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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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태복음 4:12-23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4:12-23, 주현 후 셋째 주일, 2017122

 

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

 

예수님의 고향은 갈릴리 지역에 속한 작은 마을인 나사렛입니다. 갈릴리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가장 멀리 떨어진 지역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대략 서른 살까지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즈음에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으려고 요단강 근처로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4:12,13절에 따르면 세례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으로 잠시 피신했다가 신상에 위험을 느끼셨는지, 또는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아예 가버나움으로 거주지를 옮겼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북쪽에 붙어 있는 마을입니다. 유대의 중심 도시인 예루살렘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마을로서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에 살고 있는 정통 유대인들의 관점에서는 격이 떨어지는 마을이었습니다. 이방인들도 뒤섞여 사는 곳이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태복음은 그 당시 상황을 사 9:1,2절을 인용해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당시 가버나움은 활기 넘치는 마을이었다고 합니다. 사람들도 많았고, 경제 활동도 번창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가버나움 출신이 가장 많습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가 된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다 가버나움 출신입니다.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공적 활동을 할 수 있는 때를 만난 것입니다.

 

바실레이아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활동을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4:17절입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아주 간략한 표현이지만 이 구절은 세계 역사가 완전히 새로워지는 순간을 가리킵니다. 당시에는 예수님이 누군지, 예수님으로 인해서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가버나움에서 평범하게 살던 삼십대 유대 남자를 누가 주목하겠습니까? 최소한 대제사장 가문의 아들이라든지, 유대 독립을 위해서 무장 투쟁하는 혁명가라면 모를까, 예수님은 세상에 자신을 당당하게 나타낼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메시지와 그 메시지에 전적으로 부합한 그의 삶이었습니다. 위 구절에 그 메시지가 나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이 문장이 예수님의 모든 것을 말합니다. 마태는 4:23절에서 이것을 다시 언급합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17절은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본격적으로 천국을 선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만 간단히 말하는데, 23절은 좀더 구체적으로 그 메시지가 어떻게 전파되는지를 설명합니다. 활동 지역이 가버나움이라는 마을에 한정되지 않고 갈릴리 전체로 확대되었고, 예수님이 유대교의 본거지인 회당에도 들어가셨습니다. 어쨌든지 17절과 23절이 가리키는 핵심 메시지는 예수님이 천국을 선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천국으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입니다. 복음서에는 보통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 바실레이아 투 데우가 많이 나옵니다(1:15). 우리논은 하늘이라는 뜻의 헬라어 우라노스의 2격이고, 데우는 하나님이라는 뜻의 헬라어 데오스의 2격입니다. 하늘나라나 하나님 나라나 내용적으로는 똑같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을 천국이라고 번역했는데, 저는 하늘나라로 바꿔 부르겠습니다. 하늘나라가 원문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하늘이라는 단어를 잘 생각해보십시오. 하늘이 어딘가요? 우주 자체가 신비롭습니다. 제가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서 새로운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우주물리학을 선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구가 태양이라는 별에 행성으로 자리하고 있는 은하계에는 1천억 개의 별이 있습니다. 이런 은하계가 우주에 1천억 개가 있다고 합니다. 별과 별 사이는 보통 4광년 거리입니다.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우주에 무한대에 가까운 별들이 있습니다. 그 전체가 하늘입니다. 성경이 기록된 고대 사람들은 하늘과 땅과 지하라는 3층 구조의 우주를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본 하늘에는 별과 태양이 있습니다. 그건 우리와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늘에 물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창세기의 창조 전승에 따르면 하나님은 물과 물 사이를 나누어서 궁창을 만들었습니다. 노아홍수 이야기는 하늘에서 문이 열려 물이 쏟아지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우리의 과학 지식을 기준으로 보면 고대인들의 생각이 유치할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생명의 비밀을 하늘에서 찾았다는 것은 크게 틀린 게 아닙니다. 고대인들에게 하늘은 생명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생각했기에 하늘에 하나님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생명의 궁극적인인 신비를 그런 방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나라는 헬라어 바실레이아의 번역입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용어 사용에 따르면 나라는 공간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한반도라는 공간에 위치하고, 대구샘터교회는 대구 시에 위치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나라, 즉 바실레이아는 공간이라기보다는 통치입니다. 하늘나라, 또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즉 그의 다스림을 가리킵니다. 공간과 통치의 차이를 씨앗의 발아 현상과 비교해서 생각해보십시오. 씨는 분명히 공간이자 실체입니다. 씨가 일정한 조건이 맞으면 떡잎을 내고 꽃과 열매까지 맺습니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어떤 힘이 거기에 작용합니다. 그 힘이 곧 통치인데, 색깔과 모양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가장 분명한 현실성(reality)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씨와 꽃 자체만 보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의 힘을 느끼지 못한다면 생명을 아는 게 아닙니다. 이처럼 하늘나라는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생명 통치입니다. 그걸 영혼으로 느끼는 사람이 있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긴박성

예수님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도 알쏭달쏭합니다. 가까이 왔다는 말을 우리는 평면적으로만 이해합니다. 직장에 나갔던 가족이 퇴근해서 집에 가까이 왔다거나 장마전선이나 눈보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면 하늘나라가 그 이전에는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건 오해입니다. 하늘나라는 없다가 갑자기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빅뱅의 방식으로 우주를 창조한 것이 분명하다면 하늘나라는 그 빅뱅 순간부터 이미 우주와 세상에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이 세상의 작은 사물도 다 하늘나라와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 안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풀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 바람에 날리는 눈송이, 숲속 그늘진 곳의 이끼, 그리고 돌멩이와 먼지도 다 하나님의 창조 사건이니 하늘나라와 연관됩니다. 예수님도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하늘나라는 여기에 와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가 훼손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나라의 긴박성에 대한 강조입니다.


첫째, 하늘나라가 훼손되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늘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능력입니다. 그 능력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자유이며,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생명을 자기의 소유로 여겼습니다. 자신들이 생명을 완성시킬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을 정복하고, 사람까지 수단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바벨탑을 쌓기 위해서 무던히 노력했습니다. 그게 때로는 과학과 예술의 열정으로, 인간을 향한 휴머니즘으로 추구되었습니다. 그것으로 인간 삶이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개인과 집단과 국가가 서로 끝없이 경쟁합니다. 예수님 시대보다 오늘 우리 시대가 여러 가지 점에서 발전한 건 분명하지만 생명을 우리가 더 풍요롭게 경험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교회를 보십시오. 모든 교회가 중대형 교회로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중대형, 또는 초대형교회로 성장했다고 해서 그 교회 신자들이 행복한 것은 전혀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떤 교회를 지향하십니까? 작은 교회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영혼이 행복한 교회일 겁니다. 인류는 생명을 인간 자신이 성취할 있는 것처럼 여긴 탓에 오히려 생명을 위축시켰습니다. 그게 바로 하늘나라의 훼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 눈을 뜨라는 말씀입니다. 가까이 왔다는 사실에 마음을 두는 사람만이 삶이 훼손되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거기에 없는 사람은 삶이 훼손되고 있는지 아닌지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이는 마치 진짜 보석을 알아보는 사람만이 싸구려 가짜 보석에 한눈을 팔지 않는 거와 같습니다.


둘째는 하늘나라의 긴박성입니다. 그걸 다르게 표현하면 오늘 본문에 나온 그대로 회개하라.’입니다. 복음서에는 하늘나라, 또는 하나님 나라가 언급될 때마다 회개가 따라 나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대다수가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합니다. 그 비유는 우리의 발상을 뒤흔듭니다. 예를 들어서 마 20:1-16절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보십시오. 포도원 일꾼들의 노동시간이 다 달랐습니다. 10시간, 6시간, 3시간, 1시간입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이 일당인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열 시간 일한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 받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사람의 기준으로는 노동 시간에 따라서 일당 액수가 달라져야 하는데, 하늘나라의 기준으로는 똑같아야 했습니다. 각각의 사람들이 노동 능력은 다르겠지만 일당은 똑같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은 생각을 완전히 바꾸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과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메타노이아, 즉 회개입니다. 하늘나라를 향해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런 회개가 실제로 현실에서 가능할까요? 누구나 쉽게 하늘나라를 향해서 돌아설 수 있다면 예수님이 그걸 반복해서 말씀하지 않았을 것이며,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하늘나라를 선포한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은 이 세상 권력이 하늘나라를 거부한다는 의미입니다. 유대의 종교권력과 로마의 정치권력은 예수의 하늘나라 선포가 성가셨습니다. 예수를 침묵시키려고 했습니다. 침묵하지 않자 제거한 것입니다. 그들을 포악한 사람들이라서 하나님 뜻을 거역한 것이라고 보면 이 사태를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겁니다. 악은 머리에 뿔이 난 도깨비가 아닙니다. 악마의 얼굴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악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세련된 사람들이었던 유대교 권력자들과 로마정치 권력자들이 왜 그랬을까요? 하늘나라가 자신들의 종교적 욕망과 정치적 욕망에 걸림돌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욕망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표면적으로 아주 매력적이지만 그 내면은 억압적입니다. 자신의 뜻을 절대화하고 주변 세계에 강요합니다. 예수 당시의 율법주의와 로마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보십시오. 율법의 밖에 있는 이들을 배척합니다. 로마의 평화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을 완벽하게 제압합니다. 자신들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다른 이들의 자유와 평화를 파괴합니다. 그 결과는 양쪽 모두의 자유와 평화가 파괴되는 겁니다. 그것을 오늘 우리는 21세기에도 그대로 목도합니다. 지난 금요일(220)에 트럼프가 미국 4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그는 앞으로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운다고 합니다. 그 이전에도 미국이 자신들의 이익을 접어두고 다른 나라를 배려하거나 세계 평화를 추구한 건 아니지만, 이제는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겠다는 겁니다. 국내외적으로 힘과 힘이 충돌함으로써 자유와 평화는 점점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것만 생각하면 인류의 미래는 암담합니다.

 

하늘나라와 예수

저는 정치 평론가도 아니고, 경제학 교수도 아닙니다. 욕망의 충돌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아는 게 별로 없고, 말씀드릴 것도 많지 않습니다. 더 근본적으로 세상 문제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설령 인공지능이 현실화되어서 인간 세상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어도 여전히 다른 문제로 인해서 사람들은 충돌할 겁니다. 여전히 경쟁하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심지어 전쟁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제가 무슨 말을 더 붙일 수 있겠습니까. 저는 설교자로서 하늘나라를 향해 돌아서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설명할 뿐입니다. 그것을 제대로 알아들으면 짙은 안개가 자욱한 것과 같은 세상살이에서도 한줄기 빛을 느낄 것입니다. 그 빛을 향해서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 최선입니다.


초기 기독인들이 본 한줄기 빛을 오늘 설교 주제와 연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바로 그 예수를 하늘나라로 경험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1:15). 똑같이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유일신 종교인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기독교의 이런 주장을 신성모독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떻게 인간인 예수가 하나님일 수 있느냐는 반론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보이는 하나님이라고 과감하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얻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 생명 경험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그런 경험을 했고,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예수를 평생 믿어도 생명을 얻었는지 확실하지 않다고 불안해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교회를 다니는 분들이라면 다른 사람보다 더 풍족하게 살고, 출세하고, 건강하게 사는 것만을 생명이라고 생각할 분은 없을 겁니다. 그런 생명만 원단다면 굳이 예수를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세상이 온갖 사탕발림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들이 다 이런 생명을 말하고 있으니까요. 잊지 마십시오. 생명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이에 대한 명확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종말에 생명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은 생명 완성의 순간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그 결정적인 순간인 종말이 오기 전까지 잠정적인 인생살이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늘나라를 향해서 회개하라는 말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은 똑같은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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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방성수

January 22, 2017
*.186.154.105

오늘 샘터교회에 등록을 하였습니다. 등록을 하고 보니 목사님의 설교가 새롭게 다가 오는 것 같습니다.

오늘 설교에서 '하늘나라의 훼손과 긴박성'에 대한 내용이 감명깊게 다가 왔습니다.

"이렇게 생각과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메타노이아, 즉 회개입니다."

참 감동적인 말씀입니다. 저의 삶의 방향도 이런 회개가 이루어져야 참된 신앙의 길로 들어 섰다고 얘기 할수 있을텐데....

어렵고 지난한 길이 될지라도 한번 끝까지 가 볼 생각입니다. 

요즈음 제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성 프란치스코>란  소설을 읽고 있는데(성 프란치스코의 생애를 그린 소설임) 여기서 프란치스코가 부자집 아들로서의 기득권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살아가는 모습이  성경이 말하는 메타노이아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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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23, 2017
*.164.153.48

예, 방성수 님,

교회에서도 얼굴을 직접 뵈고

여기 온라인에서도 대화를 하게 되니 반갑기 그지 없습니다.

신앙의 길은 수행입니다.

열광적인 종교 행태를 반복하는 방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생명의 깊이로 들어가는 방식이어야겠지요.

그건 늘 새로운 경험입니다.

방성수 님이 대구샘터교회 일원이 되신 걸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마음 편안히 먹으시고 행복한 신앙생활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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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온마음

March 13, 2017
*.165.37.68

세상에 매몰되어 참되고 진실된 것이 무엇인지 호도되지 않도록 부단히 수행해야겠습니다.

위 본문의 비유에서 보석감정사가 부단히 진품에 집중하는 것처럼 그것에 지속적으로 집중

하고 마음의 중심을 두는 자세를 가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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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13, 2017
*.164.153.48

온마음 님이 지금 삶에서 가장 중요한 태도를 짚은 겁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로 인해서 삶을 생명과 구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거든요.

이게 실로 우리 삶의 능력으로 들어오려면

'지속적인 집중'이 필요한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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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 기타 막힘에서 열림으로! 2004-07-02 1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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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 기타 야훼의 진노와 모세의 기도 [1] 2004-07-02 11626
1002 기타 예수님을 먹다 [1] 2004-07-02 13097
1001 기타 땅을 묵혀라! 2004-07-02 11336
1000 기타 마술과 신앙 2004-07-02 10808
999 기타 세계의 토대 2004-07-02 12200
998 기타 야훼의 자기 증거 2004-07-02 11447
997 기타 운명과 자유 2004-07-02 10490
996 기타 본질의 변질 2004-07-02 10548
995 기타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힘 2004-07-02 12126
994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10102
993 기타 노동하는 인간(1) 2004-07-02 9582
992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10072
991 기타 영광의 경험 [3] 2004-07-02 9420
990 기타 노동하는 인간(2) [2] 2004-07-02 9060
989 기타 무엇이 진실한 예배인가? [1] 2004-07-02 9814
988 기타 수행으로서의 신앙생활 [1] [1] 2004-07-02 8672
987 기타 돌무더기에 얽힌 사연 [1] 2004-07-02 9742
986 기타 메시아적 행위와 교회 [1] 2004-07-02 9444
985 기타 사랑이란 무엇인가? [1] 2004-07-02 15517
984 기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1] 2004-07-05 9386
983 기타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1] 2004-07-11 9663
982 기타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2004-07-18 9714
981 기타 믿음과 사랑의 뿌리, 7월25일 2004-07-25 9386
980 기타 말씀 망각의 심판, (8월1일) 2004-08-05 8652
979 기타 기도란 무엇인가? (8월8일) [2] 2004-08-08 12892
978 기타 모세의 소명, 2004.8.15. 2004-08-16 9771
977 기타 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2004-08-22 9448
976 기타 평화를 위한 분열, 8월29일 [5] 2004-08-30 8538
975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486
974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9224
973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973
972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342
971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403
970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363
969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215
968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725
967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412
966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349
965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408
964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9125
963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477
962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178
961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9001
960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564
959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672
958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705
957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526
956 기타 세례 요한의 증언, 1월16일 [1] [1] 2005-01-17 13072
955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666
954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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