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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뒤로 물러가라!" (막 8:31-38)

사순절 조회 수 8416 추천 수 0 2018.02.25 21:49:57
설교듣기 : https://youtu.be/m34k5d57gdQ 
설교보기 : http://afreecatv.com/nfermata 
성경본문 : 마가복음 8:31-38 

내 뒤로 물러가라!”

8:31-38, 사순절 둘째 주일, 2018225

 

31.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2.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8.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고난받는 그리스도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메시야, 즉 그리스도라고 생각할 겁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리스도라고 믿는지를 설명하라는 요구를 받으면 대답이 쉽지 않을 겁니다. 우리와 똑같이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유대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은 예수님을 메시아가 아니라 선지자로 간주합니다. 그런 생각이 예수님 당시에는 일반적이었습니다. 8:27-30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제자들은 자신들이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습니다. ‘세례 요한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엘리야라 하는 사람도 있고,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은 제자들의 생각은 무어냐고 재차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이 원칙적으로 옳지만 오해의 소지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정확하게 예고하셨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이 시작되는 막 8:31절이 이를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이 구절에 예수님의 운명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네 가지입니다. 1) 예수는 고난당할 것이다. 2) 예수는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받을 것이다. 3) 예수는 죽임당할 것이다. 4) 예수는 삼일 만에 살아날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거칠게 항변했습니다. 이런 일이 당신에게 일어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당시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승리자로서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버림받고 십자가에 달린 메시야둥근 삼각형이라는 말처럼 형용모순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는데도 베드로가 항변했다는 게 이상해보입니다.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거부하는 것은 그럴 수 있다 해도 부활까지 거부하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는 표현은 호 6:2절에 근거합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이 구절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치료하고 위로해주신다는 사실에 대한 문학적 표현입니다.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거나 취업에 실패한 젊은이에게 하나님이 너를 살리고 일으킬 터이니까 걱정하지 마라.’고 위로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 구절에서 핵심은 고난과 죽음입니다.


오늘 우리도 베드로와 똑같이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고난당하고 버림받고 죽임 당한다면 누가 기독교인이 되겠습니까. 그런 고난도 잠시이고 결국 복을 받아서 잘 살게 된다고 믿기 때문에 기독교인으로 사는 거 아니겠습니까. 특히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재물에 대한 욕망까지 신앙적으로 포장되고 있는 마당이니 고난과 버림받음이라는 운명은 어디서나 기피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베드로를 꾸짖으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33절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베드로의 잘못은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무조건 좋은 것이며, 사람의 일은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분리하면 곤란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본문이 굳이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하는 이유는 세상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사람의 일은 이스라엘인들의 전통에 묶이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들의 전통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검증된 것이라서 누구나 옳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덕, 윤리, 규범, 질서 등은 어디서나 필요합니다. 그것이 잘 발달되고 작동되는 사회를 가리켜서 문명사회라고 보통 말합니다. 이런 사회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고대 유대인들에게는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이 이스라엘을 추동해가는 원리였습니다. 그들에게 인정받아야만 안정적인 삶이 보장됩니다.


본문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일은 이와 달리 이스라엘의 전통을 넘어서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리스도가 고난당하고 버림받고 죽임을 당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한다는 사실은 당시에는 아무도 동의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고전 1:23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미련한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의 일에만 마음이 쏠려 있는 사람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염려에 묶이지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추구합니다. 삶의 태도가 완전히 다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예수님은 고난당하고 버림받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런 운명은 다 불행한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이런 운명에 떨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운명을 막아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런 운명을 통해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저주스러웠던 운명으로부터 가장 거룩한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것을 순전히 교리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고난과 소외와 고독은 한편으로(사람의 일) 우리의 삶을 파괴하지만, 다른 한편으로(하나님의 일) 삶을 완성합니다. 혼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생명의 세계야말로 가장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를 실질적으로 느끼려면 혼자 아니면 안 됩니다. 우리 집 마당의 소나무 다섯 그루와 하나 되는 즐거움도 혼자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책과 시계와 컴퓨터와 책상 등이 배치된 제 서재의 공간을 깊이 느끼려면, 이럴 때만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강렬한 느낌에 사로잡히는데, 당연히 혼자여야만 됩니다. 고난과 버림받음이 겉으로는 외롭지만 속으로 자유롭습니다. 이 자유가 가장 중요한 생명 현상이기에 저는 남은 인생을 혼자 지내고 싶습니다. 아직 젊어서 그렇지 더 늙으면 외로워질 거라고 말할 분들이 있겠지요. 그래서 자식들이나 지인들이 찾아와주기를 바랄 거라고 말입니다. 지금 집사람과 둘만 지내지만 불편하거나 외롭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걸 보면 나이가 더 들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집사람도 저와 비슷하게 생각해서 다행입니다. 내가 먼저 죽으면 집사람의 생각이 달라질지는 제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지 나이가 들면 자식들을 비롯해서 주변 사람들이 떠남으로써 더 자유로워진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고독해야만 누릴 수 있는 생명의 절정을 점점 깊이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에서 정말 중요한 일은 고독해야만 경험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영성가들, 시인들, 예술가들이 다 그런 방식으로 살았습니다.


이 문제는 목회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저는 평생 작은 교회에서 목사 생활을 했습니다. 젊었을 때는 기회가 주어지면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교회에서 소신껏 목회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기회를 잡으려면 나름으로 교회 정치를 해야만 합니다. 결국 저는 목회 현장에서 버림받은 것입니다. 목사들 모임에 자주 나갈 필요도 없고, 교회 성장 프로그램을 연수받으려고 세미나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었고, 중대형 교회 담임 목사로서 감당해야 할 온갖 행정적인 것들과 사람관계에 시간을 쓰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역설적으로 더 좋은 것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있었습니다. 책도 더 읽고, 공부도 더 하고, 삶에 더 천착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기준으로 외로우니까 정말 중요한 것에서 풍성해진 겁니다.

 

내 뒤로!’

사람의 일만 생각하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으뜸 제자를 사탄이라고 부르는 것은, 더구나 바로 직전에 주는 그리스도이시다.’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그런 호칭을 붙인다는 것은 지나쳐 보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생각을 아주 엄중하게 본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사탄은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악한 세력입니다. 병행구인 마 16:23절은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사탄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일에만 마음이 쏠리면 그가 아무리 인격적이고 교양이 넘치고 마음이 따뜻하더라도 사탄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눈을 감게 하기 때문입니다.


성서신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내 뒤로 물러가라.’는 헬라어 문장은 원래 내 뒤로!’(오피소 무)라는 단어로 표현되었다고 합니다. ‘내 뒤로!’나를 따르라.’는 명령, 즉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는 명령과 같은 뜻입니다. 이 순간에 베드로를 비롯해서 제자들은 제자로의 부르심을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은 실수한 베드로를 물리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가깝게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 34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이라는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분간하지 못함으로써 부지불식간에 사탄이 될 수 있지만, 그래서 자책에 떨어지기도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귀만 열려 있다면 내 뒤로!’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내 뒤로!’가 가리키는 예수 따름은 두 가지 점에서 기독교 신앙의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하나는 구체적인 역사적 인물이었던 예수를 따르는 것이지 진리나 지혜나 삶의 모범을 따르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삶의 오묘한 진리를 깨우치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예수를 믿으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실제로 믿고 따르려면 바로 그 예수가 누군지를 알아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 따름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이 어느 정도 성숙해지면 이제 혼자서 구원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반복해서 다시 내 뒤로!’로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자신이 이루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예수님을 따르는 게 아닙니다. 34절은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현대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입니다. 현대는 자기 부인이 아니라 자기 긍정을 중요한 가치로 가르칩니다. 자기 긍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자기 긍정과 대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자기의 삶을 긍정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자학이나 냉소나 열패감에 떨어지라는 게 아니라 자기의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한다면 생명의 완성도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그 어떤 삶의 조건에서도, 즉 고난당하고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조건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을 불편하게 여기거나 오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회생활에서 더 그렇게 나타납니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은 상투적으로 내가 십자가를 져야지.’ 하고 말합니다. 자기를 희생하고 양보하고 손해 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희생, 양보, 손해가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집중함으로써 벌어지는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십자가인지가 중요합니다. 지난 몇 달에 걸쳐서 강원랜드 채용 비리문제가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수백 명의 신입사원들이 소위 으로 합격한 사건입니다. 그 수사를 맡은 안 검사가 외압을 받았다고 내부자 고발을 했습니다. 쉽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처리했다면 좋은 자리가 보장되었을 겁니다.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느냐 하는 질문에 안 검사는 검사로 살고 싶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게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옳은 일을 위해서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이니까요.

 

생명의 길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면서 예수의 제자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35절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그리고 이어서 36, 37절에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고 했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 바로 구원받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반복해서 예수를 믿고 따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목숨을 얻는다는 게 무슨 말인지, 구원받는다는 게 무엇인지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오늘 예배에 참석한 분들 중에서 있을까요? 신앙의 경력만 늘어날 뿐이지 자신에게 기독교 신앙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분간하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구원 경험이, 즉 생명 경험이 없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고 제자가 된 것도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해 본 적도 없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자기 십자가를 져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제자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제자가 되지 않았으면서 어떻게 생명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500미터 스피드 스케이팅 종목에서 라이벌인 한국의 이상화 선수를 제치고 금메달을 딴 일본 선수 고다라 나오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스케이트 날 아래에 있는 고리(얼음)을 즐긴다. 그것이 내가 스케이팅을 하는 이유이다. 나는 스케이터로서 얼음과 일치되는 것 자체를 즐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이 혼란스러울수록, 무엇이 옳은지 종잡기 힘들수록 예수님의 뒤로 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그게 최선입니다. 실제로 믿고 그 길을 가보십시오.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가 여러분에게 경험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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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은혜

February 25, 2018
*.240.61.32

세상을 얻는건 우리의 능력과 노력여하에 달렸겠지만, 생명을 얻는건 생명의 근원에의 연결만이 유일한 길이기에 생명은 소유가 아니요 생명의 근원과의 존재론적인 연합이겠지요
그래서 생명살이, 구원살이는 doing 이 아니요 being 이라고 하는건가 싶군요

생명을 얻었노라, 얻겠노라 자처하는 우리가
세상사람들과 똑같이 자기를 확대시키는 일에 몰두하면서 경건의 포즈를 취하고 있다는건, 생명에 대해,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목숨을 잃는다는 것에 대해 관념적이고 감상적인 차원에 갇힌채,
또 자기가 거기에 갇혀있는지도 모른채, 종교적인 세련미나 교양을 쌓아가고 있는 탓이 아닌지요?

자기집중과 자기확대의 시대정신이 교묘한 논리로
이미 교회를 삼켜버린 이 시대에, 분연히 이를 거슬러 살아갈수 있는 추동력은 무엇일까요?

요즘 매일 묵상에서 연일 토로하시는 '구원과 직결되어있는 죽음문제'에 집중하여 사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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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26, 2018
*.182.156.121

'...추동력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피소 무'(내 뒤로),

즉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다.

문제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라는 데에 있겠지요.

최선은 예수를 따랐던 선배 제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지금 여기서 그런 길을 가는 도반들과 영적인 친교를 나누면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나선 사람처럼 살아가는 겁니다.

오늘의 세상살이에서는 이런 삶이 불가능하니

나름으로 '엑소더스'가 필요해보입니다.

힘을 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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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하늘연어

February 26, 2018
*.47.159.15

내 뒤로!’

넷째 줄....."병행구인 마 16:23절은 좀 저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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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26, 2018
*.182.156.121

ㅎㅎ 고맙습니다.

평소에 오자를 고쳐놓아야만

혹시라도 나중에 책으로 펴낼 때

크게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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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하늘연어

February 27, 2018
*.47.159.15

네 목사님!

전에 올린 말씀대로 저도 그 때를 생각해 도와드린다는 생각으로 적는 것이니

좋은 마음으로 이해 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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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은나라

February 27, 2018
*.105.196.84

주일아침 눈뜨면서 정목사님의 신학단상 ''영성과 열정''을 읽게 되었습니다.
주일 설교말씀 주제인 ''내 뒤로''와 그 앞내용인 ''사탄의 일''과 연결이 되어 설교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덜었습니다.
일반 교회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의 일'은 '교회의 일'을 적용시킵니다.
그래서 인간의 열정을 유발시킵니다.
그래서 혼란스러웠던거 같습니다.
열정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가? 하구요.
이 열정을 위해 간구했고, 간구한 열정으로 교회일을 열쓈히 했던거 같습니다.

잠시 '영성과 열정' 의 글을 인용한다면..
< 엄격하게 말한다면,
영성의 깊이에 들어갈수록
우리에게 인간의 열정은 축소되고,
거룩한 활동이 확대된다.
왜냐하면, 생명의 영인 성령의 지배를 받음으로 발현하게 되는 인간의 영성은..
자기 스스로 빛을 내는게 아니라~
성령의 빛을 반사하거나..
아니면, 그 뒤에 숨는 영적작용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엄습하는 영의 광휘에 두려움을 느낀 영성의 대가들이 묵언, 명상, 고독, 내면의 세계로 침잠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열정과 영성의 차이를 확인할수 있다.>

'내뒤로~'와 '영성'은 내 열정을 감소시키는 것이고,
나를 부인하는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해가 됩니다.

또 한가지는 베드로에게 '내뒤로 물러나라'는 말씀이 실수한 베드로를 물리치는게 아니라..
도리어 가깝게 불렀다는게 새로운 관점인거 같습니다.
예수를 따름이 삶의 오묘한 진리 깨우침이나, 삶의 지혜나 모범을 따르는게 아니라..
예수를 믿는거라는 거죠.
생명의 시작과 완성이 하나님께 있으니..
너희는 힘(열정)을 빼고 예수의 뒤에서 성령의 빛을 반사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시는거 같습니다. 말씀 감사드립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February 27, 2018
*.182.156.92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게 의미 있는 거냐,

또는 어떤 길이 자아실현의 궁극적인 길이냐,

무엇이 생명 충만이냐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가지각색이겠으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를 뒤따름'이라는 한 가지 대답만 있으니

다른 대답을 기웃거리지 말고,

부러워도 말고 걱정하지 말고,

믿음으로 그 길을 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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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3 기타 종말론적인 삶 (벧전 4:1-11) [1] 2004-07-02 11941
1022 기타 은폐와 노출 [3] 2004-07-02 11659
1021 기타 부자 이야기 [2] 2004-07-02 13987
1020 기타 흔들리지 않는 터전 [1] 2004-07-02 11681
1019 기타 자기 의와 은총 [1] 2004-07-02 11562
1018 기타 언어의 집 [1] 2004-07-02 9348
1017 기타 내면적 삶이란? [1] [1] 2004-07-02 9350
1016 기타 삶으로서의 예배 [1] 2004-07-02 9864
1015 기타 말의 구원론적 능력 [1] 2004-07-02 12025
1014 기타 불평을 넘어서 존재의 기쁨으로 [1] 2004-07-02 9553
1013 기타 주님의 재림과 생명의 완성 [1] 2004-07-02 9552
1012 기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3] 2004-07-02 10430
1011 기타 세례요한의 질문 [1] 2004-07-02 13829
1010 기타 이사야의 구원신탁 2004-07-02 11538
1009 성탄절 마리아의 노래 (눅 1:46-56) [1] 2004-07-02 12438
1008 기타 삶의 지혜를 넘어서 [1] 2004-07-02 10804
1007 기타 기쁨과 사랑의 역학관계 [1] 2004-07-02 10148
1006 기타 자유를 향한 길에 서서 [1] 2004-07-02 10965
1005 기타 사울의 어리석음 [1] 2004-07-02 12318
1004 기타 막힘에서 열림으로! 2004-07-02 12305
1003 기타 구름 타고 오십니다. 2004-07-02 11415
1002 기타 야훼의 진노와 모세의 기도 [1] 2004-07-02 11591
1001 기타 예수님을 먹다 [1] 2004-07-02 13015
1000 기타 땅을 묵혀라! 2004-07-02 11295
999 기타 마술과 신앙 2004-07-02 10772
998 기타 세계의 토대 2004-07-02 12164
997 기타 야훼의 자기 증거 2004-07-02 11409
996 기타 운명과 자유 2004-07-02 10455
995 기타 본질의 변질 2004-07-02 10511
994 기타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힘 2004-07-02 12088
993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10070
992 기타 노동하는 인간(1) 2004-07-02 9540
991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10038
990 기타 영광의 경험 [3] 2004-07-02 9388
989 기타 노동하는 인간(2) [2] 2004-07-02 9015
988 기타 무엇이 진실한 예배인가? [1] 2004-07-02 9783
987 기타 수행으로서의 신앙생활 [1] [1] 2004-07-02 8628
986 기타 돌무더기에 얽힌 사연 [1] 2004-07-02 9705
985 기타 메시아적 행위와 교회 [1] 2004-07-02 9409
984 기타 사랑이란 무엇인가? [1] 2004-07-02 15481
983 기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1] 2004-07-05 9335
982 기타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1] 2004-07-11 9619
981 기타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2004-07-18 9674
980 기타 믿음과 사랑의 뿌리, 7월25일 2004-07-25 9350
979 기타 말씀 망각의 심판, (8월1일) 2004-08-05 8609
978 기타 기도란 무엇인가? (8월8일) [2] 2004-08-08 12858
977 기타 모세의 소명, 2004.8.15. 2004-08-16 9741
976 기타 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2004-08-22 9418
975 기타 평화를 위한 분열, 8월29일 [5] 2004-08-30 8491
974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453
973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9173
972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938
971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301
970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344
969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312
968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177
967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689
966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364
965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304
964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377
963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9083
962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431
961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138
960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8958
959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522
958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639
957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661
956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484
955 기타 세례 요한의 증언, 1월16일 [1] [1] 2005-01-17 13043
954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624
953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1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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