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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받으라! (요 20:19-23)

성령강림절 조회 수 24777 추천 수 0 2011.06.12 23:5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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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한복음 20:19-23 

성령을 받으라!

요한복음 20:19-23, 성령강림 주일, 2011년 6월12일

 

     오늘의 제3독서인 요한복음 20:19-23절은 부활 전승에 속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여러 부활 전승 중의 하나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시고 무덤에 묻힌 날은 금요일 늦은 오후입니다. 금요일 저녁부터 그 다음날 토요일 저녁까지는 유대인들이 거룩한 날로 지키는 안식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한 곳에 모였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지금의 주일 저녁입니다. 그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마리아가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했지만 제자들은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은 그들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고, 예상하지도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사면초가에 빠져 있습니다. 자신들의 스승인 예수님은 신성모독과 사회소요죄로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당시에 가장 저주스런 사형법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죽은 사람을 존경하지 않았고, 불쌍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일종의 마녀사냥을 당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앞으로 어떤 어려움을 당할는지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실제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주변 세계로부터 많은 억압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순교를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제자들은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이 난관을 어떻게 뚫고 나갈지 막막했습니다. 이들의 이런 심정을 요한복음 기자는 정확하게 묘사했습니다.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았다고 말입니다.

     그 순간에 예수님이 그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평강을 비는 인사는 당시 유대인들의 일상적인 인사말인 ‘샬롬’입니다. 이 인사의 영적인 의미를 알려면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한 가지는 제자들이 지금 큰 두려움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평강은 구원이고 빛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이런 샬롬의 축복을 베푸는 이가 바로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무덤에 묻혔던 예수님이 지금 죽기 이전의 인사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야말로 제자들이 큰 충격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였습니다. 죽음 이전의 예수님을 죽음 이후의 현실로 경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은 이어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손과 옆구리는 십자가에 달리실 때 생긴 상처가 있는 부분입니다. 손에는 못 자국이, 옆구리에는 창 자국이 있습니다. 그들 앞에 나타난 분이 바로 그들과 함께 3년 동안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던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제자들은 그 상처 난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이 이제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분은 옛날 그대로의 예수님은 아닙니다. 손에 못 자국과 옆구리에 창 자국이 있는 분입니다. 그것은 죽었다는 증거입니다. 죽었던 예수님을 현실에서 만났기 때문에 그들은 기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활 경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평강을 축원한 뒤에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절) 이런 말을 듣고 있는 제자들은 바로 전까지만 해도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문을 닫고 숨었던 이들입니다. 두려움에 의한 현실도피가 그들의 실존이고, 더 나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실존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제 세상으로 나갈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억지로 되지는 않습니다. 두려움에 갇혀 있는 한 불가능합니다.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통해서 평화가 무엇인지 알았고,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고 경험했습니다. 그들의 삶이 전혀 새로운 영적 실존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은 실제로 평화와 기쁨에 휩싸인다는 말일까요? 실제로 두려움이 완전히 극복될 수 있다는 말일까요? 원칙적으로는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부활 경험의 초기에는 열광적으로 모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현실적인 어려움에 부딪혔습니다. 지금 우리도 그렇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의 평화와 기쁨이 늘 유지되는 게 아닙니다. 부활 경험이 사진을 찍어서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경험이 늘 생생하게 유지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한 순간에 완전히 극복되는 게 아닙니다. 다시 두려움에 빠지곤 합니다.

 

     생명의 영, 성령

     오늘 본문은 그것을 배경에 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22절) 이런 말씀은 부활 전승과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부활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 성령을 받으라는 언급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부활 전승은 주로 부활 현상 자체에 관한 것입니다. 새벽에 무덤에 갔더니 무덤이 비었다거나, 부활의 주님이 갈릴리로 갈 것이라는 천사들의 말이 그런 것들입니다. 요한복음만 성령을 받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부활 사건을 공관복음서처럼 단순히 서술하는 게 아니라 고유한 신학적 관점에서 해석했다는 뜻입니다. 바로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부활 경험만으로 자신들의 어려운 상황을 뚫고 나갈 수 없었습니다. 부활은 승천으로 이어집니다. 부활의 주님은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이제 부활의 주님은 성령을 통해서 제자들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는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었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이 사실을 이미 앞에서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고별사의 한 대목인 요 16장은 오늘 본문이 가리키고 있는 비슷한 상황에 대한 설명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앞으로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16:2)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야만 보혜사 성령이 그들에게 옵니다. 보혜사 성령은 죄, 의, 심판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부활의 주님은 세상을 떠나기 바로 직전에 두려움 가운데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고난의 현실에서 살아가는 제자들을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성령은 무엇일까요? 성령은 누구일까요? 골방에 갇혀서 사는 게 아니라 세상에서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성령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귀신 비슷한 존재로 생각합니다. 심령술사들이 악한 영을 불러내거나 쫓아내는 것처럼 신자들도 성령을 자기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성령 받아라!” 하고 큰 소리를 치는 이들도 있습니다. 성령집회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현상들은 집단적 히스테리나 집단 최면에 걸린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과 비슷합니다. 집회를 인도하는 이들의 손에 의해서 청중들이 쓰러지고 곤두박질치고, 고함을 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성령이 왜곡되거나 좁은 의미로만 받아들여집니다. 대표적인 것은 오순절적 은사주의입니다. 방언, 신유, 축귀 등의 은사만을 성령 현상으로 간주합니다. 또 하나는 개인의 경건주의입니다. 개인적으로 성령을 받아서 경건하게 살아가는 것을 신앙의 핵심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요소들은 성경에 나옵니다. 따라서 그것을 완전히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극단적으로 치우친다는 것입니다. 마치 짝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녀가 자기의 경험을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성령을 은사와 경건으로 제한시키는 이유는 성령을 받는다는 말 자체가 모호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가 명확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돈을 주고 물건을 사듯이 성령을 소유할 수도 없고, 확인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인가요? 성령이 충만한 교회의 모습은 어떤가요? 그걸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나요? 설교 시간에 아멘 소리를 많이 하는 교회인가요? 찬송을 뜨겁게 부르는 교회인가요? 성경도 성령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실증적인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그렇게 경험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 여러분도 스스로 성령을 받았는지 아닌지 잘 모를 겁니다. 물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이 바로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것만으로 우리가 늘 성령 충만한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제삼자가 판단할 수 없습니다. 결국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령을 받았는지의 여부보다는 성령이 누구냐에 대한 성경의 대답을 아는 것입니다. 그걸 알아야만 자신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성령을 ‘루아흐’라 하고, 신약성경은 ‘프뉴마’라고 합니다. 루아흐나 프뉴마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바람이고, 다른 하나는 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숨과 성령은 똑같은 의미입니다. 숨, 또는 바람이 바로 영이라는 뜻입니다.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면 식물이 살아나고 찬바람이 불어오면 죽습니다. 태아가 엄마 자궁으로부터 밖으로 나온 뒤에 숨을 쉬어야만 삽니다. 사람이 죽을 때 숨은 멎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성경이 가리키는 루아흐와 프뉴마는 ‘생명의 영’, 즉 살림의 영입니다. 성령을 받으라는 말은 곧 생명의 영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생명의 영에 사로잡히라는 말씀입니다. 생명의 능력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령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곧 생명의 영, 생명의 능력이란 무엇인가와 똑같습니다.

     성령을 받으라는 말이 모호하다고, 그래서 그 말씀을 오해하기 쉽다고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생명의 영, 생명의 능력도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그게 손에 잡히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생산과 소비 중심의 현대사회를 보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사람과 자연을 살릴 것으로 기대하지만 오히려 파괴할 때가 많습니다. 산과 들을 뚫어 길을 내는 이유는 편리한 이동권을 확보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파괴되는 부분도 적지 않을 겁니다. 자녀 교육도 그렇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한다는 생각으로 많은 걸 제공하기도 하고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게 자녀를 살리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오히려 자녀를 파괴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심합니다. 생명이 무언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욕망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답은 죄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에서 죄를 언급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세상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죄의 용서를 위해서 우리가 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 예배는 우리만이 아니라 세상을 대표하는 행위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무턱대고 용서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용서를 하려면, 또는 용서를 받으려면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의 할 일은 세상으로 하여금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세례를 가리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의 주님이 우리에게 생명의 능력인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은 곧 생명의 능력에 대한 원초적 경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에 나가서 영적인 세례를 베풀어야 합니다. 거짓 생명과 싸우십시오. 생명을 파괴하는 힘에 주눅 들지 말고 대항하십시오. 그것이 성령을 받은 증거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를 근본에서 살리는 영인 성령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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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질그릇

June 13, 2011
*.159.144.211

목사님, 감사합니다.^^

세상에 나가서 영적인 세례를 베풀어야 할 우리가...

살리는 영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할 우리가...

가야할 길이 만만치 않습니다.^.^

얼마 전부터 아들녀석이 다비아의 글에 빠져 들고 있어서 기쁘답니다.ㅎㅎ

장마가 온다 하니 건강 유의하세요. ㅊ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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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13, 2011
*.120.170.250

박옥진 목사님,

손주들 잘 보고 계시지요?

부럽군요.

세상에 영적인 세례를 베풀기에는 우리의 준비가 너무 허약하고,

세상도 너무 완고하지요.

그래도 꾸준히 그 길을 갈 수밖에요.

아드님이 다비아에 관심을 보인다니, 잘 됐군요.

이번 장마를 멋지게 보내야겠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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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7]paul

June 13, 2011
*.190.204.139

성령은 생명의 영이다라는 목사님의 설교를 읽으면서 성령은 씨앗속의 생명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씨앗을 처음 심고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 이틀 기다리며 싹이 나길 바라다 과연 이 씨앗이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답답합니다. 어떤 씨앗은 금방 싹이 나오기도 하고 어떤 씨앗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갑자기 나오기도 합니다. 씨앗을 심고 물도 주고 정성스레 돌보지만 그렇다고 저희 마음대로 싹이 낳게 할 수는 없습니다.

씨앗 속의 생명이 오직 하나님의 주관이시듯 우리 마음 속의 영도 주님의 주관으로 성령이 임하시고 또한 주님의 주관대로 그 성령이 저희를 주님의 역사에 쓰시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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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13, 2011
*.120.170.250

폴 님이 멋진 말을 하셨네요.

성령은 씨앗 속의 생명과 같다구요.

씨앗은 정말 신비롭습니다.

원당 농가에 까만 분꽃 씨앗을 심었는데,

그놈들이 떡닢으로 나오더니

지금은 조금 더 자랐습니다.

까만 씨앗 속에서 어떻게 파란 싹이 나올까요?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그런 생명의 능력은 성령이 아니고는 불가능하겠지요.

그렇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떡닢과 꽃을 신비한 방식으로 내포하고 있는 씨앗과 같습니다.

지금 한국은 하루가 가고 미국은 하루가 시작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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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June 13, 2011
*.119.181.15

짝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녀가 자기의 경험을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자가 이제는 되질 않으려고 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람 같은 성령이 온 세상을 휘돌아 가며 세상에 생명을 불어 넣는것 맞죠..

목사님, 오늘도 좋은 말씀으로 감사히 배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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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13, 2011
*.120.170.250

별달 님,

바람같은 성령은 온 세상의 생명을 일구는 능력, 맞습니다.

놀랍고 신비로운 능력이지요.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능력이에요.

창조의 능력과 같습니다.

그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능하게 했구요.

우리는 오늘도 매 순간 성령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다른 것에 정신을 파느라

알아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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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상수리

June 13, 2011
*.99.193.27

성령에서 죄, 세례 각각의 의미가 조금씩 새롭게 다가옵니다.

생산과 소비 중심의 시대...성령마저 소비의 대상이 되어 많이 받고 덜 받고 하는 소모품이 되어버렸습니다.

방전되면 재충전이 필요하다고 이곳저곳을 헤메기도 하구요..

...

주님 생명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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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13, 2011
*.120.170.250

상수리 님,

성령, 죄, 세례가 서로 연결되나요?

그게 새롭게 느껴지나요?

새롭다는 건 한 차원 더 깊이 들어간다는 말이에요.

바둑에서도 수가 깊어지듯이 말이지요.

앞으로 언제가는 창조부터 종말까지

그리스도 신앙의 전체 체계가 새롭게 다가오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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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삼송

June 14, 2011
*.119.241.107

목사님 말씀 감사합니다. 더운데 건강 조심하십시요 목사님

거짓 생명과 싸워야 된다고 하신 말씀에 용기도 나지만 두렵기도 합니다. 목사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을려교 몸부림치지만

어느순간에 다시 세상가운데 사로잡힌 저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고 또 정신차려야 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저의 의지가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에 의지할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저의 모습에 실망할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속에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거짓생명과 싸우도록 하겠습니다. 욕망에 자유스러울때까지 싸워야 하겠습니다. 성령님은 생명의 영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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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14, 2011
*.120.170.250

예, 삼송 님,

힘을 냅시다.

우선 거짓 생명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을 키우는 게 우리에게 필요하겠지요.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걸 분별해도 투쟁하기는

삼송 님이 지적한 것처럼 두렵기도 합니다.

우리 믿음의 분량만큼 밀고 나갈 수 있겠지요.

주님이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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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3]달팽이

June 16, 2011
*.83.6.242

바람에 실려오는 진한 밤꽃 냄새가

온 몸에 스며들때  창조의 향기를 느끼곤 합니다.

하나님도 이 세상을 창조하실때

그런 기쁨과 행복을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그동안 조금 나태해진 몸과 마음을 돌아보며

새힘을 얻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두려움에 떨지 말고 부활의 경험한 기쁨과 평화가운데

담대함으로 죽음을 이끄는 이 문명과 세대속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해야 겠습니다...

생명의 영께서 밤꽃 향기처럼 내 몸을 감싸는 하루가 되길 소망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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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17, 2011
*.120.170.250

달팽이 님,

밤바람이 시원하네요.

오늘 대구 시내에 나갔다 왔어요.

목정평과 KNCC 대구 인권위 연합으로

10월 항쟁에 대한 토론회가 있어서요.

나는 그냥 청중으로 참가했어요.

많은 걸 듣고 배우고 왔습니다.

 

달팽이 님은 조금 나태해져도 좋아요.

천성적으로 자기를 성찰하는 사람이래서

오히려 나태할 필요도 있어요. ㅎㅎ

주님의 은총이 온 가족에게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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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June 25, 2011
*.239.93.193

생명의 능력,성령의 아름다운 자취를 실천으로 체험합니다.

나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뒤돌아 보면서 참 생명의 성장의 의미를 조금씩 느끼게 됩니다. 기쁨과 신비함이 비교됩니다. 예전에 스스로의 노력으로 산출된 작은 성취감을 부풀려서 오래 가지고 가려고 애쓰던 내 모습을 보면서 웃음짓습니다. 크게 한 것도 없는데 나는 내 성취의 기쁨에 사로잡히고 과시하려 하였습니다. 그 성취감을 담아두려고 만들어 놓은 통은 늘 마이너스 통장이었습니다. 빌려온 기쁨, 다시 그 기쁨을 갚지 못하는 무능력을 유지하면서 목마른 영혼의 기쁨을 갈구 했습니다.

생명의 능력인 성령을 받으라는 한 줄의 간단한 말씀이지만 문을 여는 유일한 열쇠가 이 말씀임을 알게 될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되고 내가 풀지 못한 것들이 얽힌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언제든지 오래 전부터 한번만 당기면 원하는 모든 게 풀리는 매듭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늘 십자가에 못박는 죄의 실체를 가진 존재가 나 자신이지만 죄에 눌리지 않고 나아가서 성령을 받고 있습니다. 실증적인 나의 모습을 보이지는 못하더라도 가장 작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음에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기쁨을 가까이 있는 귀한 영혼에게 알리는 힘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령으로 꽃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모습을 처음으로 내 모습에서 느껴보니 잔소리보다는 막내 등 한번 더 긁어주는 아빠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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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6 주현절 캄캄한 땅을 비추는 빛 [4] 2008-01-27 13305
725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얼굴 [8] 2008-07-27 13300
724 기타 살아계신 주님 [5] 2006-04-16 13281
723 부활절 영광과 찬송을 받으실 분 [4] [1] 2010-04-18 13264
722 성령강림절 인자가 오리라! (눅 12:35-40) [5] 2013-08-12 13256
721 대림절 마지막 ‘때’ [11] 2008-12-01 13255
720 성령강림절 율법과 사랑 [9] 2008-08-31 13245
719 성탄절 나사렛 사람 예수 (마 2:13-23) [6] 2017-01-01 13241
718 기타 하나님 나라의 감춤과 드러남, 2월12일 [3] 2006-02-12 13204
717 부활절 몸의 부활 (눅 24:36-48) [12] 2015-04-19 13201
716 기타 삶의 중심 2004-07-02 13195
715 성령강림절 예레미야의 소명 (렘 1:4-10) [9] 2016-08-21 13164
714 성탄절 솔깃한 말, 터무니없는 말 [7] 2006-12-31 13150
713 기타 예수님을 먹다 [1] 2004-07-02 13143
712 부활절 빈 무덤과 예수 부활 (요 20:1-18) [10] 2014-04-20 13127
711 창조절 광야에서 만나를 만나다 (출 16:2-15) [4] 2014-09-21 13111
710 주현절 주는 영이시다 [3] 2010-02-15 13108
709 사순절 축제의 능력 [5] 2010-03-15 13101
708 기타 세례 요한의 증언, 1월16일 [1] [1] 2005-01-17 13093
707 기타 하나님의 나라와 영의 나라 [4] [1] 2004-07-02 13078
706 주현절 시몬의 하나님 경험 [21] 2007-02-04 13066
705 성령강림절 승리주의를 넘어 생명으로 [20] 2009-07-20 13056
704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눅 9:37-43) [8] [2] 2013-02-10 13038
703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믿음 (마 15:21-28) [7] 2017-08-20 13011
702 부활절 평화의 복음, 부활의 능력 [4] 2007-04-08 12986
701 기타 영원한 구원의 근원 2006-04-02 12956
700 사순절 마리아를 가만 두라! (요 12:1-8) [16] 2016-03-13 12941
699 사순절 그날이 오리라! [12] 2009-03-30 12922
698 기타 행복한 삶과 신앙, 1월1일 [1] 2006-01-01 12921
697 창조절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 (민 11:4-15) [6] 2018-09-30 12916
696 기타 기도란 무엇인가? (8월8일) [2] 2004-08-08 12915
695 창조절 복음은 싸움이다! [6] 2011-09-19 12902
694 성령강림절 닫힘과 열림 [21] 2009-09-21 12866
693 기타 영적인 인식론 [2] [1] 2004-07-02 12844
692 창조절 명령하시는 하나님 (출 20:1-11) [16] [1] 2011-09-26 12843
691 성령강림절 벌과 복 [3] 2007-07-01 12834
690 기타 낯섬의 출처 2004-06-30 12829
689 성령강림절 형제관계의 자리로! [11] 2008-10-26 12801
688 성령강림절 두려움과 하나님 찬양 [6] 2007-06-17 12765
687 창조절 낮춤과 높임의 역설 (마 23:1-12) [14] 2017-11-05 12758
686 창조절 그리스도교 윤리의 근거 (마 18:21-35) [6] 2011-09-11 12757
685 성령강림절 마리아의 영성 [8] 2007-07-29 12732
684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730
683 기타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 10월30일 [2] 2005-10-30 12730
682 기타 자유로움의 세계로! [2] [1] 2004-07-02 12728
681 성령강림절 생명이란 무엇인가? [25] 2008-10-05 12716
680 부활절 희망은 기다림이다 (벧전 1:13-21) 2005-04-10 12704
679 창조절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렘 8:18-9:1) [9] 2016-09-18 12699
678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7] 2013-02-18 12690
677 부활절 상호내주의 비밀 (요 17:20-26) [5] 2013-05-12 12683
676 성령강림절 윗자리와 끝자리 [13] 2007-09-09 12675
675 기타 풍요로움의 근거, 11월20일 [4] 2005-11-20 12638
674 사순절 떠돌이 아람인의 후손 [15] 2007-02-25 12629
673 성탄절 크게 기뻐하라! [11] 2009-01-05 12612
672 성령강림절 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구원신비 [4] 2008-08-10 12607
671 성령강림절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22] [1] 2009-11-16 12585
670 부활절 믿음과 희망 (벧전 3:13-22) [4] 2017-05-21 12584
669 창조절 신앙과 소금 (막 9:38-50) [6] 2015-09-27 12582
668 성령강림절 거룩한 하나님의 질투 [5] 2008-11-02 12562
667 부활절 예수는 참 포도나무다 (요 15:1-8) [8] 2015-05-03 12549
666 사순절 만나가 멎는 날 [11] 2007-03-18 12541
665 기타 비뚤게 보기와 바로 보기 [1] [1] 2004-07-02 12528
664 주현절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2] 2007-02-18 12513
663 기타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 [1] 2004-07-02 12506
662 성탄절 종이냐, 자녀냐 [26] 2008-12-29 12506
661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2] 2008-01-20 12503
660 부활절 그리스도의 영광과 교회 일치 [3] 2010-05-17 12496
659 성탄절 마리아의 노래 (눅 1:46-56) [1] 2004-07-02 12490
658 창조절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출 17:1-7) [4] 2017-10-01 12458
657 기타 새로움의 원천, 2월19일 [2] 2006-02-19 12434
656 성령강림절 예수 그리스도 송영 (골 1:15-23) [2] 2013-07-21 12426
655 사순절 다윗과 여호와의 영 (삼상 16:1-13) [5] 2014-03-30 12377
654 기타 사울의 어리석음 [1] 2004-07-02 12369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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