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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찬양과 하나님의 축복 (엡 1:3-14)

성탄절 조회 수 9754 추천 수 0 2016.01.03 21:04:05
설교듣기 : https://youtu.be/Vxa-aIKLL1w 
성경본문 : 에베소서 1:3-14 

하나님 찬양과 하나님의 축복

1:3-14, 성탄절후 둘째 주일, 201613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Orthodox-Deposition[1].jpg

러시아 모스코바 크레믈린 궁 안 있는

정교회 교회당 십자가 첨탑

제작자: Masters of Pskov(1484)

 

 

하나님 찬양

한민족은 옛날부터 가무(歌舞)를 즐겼습니다. 특히 노래를 즐겨한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런 전통을 이어받아서 한국 사람들이 노래를 잘하기도 하고 자주 하기도 합니다. 유명한 성악가도 많기도 하고, 노래방 문화도 다른 나라보다 유별나게 발달했고, 관광버스를 타면 노래와 춤을 쉬지 않습니다. 티브이 프로그램에도 노래에 관련된 게 많습니다. 교회에서도 노래를 많이 부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지금도 예배 전에 준비 찬송을 하는데, 이것도 우리나라 교회만의 특별한 종교현상으로 보입니다. 신구약 성경에도 찬송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나옵니다. 시편은 모두가 찬송입니다. 초기 기독교 역시 구약의 전통에 따라서 예배 시에 찬송을 많이 불렀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엡 1:3-14절에도 찬송한다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3, 6, 12, 14절입니다. 그중에 3절만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런 구절을 읽으면 종교적으로 마음이 뜨거워지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수십 년 전부터 한국교회 예배 형태의 한 트렌드가 경배와 찬양집회입니다. 이런 종류의 예배나 집회에는 전자 기타와 타악기처럼 회중들의 정서와 심리를 자극할만한 악기가 동원됩니다. 찬양 집회의 리더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 은혜로운 멘트를 외칩니다. 10년 쯤 전에 <기독교 사상>의 원고 청탁을 받아 이런 예배의 원조 격인 온누리 교회 예배를 인터넷으로 시청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그 화면을 보고 예배라기보다는 잘 연출된 종교 쇼(show)를 대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거기에 참여하는 이들의 신앙적인 열정도 뜨거웠고, 신앙적인 진정성도 남달라 보였습니다. 그런 태도는 다 좋은 겁니다. 흑인들이 모이는 교회는 예배 때 설교를 들으면서 마치 판소리에서 좋지, 얼씨구하는 추임새를 넣듯이 아멘과 할렐루야를 외칩니다. 그런 행태가 전통의 예전예배와 다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잘못된 거는 아닙니다. 문화와 기질의 차이라고만 보면 됩니다. 이와 달리 경배와 찬양유의 집회는 회중들의 종교적 감수성에만 초점이 맞춰진다는 인상이 강했습니다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종교적 감수성에 영향을 크게 받는 회중들이 아니라 영광을 받아야 할 하나님입니다. 이 두 요소가 완전히 분리되는 것도 아니고 서로 겹치기도 하기 때문에 혼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단은 이 두 요소를 분명하게 구분해서 봐야합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찬송이 한국교회에서 한때 많이 불렸습니다. 이런 찬송에서는 하나님이 누군지를 잘 몰라도 되고 자기가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만 알면 되는 겁니다. 입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나의 영광에 관심이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사람은 실존적으로 자기에게 매달리게 되어 있어서 그런 현상이 이해가 갑니다. 교회에서도 인정을 받아야만 신바람이 나는 거와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계속 그쪽으로 가도록 내버려두면 다시 신앙의 중심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가버리기 때문에 중간에 조율이 필요합니다. 지금 내가 실제로 하나님에게 관심하고 있는지, 겉으로만 하나님을 말하지 실제로는 자기에게 매달려 있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다시 에베소서 본문을 봅시다. 바울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고 했습니다. ‘를 찬양하는 게 아니고, 그렇다고 를 찬양하는 것도 아니고, 부모를 찬양하는 게 아니고, 자식을 찬양하는 게 아니고, 돈을 찬양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웬만해서는 우리의 삶에서 현실로 경험되지도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게 쉬운 게 아닙니다. 돈을 찬양하는 건 눈에 보이기 때문에 쉽습니다. 현대인들은 모두 돈 숭배자들이라는 점에서 다 돈을 찬양하는 겁니다. 무엇이 돈을 찬양하는 건지도 모를 정도로 현대인들은 돈이 지배하는 체제에 완전히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찬양은 예배 때 찬송을 부르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바울의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 따라가 봅시다.

 

영적인 축복

바울은 본문에서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용어로 찬양의 이유와 근거를 설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적인 축복을 베풀어주셨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바울의 설명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논리의 비약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순하면서도 명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셨으니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건 마땅합니다. 이 사실에 동의하지 않는 기독교인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말하는 축복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충분히 알지 못하거나 때로는 오해할 때는 간혹 있습니다.

 

우선 영적 축복이라는 말을 봅시다. 우리말 성경으로는 신령한 복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복은 헬라어 율로기아의 번역입니다. 율로기아는 사전적인 의미로 blessing, praise입니다. blessing은 복보다는 축복이라고 하는 게 좋고, praise은 찬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율로기아는 축복이면서 동시에 찬양입니다. 율로기아와 어근이 같은 단어가 3절에 두 개 더 나옵니다. 그게 우리말 성경에는 서로 다른 뜻처럼 번역되었지만 근본적으로는 같은 뜻입니다. ‘찬양한다.’는 헬라어로 율로게토스이고, 축복을 베푸신다고 할 때의 베푸신다.’율로게사스입니다. 찬양, 축복, 베푸심이 다 같은 어근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높인다는 뜻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복이 임하기를 바라는 뜻도 포함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로기아, 즉 축복이라는 단어에 영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습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이 찬양의 근거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그와 똑같이 생각합니다.

 

영적 축복이라는 말이 어떤 분들에게는 막연하게 들릴 겁니다. 부자가 된다거나 불치병이 낫는다면 그 축복이 무엇인지 손에 잡히지만 영적이라면 멀게 느껴집니다. 바울은 영적인 축복이 어떤 것인지를 헬라어 전치사 을 두 개 사용해서 설명합니다. 우리말 성경으로는 그게 명확하게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하나는 엔 토이스 에푸라니오이스이고 다른 하나는 엔 크리스토입니다. 전자는 하늘에 속한 것 안에라는 뜻이고, 후자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속한 영적인 것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축복해주셨다는 뜻입니다.

 

먼저 하늘에 속한 축복이라는 말을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들은 이것을 세속적인 방식으로 대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부터 수() ()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라는 오복을 가장 중요한 복으로 여겼습니다. 그런 습관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뒤에도 여전한 거 같습니다. 유대교의 지혜 전통도 이런 복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큰 재앙에 떨어진 욥을 비판한 욥의 친구들은 유대 지혜 전통에서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저주받은 욥의 운명이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하늘에 속한 축복은 당연히 이런 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옥황상제처럼 자기 기준에 따라서 사람들의 운명을 마음대로 처리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말하는 이 축복을 이 세상에서 심리적인 위로를 받거나 죽어서 천당 가는 것쯤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우선 성경이 말하는 하늘, 또는 하늘에 속했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과 완전히 별개의 어떤 영역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땅에 속한 것들이 전적으로 의존해야 할 가장 궁극적인 세계를 가리킵니다. 그 세계는 지금 우리가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근원적인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지를 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도 밝혀보려고 했습니다. 노자와 장자 같은 이들은 그걸 도()라고 했고, 플라톤은 이데아라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에이도스)이라고 했고, 헤겔은 절대 정신, 하이데거는 존재, 화이트헤드는 프로세스(과정)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늘이라고 말합니다.

 

요즘 혼자 밥을 먹을 때마다 식탁에서 읽는 책이 앤드류 H. 놀의 생명, 최초의 30억년입니다. 그 책에 나오는 진화에 대한 설명 중에 인상 깊은 게 있습니다. 박테리아와 사람을 비교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이 지구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한 생명체라고 여기면서 지구의 생태 문제도 인간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반면에 박테리아는 지구 생태계에서 겨우 기대서 살아가는 생명체라고 업신여깁니다. 이게 큰 착각입니다. 박테리아는 지구의 이산화탄소를 먹어 없애는 미생물입니다. 박테리아가 없으면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가 많아지고, 산소가 부족해집니다. 그런 순간이 오면 인간을 비롯해서 산소를 필요로 하는 모든 동물들은 멸종됩니다. ‘진화에서 동물의 대부분은 장식일 뿐이고, 케이크의 본체를 이루는 것은 박테리아다.’(38)는 말이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생물학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인간은 스스로 생명을 운영할 수 없고, 철저하게 다른 것에 의존해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피조성입니다. 이런 피조된 인간이 전적으로 의존해야 할 생명의 궁극적인 세계와 그 힘을 가리켜 바울은 하늘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막연한가요? 이게 막연하게 느껴진다면 하나님도 막연하게 느껴질 겁니다. 본문이 가리키는 세계로 한 걸음 더 들어갑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영적으로 축복하셨는데, 그것은 엔 크리스토’, 즉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겁니다. 본문 엡 1:3-14절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입니다. 10번이나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바울은 4절 이하에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영적인 축복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습니다(5).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된다는 뜻입니다. 3절은 하나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아들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런 표현들이 오해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딸은 아니고 왜 하필 아들이냐고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아들은 성()과 관계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기독교인의 하나님 관계가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종의 특징은 억압이며, 아들의 특징은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말은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자유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자유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바울은 7절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 용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게 바로 위에서 말한 자유의 근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죄 용서라는 말을 기독교인은 귀가 따갑게 들었을 겁니다. 그런 탓인지 타성에 젖어 무감각하게 듣습니다. 우리는 보통 죄를 나쁜 마음, 악한 행위로 여깁니다. 당신들은 다 죄인이야, 하는 말을 들으면 기분 나쁘면서도 마음이 움찔합니다. 죄의 세력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분량에서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수도원에서 평생 사는 사람도 세속에 사는 사람과 차이가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더 근본적인 겁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은 곧 설교 앞부분에서 말한 자기 찬양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완성해보려는 온갖 노력이 죄입니다. 실제로 벌어지는 폭력적이고 파렴치한 행위들은 이런 죄의 결과들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인간이 율법으로도, 즉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의에 이르지 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죄는 강력합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죄로 인해 인간의 죽음의 운명에 떨어졌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죽음의 힘에서 자유로워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그를 믿는 이들을 죽음에서 벗어나게 한 것입니다. 그 증거가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입니다. 생명을 얻은 사건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영적인 축복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즐겁게 살아가기 위해서 매달리고 있는 다른 것들은 다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은 도대체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 무엇일까요?

 

3) 바울은 하나님이 앞으로 당신의 때가 오면 하늘과 땅의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10절을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때가 차면 이 계획이 이루어져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가 될 것입니다.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하나가 된다는 말은 생명이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생명의 완성은 곧 창조의 완성입니다. 우리에게 감추어졌던 창조의 신비가 완전히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 된다는 것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창조의 완성이며, 생명의 완성이라는 뜻입니다. 하늘과 땅의 우주론적 일치에 의한 생명 완성이라니, 얼마나 위대한 생각입니까? 얼마나 거룩한 상상력입니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초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구원을 우주론적인 차원에서 높이고 찬송했습니다.

 

지금 당장 돈 벌어서 먹고 살기도 바쁜 마당에 구원의 우주론적 차원이 무슨 말이냐, 하고 생각할 분들도 계실 겁니다. 이해는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 사실을 말하고 있으니 설교자로서 저도 그 사실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우주의 완성, 하늘과 땅의 일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걸 좀더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에피소드에 지배당하지 않고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를 영적으로 축복하셨다는 사실이 무엇인지를 절감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2016년에 이런 찬양의 삶이 여러분들에게 더 깊어지고 풍요로워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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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주안

January 06, 2016
*.36.157.94

아멘!
주님의 은혜로 자유함 얻은 우리,
매시간 기쁨과 감사함으로
찬양하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January 06, 2016
*.94.91.64

주안 님과 똑같은 심정으로

저도 '아멘!'입니다.

2016년 한 해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가득한 삶이...

profile

[레벨:9]베샬롬

January 06, 2016
*.49.66.205

제가 목사님의 설교를 한 번 들어보라고 해서,

아내가 어제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았답니다.

간호사인데, 밤 근무를 하면서 들었답니다.

아내왈, 

설교가 자상한 어떤 동네 아저씨께서 차근차근 가르치신다는

포근한 느낌을 받았다는군요.

수요예배를 마치고 차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함박 웃음을 나누었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January 06, 2016
*.94.91.64

제 설교를 듣고

포근한 느낌을 받았다 하신

베샬롬 님의 부인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전해주세요.

두분이 수요예배까지 함께 나가시는 걸 보니

신앙도 좋고 사이도 좋은 거 같습니다.

2016년이 더 풍요로운 해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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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February 13, 2017
*.222.51.58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축복을 무시하고 소모하고 훼손하였습니다.

욕심내서 내 것으로 차지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였습니다.

옥상에 이불을 널면서 따스한 해와 맑은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오후에 걷으면서 이불에서 느껴지는 뽀송한 느낌과 따스함이 너무 좋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의미를 알고 나니 작은 것 조용한 것에 기쁜 감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축복받을 자격보다는 그동안 살면서 쌓아온 결격사유로 인해

마음이 무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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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13, 2017
*.164.153.48

주님의 복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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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기타 막힘에서 열림으로! 2004-07-02 12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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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4 기타 야훼의 진노와 모세의 기도 [1] 2004-07-02 11713
1003 기타 예수님을 먹다 [1] 2004-07-02 13269
1002 기타 땅을 묵혀라! 2004-07-02 11444
1001 기타 마술과 신앙 2004-07-02 10924
1000 기타 세계의 토대 2004-07-02 12304
999 기타 야훼의 자기 증거 2004-07-02 11561
998 기타 운명과 자유 2004-07-02 10610
997 기타 본질의 변질 2004-07-02 10648
996 기타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힘 2004-07-02 12230
995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10201
994 기타 노동하는 인간(1) 2004-07-02 9695
993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10194
992 기타 영광의 경험 [3] 2004-07-02 9536
991 기타 노동하는 인간(2) [2] 2004-07-02 9170
990 기타 무엇이 진실한 예배인가? [1] 2004-07-02 9907
989 기타 수행으로서의 신앙생활 [1] [1] 2004-07-02 8792
988 기타 돌무더기에 얽힌 사연 [1] 2004-07-02 9835
987 기타 메시아적 행위와 교회 [1] 2004-07-02 9543
986 기타 사랑이란 무엇인가? [1] 2004-07-02 15633
985 기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1] 2004-07-05 9489
984 기타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1] 2004-07-11 9774
983 기타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2004-07-18 9798
982 기타 믿음과 사랑의 뿌리, 7월25일 2004-07-25 9516
981 기타 말씀 망각의 심판, (8월1일) 2004-08-05 8772
980 기타 기도란 무엇인가? (8월8일) [2] 2004-08-08 12977
979 기타 모세의 소명, 2004.8.15. 2004-08-16 9862
978 기타 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2004-08-22 9548
977 기타 평화를 위한 분열, 8월29일 [5] 2004-08-30 8646
976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591
975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9344
974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10084
973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451
972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507
971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505
970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320
969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837
968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525
967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460
966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521
965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9255
964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582
963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289
962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9111
961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668
960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766
959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815
958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627
957 기타 세례 요한의 증언, 1월16일 [1] [1] 2005-01-17 13160
956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765
955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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