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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사람 예수 (마 2:13-23)

성탄절 조회 수 13276 추천 수 0 2017.01.01 22:45:29
설교듣기 : https://youtu.be/cjmmuRgdvRQ 
성경본문 : 마태복음 2:13-23 

나사렛 사람 예수

2:13-23, 성탄후 첫째 주일, 201711

 

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19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20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지금 제가 예수님에 관해서 몇 가지 질문을 할 테니까 각자 속으로 답을 맞춰보십시오. 예수님의 어머니 이름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당시에 아주 흔한 이름입니다. 사실 예수라는 이름도 흔했습니다. 아버지 이름은? 요셉입니다. 예수님의 출생지는? 베들레헴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작은 마을입니다. 예수님이 자란 곳, 또는 고향은? 나사렛입니다. 출가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결혼했을까요? 아닙니다. 십자가 처형을 당한 나이는? 서른 세 살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나라 사람일까요? 유대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복음서가 신약성경에 몇 권이나 될까요? 4권입니다. 4권의 특징이 각각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독자는 누구일까요? 유대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유대의 율법이나 구약성경을 자주 인용합니다. 예수님의 운명을 유대의 역사와 연결시키기도 합니다. 그 특징이 오늘 설교 본문으로 삼은 마 2장에서 두드러집니다.


2장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 나오지 않은 마태복음만의 전승입니다. 1-12절은 동방박사 이야기이고, 13-18절은 요셉이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한다는 이야기이고, 19-23절은 애굽에서 돌아와 나사렛에 거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전체적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입니다. 우선 그 줄거리를 간단하게 살펴볼까요? 동방박사 이야기는 오늘 설교 본문에 속하지 않으니까 간략히 짚고 건너뛰겠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 예수와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에게 동방박사들이 와서 경배를 드리면서 세 가지 예물, 즉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치고 떠난 뒤에 요셉은 천사가 나타나는 꿈을 꿉니다. 헤롯 왕이 아기 예수를 찾아 죽이려고 하니 가능한 빨리 이곳을 떠나서 애굽으로 피하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를 만나기 전 도움을 받으려고 헤롯 왕을 찾아갔을 때 헤롯은 속으로 예수를 제거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 소문을 요셉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런 꿈을 꾸는 거겠지요. 신생아 예수는 살해당하는 위기를 모면하지만 나중에 서른세 살에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걸 보면 이미 이런 운명이 아기 예수에게 암시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14절에 따르면 악몽을 꾸다 잠이 깬 요셉은 그 즉시 아기와 마리아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요셉 가족은 헤롯이 죽기까지 애굽에 머물렀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이런 일이 구약 호 11:1절에 의한 것이라는 코멘트를 달았습니다. 예수의 운명이 유대인들의 역사에서 이미 예언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겁니다.

 

다른 한편으로 헤롯은 처음 마음먹었던 대로 예수가 태어난 날짜를 계산해서 두 살 아래 아이들을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헤롯은 원래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유대인 로마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헤롯은 자신의 세 아들을 반역으로 몰아 처형했고, 자신의 장례 때 사람이 슬퍼하도록 각 가정에서 한 사람씩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광적인 사람이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저지릅니다. 이런 일을 연산군(1476-1506)이나 히틀러(1889-1945)에게서도 볼 수 있고, 현대 세계 역사에서도 자주 목도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평소에 겉으로 정상적인 것처럼 보여도 그 내면의 세계가 병들어 있어서 최소한의 상식에 어긋나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요세푸스가 오늘 성경이 말하는 두 살 아래 아이를 죽이는 사건을 언급하지 않는 걸 봐서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유대 역사에 대한 상징으로 보입니다. 모세가 태어난 시절에 애굽의 바로는 산파들에게 명령하기를 유대 산모가 출산하는 아이들 중에서 남자 아이는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모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예수의 운명이 바로 유대 민족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모세의 운명과 비슷하다는 의미입니다. 유대 기독교인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당연히 예수님과 모세를 연결해서 생각했을 겁니다.

  

세월이 흘러 헤롯이 죽자 요셉은 다시 꿈에 천사를 만났습니다. 천사는 요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2:20). 요셉은 천사의 말대로 애굽을 떠나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감히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장면과 같습니다. 성경은 간단하게 묘사했지만 그 안에서는 수많은 사연들이 숨어 있습니다. 요셉이 꿈에서 천사를 만나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해서 애굽을 당장 떠날 결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생활 근거지를 포기하기도 어렵고, 정들었던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요셉은 큰 결단을 내렸습니다. 아내와 아들 예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유대 지역에서 왕위를 계승한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는 아버지 헤롯 못지않게 난폭했습니다. 유대 지역을 피해야만 했습니다. 요셉은 가나안의 북쪽 변방인 갈릴리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갈릴리 지역에서도 작은 마을인 나사렛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습니다. 나사렛에 지인이 있었을까요? 친인척이 있었을까요? 요셉의 직업인 목수 일을 할 만한 조건이 들어맞은 걸까요? 그 숨은 사연을 우리는 아는 게 없습니다. 2:23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마태복음 기자는 당시 예수님에게 붙어 다니던 호칭인 나사렛 사람이 구약 선지자의 말에 기인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런 표현이 구약에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사 11:1절이 이에 해당된다는 각주가 달렸습니다. 11:1절은 이렇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한 가지가 나온다고 하는 표현에서 이 가지는 히브리어로 내체르라고 합니다. 그 발음은 구약이 말하는 나실인(13:5)과 비슷합니다. 나사렛도 이런 발음과 연결됩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여기서도 다시 예수가 유대 민족의 역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류의 메시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만 말해도 충분할 텐데, 왜 나사렛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일까요?

 

나사렛 동네

1:43절 이하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의 부름을 받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메시아를 만났는데, 그가 바로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하자, 나다나엘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나사렛은 별로 특별할 게 없는 평범한 마을입니다. 거기서 위대한 인물이 나올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마태복음을 비롯해서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나사렛이라는 동네 자체를 강조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 마을에서 살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각자 대구에서, 영천에서, 경주와 포항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를 따라서 나사렛에 간 예수님은 그곳에서 어떤 방식으로 살았을까요? 소년이 되면서 산과 들을 돌아다니고, 계절에 따라서 친구들과 여러 가지 놀이를 했겠지요. 다른 이의 과수원에 몰래 들어가서 포도나 무화과를 따먹었을지도 모릅니다. 사춘기가 되면서 같은 또래의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뛰었겠지요. 니코스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에는 예수의 인간적인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있던 몇 시간 동안 의식이 혼미해질 때 그런 유혹이 찾아온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예수가 받은 최후의 유혹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가정을 꾸리고 사는 거였습니다. 그 소설에는 마리아와 결혼해서 자식 낳고 사는 거로 나옵니다. 목수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예수에게 제자들이 몰려들어서 따지고 듭니다. 당신이 십자가에서 도망쳤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전하던 우리가 실패했다는 겁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쓰러뜨리고 머리를 발로 밝습니다. 예수는 고통을 느끼면서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고 외치면서 다시 정신을 차립니다. 그는 여전히 십자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을 나사렛이라는 지명과 일치해서 부르는 이유는 그가 우리와 조금도 차이가 없는 구체적인 인간으로 살았다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삶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두 발을 땅에 딛고 삽니다. 무엇을 먹고 마시고 배설합니다. 모든 게 흙에서 와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지만 지금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아있다는 사실이 소중합니다. 소중할 뿐만 아니라 거룩합니다. 간혹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라는 복음 찬송을 부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세상은 헛되고 악하니까 포기하고 십자가만 바라보자는 찬송입니다. 일리가 없지 않으나 근본적으로는 잘못된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삶을 부정하거나 훼손하는 것으로는 신앙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나가서 교회는 정치에 대해서 무관심해야 한다는 주장도 간혹 듣습니다. 정치도 구체적인 인간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이 정치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바른 정치를 위해서 투쟁할 때는 투쟁해야 합니다. 정치적인 주도권을 획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삶이 파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건 신앙생활을 위해서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금과 같은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기승을 부리면 생존 자체가 불안해져서 성경공부와 신학공부는 둘째 치고, 최소한 일주일에 한번 드리는 예배도 진정성 있게 드릴 수 없습니다. 이런 생존 보장 문제는 정치적으로 해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최저임금 문제입니다. 최저임금을 한 시간 당 1만원으로 올리는 건 정치적인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일어나는 자영업자들의 어려움은 중앙 정부나 지방 정부의 차원에서 지원해야지요. 이게 다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재정이 넘치는 대형교회와 최소한의 생존도 담보되지 못하는 소형교회가 경제 민주화 차원에서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교회 정치가 필요합니다. 가톨릭교회가 각자도생에 떨어진 개신교회와 다른 점은 교회 정치가 건강하게 작동된다는 점입니다. 모든 인간의 삶이 정치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인간의 삶을 인간답게 하는데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 그 안의 역사와 인간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당연한 일입니다. 마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마저 나사렛 동네에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삶을 살았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 하심

이 대목에서 근본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우리와 똑같이 인간으로서 세상에서 살았다면 그를 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지, 즉 그를 메시아라고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냐에 대한 질문입니다. 대답하기가 곤란할 겁니다. 무조건 믿어야 한다거나, 성경을 더 많이 읽거나 기도하면 답을 얻는다는 말로 이런 곤란한 상황을 헤쳐 나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취미생활로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면 이 질문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합니다. 스스로 답을 얻기 힘들면 전문가에게 물어보거나 전문 서적을 찾아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성탄후 첫 주일이자 2017년 첫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가장 근원적인 질문에 부딪쳤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인간으로 살았던 나사렛 사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아인 근거가 무엇인가요?


1:18절 이하에 따르면 동거하기 전의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소문을 듣고 파혼할 생각을 하는 요셉에게 천사가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는 부정한 방식으로가 아니라 성령으로 임신한 것이며, 그녀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인데,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겁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이 사건을 사 7:14절을 인용해서 해명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증거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의 임마누엘입니다. 마태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마태복음 마지막은 28:20절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세계 전도의 사명을 내리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의 출생 순간과 마지막 세상을 떠나는 장면에서 똑같이 하나님이, 또는 예수님이 함께 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말을 공간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가 같은 공간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건 아닙니다. 성찬예식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자리에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실체로 거기에 나타나는 건 아닙니다. 영적으로 거기에 임재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절대 생명으로의 변화인 부활이 성찬의 자리에서 우리에게 경험되는 겁니다. 그런 경험으로 우리는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생명을 얻는 경험입니다. 기쁨과 자유와 평화의 영이 우리의 삶을 가득 채웁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설명을 듣고 좀 시시하다고 실망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혹시 이런 것보다 더 강렬하고 매력적인 어떤 것을 기대하셨는지요. 천국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인다거나 방언을 유창하게 한다거나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니까 병이 깨끗하게 치료되는 능력을 얻고 싶은 분들도 있을 겁니다.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기만 하면 그걸 하나님이 함께 하는 증거로 알겠다고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단순한 호기심입니다. 마치 티브이 연예 프로그램을 보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거기서는 단순히 재미를 느끼면 됩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영적인 증거인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통한 생명 경험은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생명 경험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까지 기꺼이 받아들일 만큼의 자유를 얻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신출귀몰하는 마술사나 인류 역사를 쥐락펴락하는 전쟁 영웅, 또는 노벨상을 받는 위대한 학자가 아니라 나사렛이라는 촌 동네에서 우리와 비슷하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그 나사렛 예수가 이제 우리와 항상 함께 한다고 약속했습니다. 우리의 평범한 삶과 그 일상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육체노동자, 전업주부, 학교 교사로서의 인생에 비밀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생명 통치가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서 발생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여러분은 실제 삶에서 어느 정도나 분명하게 누리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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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홍새로

January 02, 2017
*.224.15.62

이제까지 저희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안에 던져진 존재로서 이게 뭐지? 하고 있을때,
예수님이 인간과 똑같은 육신을 입고 오셔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셨다는 말씀이네요.
하나님은 생명이시고요.
생명이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게 된다면, 슬픔과 탄식대신 일상에서 평화속에 살수 있을것 같습니다.
사람은 말씀으로 살수 있네요,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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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02, 2017
*.164.153.48

에스더 님이 요즘 신학과 친숙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게

눈에 훤히 보이는군요.

그런 생각과 느낌들이 축적되어야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폭발하는 것을 경험할 겁니다.

'돈오'의 경험이지요.

그렇게까지 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냥 맛만 느껴도 삶이 새로워질 겁니다.

2017년에도 이 길을 계속 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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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주안

January 02, 2017
*.69.199.48

임마누엘의 경험을 실증적으로 말할 수는 없으나

예수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느끼며

주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순간 순간이라고 봅니다.

노동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이라는 것처럼

살아가는 일상에서 늘 함께하시는 주님을 인식하며

늘 깨어 쉬지않고 기도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라고 봅니다.

닭 울음소리에 베드로가 깨달은 것 처럼

항상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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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03, 2017
*.164.153.48

요즘처럼 어수선한 시국에,

더 근본적으로 우리의 무상한 인생살이에

임마누엘 신앙이 없다면 마음의 중심을 잡기 힘들겠지요.

하나님이, 즉 궁극적인 생명이

우리의 일상에 늘 함께 한다는 사실을 날이 갈수록

더 깊이 느끼면서 2017년을 살아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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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bboyswj

January 05, 2017
*.216.32.110

목사님 안녕하세요^^ 가입한 지 5년이 넘었지만 글은 처음 쓰네요.

가끔 홈페이지 들를 때마다 목사님의 잠잠한 언어에 마음이 따뜻해져서 돌아갑니다. 제 설교에 모올래 적용하기도 하고요.

오늘도 목사님 설교로 마음 따뜻해져서 돌아갑니다. 혼란스럽고 분노도 치밀고 때론 따분한 제 일상에 임마누엘 예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 그걸로 족합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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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05, 2017
*.164.153.48

bboyswj  님, 안녕하세요?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보다

우리에게 더 큰 위로가 되는 건 없습니다.

문제는 그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기기 쉽지 않다는 거지요.

사랑을 절실하게 느끼기 어려운 거와 같습니다.

그래도 꾸준히 그 길을 가다보면

임마누엘 영성 안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저도 아직 깊이로는 들어가지 못했고,

들어가려고 애를 쓰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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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6 기타 말의 구원론적 능력 [1] 2004-07-02 12100
1015 기타 불평을 넘어서 존재의 기쁨으로 [1] 2004-07-02 9619
1014 기타 주님의 재림과 생명의 완성 [1] 2004-07-02 9612
1013 기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3] 2004-07-02 10509
1012 기타 세례요한의 질문 [1] 2004-07-02 13891
1011 기타 이사야의 구원신탁 2004-07-02 11591
1010 성탄절 마리아의 노래 (눅 1:46-56) [1] 2004-07-02 12511
1009 기타 삶의 지혜를 넘어서 [1] 2004-07-02 10882
1008 기타 기쁨과 사랑의 역학관계 [1] 2004-07-02 10227
1007 기타 자유를 향한 길에 서서 [1] 2004-07-02 11034
1006 기타 사울의 어리석음 [1] 2004-07-02 12388
1005 기타 막힘에서 열림으로! 2004-07-02 12374
1004 기타 구름 타고 오십니다. 2004-07-02 11483
1003 기타 야훼의 진노와 모세의 기도 [1] 2004-07-02 11657
1002 기타 예수님을 먹다 [1] 2004-07-02 13185
1001 기타 땅을 묵혀라! 2004-07-02 11387
1000 기타 마술과 신앙 2004-07-02 10868
999 기타 세계의 토대 2004-07-02 12249
998 기타 야훼의 자기 증거 2004-07-02 11505
997 기타 운명과 자유 2004-07-02 10548
996 기타 본질의 변질 2004-07-02 10600
995 기타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힘 2004-07-02 12178
994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10151
993 기타 노동하는 인간(1) 2004-07-02 9638
992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10133
991 기타 영광의 경험 [3] 2004-07-02 9468
990 기타 노동하는 인간(2) [2] 2004-07-02 9102
989 기타 무엇이 진실한 예배인가? [1] 2004-07-02 9856
988 기타 수행으로서의 신앙생활 [1] [1] 2004-07-02 8720
987 기타 돌무더기에 얽힌 사연 [1] 2004-07-02 9786
986 기타 메시아적 행위와 교회 [1] 2004-07-02 9485
985 기타 사랑이란 무엇인가? [1] 2004-07-02 15566
984 기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1] 2004-07-05 9433
983 기타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1] 2004-07-11 9707
982 기타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2004-07-18 9748
981 기타 믿음과 사랑의 뿌리, 7월25일 2004-07-25 9454
980 기타 말씀 망각의 심판, (8월1일) 2004-08-05 8703
979 기타 기도란 무엇인가? (8월8일) [2] 2004-08-08 12929
978 기타 모세의 소명, 2004.8.15. 2004-08-16 9813
977 기타 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2004-08-22 9489
976 기타 평화를 위한 분열, 8월29일 [5] 2004-08-30 8581
975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528
974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9281
973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10020
972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394
971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452
970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431
969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269
968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768
967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467
966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404
965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463
964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9185
963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523
962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233
961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9052
960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615
959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711
958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758
957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576
956 기타 세례 요한의 증언, 1월16일 [1] [1] 2005-01-17 13118
955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709
954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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