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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 이야기 (출 14:21-31)

창조절 조회 수 1333 추천 수 0 2023.09.17 18:30:50
설교보기 : https://youtu.be/Eqviah7saD8 
성경본문 : 출애굽기 14:21-31 

홍해 이야기

14:21-31, 창조절 3, 2023917

 

 

진퇴양난

오늘 본문이 전하는 이야기를 모르는 분들은 별로 없을 겁니다. 14:21~22절은 이렇습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모세가 팔을 바다로 뻗치자, 야훼께서는 밤새도록 거센 바람을 일으켜 바닷물을 뒤로 밀어붙여 바다를 말리셨다. 바다가 갈라지자 이스라엘 백성은 바다 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고 걸어갔다. 물은 그들 좌우에서 벽이 되어주었다.

 

거센 바람이 바닷물을 밀쳐서 땅을 드러낸 이곳은 홍해입니다. 구글 지도에 red see를 검색하면 생생한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인도양에서 지중해 11시 방향으로 흘러드는 듯이 만들어진 좁고 긴 바다입니다. 아프리카 북부 이집트에서 가나안 쪽으로 가려면 지중해와 홍해 사이의 지협을 통과해야 합니다. 로마 시대부터 계획되었던 운하가 150년 전에 뚫렸습니다. 지중해에서 인도로 항해하려면 아프리카를 한 바퀴 돌아야 했으나 이제는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서 직접 홍해로 가면 됩니다. 가나안으로 가야 할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지협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지름길입니다. 13:17절에 따르면 그 길목에 블레셋 족속이 있어서 그쪽으로 못 갔다고 합니다. 모세가 그 지름길을 강행했다면 광야에서 40년을 보내지 않고 한 달 만에 대장정을 끝냈을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방향을 틀어서 오른쪽이 아니라 홍해가 있는 아래쪽으로 내려왔습니다. 그 방향으로 계속 내려오면 사실 아프리카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대구에서 포항을 가야 할 사람이 동쪽 영천이 아니라 남쪽 밀양으로 방향을 잡은 겁니다. 애굽 바로의 군대가 추격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무조건 피하자는 다급한 생각으로 그렇게 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이 당연히 동쪽 지름길로 갔으리라는 바로의 예상을 깨려고 그렇게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당시 세계 최고 정보력과 군사력을 확보했던 바로의 기마병들이 이를 놓칠 리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라잡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워했고, 모세를 다음과 같이 원망했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은 것보다 낫겠노라.”(14:11, 12)

애굽의 기마병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놓인 거리가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아주 위급한 상황입니다. 14:19~20절의 설명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던 하나님의 사자가 애굽 군대 진영과 이스라엘 진영 사이에 끼어들었습니다. 오늘날의 연막탄이라 할 수 있는 구름 기둥이 그들을 덮었다고 보면 됩니다. 어두워서 양쪽 진영 모두 꼼짝 못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날이 밝기 시작하자 바로의 기마병들이 공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긴박한 순간에 모세가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서 홍해를 갈라지게 했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 갈라진 바다를 건넜습니다. 그 광경을 본 애굽 기마병들도 홍해 한가운데로 뛰어들었습니다. 모세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십계>를 보신 분들은 그 장면을 기억하시겠지요. 겁도 없이 홍해로 뛰어든 말과 병거와 마병들은 전열을 잃고, 병거 바퀴는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추격을 포기하고 퇴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손을 내밀어 바닷물을 다시 흐르게 하라고 말입니다. 27-28절 말씀입니다. <공동번역>입니다.

 

모세는 팔을 바다 위로 뻗쳤다. 날이 새자 바닷물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집트인들은 물결을 무릅쓰고 도망치려고 했으나, 야훼께서 이집트인들을 바다 속에 처넣으셨다. 물결이 도로 밀려오며 병거와 기병을 모두 삼켜버렸다. 이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따라 바다에 들어섰던 파라오의 군대는 하나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당시 애굽의 바로 군대는 천하무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오합지졸이었습니다. 홍해 앞에서 몰살당할 것을 각오한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전쟁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 남녀노소는 홍해에서 구원받았으나 전쟁 전문가들인 바로의 기마부대는 전멸당했습니다. 도대체 당시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홍해 이야기는 실제 벌어진 것인가요, 아니면 어떤 이야기꾼이 꾸며낸 이야기인가요?

 

출애굽과 바벨론 포로

출애굽 사건이 벌어진 시기는 지금부터 33백 년 전인 BC13세기입니다. 그 당시로 돌아가서 이 이야기를 다시 읽어야 합니다. 우선 출애굽(Exodus) 사건은 하나님께서 주도한 것이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당연히 순종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정확한 게 아닙니다. 애굽을 떠난다는 말은 그동안 선진국에서 누렸던 모든 사회 안전망을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나일강 유역의 기름진 땅 고센에서 나름 풍족하게 살았습니다. 애굽 왕들이 소수 민족 이스라엘을 박해했다고 하나 애굽 제국이 제공하는 좋은 점이 훨씬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난 뒤에 크고 작은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다는 데서 출애굽 사건이 그렇게 당연한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기원전 6세기에 벌어진 바벨론 포로 사건과 연결됩니다. 출애굽 이후 대략 7백 년이 흐른 뒤에 이스라엘은 다시 바벨론의 포로 신세가 되었습니다. 기원전 587년에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되었습니다. 그들의 정신적 구심점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초토화되었고, 거기서 사용하던 온갖 기물은 약탈당했으며, 제사장 전통도 없어졌습니다. 지식인과 귀족들을 바벨론으로 인질 삼아 데리고 갔습니다. 거기서 동화정책을 실행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더는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그게 모든 제국의 기본 정책입니다. 소수 민족은 타의에 의해서나 자의에 의해서 제국에 흡수됩니다. 제국에 완전히 적응해야만 사는 게 편하기도 하고, 제국 정책에 반대하다가는 자신들의 생존 자체가 위태로우니까요. 한반도를 병합한 일본 식민지배 시대에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을 지지한 친일론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유별났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최고급 문명을 무조건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재미있는 일들이 많아도 그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중에서 일부 선지자들이 자신들의 민족적인 정체성을 다시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정체성의 뿌리가 출애굽이라는 대답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민간전승으로 내려오던 몇몇 출애굽 서사를 편집해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 출애굽 이야기에서 어떤 내용이 역사적 사실이고, 어떤 내용이 출애굽기를 기록한 사람에 의해서 편집된 것이냐, 하는 질문은 크게 의미가 없습니다. 그걸 우리가 정확하게 구분할 수 없습니다. 고대 이집트 역사 문헌에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에 관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흔적이 나오지 않습니다. 어떤 소수 민족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정도의 이야기는 나옵니다. 그게 반드시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제국 안에서 그런 일은 흔하게 벌어졌습니다. 이 문제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단서는 히브리인이라는 명칭에 있습니다. 히브리라는 용어는 성경에만 나오는 게 아닙니다. 고대 근동의 여러 종족에게서 두루 사용되었습니다. 그 의미는 하층민, 떠돌이 등등입니다. 출애굽은 고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여러 소수 민족, 노예, 하층민이 일으킨 반()제국주의 반란이라고 설명하는 성서학자들도 있습니다. 개연성이 없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는 중에 서로의 의견이 갈리기도 했고, 심지어 내전 비슷한 상황까지 이른 걸 보면 엑소더스 공동체가 단일대오를 이룰 정도로 내부 결속력이 단단하지 않았던 게 분명합니다.

 

역사적 사실과 역사적 현실

그렇다면 출애굽은 역사적 사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말이냐, 하는 질문이 나오겠지요. 역사적 사실(fact)이 반드시 역사적 현실(reality)은 아닙니다. 역사적 사실 너머와 그 심연에 역사적 현실이 은폐 방식으로 놓여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역사적 사실을 보는 게 아니라 역사적 현실을 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하겠습니다. 대구성서아카데미는 올해 종교개혁기념일을 기해서 판넨베르크의 설교집 믿음의 기쁨을 재출간하기로 했습니다. 책을 원하는 분들에게는 제작 원가로 팔고, 펀드를 모아서 인쇄한 설교집은 각 신대원 학생들에게 선물로 줍니다. 여기까지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왜 이런 일을 하는지 아는 분도 있고, 모르는 분도 있습니다. 중요한 일이라고 여기는 분도 있고,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한국교회 설교단 갱신을 위한 작은 시도라는 게 이번 일의 가장 중요한 의미입니다. 이 책이 어떤 신대원 학생의 영혼에 씨앗으로 심기면 그가 설교자가 되었을 때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가 훗날 대형 교회 담임 목사가 되어서 판넨베르크 설교집에서 받은 신학적 감동을 바탕으로 설교하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이게 바로 역사의 은폐된 현실입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그런 역사적 현실을 읽고, 배우고, 그걸 삶의 중심으로 삼습니다.

역사적 사실도 역시 중요하다는 주장이 잘못은 물론 아닙니다. 저도 성경이 말하는 사건의 실체적인 사실과 진실을 알려고 노력합니다. 강한 바람이 밤새도록 불어서 홍해가 마른 땅이 되었다는 보도가 가리키는 사실이 무언지 궁금합니다. 홍해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갈대 바다로도 번역될 수 있다고 합니다. 나일강 유역에는 갈대가 많았습니다. 모세는 어린 시절에 갈대를 많이 보고 자랐습니다. 마흔 살에 망명자 신세가 되어 미디안 광야에서 목자로 사십 년을 사는 동안 그 인근의 지리를 완전히 몸에 익혔을 겁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숨기 좋은 갈대가 있는 늪지대로 이끌었습니다. 갈대숲을 헤치고 지나는 모습이 마치 광풍이 몰아쳐서 바다가 갈라지는 듯이 보이지 않았을까요? 그쪽 지리를 모세처럼 자세하게 알지 못했던 바로의 기마부대는 길을 잘못 들어서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전멸했다고 봐도 성경을 잘못 읽는 게 아닙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저는 자연과학이 말하는 수준에서 성경을 읽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초자연적으로 보이는 기적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자연과학도 자연을 완전하게 아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상예보가 늘 확률로만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GPT처럼 생성형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완전하게 아는 게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 세상을 피상적으로 경험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곤충을 데리고 노는 초등학생이 대학교에서 생물학을 가르치는 교수보다 곤충을 더 분명하게 인식하고 경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노숙자가 50억 원 아파트에서 호화롭게 사는 상류층 사람보다 삶을 더 깊이 있게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가 완전히 부정하겠습니까. 성자처럼 사는 청소부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할 수 있습니까.(성자가 된 청소부, 참조) 그러나 초자연 기적이라는 말로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쉽게 부정하는 행태는 옳지 않습니다. 믿음 좋은 사람이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가 휘두르는 칼을 꽃으로 바꿔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런 식의 신앙을 우리는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와 비슷한 현상이 한국교회에서 적지 않게 일어납니다. 성경의 보도를 무조건 문자 그대로 믿는 게 좋은 믿음이라고 치켜세웁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

오늘 홍해 이야기가 말하려는 핵심은 본문 31절에 나옵니다. 이 구절 뒤에 출 15장에는 모세의 노래와 미리암의 노래가 나옵니다. 이런 노래가 더 오래된 전승입니다. 31절을 다시 들어보십시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앞에서 출애굽 이야기가 바벨론 포로 상황과 맞물려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상황은 패배감에 떨어지기에 맞춤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던 그들이 쫄딱망했으니까요. 주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조롱과 연민의 대상이 되었으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큰 능력을 노래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패배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승리를 노래했습니다. 애굽의 기마병을 수장시키신 여호와께서 바벨론 제국을 그냥 두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런 신앙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어졌습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람은 로마 제국을 바벨론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바벨론은 괴력을 발휘하는 짐승이었습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새 예루살렘을 세우신다고 노래했습니다. 이게 과연 옳은가요? 정신승리에 불과한가요?

저는 본문에 담긴 메시지가 소위 말하는 승리주의 예찬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안 되면 되게 하라든지,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사실 홍해 사건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이 완전히 바뀌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배고프고 외롭고 고달프게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홍해 경험이 있었으나 최소한 축제 때마다 고깃국을 먹을 수 있었던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스무 살 이상의 사람들은, 여호수아와 갈렙만 제외하고 모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홍해 사건으로 그들의 팔자가 요즘 식으로 대박난 게 절대 아닙니다.

뒤에서는 기마병들이 추격하고 앞은 홍해가 가로막은 상황을 다시 돌아보십시오.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전혀 새로운 길이 열린 겁니다. 새롭게 열렸다기보다는 새롭게 보인 겁니다. 광야에서 만나가 보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삶의 바닥에 떨어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거기서 살길이 열립니다. 믿어지시나요? 현실이 답답한 상황 앞에서 두 가지 반응으로 갈리겠지요. 그 상황을 두려워하고 서로 남 탓하면서 일종의 멘붕에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고, 오히려 홍해가 갈라져서 마른 땅에 드러나듯이 생명의 길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신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의 바닥에 떨어지는 게 겁나긴 합니다. 재정적으로 파탄이 이르기도 하고, 인간관계가 근본에서 무너지기도 하고, 건강을 완전히 잃을 수도 있습니다. 가능한 한 그걸 피하려고 우리는 모든 힘을 쏟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결국에는 우리 인생이 언젠가는 파탄에 떨어진다는 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 어떤 노력과 준비로도 막을 수 없는 파탄입니다. 미리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가 아무리 바닥으로 떨어진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보다 더 심하지는 않습니다. 실제 그런 상황이 되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과 그 능력을 경험할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져서 마른 땅이 드러나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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