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4

삼위일체의 신앙, 5월22일

기타 조회 수 10429 추천 수 38 2005.05.22 23:38:44
성경본문 : 마태복음 28:16-20 
2005.5.22.          
마 28:16-20
삼위일체의 신앙

신앙의 다중성
‘오직 믿음’(sola fide)라는 마틴 루터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옳지만 그것이 교회 현실에서는 오용되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우선 그의 주장이 옳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 길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우리의 믿음에 있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에 대한 강조는 교회 안에서 자칫 믿음 일원론으로 빠져들 위험성도 있습니다. 성서공부나 교회생활의 모든 문제들이 무조건 믿기만 하면 해결된다는 주장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모든 불안과 의심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으로 믿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건 기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불가지론자들처럼 모든 게 실증적으로 확실한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긴장이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믿음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회의론도 아닙니다. 이 말은 곧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믿음이지만 그 믿음에 이르기 까지는 충분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두 가지, 즉 믿음과 사유, 혹은 믿음과 의심은 서로 밀고 당기면서 기독교 역사를 끌어왔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심은 부정하기 위한 게 아니라 확실성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공동체이든지 의심이 없으면 발전도 없듯이, 또한 진리는 곧 이런 의심의 해석학을 통해서 자기를 나타내듯이 기독교 역사도 이런 과정을 밟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흔적이 나옵니다. 이제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면서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나는 장면에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정신적인 상황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열한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약속하신 대로 갈릴래아 지역에 있는 산으로 예수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예수님에게 엎드려 절했습니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17절). 이런 묘사가 곧 초기 기독교가 처한 상황입니다. 대다수의 제자들과 신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예배했지만 일부의 사람들은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의심은 어쩔 수 없는 현상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아무런 의심도 없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처음부터 의심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건 믿음이 아니라 광신입니다. 그것에 관해서 의심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기독교는 그런 의심을 강제적으로 억압하지 않고 믿음의 단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독교의 가르침을 해명했습니다.

하늘과 땅의 권한
오늘 본문은 예수님에게 엎드린 사람들과 의심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증언합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18). 이 선언은 초기 기독교의 기본적인 신앙이면서, 동시에 곧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을 향한 변증이며 해명입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은 분입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하늘을 또 하나의 세계로 간주했기 때문에 마태가 ‘하늘과 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에게 우주를 통치할 권한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우주를 통치한다는 게 무슨 의미라고 생각합니까? 여기서 통치라는 것을 로마 황제의 권력에서 나오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 말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정치와 경제의 힘으로 작동된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에게 그것과 전혀 다른 예수님의 통치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곧 폭력을 통해서라도 자신들의 세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조폭들에게 평화의 삶을 설명하기 힘든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이 예수님의 우주론적 통치를 이해하고 믿었으며, 나아가서 그 사실을 설명해야하며, 그런 길을 걸어왔고, 지금도 걸어가고 있습니다.  
다시 질문해봅시다. 오늘 본문을 비롯해서 성서 전체는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이 우주의 통치자라고 주장하는 겁니까? 이런 대답은 한 두 마디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도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통치는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해서 쑥대밭을 만들어 놓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당장 분명한 대답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물론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게 곧 예수님의 통치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 세상이 평화적인 세상이 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사랑이야말로 예수님의 통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들이 부분적으로, 또는 어떤 범주 안에서는 옳지만 궁극적인 대답이 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의 우주론적 통치는 오직 예수님만이, 또는 하나님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예컨대 예수님의 십자가가 인간의 구원이라는 사실을 예상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통치는 오직 그분의 배타적인 영역이라는 말이 옳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예수님의 우주론적 통치가 비밀이라면 우리가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그런 통치가 일어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통치에 들어가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이 그분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그런 구원 사건이 우리에게 일어나도록 기다려야만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태는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을 ‘세례’ 베푸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세례는 곧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좀더 본질적으로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죽고, 그의 부활과 더불어 산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에게 행하는 종교의식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의 우주론적 통치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서 살아가야만 하니까 말입니다. 이는 곧 세례를 통해서 우리가 전혀 다른 삶의 차원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마태는 이 세례를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세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19) 베풀어집니다. 이 구절이 아직 삼위일체론의 개념까지 발전되지는 않았지만 그 단초의 역할은 충분합니다.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삼위일체론은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요? 삼위일체론은 기본적으로 유일신론의 극복입니다. 전지전능, 무소부재, 유일무이라는 하나님이라기보다는 철저하게 역사에 의존하고 영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바로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똑같이 역사적 인물이었던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될 수 있으며, 거꾸로 예수 그리스도는 야훼 하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이며, 또한 영도 마찬가지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이런 개념이 도대체 우리의 신앙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은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이런 방식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추상적이고 이상적이고 신인동성동형론적인, 더 나아가 자기가 투사된 절대자가 아니라 역사적인 인물인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살아갑니다. 그의 구체적인 삶에 우리의 운명을 맡긴다는 뜻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와 이 세계에 운행하는 생명의 영을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역사적 인물이었던 한 인간과 영을 절대자인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이 말은 곧 역사와 영을 우리가 구원받아야 할 생명의 토대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아직은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의심이 들 겁니다. 그런 의심을 풀어나가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가르쳐라’는 마태의 권고는 옳습니다. 그런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도록 가르쳐야겠지요.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잠정적인 인식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돕기 위해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20)고 약속하셨습니다.

profile

profile

[레벨:6]유희탁

May 23, 2005
*.81.186.141

저에게도 조금은 어려운 설교입니다. 그러나 몇가지 분명한 것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신인동형론적인 사고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그것이 삼위일체론을 통해서 첫 단초를 끼울수 있다는 것....역사속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과 생명의 영을 토대로 배워가야한 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오늘도 그 몸부림을 해야겠지요...
profile

[레벨:1]정선희

June 29, 2005
*.37.65.134

심오한 말씀이군요. 모든 인간이 유한자로서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면, 그리고 그것을 당연한 현상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도마에게 던진 <왜 의심하느냐? 믿는자가되라>는 이 말씀은 단순한 권면인가요? 아니면 육적,물적한계에 처한 인간을 향한 꾸짖음인가요? 예수님의 이 표현을 어떻게 읽어야할까요? 그리고 의심과 불신앙의 경계는 과연 어디인가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sort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74132
154 부활절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시 1:1~6) [8] 2021-05-16 5157
153 성령강림절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요 16:5~15) [2] 2021-05-23 5673
152 성령강림절 충만! (사 6:1~8) [5] 2021-05-30 5301
151 성령강림절 왕의 출현 (삼상 8:4~11, 16~20) [1] 2021-06-07 4145
150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와 씨 (막 4:26~34) [4] 2021-06-13 4496
149 성령강림절 "지금", 은혜와 구원 (고후 6:1~13) [5] 2021-06-20 5340
148 성령강림절 "딸아!" (막 5:25~34) [4] 2021-06-27 4908
147 성령강림절 열두 제자 파송 이야기 (막 6:1~13) [2] 2021-07-04 4824
146 성령강림절 왕-선지자-그리스도 (막 6:14~29) [1] 2021-07-11 4144
145 성령강림절 예수 십자가와 세계 평화 (엡 2:11~22) [2] 2021-07-18 4117
144 성령강림절 가난한 자의 피난처 (시 14:1~7) [2] 2021-07-25 4391
143 성령강림절 만물의 충만-그리스도의 충만 (엡 4:1~16) [3] 2021-08-01 3910
142 성령강림절 "나는 생명의 떡이다." (요 6:35, 41~51) [3] 2021-08-08 5101
141 성령강림절 예수와 영생 (요 6:52~58) [2] 2021-08-15 5320
140 성령강림절 전투하는 교회 (엡 6:10~20) [2] 2021-08-22 5003
139 성령강림절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 (아 2:8~13) [1] 2021-08-29 4430
138 창조절 놀람의 근거 (막 7:24~37) 2021-09-05 4592
137 창조절 지혜 & 그 너머 (잠 1:20~33) [3] 2021-09-12 4700
136 창조절 지혜 그 '너머' (약 3:13~4:3) 2021-09-19 4123
135 창조절 생명과 지옥 (막 9:42~50) [4] 2021-09-26 5683
134 창조절 욥의 재난 & 욥의 믿음 (욥 1:1, 2:1~10) [1] 2021-10-03 4302
133 창조절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 (막 10:17~22) [5] 2021-10-10 5633
132 창조절 속죄와 구원 (히 5:1~10) [2] 2021-10-17 3973
131 창조절 욥의 회개 (욥 42:1~6) [4] 2021-10-24 6488
130 창조절 유대교 신학자의 질문 (막 12:28~34) [4] 2021-10-31 5419
129 창조절 불행한 서기관 (막 12:38~44) 2021-11-07 3881
128 창조절 하나님께 가까이! (히 10:19~25) [2] 2021-11-14 6948
127 창조절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 (욜 2:2~27) [1] 2021-11-21 4610
126 대림절 늘 깨어 기도하라! (눅 21:25~36) [1] 2021-11-28 7676
125 대림절 빈 들에서 (눅 3:1~6) [2] 2021-12-05 6278
124 대림절 성령과 불 (눅 3:7~18) 2021-12-12 5406
123 대림절 평화의 왕이 오신다! (미 5:2~5a) [1] 2021-12-19 6981
122 성탄절 그리스도의 평화 & 그리스도의 말씀 (골 3:12~17) [3] 2021-12-26 5076
121 성탄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요 1:10~18) 2022-01-02 5381
120 주현절 성령 받음이란? (행 8:14~17) [2] 2022-01-09 5054
119 주현절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사 62:1~5) [7] 2022-01-16 3849
118 주현절 하나님 말씀의 성취 (눅 4:14~21) [3] 2022-01-23 4004
117 주현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 71:1~6) 2022-01-30 3404
116 주현절 첫 제자들의 출가 이야기 (눅 5:1~11) [7] 2022-02-06 3405
115 주현절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고전 15:12~20) [6] 2022-02-13 3627
114 주현절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창 45:3~11, 15) [2] 2022-02-20 3714
113 주현절 예수 변모 순간 (눅 9:28~36) 2022-02-27 3409
112 사순절 시험받는 예수 (눅 4:1~13) 2022-03-06 3559
111 사순절 영광의 몸으로! (빌 3:17~4:1) [2] 2022-03-13 3700
110 사순절 목마름의 실체 (사 55:1~9) [4] 2022-03-20 3541
109 사순절 예수의 하나님 (눅 15:1~3, 11b~32) [5] 2022-03-27 3366
108 사순절 하나님의 새로운 일 (사 43:16~21) [4] 2022-04-03 4583
107 사순절 유월절 마지막 식사 (눅 22:14~23) [2] 2022-04-10 3591
106 부활절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 (행 10:34~43) [1] 2022-04-17 3116
105 부활절 예수를 '믿는 자' (요 20:19~31) [1] 2022-04-24 5203
104 부활절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의 삶 (계 5:11~14) [1] 2022-05-01 3219
103 부활절 영생과 하나님 (요 10:22~30) [2] 2022-05-08 4135
102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3840
101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5465
100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4898
99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5689
98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4379
97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4286
96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3523
95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4319
94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3692
93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5100
92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5498
91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4471
90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4603
89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3345
88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4500
87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4761
86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4255
85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4322
84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4140
83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4438
82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3644
81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4158
80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5010
79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3530
78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4126
77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3432
76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3535
75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3860
74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5475
73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5050
72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5445
71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4238
70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4178
69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4190
68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3407
67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3448
66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3388
65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4339
64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3320
63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3478
62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3581
61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3087
60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3122
59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3758
58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2699
57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2724
56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2771
55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3295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