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4

삶과 행위, 7월3일

기타 조회 수 10935 추천 수 46 2005.07.04 12:47:53
성경본문 : 마태복음 11:2-19 
2005. 7.3.
마태 11:2-19
삶과 행위

세례요한의 제자들
신약성서는 모든 관심을 예수님에게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외의 사람들은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엑스트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엑스트라 중에서 세례 요한은 매우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의 출생 설화와 깊숙이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본격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서 나선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오늘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예수님의 메시아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시도한 최초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또한 그는 이스라엘 민중들에게 절대적인 영적 카리스마를 행사한 인물입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 일반 역사가라고 한다면 세례 요한을 이스라엘 역사에서 예수님과 쌍벽을 이루는 인물로 평가할 만합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사람이라는 복음서 기자들의 역사 인식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면, 세례 요한의 등장이 바로 예수님 사건을 가능하게 한 단초라 할 수 있습니다. 더 나가서 이 말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역사가 없었다면 예수 그리스도 역시 출현할 수 없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역사인 카이로스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진행되는 그 결정적인 순간인 카이로스는 갑자기 하늘에서 우박 쏟아지듯 내려오는 게 아니라 밤송이가 충분히 익으면 알맹이를 터뜨리듯이 어떤 결정적인 역사의 과정과 그런 순간을 필요로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사건에서 세례 요한은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역할을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는 별개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던 세례요한이 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전해 듣고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서 이렇게 묻게 했습니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3절). 예수님은 이 질문을 받고 직접 대답하시지 않고 이렇게 간접적으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4-6절). 여기서 열거된 현상들은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건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을 얽어매고 있는 저주스러운 운명이 해결되는 것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개입을 경험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예수님에게서 일어난다는 말은 곧 예수님의 일과 하나님의 행위가 일치한다는 뜻입니다.

장터 아이들의 놀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돌아간 다음에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위대성을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이어서 하나의 비유를 통해서 그 세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 수 있으랴? 마치 장터에서 아이들이 편 갈라 앉아 서로 소리 지르며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 하며 노는 것과 같구나.”(16,17절). 아마 그 당시에 이런 어린아이들의 놀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쪽 편에서 피리를 부는 시늉을 하면 다른 편에서 그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장례 때의 곡을 하면 슬픈 연기를 하는 것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곧 사람들이 모두 자기중심으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자기의 생각을 따라주기를 바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게 그 당시 장터 아이들의 놀이였고, 그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모든 사람들의 삶의 태도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상대방을 자기의 뜻대로 움직이려는 생각이 너무 강하게 우리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사회생활도 그렇고,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그런 방식이야 원래 그렇다 하고 접어둘 수 있지만, 교회마저도 이런 방식으로 작동된다는 건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해야 할 기독교 신자로서 분명하게 짚어야만 합니다. 특히 교회 지도자들이 자기의 뜻으로 신자들을 흡사 꼭두각시 움직이듯이 다스리는 건, 그것이 아무리 신앙이라는 명분으로 치장되었다고 하더라도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요즘 설교비평 작업을 하면서 새삼 더 실감하는 한국교회의 현상이지만 목사들이 신자들의 운명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듯한 일들이 많이 벌어집니다. 이 세상에서의 모든 삶을 포기하고 오직 영혼의 구원만을 위해서 힘쓰라는 말은 겉으로 볼 때 당연한 기독교 가르침처럼 보이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매우 무책임한 발언입니다. 그런 설교자가 생각하는 영혼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영육이원론에 근거해 있기 때문에 기독교의 통전적인 구원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이런 구체적인 신학적인 문제까지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목사가 신자들의 삶에 지나치게 개입함으로써 결국 생명의 영인 성령의 활동을 축소시키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한국의 목회 상황에서는 이렇게 신자들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이 곧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직면해 있는 위험스런 현실입니다.
장터 아이들의 놀이처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향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는 건 매우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언하셨습니다. “요한이 나타나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고 하더니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와 죄인하고만 어울리는구나’ 하고 말한다.”(18,19a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세례 요한은 매우 금욕적으로 살았습니다. 광양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낙타 가죽옷을 입고, 겨우 생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살면서 사람들에게 회개의 설교를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들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요한의 삶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과 달리 평범하게 살았습니다. 먹고 마셨다는 말은 음식을 별로 가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마틴 루터의 번역에 따르면) 포도주를 마셨다는 의미입니다. 요즘 한국교회에서 툭하면 술, 담배 문제를 신앙과 연결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예수님도 술을 마셨다는 사실을 그들은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지 금욕적인 세례 요한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았던 예수님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사람들의 마음에 들 수 있을까요? 세례 요한의 광야도 마음에 들지 않고, 예수님의 시장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무엇이 마음에 든다는 말일까요? 그들의 마음에 들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일단 자기만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대상이 적입니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기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게 사람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지혜의 기준
예수님은 오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이미 나타난 결과로 알 수 있다.”(19b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인간과 인류 역사를 정확하게 꿰뚫어본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나 한 민족이 지혜롭게 살았는가 하는 문제는 그에게서 나오는 삶의 열매로 판단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비유의 말씀에서 가르치셨듯이 나무가 좋은지 아닌지는 그 나무의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다는 것과 이 말씀은 비슷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삶의 결과를 보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만을 보고 트집 잡습니다. 세례 요한을 보고 ‘미쳤다’고 하거나 예수님을 보고 ‘죄인과 어울린다’고 말하는 이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에게 따라서 금욕적으로 살아갈 수도 있고, 그냥 세속적으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공무원으로 살아갈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장사꾼으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성직자도 있고, 세속 직업인도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 고상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가난해서 천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등포 역 기찻길 옆의 쪽방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백 평짜리 최고급 아파트나 전원주택에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삶의 방식들은 하나님의 지혜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이런 것에만 삶의 모든 걸 걸어두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원하는 그런 삶의 기준을 확보하기 위해서 모든 걸 투자하고 있습니다. 운이 좋아서 그런 기준을 확보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에 들어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삶의 방식이나 기준이 아니라 그에게서 무슨 결과가 나오는지, 그 삶의 열매가 무엇인지가 바로 하나님의 지혜의 본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결과, 또는 삶의 열매는 우리가 생각하는 출세와 사회적 위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연관된 것들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바로 인간 삶의 신비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천하게 사는데도 그 결과와 열매가 거룩한 사람이 있고, 겉으로는 영광스럽게 사는데도 실제로는 천박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제가 오늘 여기서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이 여러분이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래 전에 <성자가 된 청소부>라는 책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 책의 요지는 매일 새벽마다 빗자루로 동네 청소를 하는 어떤 사람이 바로 성자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거쳐 온 긴 삶의 여정이 있지만 결국 청소 행위로 그는 성자가 되었습니다. 행위는 천하지만 존재는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메시야의 행위
오늘 본문의 앞쪽으로 다시 돌아가십시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당신이 메시야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언자이면 예언자의 일이, 메시야이면 메시야의 일이 그들에게 드러나는 게 당연하니까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자기가 메시야라고 대답하시지 않고 예수님의 행위를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열거된 소경, 절름발이, 나병환자, 귀머거리, 죽은 사람, 가난한 사람은 한결같이 저주의 운명에 갇힌 이들입니다. 이들이 그런 저주로부터 해방 받는 일은 곧 메시야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런 이들에게 선포되며, 그들에게서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야말로 메시야에게 발견할 수 있는 결과와 행위들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런 일들이 바로 예수님에게서 발생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이런 일을 행하셨을까? 복음서에 기록된 많은 기적과 치유는 상당한 부분에서 사실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일들은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기적이나 치유와는 약간 다른 의미입니다. 그 당시에는 모든 병이 바로 악한 영의 개입이라거나 인간의 죄에 의한 결과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실제로 결정적인 불치병이나 장애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매우 심각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예수님은 각각의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시고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셨을 겁니다. 조금 더 생각해봅시다.
5절 말씀은 원래 구약 이사야 61:1절의 인용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이렇듯 소경과 절름발이이 치유에서 이해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신앙과 예수님의 행위와 일치함으로써 예수님은 초기 기독교에 의해서 바로 구약이 희망하고 기다리던 메시야로 고백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이제 이런 메시야의 결과와 일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경과 절름발이가 치유되는 일들이 예수님에게서 실제로 일어났는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런 걸 기계적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이런 보도에서 중요한 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다는 사실이지 소경이 눈을 떴는가 아닌가의 여부가 아닙니다. 사실 메시야로서 예수님에게서 반드시 이런 일들만 일어나는 건 아닙니다. 결정적으로 부활의 빛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것이지 이런 소경의 치유에서 믿는 것을 아닙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지혜가 바로 그 결과에서 판단된다는 오늘 본문 말씀은 옳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메시야의 일들이 나타났으며, 오늘 우리 기독교인에게는 기독교인다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나타날 행위와 결과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겉모양이 아니라 그 속으로부터 그에 합당한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sort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74063
154 기타 우상과 귀걸이 [1] 2004-07-02 16536
153 성령강림절 경계를 넘어서 [5] 2008-06-22 16540
152 부활절 사랑과 계명 [7] 2008-04-27 16545
151 주현절 카리스마의 영적 원리 [5] 2007-01-21 16572
150 사순절 하나님을 찬양하라! [34] 2008-03-16 16573
149 주현절 세례 받은 하나님의 아들 (마 3:13-17) [4] 2014-01-13 16614
148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에 관한 이야기 [10] 2011-08-15 16632
147 성령강림절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 (왕상 17:8-24) [7] 2013-06-09 16718
146 창조절 하나님의 기쁨 (눅 15:1-10) [21] 2016-09-11 16734
145 성령강림절 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분 [20] 2010-09-12 16750
144 부활절 생명과 죽음 (눅 24:1-12) [8] [1] 2013-03-31 16752
143 성령강림절 제자의 삶과 하나님 나라 (눅 9:57-62) [6] 2013-06-30 16792
142 창조절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막 12:38-44) [6] 2018-11-12 16803
141 기타 현재의 고난, 7월30일 2006-07-30 16833
140 성령강림절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file [6] 2010-10-10 16852
139 주현절 메시아는 비밀이다 (마 17:1-9) [17] 2011-03-07 16898
138 성령강림절 이사야의 하나님 경험 [7] 2009-06-08 16900
137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7] 2011-01-23 16925
136 부활절 예수의 정체에 대한 질문 [27] [2] 2010-04-25 16929
135 성탄절 하나님의 위로와 구속 2009-12-25 16970
134 사순절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22] 2009-03-02 17035
133 성령강림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6] 2008-06-08 17091
132 성령강림절 신앙경험은 새롭게 '봄'이다 [18] 2009-11-09 17121
131 주현절 영적 자유의 토대 [22] 2011-02-27 17162
130 창조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엡 1:15-23) [4] 2014-11-23 17219
129 부활절 새 하늘과 새 땅 (계 21:1-6) [10] 2013-04-28 17224
128 기타 카이사르의 것과 하나님의 것, 10월16일 [1] 2005-10-16 17245
127 성탄절 하나님의 영광과 아기 예수 [8] 2008-12-25 17281
126 창조절 신앙의 위기 앞에서 (빌 4:1-9) [6] 2011-10-09 17281
125 사순절 여호와를 알리라! [16] 2011-04-11 17302
124 기타 하나님 나라의 전복성 2006-07-16 17303
123 성령강림절 안식일과 해방 [10] 2010-08-22 17303
122 주현절 하나님이 생명이다 [10] 2011-02-15 17312
121 성령강림절 이웃에 대한 질문 [16] [2] 2010-07-11 17315
120 창조절 위선에서 낮춤으로! (마 23:1-13) [11] 2011-10-30 17375
119 성령강림절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관해서 [9] [1] 2007-09-30 17423
11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얼굴과 등 [11] 2009-09-28 17454
117 주현절 예레미야의 하나님 경험 (렘 1:4-10) [12] 2013-02-03 17455
116 주현절 가난한 사람들 [23] 2011-02-06 17496
115 기타 참된 안식 [1] 2008-05-01 17685
114 성령강림절 천국, 질적인 변화의 세계 [18] 2011-07-24 17688
113 사순절 마리아의 나드 향유 [11] 2007-03-25 17813
112 주현절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7] 2008-02-03 17906
111 기타 신앙적 일상과 재림신앙 [2] 2006-10-15 17966
110 기타 용서의 능력 [1] 2004-07-02 17983
109 부활절 예수는 양의 문이다 (요 10:1-10) [2] 2014-05-11 18035
108 대림절 우리를 구원하실 이 (미 5:2-6) [4] [2] 2012-12-24 18070
107 기타 메시야니즘의 기초 [1] 2008-05-01 18106
106 성령강림절 말씀은 성취된다 [10] 2008-07-06 18137
105 기타 세겜의 약속을 기억하라 [9] [1] 2010-01-01 18247
104 성령강림절 이웃에 대한 질문 (눅 10:25-37) [19] 2013-07-14 18395
103 사순절 “나는 아니지요?” [23] 2011-04-18 18438
102 사순절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6-21) [12] [1] 2013-03-10 18443
101 주현절 예수가 왕이다 (마 2:1-12) [3] 2013-01-07 18464
100 기타 하늘생명의 밥 [1] 2006-08-20 18467
99 기타 하나님을 알자 [4] 2004-06-30 18532
98 주현절 성령 임재와 마술 [21] 2010-01-11 18544
97 성령강림절 예수는 생명의 밥이다 [22] 2009-08-10 18568
96 성령강림절 솔로몬의 꿈 이야기 [27] 2009-08-31 18589
95 성령강림절 대재앙 앞에서 [8] 2008-05-25 18597
94 성령강림절 예수 그리스도는 누군가? [16] 2010-07-19 18663
93 주현절 하나님의 ‘선택의 신비’ [10] 2011-01-17 18669
92 대림절 그 날이 오리라! (렘 33:14-18) [16] [1] 2012-12-02 18707
91 성령강림절 요한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 [17] 2009-07-27 18736
90 기타 낡은 것과 새것 (고후 5:16-21) [2] 2004-07-02 18876
89 성령강림절 율법을 넘어서 [2] 2008-06-29 18886
88 대림절 인자가 오리라 file [8] 2010-11-28 18914
87 창조절 하나님을 기억하라 (신 8:11-18) [16] 2011-11-21 18937
86 사순절 유혹 받으신 예수 (마 4:1-11) [10] 2014-03-09 18968
85 성령강림절 한 말씀만 하소서 [17] 2010-06-07 19125
84 사순절 믿음이란 무엇인가? [11] 2008-02-17 19132
83 주현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24] 2011-01-09 19142
82 성령강림절 믿음과 행함의 긴장관계 [25] 2009-09-14 19165
81 주현절 원수사랑, 가능한가? [16] 2011-02-22 19189
80 주현절 하나님의 은폐, 하나님의 침묵 [17] 2010-01-18 19213
79 주현절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고전 1:18-31) [16] 2014-02-02 19263
78 성령강림절 은혜의 보좌 앞으로! [28] 2009-10-26 19321
77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이다! [12] 2011-05-22 19346
76 사순절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라! [13] 2011-03-21 19417
75 대림절 관용과 주의 재림 (빌 4:4-7) [7] [3] 2012-12-17 19418
74 성령강림절 믿음과 종됨의 관계 file [18] 2010-10-04 19423
73 성령강림절 하나님은 누구인가? file [8] 2010-09-26 19435
72 사순절 여호와는 가까이 계시다 (사 50:4-9) [10] 2013-03-24 19468
71 사순절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과 믿음 [27] 2010-03-22 19501
70 기타 생명이 죽음을 삼키다, 7월2일 2006-07-02 19509
69 주현절 이사야 예언의 성취 (눅 4:14-21) [7] [1] 2013-01-27 19596
68 성령강림절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눅11:5-13) [10] 2013-07-29 19621
67 창조절 제자의 길과 소유의 길 (눅 14:25-33) [10] 2013-09-08 19636
66 주현절 포도주 사건의 실체와 의미 [20] 2007-01-14 19650
65 부활절 예수는 왜 선한 목자인가? [11] 2009-05-04 19756
64 사순절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26] 2009-04-06 19800
63 성탄절 성탄에 참여하는 길 [18] 2007-12-25 19816
62 대림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file [8] 2010-12-20 19819
61 성령강림절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 [8] 2010-08-09 19829
60 기타 다윗왕조의 존재근거 [1] 2006-08-06 19830
59 성령강림절 세례 요한의 죽음 (막 6:14-29) [10] 2015-07-13 19853
58 기타 예배로서의 삶 [5] [1] 2006-09-03 19950
5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의 가난과 우리의 부요 [23] 2009-07-13 19964
56 부활절 막달라 마리아와 부활의 주 [17] 2011-04-24 20022
55 기타 높은 사람, 낮은 사람 [2] [2] 2006-10-08 20210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