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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막 10:23-31)

창조절 조회 수 7145 추천 수 0 2018.10.08 10:09:25
설교듣기 : https://youtu.be/gTxc5w-rTzo 
설교보기 : http://afreecatv.com/nfermata 
성경본문 : 마가복음 10:23-31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10:23-31, 창조절 여섯째 주일, 2018107

 

23.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6.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27.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28.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1.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예수님의 말씀은 알아듣기 쉬우면서도 재미있고, 때로는 까다롭기도 하고 충격적이기도 합니다. 단순하면서도 심오합니다. 그런 말씀의 한 구절이 오늘 설교 본문에 나옵니다. 10:23절입니다.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

 

이런 말씀은 일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겁니다. 부자가 아닌 사람들, 아무리 노력해도 부자 되기는 불가능한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부자인 사람들이나 부자가 되려고 무진장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생뚱맞게 들립니다. 이 아포리즘(경구)은 당시 시대정신과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잘살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유대인만이 아니라 대다수 문명사회에서는 부자로 사는 것이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정반대의 말씀을 하신 겁니다. 오늘 대한민국 교회는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구절들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이런 구절은 슬쩍 옆으로 미뤄둡니다. 언급하기 곤란하기 때문이겠지요.

예수님이 이런 파격적인 말씀을 하게 된 이유는 바로 앞에 어떤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길을 가는 중에 어떤 사람이 불쑥 찾아와 꿇어앉더니 예수님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선한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질문은 매우 바람직한 겁니다. 그가 말하는 영생은 구원이고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는 삶이 무상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영원한 생명에 목말라 한 겁니다. 요즘 저는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 목사 구원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목사 구원이라는 제목은 역설적입니다. 목사는 구원을 선포하는 사람이기에 당연히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목사는 구원에서 제외될 위험성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높습니다. 영생과 구원 문제는 우리의 평생 화두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은 구원 문제를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를 좋게 여겼을 겁니다. 이야기의 뒷부분인 막 10:21에서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재물 포기와 예수 따름

예수님은 영생을 구하는 이 사람에게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율법 준수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조항부터 시작해서 십계명에 나오는 조항들을 열거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율법 준수야말로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율법 준수에서는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선생님, 이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소위 모태신앙으로 평생 한눈팔지 않고 올곧게 살았습니다. 실제로 이 사람은 유대 사회에서 가장 모범적인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속으로 역시 내가 잘 살았구나. 이런 정도면 예수에게 칭찬 받을만하지.’ 하고 생각했겠지요.

예수님이 이 사람에게 말씀하신 다른 한 가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율법 준수와 함께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부정하는 말씀이었습니다. 10:21절입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예수를 따르라는 이 말씀을 저 자신에게 적용시켜보았습니다. 제가 과연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순종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를 10가지는 더 댈 수 있습니다. 전 재산을 처분하라는 이 말씀은 이 세상에서 옥신각신 이전투구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설득력 있는 말씀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아주 간혹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대표적으로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입니다. 그는 요즘의 대기업 2세였습니다. 상속을 거부하고 탁발수도회를 세웠습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에서는 청빈이 가장 큰 미덕입니다. 모든 사람이 프란체스코처럼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프란체스코이니까 대중적인 수도회 설립도 가능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노숙자 신세를 면하지 못했을 겁니다. 예수님이 노숙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물론 아닐 겁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잘 어울려서 먹고 마시면서 지냈던 예수님이 청빈과 무소유 자체를 절대적인 삶의 태도로 말씀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재물에 종속되는 삶의 태도입니다. 이 사람은 재물이 많은 사람이라서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마음에 상처를 받고 근심하면서 돌아갔다고 합니다. 재물에 종속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돌아간 다음에 예수님은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23절에서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24절에서 일종의 속담 비슷한 말씀으로 묘사했습니다.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어떤 문헌에는 낙타가 밧줄로도 나옵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이것도 문자적으로는 비현실적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도 부자들이 있었습니다. 부자로 산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부에 종속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난하면서도 재물에 종속되는 사람이 있고, 부자이면서도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부자들이 재물에 더 종속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사회는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재물에 종속되지 않는 삶이 보장되는 사회입니다. 이게 쉽지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라도 그런 사회로 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지요.

 

물신숭배로 인한 영혼의 파괴

예수님이 부자의 재물 종속성을 극단적으로 경고한 이유는 재물이 우리의 삶을 조금 불편하게 하거나 편리하게 하는 정도로 머무는 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을 위축시키고 더 나아가서 파멸시킵니다. 이런 사태를 여러분은 매일 경험할 겁니다. 예를 들어 여기 열심히 살아가는 김 집사가 있습니다. 그는 상당한 돈을 주식에 투자했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주식 등락을 눈여겨봅니다. 모든 신경이 거기에만 갑니다. 주식이 조금 오르면 기분이 좋아지고 내리면 나빠집니다. 박 집사는 부동산에 상당한 돈을 투자했습니다. 아파트 값이 빠르게 올라가다보니 거기에만 정신이 팔렸습니다. 아파트 값이 내리거나 종합부동산세가 강화되자 박 집사는 부동산을 빨리 처리하려고 여기저기 알아보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오 집사는 5명 알바를 두는 카페를 운영합니다. 인건비 절약에 온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예를 들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큰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은 또 그들 방식으로 돈에 영혼을 쏟아 붓고 살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저는 기독교인들이라 하더라도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기에 이런 방식으로 생존경쟁에 나서는 것을 무조건 비판하고 싶지 않습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돈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고상한 직업에만 종사할 수는 없으니까요. 사실은 이런 고상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실제로는 돈에 절대적으로 지배받습니다. 국회의원들과 고위 공직자들의 서울 강남 아파트 보유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약간의 경제적인 여유가 있으면 모두 재테크에 모든 열정을 기울입니다. 이게 바로 돈이 우리의 영혼을 지배하는 현상입니다. 이런 현실을 우리가 부정할 수는 없으나 예수님에게 왔다가 실망하고 돌아간 부자처럼 재물에 종속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어야합니다.

나중에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해도 여기서 일단 부자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죽어 가게 될 천당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그 나라는 이미 여기에 가까이 왔습니다. 1:15절에서 예수님이 이미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미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에 부자는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에 주어진 시간을 일단 100시간으로 잡아보십시오.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은 40은 될 겁니다. 자고 먹고 배설하고 씻는 시간입니다. 나머지 시간에 우리는 일하고 취미생활을 하고 여행도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자는 그 모든 삶의 과정을 돈과의 관계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돈이 있어야만 좋은 집을 구입할 수 있고, 첨단 유행하는 옷을 입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있어야만 원하는 해외여행도 할 수 있고, 노후도 쾌적하게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돈과 연관시킵니다. 그는 돈과 관계없는 일에는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가을 하늘을 응시하지 못합니다. 벌레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장애인들과 성적 마이너리티와 난민들의 고통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경제 정의를 위해서 부자가 세금을 더 내야한다는 말에 저항합니다.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이 좋은 계절에 시 한줄 읽을 여유가 없고, 결국 닥치게 될 죽음의 섬뜩함을 외면합니다. 낭만적으로 표현하면 들꽃을 바라보거나 씨앗을 손바닥에 놓고 황홀해할 줄 모릅니다. 그의 일상을 끌어가는 힘은 오로지 돈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거기에만 쏟는다면 그는 지금 여기서의 하나님 나라와 거리가 먼 겁니다. 개인에 따라서 차이는 있겠지요.

 

하나님의 능력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놀라서 서로 그렇다면 누가 구원 받을 수 있단 말이냐?’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무도 재물숭배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뜻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들 중의 어떤 한 사람이 말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발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는 일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돈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생을 구했다가 실망하고 돌아간 사람을 보십시오. 이런 정도의 사람을 찾기도 힘듭니다. 그는 종교성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의 삶에서도 모범적이었습니다. 그가 부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사람도 결국 유산으로 물려받은 건지 자신이 직접 불린 건지 모르겠으나 어쨌든지 자신의 큰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일만은 할 수 없었습니다. 구원은 사람의 인격이나 성품으로 가능한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마술을 부린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는 것이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말씀의 실체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믿으면 전혀 새로운 삶의 능력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경험하지 않으면 인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가르침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돈에 지배받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인 의가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인생을 너무 나이브하게 보는 거 아니냐 하는 주장도 가능합니다. 당신은 세상살이의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반론도 가능합니다. 그런 문제를 제가 다 헤아리면서 설교할 수는 없습니다. 돈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영혼을 자유롭게 한다는 사실을 전할 뿐입니다. 그게 절대적으로 옳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은 여러분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현실이 아무리 척박 하더라도 영생과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선입견이 너무 강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을 대학 입시나 회사 입사처럼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입시나 입사는 경쟁을 원칙으로 합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점수를 많이 얻은 사람이 좋은 대학교와 좋은 회사에 들어갑니다. 그것으로 인생이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부자는 인생에서 선두 그룹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게 실제로 인생의 성공은 아니었습니다. 인생이 잘 풀렸다는 게 잘못이 아니라 그것의 절대화가 잘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말씀 마지막 구절에서 역설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두 기억해둬야 할 말씀입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현실에서도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납니다. 대통령이었던 분들이 지금 두 분이나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대통령이 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지 모릅니다. 이런 특별한 경우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국무총리가 되거나 대법원 판사가 되면 중압감으로 인해서 보석 같은 일상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조용히 책을 보거나 산책을 하거나 꽃밭을 돌보거나 트래킹을 할 여유가 없습니다. 지금 문 대통령은 아마 하루라도 빨리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오고 싶을 겁니다. 실제로 영혼이 자유로운 삶이 무언지를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앞서려고 과욕을 부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실망하고 떠난 부자가 착각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그가 포기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재물은 결국 언젠가는 자신에게서 떠난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그것을 붙들기 위해서 자신이 얻으려고 했던 영생에 대한 관심도 포기했습니다. 거꾸로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영생이 가리키는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복음을 복음으로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나중 된 사람이지만 먼저 된 사람입니다.

토끼와 달팽이가 달리기 시합을 했습니다. 토끼는 쏜살같이 치고 나갑니다. 달팽이는 아무리 속도를 내도 제 자리처럼 보입니다. 토끼는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처음 자리로 왔습니다. 토끼 앞에서 달팽이가 기어가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누가 앞선 것일까요? 우리의 한평생에서는 누가 앞서는 것도 없고 뒤처지는 것도 없습니다. 지금 그가 무엇을 영혼의 중심에 두고 있느냐, 하는 게 핵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을 여러분의 기준으로 재단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과 그의 복음이 여러분을 영원한 생명으로 끌어들인다는 사실에 집중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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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9 사순절 예수와 복음 (막 1:9~15) [9] 2021-02-21 6532
888 주현절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공의 (시 50:1~6) [2] 2021-02-14 4368
887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막 1:29~39) [2] 2021-02-07 3801
886 주현절 선지자의 운명 (신 18:15-20) [2] 2021-01-31 6411
885 주현절 세상의 외형 (고전 7:29-31) 2021-01-24 4720
884 주현절 하늘이 열리고 … (요 1:43-51) [7] 2021-01-17 7943
883 주현절 하늘로부터 … (막 1:4~11) [3] 2021-01-10 9515
882 성탄절 영광-찬송 (엡 1:3~14) [2] 2021-01-03 6024
881 성탄절 행위에서 존재로! (갈 4:4-7) [5] 2020-12-27 8526
880 대림절 "은혜를 받은 자여!" (눅 1:26-38) [2] 2020-12-20 10332
879 대림절 "너는 누구냐?" (요 1:19-28) [4] 2020-12-13 11240
878 대림절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2020-12-06 11221
877 대림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3-9) 2020-11-29 8916
876 창조절 영벌인가, 영생인가! (마 25:31-46) [3] 2020-11-22 8106
875 창조절 '주의 날'과 일상 (살전 5:1-11) [4] 2020-11-15 8554
874 창조절 생명 완성의 때 (마 25:1-13) [2] 2020-11-08 8125
873 창조절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수 3:7-17) [2] 2020-11-01 10121
872 창조절 삶의 견고한 토대 (시 90:1-6, 13-17) [4] 2020-10-25 6252
871 창조절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출 33:12-23) [4] 2020-10-18 11258
870 창조절 청함과 택함 "사이" (마 22:1-14) 2020-10-11 7372
869 창조절 자기 의(義)와 하나님의 의 (빌 3:4-14) [2] 2020-10-04 8003
868 창조절 대제사장과 장로, 세리와 창녀 (마 21:23-32) [2] 2020-09-27 9364
867 창조절 복음, 은혜, 믿음, 고난 (빌 1:21-30) [2] 2020-09-20 5739
866 창조절 용서, 그 불가능한 명령 (마 18:21-35) [9] 2020-09-13 8104
865 창조절 "급히 먹으라!" (출 12:1-14) [2] 2020-09-06 5650
864 성령강림절 "사탄아!" (마 16:21-28) [2] 2020-08-30 5234
863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5] 2020-08-23 4809
862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하심 (롬 11:1-2a, 29-32) [4] 2020-08-16 4958
861 성령강림절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마 14:22-33) [2] 2020-08-09 7865
860 성령강림절 "브니엘"에서 (창 32:22-31) [5] 2020-08-02 5459
859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마 13:31-33, 44-52) [5] 2020-07-26 5434
858 성령강림절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롬 8:12-25) [2] 2020-07-19 5027
857 성령강림절 에서와 야곱 이야기 (창 25:19-34) [4] 2020-07-12 13596
856 성령강림절 쉼 (마 11:16-19, 25-30) [2] 2020-07-06 8462
855 성령강림절 냉수 한 그릇의 궁극적 의미 (마 10:40-11:1) [2] 2020-06-28 5945
854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9) 2020-06-21 5546
853 성령강림절 못 하실 일이 없는 하나님 (창 18:1-15) [6] 2020-06-14 6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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