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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R0WBhugKVc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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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한복음 14:15-21 |
“살아있음”
요 14:15~21, 부활절 6주, 2023년 5월 14일
요한복음이 기록된 시기는 1세기 후반 10년 어간입니다. 그 시기에 교회가 처한 상황은 두 가지 특징을 보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 회당에서 축출되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영지주의가 번성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첫 번째 사실은 교회의 생존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 사실은 교회의 본질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60년 정도의 세월이 흘렀고, 초기 교회의 출중한 지도자였던 (예수 동생) 야고보와 베드로와 바울이 죽은 지 30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90년대의 교회는 역사에 살아남을지,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 유대교의 아류로 떨어질지, 또는 혼합주의 색채를 띤 소종파로 전락할지가 결정될, 그야말로 백척간두의 운명에 놓여 있었습니다. 교회 구성원들의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요 14:1절은 그런 역사적 배경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
근심하지 말라고 해서 저절로 근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해서 저절로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럴만한 근거가 제시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은 전체적으로 그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는 문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걸 한 마디로 압축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다’라는 뜻입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아무리 어려운 형편이라도 근심하지 않겠지요. 14:19절을 읽겠습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아있겠음이라.
여기서 두 단어가 핵심입니다. 하나는 ‘본다.’이고, 다른 하나는 ‘살아있음’입니다. 이를 묶으면 “살아있음을 본다.”가 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이 포함된 요 13~17장은 ‘제자들에게 행하신 예수님의 고별 연설’로 분류됩니다. 이 대목은 요한복음에만 나옵니다. 이 말씀이 끝난 다음에 예수께서는 체포당하시어 십자가에 처형당하시고 무덤에 묻힙니다. 예수님은 이제 세상을 떠날 분이니까 세상이 그를 더는 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은 못 보고, 제자들이 본다면 여기서 본다는 말의 의미가 일반적인 게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선승 불교에는 ‘볼 견’과 ‘성품 성’이라는 한자가 조합된 견성(見性) 개념이 있습니다. 만물의 궁극적인 실체를 본다는 뜻입니다. 일종의 큰 깨달음을 일컫는 표현입니다. 아무나 그런 깨달음에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일상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똑같은 산을 보고, 똑같은 강물을 보지만 어떤 사람은 거기서 존재의 신비를 느끼나 어떤 사람은 그냥 지나칩니다. 어떤 정치인은 국민을 자기 출세나 과시의 대상으로만 보고, 어떤 정치인은 자기가 섬겨야 할 대상으로 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만 어떤 사람들은 ‘너무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라고 거부했습니다.
세상은 보지 못하겠으나 제자들은 보리라고 할 때의 그 예수님은 부활하신 분을 가리킵니다. 공생애 중의 예수님은 누구나 알아보았으나 부활의 주님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그런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고전 15장에는 부활 증인 명단이 나옵니다. 게바, 열두 제자, 오백여 형제, 야고보, 모든 사도, 바울이 그들입니다. 당시 관습에 따라서 여자들은 이 명단에서 제외된 것으로 보입니다. 신약성경 그 어디에도 교회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부활의 주님을 보았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바울은 초기에 예수 추종자들을 박해했으나 그의 내면은 이미 예수님에게 기울어진 상태라고 봐야 합니다. 어쨌든지 대제사장 가야바나 총독 빌라도를 비롯한 예루살렘 주민 아무도 부활의 주님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교적인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부활의 주님을 볼 수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믿음의 눈’이라는 표현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진지하게 여기지 않을 겁니다. 너무 주관적인 태도라고 말하겠지요. 위에서 예로 든 견성도 그렇습니다. 돈으로 아파트나 자동차를 손에 넣듯이 기계적으로 견성의 차원으로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믿음의 눈도 하루 이틀에 저절로, 또는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던 이들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그들은 모든 소유와 직업과 가족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3년 가까이 예수님과 동행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생명에 관한 생각이, 19절의 표현을 따르면 ‘살아있음’에 대한 생각이 새로운 차원으로 바뀐 겁니다. 그래서 본문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뒤에 세상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겠으나 제자들은 보게 될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살아있음이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읍시다. 도대체 살아있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또는 생명은 무엇인가요? 지금 우리는 실제로 살아있나요? 그걸 알아야 본문이 말하는 ‘살아있음’이 눈에 들어옵니다. 거칠게 표현하면 ‘살아있는 게 별거냐,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거지.’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하게 살면 충분하다고 말입니다. 그걸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 여기서 최소한 일용할 양식으로 먹고는 살아야 합니다. 문제는 현대인들이 무한 성장주의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가난한 나라만이 아니라 이미 부자가 된 나라도 끝없이 높은 수준의 경제 지표를 달성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여러분, 삶이 외면적으로 풍요롭고, 번창하면 그만한 정도로 더 깊은 허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산이 높으면 골도 깊은 법이거든요. 전문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일정 정도 이상의 재산은 행복한 삶에 별로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현대인들은 아무리 먹어도 허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저주받은 자처럼 성장과 번영과 식탐과 소비에 치우친 채 살아있다고 여깁니다.
성경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성경은 ‘살아있음’, 즉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창조하셨고, 생명을 유지하며, 완성하실 분이십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아무리 뛰어나도 생명 사건 앞에서 무능력합니다. 우리는 그 어떤 노력으로도 생명을 완성할 수가 없습니다. 비유적으로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모나리자’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그림이 아무리 많은 이들에게 예술적인 영감을 주더라도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그림은 예술가의 영감과 그림 그리는 능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나리자’ 그림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와의 관계를 끊는다면 더는 예술 작품으로서의 권위는 유지되지 못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졌기에 스스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다고(롬 3:20) 일갈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당신들 미친 거 아냐?’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인공지능까지 만들어냈고, 앞으로 잘만하면 과학의 힘으로 인간의 영생불사가 가능한 마당에 무슨 하나님 이야기냐고 말입니다. 이런 반론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기에 그들을 우리가 설득할 수는 없습니다. 의견 차이를 줄어나갈 수는 있으나 완전한 일치를 보기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설명하고 변증하면서 실제의 삶에서 그 가르침대로 사는 게 최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경은 창조주이신 하나님 안에 있을 때만 피조물인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실제 일상에서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우아하게 잘 먹고 잘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실제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제 말이 될까요? 이게 믿어지나요? 종교적 교언영색에 불과한가요? 오늘 본문은 19절에서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아있다.’라고 말한 뒤에 그 ‘살아있음’이 무엇인지를, 또는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는지를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 문장에 ‘안’이라는 전치사가 반복됩니다. ἐν τῷ Πατρί(아버지 안에), ἐν ἐμοὶ(내 안에), ἐν ὑμῖν(너희 안에)라고 말입니다. 삼위일체 개념 중에 ‘페리코레시스’(상호내주)가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영 하나님이 상호 ‘안’에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위 구절이 상호내주 개념과 비슷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안에 계시고,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 안에 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안에 들어간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예수님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이라는 이 세 단위를 연결하는 고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단순히 다시 산다는 뜻이 아니라 종말에 완성될 생명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판넨베르크는 『사도신경 해설』(Das Glaubensbekenntnis)에서 “예수의 부활은 마지막의 돌입으로서, 곧 모든 인간에게 임하게 될 하나님 통치의 종말론적 현실성의 개시(開始)로 이해되었다.”(144쪽)라고 보았습니다. ‘종말론적 현실성의 개시’라는 말은 종말에 일어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서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종말의 빛을 예수 운명에서 경험한 제자들은 이제 더는 로마 제국의 정치적 선전에 휘말리지 않았고, 유대의 율법 신앙에 머물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종말론적 생명완성을 강렬하게 기다렸습니다. 그 기다림이 곧 대림절 신앙입니다. 제자들에게는 그런 대림절 신앙으로 사는 것이야말로 곧 ‘살아있음’의 실체(reality)였습니다. 이게 맞는 말인가요? 너무 종교적인 데에 치우친 억측일까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디서 ‘살아있다.’라는 사실을 확인하십니까? 여러분은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무엇이라 하든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서 시작한 종말론적 생명의 빛을 모색하고 기다리든지, 아니면 이 세상이 그럴듯하게 제시하는 삶의 기준만을 따르든지. 하나님의 통치를 희망하든지, 아니면 자기 열망에 사로잡히든지.
나를 사랑하는 자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통치를 기다리는 신앙을 일상적인 비유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아주 흔한 비유라도 이해해주십시오. 어떤 사람이 여섯 달 후에 1년짜리 우주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무사하게 돌아올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남은 여섯 달을 그는 이전과 전혀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사람들을 보게 될 겁니다. 주변 사람들이 짜증을 내더라도 그걸 크게 불편하게 여기지 않을 겁니다. 모두를 품어주고 사랑할 수 있겠지요. 하나님께서 종말에 완성하실 그 생명을 지금 여기서 실질적으로 느끼고 경험하면서 산다면 우리 삶에서 많은 부분이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은혜와 평화를 누릴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게 왜 잘 안될까요? 왜 종말론적인 생명의 빛이 우리의 영혼을 가득 채우지 못하는 것일까요?
답은 아주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깊어지지 않았다는 게 대답입니다. 예수와의 관계가 깊지 않은 사람에게는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지 않았듯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형식적이거나 얄팍하니까 예수의 운명에서 선취 방식으로 발생한 종말론적 생명이 아주 멀리 보이는 겁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나무도 꽃도 구름도 새도 다 비현실인 거와 같습니다. 그 예수와의 결속을 오늘 본문 21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여기서 계명을 지킨다는 말은 율법을 지킨다는 게 아니라 예수님 말씀을 따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실질적인 제자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마음을 기울이고,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는 걱정을 내려놓으라는 말씀을 따르며, 하나님을 아버지처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이기에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으면 하나님과도 그런 관계를 맺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런 제자들에게 “나를 나타내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하셨는지요. 10년이나 20년, 또는 평생을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는데도 신앙이 깊어지지 않아서 안타까워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습관적으로 교회에 가고 교회 프로그램에 심취하거나 교우들 관계에 집중합니다. 다 좋고, 필요한 일들입니다. 신앙이 그런 형태로 열매를 맺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교회 생활이 재미있어도 예수와의 관계가 깊어지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있는 자’로 경험하지 않으면, 또는 20절이 말하듯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지 않으면, 즉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천금 같은 무게로 다가오지 않으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건강하게 유지될 수 없습니다. 최선의 경우라도 신앙이 교양 수준에 머물게 됩니다.
21절이 가리키는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라는 주님의 약속을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여기서 ‘나를 나타내리라.’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종말에 이뤄질 영원한 생명을 눈으로 보듯이 깨닫고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바꾸면, 그분이 그리스도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 인생살이에서 참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절감하는 겁니다. 여러분에게 그분이 나타나셨나요? 그래서 종말 생명의 빛을 느끼셨나요? 그래서 지금 여기서 겪는 온갖 곤란한 일들을 근심하지 않게 되셨나요? 아니면 그런 경험이 거의 없어서 졸듯이 인생을 보내시는지요. 각각 다르겠지요.
요한복음이 기록되던 시절에도 믿음과 사랑의 눈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믿음과 사랑도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 옳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기도하여 진리의 영인 ‘파라클레토스’(보혜사, 요 14:16, 16:7, 요일 2:1)를 보내주실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파라클레토스는 제자들을 변호하고 위로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음’을 실질적으로 깨닫고(견성)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기쁨 충만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아멘.
'우리는 살아있음의 리얼리티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목사님이 던진 죽비같은 질문에 데카르트의 명제를 패러디한 글들이 떠오른답니다.
나는 쇼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내 욕망이 나를 도전케 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스마트폰에, SNS에 파묻혀 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배부른 돼지이기를 만족 못하는 이들은 어떤 명제를 품고 살까요?
나는 반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의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스티브 잡스처럼 여전히 배고프고 갈증나길 원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시를 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달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삶의 리얼리티를 나는 무엇으로 붙들고 사는가?
내가 품고 사는 명제는 무엇인가?
누가 물어본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그 자문에 아마 이런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는 오늘도 실패하고 좌절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세상 그 무엇도 내 영혼을 충만케 해줄수 없음을 오늘도 절감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내가 왜 여기 존재하는지, 왜 택함을 받았는지, 나를 붙드신 분이 도대체 누구인지
여전히 암중모색중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가족이 있고, 씨줄과 날줄로 엃혀진 인간관계가 있지만 그 어디에서나 고독자로 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다 지나가버리는 허무와 유한함 속에서 손에 잡히지 않는 영원이란 무엇이며,
오늘 여기서 영원이신 그 분과 찰나의 조우를 포착하기를 갈망하며 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목사님은 어떤 명제를 품고 사시는지 궁금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