세계--존재라는 특성을 지녔습니다. 이 세계 안에 들어와 있어서 그 구조 안에서만 생명을 경험합니다. 기독교 용어로 바꾸면 피조성입니다. 피조물은 자기 스스로 자기를 완성할 수 없습니다. 존재의 근거가 자기 내부에 있는 게 아니라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밥을 비롯한 모든 먹을거리는 밖에서 주어진 겁니다.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도 다 밖에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직접 농사짓고, 의학을 발전시켜서 평균 수명을 늘려도 우리에게 생명의 능력이 있는 게 아닙니다. 모든 것의 바탕에는 자연과 세상이 놓여 있습니다. 자연과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만 생명을 생명 되게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은총으로, 선물로, 값없이,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참된 생명을 주십니다.

 

따라서 목숨을 얻는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거나 믿고 있는 어떤 구체적인 형태를 얻는 게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 하나님을 완전히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경험한 분도 있고, 그렇지 못한 분도 있을 겁니다. 그것은 말로 다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사랑이 언어를 뛰어넘는 사건인 것처럼 하나님과의 일치를 통해서 경험되는 내적인 생명인 구원도 그와 같습니다. 한정적이지만 저는 말로나마 설명해보겠습니다. 하나님과 하나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자기가 전적인 무()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참된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 자유는 동시에 평화이고 안식입니다. 이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기쁨을 얻게 됩니다. 저의 이런 설명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무엇인지가 다 밝혀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저의 경험과 설명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여러분 각자에게 생명 충만감을 허락하십니다. 그것은 온 천하를 손에 넣어도얻을 수 없는 생명 경험입니다. 하나님만이 고유한 방식으로 허락하시는 선물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간절히 원하고 계시지요? 이것 말고 여러분이 인생살이에서 더 원하는 것이 있으신가요?

 

이제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목숨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실제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입니다. 하나님과의 일치가 실제 우리 삶에서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생명을 완성할 종말까지, 그리고 개인으로서는 죽음의 순간까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 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즉 베드로가 오늘 본문에서 고백한 것처럼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곧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 삶의 압축이 바로 세례이며, 성찬입니다. 세례와 성찬은 여러 가지 순서로 진행되는 예배에서 확인됩니다. 세례, 성찬, 예배는 겉으로 평범해보여도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어 행하신 구원 사건을 상징적으로, 심층적으로, 그러나 동시에 실질적으로(real) 담아내고 있습니다. 영혼의 깊이와 무게로 이런 삶의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은 온 천하로 대체될 수 없는 프시케를, 즉 내적인 생명을, 정말 우리가 기대할만한 것인 그 부활 생명을 하나님으로부터 종말에 얻게 될 것이며, 더 나가서 지금 이미 여기서 비밀한 방식으로 받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profile

[레벨:17]홍새로

September 17, 2015
*.237.104.169

사탄의 유혹, 돌을 빵으로 변화시켜 보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보라

세상의 모든 부와 권력을 주겠다. 이세가지는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갈때 추구하는것들 입니다. 이것이 생의 목표인줄 알았는데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것을 소유해도 자기목숨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십니다. 온천하 보다 중요한 참된 생명이 과연 무엇일까요?

목사님께서 하나님과 하나되는것, 하나님안에 거하는것, 하나님을 완전히

의존할때 구원에 이르게 되는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완성할 종말까지 죽음의 순간까지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갈때 목숨을 얻게 된다는 말씀을 매일 매순간 실질적으로

삶을 살아낼때까지 성령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September 17, 2015
*.94.91.64

에스더 님이 설교의 맥을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온천하를 얻어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씀을

상투적으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이해하는 게 필요합니다.

하나님과의 일치가 왜 생명을 얻는 것인지에 대해서

기독교인들이 말은 많이 하지만

영혼으로 이해하고 믿는 일이 그리 흔하지 않아요.

에스더 님이 끝에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이끌어주기를 기도해야겠지요.

profile

[레벨:18]부스러기 은혜

September 18, 2015
*.125.153.176

하나님과의 연합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얻게되는 참생명, 구원이 무엇인지를
우린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걸까요?
또 지금은 어쭙잖이 알고 있지만

한걸음 한걸음 온전한 앎으로 근접해 가기는 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머리로 인식하고 있는 그 앎이
내 매일의 실존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체화되어야
하는건가요?

주를 그리스도로 고백해놓고는
정작 사람의 일을 도모하는 불신앙의 모습은
이천년전이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는것 같은데
이런 뒤틀려진 열심속에 있는 우리의 한계에 방해받지 않으시고
그 분은  십자가에서 보여준  그 지독한 사랑으로
우리 영혼에 간섭해하셔서 우리를 완성의 자리로 이끌어 가고  계신거겠죠?

profile

[레벨:100]정용섭

September 18, 2015
*.94.91.64

부스러기 님의 말대로 우리의 신앙이라는 게

모래 위에 지은 집에 불과한 것처럼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키리에 엘레이송'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지요.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인정하신다는 말씀을

우리 삶의 중심으로 삼고 한걸음씩 앞으로 나가는 수밖에요.  

 

profile

[레벨:18]은나라

October 22, 2015
*.105.196.251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과 일치되는삶으로..

우리사는 날까지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사는삶으로..

이 삶을 압축한 세례와 성찬, 그리고 예배로..사는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라는 말씀이~

세례, 성찬, 예배를 상징적,심층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제게 실질적으로(real) 와닿습니다.

우와!!    대~~~~~~~~박^^

하나님이 목사님 설교 말씀 안에있는 하나님 나라 비밀을 한꺼풀씩 벗겨서 제게 보여주시는거 같아요..ㅎㅎㅎ

 

profile

[레벨:100]정용섭

October 22, 2015
*.94.91.64

'실질적' 인식에 이르렀다니

그보다 더 좋은 소식이 없군요.

성경, 기독교 역사, 예배와 영성 등등의

거대한 기독교 세계에 구경꾼으로가 아니라

실제 참여자로 발을 디딘 겁니다.

더 들어가서 실제로 알고 느껴보세요.

profile

[레벨:13]진인택

January 20, 2017
*.222.51.58

나 자신이 작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록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됩니다.

지금도 어쩌다 작은 성취를 이루고 나의 업적에 취해서 내 마음속에 작은 사당을 짓고 그게 인생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생각이 극한 상황에 이르러 숨이 막힐 정도가 되니 내 생각이 얼마나  허무하고 우스운 짓이고 하나님의 모든 위대한 일들이 수 없이 생각났었습니다. 

작년 10월 병원에 잠시 있었습니다.  수술은 의사가 하지만 그 뒤의 모든 경과는 내가 할 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간호원이 수술 직후엔 저에게 방귀나왔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물었습니다. 그리고는 방귀나오고 나니 대변나왔냐고 또 물었습니다..

그냥 언제쯤 방귀,대변이 언제 나오나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게 통증 속에서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잠못이루는 아픈 밤을 몇 일씩이나 보내면서 기도 하였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목사님께 글을 올리고 아침에 해가 뜨는 모습을 잠시서서 감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것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서 또 여기 저기 맘대로 다니는게 아니라

더 하나님과 함께함이 진정한 생명이요 해야할 목숨과 같은 일이라고 알게 되었습니다.

온갖 좋다는 약 다 먹어본들 그 약이 물인지 약인지 얼마나 내 속에 들어가서 좋게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앞으로 10년이 지나고 20년, 30년이 지나면 언젠가 약도 필요 없는 때가 오겠지요.

진정한 약은 하나님과 매일 함께 함이라 믿습니다. 

멀어 지지 않고 가까이 가려고 목사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많은 것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January 20, 2017
*.164.153.48

아, 그동안 뜸하시더니, 고생하셨군요.

대글을 잃다보니

생명을 유지하는데 방귀와 똥보다 더 소중한 게 없군요.

건강 회복되기를 기원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sort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70813
1053 기타 무엇을 기다리는가? [3] [2] 2004-06-14 20030
1052 기타 기도와 말씀 선포 [6] [2] 2004-06-30 15240
1051 기타 신앙의 외면과 내면 (빌 2:14~18) [1] 2004-06-30 14486
1050 기타 하나님을 알자 [4] 2004-06-30 18214
1049 기타 낯섬의 출처 2004-06-30 12803
1048 기타 수군대는 사람들 2004-06-30 14045
1047 기타 숨겨진 미래를 기다림 2004-06-30 12147
1046 기타 빛과 어두움 [3] 2004-06-30 15358
1045 기타 영적인 삶과 이성적인 예배 (롬 12:1, 2) [2] 2004-06-30 15584
1044 기타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막 9:14-29) [2] 2004-06-30 14456
1043 기타 세계, 계시, 하나님 (겔 39:25-29) [1] 2004-07-02 11505
1042 기타 종교와 철학을 넘어서 (고전 1:22-25) 2004-07-02 10650
1041 기타 예수의 권위 (막 1:21~28), 2003.6.1 2004-07-02 13609
1040 기타 언어의 한계와 존재론적 능력 (행 2:1-13) [8] 2004-07-02 10723
1039 기타 삶의 중심 2004-07-02 13169
1038 기타 용서의 능력 [1] 2004-07-02 17807
1037 기타 영적인 인식론 [2] [1] 2004-07-02 12818
1036 기타 두려움을 넘어서 [3] [2] 2004-07-02 11752
1035 기타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 [1] 2004-07-02 12483
1034 기타 우상과 귀걸이 [1] 2004-07-02 16353
1033 기타 평화와 두려움 [1] 2004-07-02 14090
1032 기타 하나님 나라의 통치방식 [1] 2004-07-02 15011
1031 기타 낡은 것과 새것 (고후 5:16-21) [2] 2004-07-02 18560
1030 기타 이스라엘의 고집 [1] 2004-07-02 13791
1029 기타 자유로움의 세계로! [2] [1] 2004-07-02 12713
1028 기타 비뚤게 보기와 바로 보기 [1] [1] 2004-07-02 12515
1027 기타 하나님의 나라와 영의 나라 [4] [1] 2004-07-02 13060
1026 기타 생명을 얻는 길 [1] [1] 2004-07-02 13341
1025 기타 야곱의 하나님 체험 [1] [1] 2004-07-02 12183
1024 기타 종말론적인 삶 (벧전 4:1-11) [1] 2004-07-02 11967
1023 기타 은폐와 노출 [3] 2004-07-02 11687
1022 기타 부자 이야기 [2] 2004-07-02 14014
1021 기타 흔들리지 않는 터전 [1] 2004-07-02 11704
1020 기타 자기 의와 은총 [1] 2004-07-02 11592
1019 기타 언어의 집 [1] 2004-07-02 9403
1018 기타 내면적 삶이란? [1] [1] 2004-07-02 9383
1017 기타 삶으로서의 예배 [1] 2004-07-02 9885
1016 기타 말의 구원론적 능력 [1] 2004-07-02 12058
1015 기타 불평을 넘어서 존재의 기쁨으로 [1] 2004-07-02 9589
1014 기타 주님의 재림과 생명의 완성 [1] 2004-07-02 9580
1013 기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3] 2004-07-02 10464
1012 기타 세례요한의 질문 [1] 2004-07-02 13853
1011 기타 이사야의 구원신탁 2004-07-02 11563
1010 성탄절 마리아의 노래 (눅 1:46-56) [1] 2004-07-02 12475
1009 기타 삶의 지혜를 넘어서 [1] 2004-07-02 10842
1008 기타 기쁨과 사랑의 역학관계 [1] 2004-07-02 10177
1007 기타 자유를 향한 길에 서서 [1] 2004-07-02 10994
1006 기타 사울의 어리석음 [1] 2004-07-02 12345
1005 기타 막힘에서 열림으로! 2004-07-02 12332
1004 기타 구름 타고 오십니다. 2004-07-02 11441
1003 기타 야훼의 진노와 모세의 기도 [1] 2004-07-02 11625
1002 기타 예수님을 먹다 [1] 2004-07-02 13095
1001 기타 땅을 묵혀라! 2004-07-02 11335
1000 기타 마술과 신앙 2004-07-02 10806
999 기타 세계의 토대 2004-07-02 12198
998 기타 야훼의 자기 증거 2004-07-02 11447
997 기타 운명과 자유 2004-07-02 10489
996 기타 본질의 변질 2004-07-02 10548
995 기타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힘 2004-07-02 12125
994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10102
993 기타 노동하는 인간(1) 2004-07-02 9582
992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10071
991 기타 영광의 경험 [3] 2004-07-02 9418
990 기타 노동하는 인간(2) [2] 2004-07-02 9058
989 기타 무엇이 진실한 예배인가? [1] 2004-07-02 9813
988 기타 수행으로서의 신앙생활 [1] [1] 2004-07-02 8671
987 기타 돌무더기에 얽힌 사연 [1] 2004-07-02 9741
986 기타 메시아적 행위와 교회 [1] 2004-07-02 9444
985 기타 사랑이란 무엇인가? [1] 2004-07-02 15517
984 기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1] 2004-07-05 9385
983 기타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1] 2004-07-11 9662
982 기타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2004-07-18 9714
981 기타 믿음과 사랑의 뿌리, 7월25일 2004-07-25 9386
980 기타 말씀 망각의 심판, (8월1일) 2004-08-05 8651
979 기타 기도란 무엇인가? (8월8일) [2] 2004-08-08 12891
978 기타 모세의 소명, 2004.8.15. 2004-08-16 9771
977 기타 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2004-08-22 9448
976 기타 평화를 위한 분열, 8월29일 [5] 2004-08-30 8536
975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484
974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9220
973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973
972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342
971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400
970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361
969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214
968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724
967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410
966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349
965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406
964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9125
963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477
962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176
961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9001
960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562
959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672
958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705
957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524
956 기타 세례 요한의 증언, 1월16일 [1] [1] 2005-01-17 13071
955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666
954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1106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