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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 여호와! (사 43:1-7)

주현절 조회 수 5618 추천 수 0 2019.01.13 23:44:22
설교듣기 : https://youtu.be/CzUsS3gUdjc 
설교보기 : http://afreecatv.com/nfermata 
성경본문 : 이사야 43:1-7 

창조주 여호와!

43:1-7, 주현 후 첫째 주일, 2019113

 

1.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4.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5.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7.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성경의 첫 권인 창세기부터 마지막 권인 요한계시록까지 전체 66권에 이르는 성경전서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창세기는 말 그대로 하나님이 우주 삼라만상을 지으셨다는 진술로 시작되고,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때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재창조하실 것이라는 진술로 끝납니다. 창세기와 요한계시록 사이에도 창조 이야기는 수없이 나옵니다. 예컨대 욥기만 해도 그렇습니다. 욥이 당한 재앙은 사람의 논리로 대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창조 세계의 아득한 차원을 제시합니다. 욥은 그제야 대답을 얻습니다. 이전에는 인생살이의 답을 귀로 듣기만 했지만 이제는 눈으로 본다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표현이 말이 될까요, 안 될까요? 이런 성서의 진술이 와 닿지 않는 이유는 성서가 말하는 창조의 깊이를 느끼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창조 이야기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읽은 사 43:1-7절도 바로 그 창조 이야기를 합니다. 이 말씀이 기록되던 시대는 기원전 6세기 중반입니다. 이스라엘이 기원전 587년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한 후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바벨론 포로 사건은 욥의 재앙처럼 이스라엘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들에게 수모를 당한다는 사실은 그동안 알고 있던 신앙에 위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무능력하든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을 향해서 익명의 한 저술가가 쓴 글이 바로 사 43장입니다. 영적인 힘이 넘치는 글입니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을 창조주 여호와로 표현했습니다. 43: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 구절에는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신다.’는 표현이 두 번 반복되었습니다. 한번은 대상이 야곱이고 다른 한번은 이스라엘이라는 게 다를 뿐입니다. 야곱과 이스라엘은 같은 민족을 가리킵니다. 이 사람은 절실한 마음으로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를 강조합니다. 이 문장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과 세계관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다는 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내용으로 기도를 하고, 그런 내용으로 찬송을 부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는 상투적으로만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말에는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피조물이라면 우리의 생명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우리의 것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조금이라도 손해가 나는 일을 못견뎌합니다. 인정받지 않으면 짜증스럽습니다. 현대인들도 살아가면서 매사를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자신의 이름으로 된 아파트가 한 채 있다고 합시다. 그 동네에 장애인 시설이 들어오는 걸 극구 반대합니다. 아파트 값이 떨어진다는 이유입니다. 만약에 그 아파트에 월세나 전세를 사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굳이 반대하지는 않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살이가 전세를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공연한 것으로 예민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겁니다.

하나님이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라는 말에는 좀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리의 생명이 선하고 귀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면 당연히 선하고 귀합니다. 우리는 선하고 귀하다는 것을 세상이 말하는 기준으로만 판단하다보니 창조의 능력을 붙들지 못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기준은 대부분 돈과 권력과 업적과 관계됩니다.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고, 높은 연봉을 받고, 최소한 중산층이 누려야 할 삶의 조건을 갖추는 것입니다. 그게 주어지지 않으면 불안해지고 주눅이 듭니다. 이런 조건들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비교할 때 누추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능력 앞에서 세상의 조건에 사로잡힌 사람은 왕 앞에서의 거지와 같습니다. 거지가 옷 수거함에서 골라잡아 입은 옷을 자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거칠게 말해서 세상은 거지들의 왕국이 아닐까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능력에 사로잡힐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깊은 신앙의 차원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웬만큼 세상과 삶에 대한 통찰력이 있는 사람들은, 대개 시인들에게서 잘 나타나는 것인데,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금 시간과 공간의 결합으로 작동되는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 우리는 들어왔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는 세계내존재’(In der Welt Sein)입니다.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삼대 비극이라는 연극무대의 배우와 비슷합니다. 이곳을 보니 꽃이 있고, 저곳을 보니 벌이 날아다닙니다. 이곳에서 커피 향을 맡을 수 있고, 저곳에서 매실 향을 맡을 수 있습니다. 구름과 비와 바람 현상을 만납니다. 손으로 나무와 흙과 옷감의 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너무 일상적인 것이라서 아무런 감흥이 일어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지구에 처음 온 외계인의 시각으로 그것들을 느껴보십시오. 이런 것보다 더 멋지고 황홀한 경험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지금 당장 먹고 살기가 고달파서 그런 것에 마음을 줄 여유가 없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일단 노력을 하십시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붙들지 못할 상황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라는 표현이 가리키는 두 번째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신다는 사실입니다. 2,3a절에서는 그 내용을 좀더 사실적으로 설명합니다. 들어보십시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도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여기에 나오는 물과 강과 불은 이스라엘 역사와 연관됩니다. 애굽을 탈출하고 처음 당면한 어려움은 홍해였습니다. 뒤에서는 애굽 파라오 기마병들이 추격을 하고 앞에는 홍해가 놓여 있습니다. 홍해가 갈라져서 이스라엘은 마른땅처럼 무사히 건널 수 있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요단강을 건너야만 했습니다. 요단강이 멈춰서 이스라엘은 무사히 건넜습니다. 불은 전쟁의 참화입니다. 바벨론의 공격을 받은 예루살렘은 초토화되었습니다. 모든 건물이 불에 탔고, 사람도 불에 탔습니다. 불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극도의 불안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불과 불꽃도 이제는 과거의 일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는 동족에게 외치는 중입니다. 1절과 5절에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반복해서 강조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려움은 일상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일컬어지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5:1절에서 환상 중에 여호와의 말씀이 아브라함에 임했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라함이 느낀 두려움은 이스라엘 민족 역사를 관통합니다. 주변의 제국에 의해서 생존이 늘 위태로웠습니다. 지금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면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전해 듣는 이 사람들도 두려움을 일상적으로 경험했습니다. 지금 21세기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런 두려움이 삶을 위축시키거나 공격적으로 만듭니다.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요? 무조건 낙관적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현실을 도피하게 됩니다. 이사야는 창조주 여호와가 지키신다는 사실을 근거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신다는 말은 우리에게 고난과 재앙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스라엘도 세계의 여러 작은 나라가 겪어야 할 고난과 재앙을 다 경험했습니다. 자신들의 민족적인 특성과 종교적인 특성을 지키느라 오히려 더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창조주 여호와라는 사실을 경험한 이들에게만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지나칠 정도로 반복해서 창조주 여호와를 외쳤습니다. 그 창조의 능력 안에서 고난과 재앙까지도 극복된다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개인의 운명에서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지금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그 과정이 끝납니다. 죽습니다. 죽음이 창조의 완성이라고 한다면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불행도 역시 완성의 한 부분입니다. 여기 인생살이가 잘 풀린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명성을 날리면서 살았습니다. 죽음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영혼이 피폐해집니다. 다른 한 사람은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지만 죽음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영혼이 더 풍요롭고 빛납니다. 예수님이 마 5장에서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가난한 사람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런 말씀이 실감나지는 않을 겁니다. 지금 당장 재미있고, 배부르고, 즐거운 것에만 몰두하기 때문입니다. 이걸 극복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가난과 불행을 합리화하자는 말이 아니라 삶의 중심을 뚫어보자는 것입니다. 그걸 뚫어보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런 설명이 너무 성경 중심의 아전인수라서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자기는 하나님이 관심을 기울여 지켜주실 정도로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도 가능합니다. 우주의 시간에서 한 순간에 불과하고, 우주의 크기에서 먼지에 불과한 자신을 지명하여 불러서 너는 내 것이라.’ 한다는 말이 과장된 것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 느낌은 오해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똑똑하고 믿음이 좋고 성실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지키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지키시고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입니다. 7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이사야 선지자의 관점이 얼마나 심층적이고 거시적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내 이름으로 불리는 자는 곧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드러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창조의 확연한 발현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창조의 능력이 발현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너는 내 것이라말씀하시고,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믿는다면 우리가 각각 모두 하나님의 영광의 빛 가운데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이는 곧 창조의 빛 가운데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 창조의 빛은 너무 강렬해서 우리의 가장 원초적인 죄와 죽음의 능력까지도 말소시킵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설교자로서 회중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인생살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의 실제 삶에서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이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이고, 하나님의 현존입니다. 저는 설교 앞 대목에서 이미 하나님의 창조 능력에 관해서 설명했습니다. 시인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창조의 능력과 그 신비를 경험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저는 여기서 그것을 다시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초기 기독교가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 경험했는지를 설명하겠습니다. 그 내용은 고후 4:6절에 나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은 실제의 얼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운명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발현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고 거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곧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죄와 죽음에서 해방된 사람은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생명을 얻은 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저는 지금 기독교의 가장 초보적인 교리를 말씀드렸습니다. 초보적이지만 가장 중요한 교리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지 않았다고, 즉 하나님의 영광을 실질적으로 경험하지 못한다고 주장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기독교인인데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게 없어서 당혹스러워하거나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할지도 모릅니다. 여기에도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그리스도와 점점 가까워지고 하나님과 친밀해짐으로써 세월이 가면서 자신의 영혼이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끼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처세술은 늘지만 영혼의 자유로부터 오히려 멀어집니다. 영혼의 자유로부터 멀어지면 평화와 안식이 아니라 경쟁과 교만과 자기만족에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세계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구태의연한 태도가 아니라 백척간두에 올라간 태도로 하나님 앞에 서야합니다.

백척간두의 자리가 바로 하나님을 창조주 여호와로 아는 것입니다. 창조와 그 완성의 아득한 세계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100년 전으로 들어가든지 100년 후로 나아가보십시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의 자리가 무엇인지 눈에 보일 겁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 하나에 집중하고, 나의 궁극적인 미래에만 나의 영혼이 집중하지 다른 것에는 관심이 가지 않습니다. 다른 것에 완전히 관심이 없을 수는 없으나 대폭 줄어들 겁니다. 이런 경험이 있을 때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창조 능력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눈과 귀가 번쩍 뜨일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안개가 햇살에 걷히듯이 세상에서의 두려움이 걷히는 걸 경험할 겁니다.

*설교듣기는 '서울샘터교회'의 설교이고, 설교보기는 '대구샘터교회'의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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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하늘연어

January 14, 2019
*.86.237.246

죽음과 불행이 창조의 완성이라는 말씀에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이 창조의 완성 과정에서 고통 받고, 슬퍼하고, 분노하며  원통해 하는 모든 교우들에게

평화의 위로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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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14, 2019
*.182.156.135

고난, 재앙, 불행, 죽음 등등은

하나님이 세상을 선하게 창조했다는 사실 앞에서

극복되어야 할 우리의 실존이면서

우리가 완전하게는 알지 못하는 창조의 어두운 면입니다.

한편으로는 연대하여 투쟁하고

하나님의 승리를 향한 희망을 놓치지 말아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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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은혜

January 15, 2019
*.229.148.165

욥기의 결론을 익히 알고있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창조능력을 경험하기 전의 욥의 영적상태로, 또 그를 정죄하는 친구들의 시각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라는,
성경이 주장하는 우리의 정체성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면서
어줍잖이 알고 있는 교리와 신앙생활의 상투성에 갇혀 제 자리에서 한걸음도 못나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창조능력의 깊이에 눈뜨지 못한 탓일까요?

사물을 뚫어보는 예민한 영적감수성을 가진 시인이 못된다면, 결국 우리가 끔찍히 두려워하는 고립무원 백척간두의 나락에 떨어지지 않고는 그 분의 창조능력을 경험할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인가요?

각자가 욥기 2탄을 써가면서, 줄탁동기의 임계점에 이를때까지 무던히 이 길을 가는것 말고는 지름길은 없겠죠?

달은 보지 못하고 달을 가르치는 손가락만 보게 하는 설교가
넘쳐나는 이 땅에, 한결같이 동일한 방향성을 안내해주셔서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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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15, 2019
*.182.156.135

모든 기독교인들이 사도와 교부와 위대한 신학자나 영성가처럼

기독교 신앙의 높거나 깊은 경지에 들어갈 수는 없으니

주어진, 또는 자신이 선택한 신앙의 자리에서

나름으로 최선을 다하면서 살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중에 영혼의 눈이 밝은 사람은

누가 옆에서 하라 마라 하기 전에 구도정진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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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쿠키

January 17, 2019
*.123.54.208

지난 주 '별을 따라 온 사람들'  말씀이

제 마음에서 떠나지 않네요. 계속.

'동방박사 세사람 귀한 예물 가지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별 따라 왔도다.'

이 찬송이 저절로 입에서 맴돕니다.


이번 주 말씀도 사실 수없이 듣고 외우며

힘을 얻고 위로를 받은 말씀이지요.

두려워 말라, 너는 내 것이라는

말씀 안에

하나님의 창조와 영광!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또한 피조물인 내가 , 우리가 ,

오묘한 하나님안으로 들어가는 느낌 이랄까?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운명이

내 삶과 운명이라는것..


근데 목사님,

야곱도 120세 죽음 앞에서

'내가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고백하고

시편 기자도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80이라도

수고와 슬픔 뿐'이라는 고백을

때때로 생각하면

다시 하나님은? 인간은?

다 ~~ 불쌍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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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17, 2019
*.182.156.135

예, 불쌍한 거 맞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연민을 느끼듯이

우리도 모든 살아있는 것에 연민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연민을 딛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인식과 신뢰에서 주어지는 것도 분명합니다.

야곱의 한탄이나 시편기자의 고백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실존의 한 면을 말한 것이니

그것으로 우리 삶의 진면목을 다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도 해가 빛났고,

여전히 숨을 쉴 수 있고,

성경책을 손으로 만질 수 있으니,

그리고 십자가와 같은 운명에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나사렛 예수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분명하니

찬양하고 즐거워해야할 이유가 충분하겠지요.

연민과 찬양은 생명의 능력인 사랑의 양면이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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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 기타 내면적 삶이란? [1] [1] 2004-07-02 9390
1017 기타 삶으로서의 예배 [1] 2004-07-02 9891
1016 기타 말의 구원론적 능력 [1] 2004-07-02 12061
1015 기타 불평을 넘어서 존재의 기쁨으로 [1] 2004-07-02 9592
1014 기타 주님의 재림과 생명의 완성 [1] 2004-07-02 9585
1013 기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3] 2004-07-02 10471
1012 기타 세례요한의 질문 [1] 2004-07-02 13857
1011 기타 이사야의 구원신탁 2004-07-02 11567
1010 성탄절 마리아의 노래 (눅 1:46-56) [1] 2004-07-02 12479
1009 기타 삶의 지혜를 넘어서 [1] 2004-07-02 10845
1008 기타 기쁨과 사랑의 역학관계 [1] 2004-07-02 10181
1007 기타 자유를 향한 길에 서서 [1] 2004-07-02 10999
1006 기타 사울의 어리석음 [1] 2004-07-02 12350
1005 기타 막힘에서 열림으로! 2004-07-02 12340
1004 기타 구름 타고 오십니다. 2004-07-02 11449
1003 기타 야훼의 진노와 모세의 기도 [1] 2004-07-02 11632
1002 기타 예수님을 먹다 [1] 2004-07-02 13110
1001 기타 땅을 묵혀라! 2004-07-02 11344
1000 기타 마술과 신앙 2004-07-02 10817
999 기타 세계의 토대 2004-07-02 12209
998 기타 야훼의 자기 증거 2004-07-02 11453
997 기타 운명과 자유 2004-07-02 10497
996 기타 본질의 변질 2004-07-02 10554
995 기타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힘 2004-07-02 12134
994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10109
993 기타 노동하는 인간(1) 2004-07-02 9596
992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10077
991 기타 영광의 경험 [3] 2004-07-02 9426
990 기타 노동하는 인간(2) [2] 2004-07-02 9063
989 기타 무엇이 진실한 예배인가? [1] 2004-07-02 9819
988 기타 수행으로서의 신앙생활 [1] [1] 2004-07-02 8676
987 기타 돌무더기에 얽힌 사연 [1] 2004-07-02 9746
986 기타 메시아적 행위와 교회 [1] 2004-07-02 9448
985 기타 사랑이란 무엇인가? [1] 2004-07-02 15524
984 기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1] 2004-07-05 9393
983 기타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1] 2004-07-11 9668
982 기타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2004-07-18 9717
981 기타 믿음과 사랑의 뿌리, 7월25일 2004-07-25 9396
980 기타 말씀 망각의 심판, (8월1일) 2004-08-05 8662
979 기타 기도란 무엇인가? (8월8일) [2] 2004-08-08 12901
978 기타 모세의 소명, 2004.8.15. 2004-08-16 9778
977 기타 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2004-08-22 9457
976 기타 평화를 위한 분열, 8월29일 [5] 2004-08-30 8542
975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489
974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9233
973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977
972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349
971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406
970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371
969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222
968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729
967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420
966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353
965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413
964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9129
963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483
962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184
961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9008
960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571
959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677
958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710
957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532
956 기타 세례 요한의 증언, 1월16일 [1] [1] 2005-01-17 13081
955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674
954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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